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79.80
●개경에 이는 피 바람
♧겨울비가 도를 벗어나면 한판 붙어야 한다
하륜이 명나라로 떠나자 정종은 환도문제를 꺼냈다. 개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골육상쟁의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경복궁이 싫었다. 비록 동모형제는 아니지만 동생들의 비명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듯 했다. 악몽에 시달려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새나라는 새 도읍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정종은 한양이 싫었다. 한시 바삐 한양을 떠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할 힘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하륜은 자타가 인정하는 도참(圖讖)의 대가다. 융성하던 개경의 기는 쇠(衰)했다고 역설하는 하륜이 조정에 남아 있으면 개경 환도 문제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하륜이 명나라 사신으로 떠난 공백을 이용했다.
개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종은 개경환도를 결심하고 서운관으로 하여금 개경환도를 명했다. 정종이 환도라고 말하는 것에서 내포하듯이 개경은 돌아갈 도읍지이며 한양은 잠시 머물렀던 고장이라는 뜻이다.
개경환도는 전격적으로 결행되었다. 조정대신은 왕을 따라 개경으로 향했지만 각사(各司)의 관원들은 절반씩만 따라갔다. 도읍지 문제는 유동적이다.
개경인들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한양을 떠나는 태조 이성계의 심정은 착잡했다. 한양에 입성할 때만 해도 새 집을 지어 사랑하는 현비를 대동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군왕의 입장에서 당당히 입성했다. 이제는 현비와 사랑하는 아들들을 땅에 묻고 왕이 된 아들의 뒤를 따라가는 자신의 몰골이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방문한 이성계는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내가 한양에 천도하여 아내와 아들을 잃고 돌아왔으니 실로 개경 사람에게 부끄럽다. 출입은 반드시 밝지 않은 때에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망신스러웠다. 개경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개경인들의 보는 눈이 무서웠다. 태조 이성계는 수창궁에 머무는 것조차도 민망했다.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하룻밤 묵고 새벽에 수창궁을 나섰다.
시중 윤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태조 이성계가 경순궁주(敬順宮主)를 불렀다.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삼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이다. 무인년 변란 중에 세자 방석을 지키다 희생된 이제(李濟)의 아내였다. 태조 이성계는 지아비 없는 딸에게 중이 되라 명했다. 사랑하는 딸이 여승이 되기 위하여 머리를 깎을 때 태조 이성계는 현연(泫然)히 눈물을 흘렸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 현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돌아온 하륜은 방원에게 명나라의 정세를 소상히 보고했다. 주원장의 유명에 따라 황자징(黃子澄)과 방효유(方孝孺)가 어린 황제를 잘 보필하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북경의 연왕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으로 등장했다고 분석했다.
방효유는 연왕이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고 황위에 오를 때 즉위의 조(詔)를 기초하도록 명받자 붓을 땅에 내던진 인물이다.
조선은 대륙에 부는 바람을 신경 써야 할 것인지 촛불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전망했다. 이른바 바람론이다. 하륜은 만사(萬事)의 원인은 바람이라고 진단했다. 행과 불행을 몰고 다니는 바람의 향방을 잘 관측하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당하며 명나라의 압박외교에 시달린 것도 친원과 친명을 오락가락했던 우리의 정책 부재에서 나온 판단 착오가 원인이라고 정리했다. 즉 명나라 입장에서 요동정벌론은 조선을 다스리기 위한 좋은 구실이었다는 것이다.
대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1400년 새해가 밝았다. 하륜이 "7년만 기다립시오"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 해다. 하륜이 방원을 찾았다.
"대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공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 열리는 대통의 해입니다. 허나, 대망은 맞이할 준비가 된 자에게 돌아옵니다. 혈육으로 부터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추고 있으니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렇잖아도 신경 쓰이는 첩보가 접수되어 심사가 편치 않습니다."
며칠 전, 추동 방원의 사저에 의미심장한 첩보가 날아들었다.
