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77.78
♧명나라의 정변과 조선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국제정세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변하고 있었다.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는 북방으로 밀려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고 대륙을 호령하던 주원장이 죽었다.
황세손 윤문(允炆)이 황제로 등극했지만 권력의 심장부 금릉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이 어린 혜제(惠帝)의 삼촌 연왕(燕王)이 북경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중원을 장악하고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은 맏아들 주표(朱標)를 의문태자(懿文太子)로 봉하고 황태자로 책봉했다.
황태자가 병사하자 장자 계승 법통에 따라 손자 윤문(允炆)을 황세손으로 책봉했다. 23명의 아들들은 변방을 분봉(分封)하여 왕으로 내보냈다.
변란을 방지하고 황세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황태손 주윤문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여러 아들들은 상례를 치르기 위해 금릉으로 달려올 필요 없이 각자의 영지를 지키라."
주원장은 죽으면서 유서를 남겼다. 나이 어린 황세손을 바라보는 황제의 노심초사가 묻어있다. 주원장은 죽는 날까지 장손 윤문을 위태롭게 보았다.
장례라는 구실로 삼촌들이 금릉에 몰려들면 무슨 변란이 있을지 두려웠다.
약관 16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혜제는 부랴부랴 할아버지 홍무제의 장례를 7일 만에 치렀다. 변방에 있는 삼촌들이 장례에 참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황제의 국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속전속결이다. 이에 분노한 것이 북경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연왕이었다. 연왕은 훗날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된다.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금릉이 요동치면 대륙이 흔들리고 대륙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면 한반도는 지진이 난다.
이러한 판세에 하륜이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기로 낙점이 되었다. 황제 등극을 하례하고 조선을 압박하는 시한폭탄 같은 '요동정벌론'을 확실히 매듭짓기 위해서다.
용산강에 배 띄워라
방원이 우부승지 이숙번을 불렀다.
"이번에 하대감이 명나라를 다녀오게 되었다. 환송연을 베풀어주고 싶은데 어디가 좋은가?"
"서강이 좋을 듯 싶습니다."
"서강이야 경승이 절경이지만 세곡선이 드나드는 곳이 아닌가?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 배 띄워 놓고 술 마시고 있으면 백성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도 그렇습니다. 마포강은 어떻습니까?"
"거기야 새우젓 배가 드나들고 장사치들이 떠들어대니 조용히 담소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아예 그러시면 임진강으로 나가시죠?"
"그곳은 아마 전하께서 환송연을 베풀어 주실 걸세."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데요."
"장수는 천문지리에 통달해야 하거늘 지리에 그리 아둔해서 어찌할꼬?"
"소인은 장수가 아니라 임금을 보필하고 있는 우부승지 이옵니다."
이숙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도전을 척결하던 기사일 거사 때 큰 칼 쥐고 선봉에 섰던 일은 잊어버렸나 보다. 이제 대궐에서 임금 지근거리에 있으니 점잖은 선비로 보아달라는 얘기다.
"누가 누구를 보필하고 있다고?"
노기와 함께 날카로운 방원의 눈빛이 번쩍였다.
"아, 예. 임금을 보호하고 공을 보필하고 있습니다요."
방원의 언짢은 심기를 눈치 챈 숙번이 꼬리를 내렸다. 보호가 감시의 동의어인지 알 수 없다.
"하하하, 자네는 무장이 제격이야, 무골이 딱이라구…. 용산강으로 할 것이니 준비하도록 하시게."
대륙이 요동치고 있다, 실태를 파악하라
용산강은 인왕산 범 바위 아래 샘터에서 발원하여 금화산 물줄기를 아우르고 청파역을 지나 한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을 말한다. 용산강의 상류 만초천에 있는 서교(西橋)는 한양과 경기도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으며 하류에는 병선(兵船)을 건조하는 사수감(司水監)이 있었다.
숭례문 밖 삼남으로 가는 최대의 파발역참을 끼고 있는 용산강 일대는 조선 최초의 위성도시였다.
