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작품은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가 임수현씨의 작품입니다.
1. 이벽의 세례 <작품설명> 1784년 이승훈(李承熏, 1756-1801)은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李檗, 1754-1786)의 집 대청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사건은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이 장면을 재현해 보았다. 당시 이벽의 나이 30세였으며, 이승훈은 28세 청년이었다. 이승훈이나 이벽은 양반 출신이므로 두 사람 모두 유건(儒巾)을 쓰고 중치막을 입고 옥색(玉色) 술띠를 띠었다. 이승훈의 옷감은 항라이고, 이벽은 무명옷을 입었다.
<역사적 배경> 이벽의 원명은 덕조(德祚)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었다. 그는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벽의 친척이었던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부친을 수행해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입했고 교리를 배워 영세했다. 이승훈은 귀국한 이후 이벽에게 그리스도교 세례를 집전함으로써 조선사회에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세웠다.
이벽은 이승훈에게서 영세를 받은 이후 권일신(倦日身 1742-1792)과 함게 신앙을 널리 전파시켜 갔다. 그런데 1785년 서울의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에서 열렸던 신앙모임이 발각되어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이벽의 부친은 그의 선교운동을 적극 만로했고, 이벽은 그 부친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효도를 실천하기 위해서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786년 병에 걸려 죽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창설에 미친 그의 공을 기억하고 있다.
2. 명례방의 신앙집회
<작품 설명> 1785년 봄, 서울 명례방 김범우 집 사랑방에서 천주교 신앙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는 집주인인 김범우 이외에도 이승훈, 이벽, 권일신, 이윤하, 이총억, 정섭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이 참석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청지기와 시종의 모습도 보인다. 경상(經床) 위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같은 천주교 관계 교리서가 펼펴져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고난상도 보인다. 전부 양반집 선비들이라서 중치막에 옥색과 자주색, 남색 술띠를 띠고 단정한 모습이다.
<역사적 배경> 이승훈이 이벽에게 세례를 준 후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몇 곳에서는 신앙집회가 열렸다. 이 신앙집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김범우의 집에서의 집회였다. 중인출신인 김범우의 집은 서울 명례방(서울의 명동부근)에 있었다. 1785년(정조9) 봄에 열렸던 이 신앙집회가 우연히 형조의 관리들에게 적발되었다. 형조의 관리는 이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천주교서적 및 성화상들을 압수하여으므로 형조판서의 재량에 의해 방면되었다. 그러나 집주인이며 중인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었고, 그러나 집주인이며 중인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게 되었다.
3. 윤지충과 권상연의 체포 <작품 설명> 여기에서는 1791(정조15) 윤지충(允持忠, 1759-1791)과 그의 외종제(外從弟) 권상연(權尙然, 1750-1791)이 오라줄에 묶여 진산에서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는 장면을 연출했다. 전주고을의 형방 아전 한 명은 삼지찬을 들고 앞서가고, 다른 한 명은 오랏줄을 잡과 있다. 옆구리에는 육모 방망이를 찼다. 전주에 있던 전라감영 소속이었던 이들은 검정색 더그레를 입었다. 오랏줄에 묶여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온 6살의 딸아이가 아버지 윤지충의 옷자락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한다. 골목어귀에는 그의 종이 주인이 먹을 미음 그릇을 들고,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윤지충의 세례명은 바오로였으며, 정약용의 외사촌이었다. 전라도 진산(珍山) 출신으로, 1783년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이듬해 1784년 겨울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이를 연구해 갔다. 그는 1787년 천주교에 영세 입교한 이후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4. 강완숙을 중심으로 한 여성 신앙공동체 <작품 설명> 강완숙(姜完淑, 1790-1801)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회장이었다. 주문모 신부를 도와서 선교활동을 했고 특히 여성 신앙공동체를 무어 일으켰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가지고 들어온 성화 족자를 내걸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면서 기도 모임을 하고 있다. 강완숙은 족자 옆에 단아하게 소복을 하고 있다. 화분에 심은 흰 매화는 그의 고결한 삶을 상징하고, 방 중앙의 과반에 일치의 은혜를 나타내는 로사리오가 있다. 강완숙 집에 함께 거처하던 윤점혜(尹占蕙)와 정순매(鄭順每), 이득임(李得任)등이 함께 있다. 그들은 여성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새로운 믿음을 실천해 나갔다.
<역사적 배경> 강완숙의 세례명은 골롬바였다. 그는 충청도 내포지방 양반가문 출신이었으나, 덕산에 살고 있던 홍지영(洪芝榮)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명을 받아 영세 입교한 이후 1791년(정조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후 남편은 천주교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별거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자신이 영세 입교시킨 시어머니와 전실 소생 아들인 홍필주(洪弼周) 및 자신의 딸을 데리고 서울로 이주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謀)신부가 입국한 이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기집 나무광에 숨겨 주어 전도를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그를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임명했다. 강완숙은 신분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주변에 있던 부녀자들에게 천주교를 전했으며, 여성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를 꾸려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41세의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 당해 순교했다.