박포(朴苞)가 방간의 집에 번질나게 드나든다는 정보가 접수된 것이다. 괄괄한 성격의 방간과 불같은 성미의 박포가 맞장구를 친다면 무슨 흉계를 꾸며낼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박포는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조선건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정도전과 방석을 척결한 무인변란에도 방원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참여하여 2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박포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1등 공신에 책록 되고 자신은 푸대접받아 2등공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다니던 박포는 방원의 질책을 받고 죽주(竹州-영동)에 귀양 갔다. 유배에서 풀린 박포는 칼을 갈았다. 책록을 변경해주어도 시원치 않는데 유배라니 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지를 찾던 박포는 방간을 선택했다. 박포가 회안군 방간의 집에 번질나게 드나든다는 첩보가 포착되었다.
방간을 예의주시하던 방원은 세작을 더 많이 풀어 밀착 감시하게 했다.
방간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며 방원의 바로 위형이다.
괄괄한 성미에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방간이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를 불렀다. 이래는 방간의 처조카다.
"정안공이 나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어찌 필부(匹夫)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 당하겠는가?"
이래는 깜짝 놀랐다.
"공(公)이 골육을 해치고자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안공은 왕실에 큰 훈로가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가 누구의 힘입니까? 공의 부귀도 또한 그 때문입니다. 공이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대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요 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가? 나를 도울 사람이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방간이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의 의견을 좇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는데 전혀 뜻밖의 답변을 듣고 보니 실망스러웠다. 곁에 있던 내시 강인부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공은 왜 이런 말을 하십니까?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강인부가 꿇어앉아 손을 비비며 말했다. 강인부는 방간 처의 양부다.
방간의 집을 나선 이래는 스승 우현보를 찾았다. 이래는 우현보의 문생(門生)이다.
"방간이 이달 그믐날에 거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이한 일이로고…."
우현보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정안공도 또한 공의 문생이니 빨리 알려야 합니다."
우현보는 방원의 어릴 때 스승이다. 우현보가 그 아들 우홍부를 시켜 방원에게 알렸다. 첩보를 접수한 방원은 이날 밤 하윤과 이무를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겨울비가 도를 벗어나면 한 판 붙어야 합니다
정보가 새어 밀착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박포가 회안군 방간의 사저를 찾았다.
"오늘의 큰비에 대해 공은 그 응험을 아십니까?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겨울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고 하였습니다."
겨울이면 매서운 칼바람과 함께 눈이 와야 하는데 이상난동으로 겨울비가 많이 왔었다.
"이같은 때에 어찌 군사가 교전하는 일이 있겠는가?"
"정안공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쳐야 할 것입니다."
방간은 괴로운 한숨을 쉬었다. 형제간에 피를 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란 말인가? 정녕코 피할 수 없다면 선수를 치리라.
방간은 결심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
방간은 피를 부르는 결의를 다졌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사냥 공지가 내려왔다. 여러 장수와 공후들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하여 그 사냥물로 둑제(纛祭)에 쓰자는 것이다. 둑제는 대가(大駕)나 군중(軍中)의 앞에 세우는 둑기(纛旗)에 지내던 제사로 군 통수권자에게 충성을 맹약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사냥을 준비하던 방원이 조영무로 하여금 모릿꾼(驅軍)을 거느리고 새벽에 들에 나가게 하였다. 이때 방간의 아들 의령군(義寧君) 이맹종이 방원의 사저를 찾아왔다.
아버님도 오늘 사냥을 나가십니다. 어디로 사냥을 가시는지요?"
"서교로 나갈 것이다."
서교로 사냥터를 잡았다는 방원의 얘기를 들은 맹종이 급하게 방원의 사저를 빠져 나갔다. 서둘러대는 맹종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방원은 날치를 불러 미행하도록 했다.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맹종을 미행하던 날치가 맹종이 집으로 들어가자 담을 뛰어넘어 방간의 사저에 잠입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80
● 개경에 부는 피 바람
♧숭인문을 먼저 장악하라
방간의 사저에 잠입하여 동태를 염탐하고 돌아온 날치의 보고는 충격이었다. 방간의 사냥 길에 따라 나서는 몰이꾼들의 복장이 사냥 복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하고 창검을 들었다는 것이다. 방원의 사저에 비상이 걸렸다.
"숙번의 얼굴은 왜 보이지 않은가?"
제일 먼저 달려 나와 있어야 할 이숙번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좀 과음한 것 같습니다."
민무구가 변명으로 거들었다.