우정승 김사형이 정사를 맡았지만 하륜의 임무가 막중했다. 황제등극하례와 '요동정벌론' 폐기처분도 중요했지만 요동치는 명나라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원나라는 이미 패망의 길로 들어섰지만 욱일승천 치솟아 오르는 명나라의 장래를 예측하지 못하고서는 한 발작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조선이었다.
명나라 사신 길에 북경의 연왕을 만난 일이 있는 방원은 야망에 불타는 연왕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연왕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전망한 방원은 정세 파악의 적임자로 하륜을 천거한 것이었다.
결과론이지만 방원과 연왕이 누가 먼저 위(位)에 올라가느냐 하는 권력레이스가 펼쳐진 것이다. 결과는 방원이 형을 제치고 1400년 왕위에 올랐고 연왕은 이보다 2년 후 1402년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방원이 빠른 셈이다.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하륜을 위한 송별연이 용산강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차일을 늘어뜨린 배위에 진수성찬이 마련됐다. 환송연이라 하지만 혁명성공 축하연도 겸한 연회였다. 이지란과 조영무를 비롯하여 이숙번, 신극례, 민무구, 민무질 등 무골출신들이 많이 참석했다. 혁명동지들의 단합대회와도 같은 자리였다.
방원이 하륜을 독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78
♧준골의 야망과 욕망
관악산의 화기를 누가 꺾을 것인가
삼각산을 떠난 한 마리의 용이 한강을 바라보며 용트림을 하고 있는 곳. 용산강 하류의 사수감(司水監)은 천혜의 수군 기지창이었다. 한강 물줄기를 가르는 노들섬이 강 중앙에 떡 버티고 서있고 유속은 완만했다.
울창하던 노들 섬 버드나무도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강 건너 검돌뫼(흑석동)가 유난히 검어 보인다. 서해안에 만조가 가까웠나? 불어난 강물이 뱃전을 때린다.
"강 건너 산이 송악산 못지않게 웅장하구려."
"네, 관악산이 영(靈)산이긴 합니다만 기(氣)가 너무 세서 탈입니다."
"도통한 하대감께서 한번 잡아 보시구려. 하하하."
방원이 하륜의 술잔에 술을 쳤다.
하륜은 정통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도참(圖讖)과 잡설에 능했다.
"도전이 해태상으로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입니다. 넘어야지요."
"넘다니요?"
"대전에 앉아있는 분이 기가 세면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륜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백악을 등지고 대전(大殿)에 앉아있는 임금의 기가 세면 관악산의 기를 누를 수 있지만 임금의 기가 약하면 관악산의 정기에 눌린다는 뜻이다.
"저쪽에 있는 섬은 무슨 섬이오?"
방원이 서쪽에 있는 섬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날의 여의도다.
"우기에는 물에 잠기는 쓸모없는 땅입니다. 홍수 때는 양말산만 보이고 물에 잠기지요. 임화도라는 이름이 있지만 백성들이 서로 '너나 가져라'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섬입니다."
"쓸모없는 땅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위화도도 쓸모없다 했지만 우리가 가꾸어 놓으니 쓸모가 있지 않습니까?"
위화도는 버려진 땅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팽개친 불모의 땅이었다. 의주 백성들이 배타고 건너다니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관할권을 인정받았으며 압록강이 우리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군사를 조련하면 좋겠습니다."
"군사를 조련하려면 군막을 치고 부대가 주둔하여야 하는데 갑자기 큰 비라도 내리면 보통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들여보내 목축이나 하도록 해야지요."
하륜이 방원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강바람에 향비파소리가 상큼하다. 향비파는 5줄이고 당비파는 4줄이다. 양수(陽數)를 좋아하는 방원을 위하여 이숙번이 향비파를 준비했다.
강태공은 기다리는 것이 본분입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태공 생활 5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지루하기 짝이 없소이다."
태조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의와 절망감에 빠져있던 방원에게 7년만 기다리라고 했던 하륜이다.