호탕한 사나이는 두주불사(斗酒不辭)라 했던가. 사실은 과음 정도가 아니었다. 이숙번과 대작한 민무구는 대취한 이숙번을 수레에 태워 보내고 새벽에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만취라니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방원은 숙번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방원의 이러한 애정으로 안산군사에서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는 승지의 직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숙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괘씸을 넘어 실망스러웠다.
선제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 나온 의안공(義安公) 이화, 완산군(完山君) 이천우 등 10인이 방원의 사저에 모여 구수회의를 가졌다.
선제공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사냥 길에 사냥 복장이 아니라 완전무장한 전투복 차림은 전투태세라는 판단이었다. 방원에게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했다.
방원은 군사로 호위하고 공격에 나가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선공하겠는가?"
방원의 의사는 완강했다. 혈육의 피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대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어 형의 진의를 파악한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방원은 형 방간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대의로 이르고 형제지간에 감정이 있으면 만나서 풀자고 청했다. 방원의 뜻을 전해들은 방간은 단호했다.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방간은 결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방간의 의사를 확인한 방원의 사저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방간의 흉험한 것이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화가 방간을 성토했다. 이천우와 민무구 등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가 결전에 임하자고 강력히 청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방원이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화가 따라 들어가 방원을 끌어안고 외청으로 나왔다.
마지못한 방원이 종 소근을 불러 갑옷과 병장기를 꺼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침실로 또 다시 들어가 버렸다. 안방으로 들어온 방원을 붙잡고 부인 민씨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다.
"세종대왕을 안아줄 길몽입니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의 옛집에 있는데 밝은 태양이 공중에 떠있고 그 해 바퀴 가운데에 우리 막동(莫同-세종대왕의 어릴 때 휘)이가 앉아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도 이상하여 무녀(巫女) 가야지(加也之)를 불러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라고 물으니 '공(公)이 왕이 되어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습니다."
"국기를 흔드는 실없는 소리 그만하시오. 하찮은 무녀의 얘기를 믿는단 말이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결단입니다. 결단을 미루는 것은 화(禍)를 부릅니다. 소첩은 공께서 결단할 때 결단하고 행동할 때 행동하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부인 민씨가 방원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조용한 말씨에 강한 힘이 있었다. 방석을 척결하던 '무인변란'도 옳았고 지금 군사를 움직이는 것도 옳은 결단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부인 민씨는 망설이는 방원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속삭였다.
"존경스러운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세요."'
방원이 갑옷을 입고 외청에 나오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 모습은 한 마디로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방원이 말에 오르며 예조전서 신극례를 불러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하라고 당부했다.
"형제간의 충돌로 소란스러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놀라지 마시고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에 대비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할 줄 아뢰옵니다."
방원의 전갈을 받은 정종은 아연실색했다. 또 형제간의 피바람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을 때 방간이 보낸 상장군(上將軍) 오용권이 입궁하여 방간의 뜻을 전했다.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또 다시 형제간에 피바람이라니...
오용권을 돌려보낸 임금은 도승지(都承旨) 이문화를 즉시 방간에게 보냈다. 그러나 방간은 이미 군사를 출동시킨 후였다.
인친(姻親) 민원공, 기사(騎士) 이성기 등의 부추김을 받아 군사를 출동시킨 방간은 아들 맹종과 휘하 군사 수백 명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태상전(太上殿) 앞을 지나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다.
"방원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망연자실했다.
"네가 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태조 이성계는 한탄했다. 방석과 방번의 죽음도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데 또 다시 형제가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눈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운명이 조화를 부린다면 숙명이 원망스러웠다.
군사를 이끌고 동대문(崇仁門)으로 향하던 방간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임금이 보낸 도승지 이문화와 마주쳤다.
"군사를 멈추시오. 교지를 받으시오."
교지가 있다는 말에 방간이 말(馬)에서 내렸다.
"네가 난언에 혹(惑)하여 동기를 해치고자 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들어오면 내가 장차 너의 생명을 보전하겠다."'
방간은 임금의 만류를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말에 다시 오른 방간은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시켰다. 가조가는 수창궁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목이다. 개경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면 누가 먼저 남산과 동대문(숭인문)을 선점하고 가조가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전략요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