"물고기가 먹이를 물었다고 고기를 잡은 것이 아닙니다. 잡았다고 자만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낚아 올려 내 그물망 속에 담을 때까지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물속에 뛰어 들어가 휘적휘적 내저으며 물고기를 보고 싶은 심정이오."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물었다 싶으면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물고기가 지친 연후에 끌어올리는 것이 강태공의 수순입니다. 물고기가 먹이를 물었다고 성급하게 낚아채면 낚싯대가 부러지거나 낚싯줄이 끊어져 다 잡은 고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조급해하며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는 우를 범하지 마시옵소서."
"저어기, 저기 좀 보시오, 정도전이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군선을 짓다가 마무리하지 못하고 폐선이 되어버리지 않았소. 한대의 낚싯대에는 고기가 물어 찌가 움직이고 있지만 또 한 대의 낚싯대는 저 군선처럼 써보지도 못하고 강가에 방치하고 있으니 어느 때 쯤이나 쓸모가 있겠소이까?"
하륜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짓다만 병선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부르짖으며 심혈을 기울여 건조하던 병선이었다. 정도전은 요동을 정벌하자고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는 한편 오진도에 의한 군사연습과 함께 병선을 건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정도전의 꿈과 함께 사라진 요동정벌은 폐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짓다만 병선은 강물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방치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방원의 두 대의 낚시대론이다. 한 대의 낚시로 한반도를 낚고 또 한 대의 낚시로 요동을 낚겠다는 야심이다.
이것은 그가 어렸을 때 접했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맥이 닿아 있다. 우선 제가(齊家)의 바탕을 마련한 다음에 힘을 모아 치국평천하를 이룩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 숨어있다.
방원의 이러한 생각에는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어떻게 제가(齊家)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가(家)를 두고 벌이는 이방원의 이율배반
수신제가에 목표점을 설정한 범부(凡夫)는 개나 걸이나 미운 형제도 모두 안고 가야 하지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목표를 설정한 준골(俊骨)은 혈육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군주는 만인의 어버이지만 만백성을 모두 다 사랑할 수 없다는 군주론과 일치한다.
갈 길이 먼 치국평천하의 고지를 향하여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되는 형제는 설득하여 동참시킬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방원은 제가에 나오는 가(家)의 의미를 넓게 해석했다. 가(家)란 지붕아래 한솥밥을 먹는 혈육을 뛰어넘어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움막아래 돼지를 잡아놓고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동지로 봤다. 즉, 뜻을 같이하는 조직으로 봤던 것이다.
"백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백년씩이나요?"
방원은 어이가 없었다. 백년이라면 생이 끝난 후란 말인가. 대륙의 황제 주원장을 사사(師事)한 주승(朱升)의 완칭왕(緩稱王) 이론보다도 더 속도가 느린 논리다.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고속을 선호했던 정도전 때문에 이성계가 무너졌다면 완속을 주장한 하륜이 있었기에 방원은 치세를 완결할 수 있었다.
"중원을 평정한 황제께서는 대륙의 북방으로 밀린 원나라를 자신의 당대에 멸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무리한 욕심은 화(禍)를 부르고 화는 낭패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방원이 약관 스무 한 살에 고려조의 사신으로 요동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반도는 좁고 대륙은 넓다는 것을 절감했다.
요동의 옛 주인이 고구려였다는 것에 가슴 뛰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 광활한 땅을 내주고 명나라의 압박을 받고 있는 현실이 치욕스러움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로 다가왔다. 그 분노를 삼키며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방원의 평천하에는 일어버린 고토(故土)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등극 후 국내정세를 안정시킨 다음에 철령 이북의 땅을 영토로 회복하는데 힘을 기울여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의 무리를 물리쳤다. 아버지 태종의 유업을 이어받아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으로 하여금 6진과 4군을 설치하게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확보하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다.
"명나라 사신 길이 성공하기를 바라오."
"지극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륜의 사신 길은 성공이 담보된 여정이었다. 황제등극을 축하하고 아무런 대가없이 '요동정벌론'을 폐기하겠다는데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북이 아무런 대가없이 핵을 폐기하겠다면 실패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성공을 바란다는 방원의 말은 북경에 있는 연왕의 의중을 파악해오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