5. 주문모 신부의 부활미사 <작품 설명> 주문모(야고보, 1752-1801)신부가 홍필주를 복사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이 미사에는 강완숙과 동정녀 두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양반집 할머니가 세살박이 손자와 함께 미사에 참예하고 있다. 그 외에 엄마 등에 업혀온 두살박이 아기도 미사에 함께 한다. 색동 옷을 입은 아기는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또 다른 예수이다. 다른 한 아기는 천진한 조선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주문모신부는 청국인 선교사엿다. 그는 중국 소주(蘇州)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어왔다. 그는 20세에 결혼햇으나 결혼후 3년만에 상처(喪妻)를 한 후 재혼하지 않고 지내다가 장년에 북경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40여세를 전후해서 북경교구 신학교에서 구베아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았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1789년 조선인 교우들로부터 조선교회가 형성되어 신앙이 실천되고 있음을 보고받았다. 그리고 당시 조선교회에서는 교회법의 구정에도 없는 가성직제도를 시행하거나, 당시 교회에서 금지했던 조상제사를 인정하는 등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염려했다. 이 조선교회를 방치할 경우 새로운 이교(異敎)가 생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조선교우들의 요청대로 선교사를 보내서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천하도록 배려했다. 여기에서 주문모 신부가 조선의 선교사를 발탁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23일 조선인 지황, 윤유일 듳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을 건너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그는 이듬해 1월초에 서울에 도착한 후 북부 민가에 숨어 포교하다가 신분이 노출되었다. 그를 보호하려던 지황(池璜, 1766-1795), 윤유일(尹有一, 1760-1795), 최인길(崔仁吉, 1764-1795)등 신자들은 포도청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 이후 주문모 신부는 6년간이나 숨어 지냈다. 물론 그는 지방의 신앙공동체를 순방하며 피신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은신처는 강완숙의 집이었다. 1801년 3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한 때 몸을 피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아고서 의금부에 자수했고, 신문을 받앗다. 그는 1801년 5월 31일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를 보회해 주었던 강완숙도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죽음을 받아들였다.
6.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 <작품 설명> 어느 초가을날 유중철(柳重喆, 1779-1801)과 이순이(李順伊, 1782-1801)는 전주에 있던 유중철(요한)의 집에서 초례청을 열고 부부의 가약을 맺었다. 연지곤지를 한 신부 차림의 이순이(루갈다)는 서로 동정을 서약하는 예물로 명주에 쓴 서약서를 낭군에게 드리고 있다. 전통예법에서 첫날빰에 부부는 과반에 놓인 술잔으로 합환주를 나눈다. 그러나 이 동정부부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에 대한 사랑을 다지기 위해서 소반에 가시관을 놓아두고 있다. 신부 이순이는 녹의 홍상을 입고 연지 곤지에 족두릴르 썼는데, 이는 첫 날밤이라는 뜻이다. 빨마가지 밑에는 명주천에 쓴 서약서가 들어있다. 신방에 치장한 원앙 한 쌍과 은가락지는 변치 말자는 부부애를 , 장도는 서로의 절개를 상징한다. 이 모든 것들은 두 사람 앞에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굳굳이 이겨내자는 뜻을 담고 있다.
<역사적 배경> 이순이 1782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윤하와 권철신의 동생인 어머니 권씨, 사이의 2남 1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주문모신부에게서 첫 영성체를 했다. 이때 그는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했지만, 당시 조선 풍습에서는 여성이 혼자서 동정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주문모 신부는 역시 동정생활을 하고자 하던 유중철과 형식적 혼인을 주선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장남이었다. 유항검은 이종사촌이었던 윤지충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고, 권일신에겍서 교리를 본격적으로 수학했다. 전주의 거부였던 그는 전라도 지역의 선교에 크게 기여했고 1801년 10월 24일 전주에서 순교했다. 앞날의 순교자 유항검은 자신의 아들 유중철에게 천주교 신앙을 올바로 가르쳤다. 지봉 이수광의 후예로서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이윤하는 자신의 딸 이순이를 멋지게 가르쳤다. 두 젊은이들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맞서서 교회의 가르침을 가정 성실히 실천하기 위해서 동정생활을 서약했다. 그들이 동정부부로 남았던 것은 개인적 신앙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는 동시에 유교의 가족주의적 전통을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질서로 바꾸어 보려던 치열한 노력의 표현이기도 했다.
7. 이도기의 옹기점 <작품설명> 이도기(李道起, 바오로, 1743-1793)는 한 꼬마 교우와 함께 장날 옹기점을 열었다. 이때 또 다른 교우 하나가 새로 구은 옹기를 지고 장터에 나왔다. 이도기는 꼬마를 시켜서 묵주가 담긴 항아리를 전해주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이도기는 오기를 고르고 있는 한 아녀자에게 전교하고 있다. 옹기점은 박해시대 신자들이 많이 경영했던 삶의 형식이었다. 신자들은 옹기를 제작하여 판매하면서 신자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났으며, 또 이를 전파시켰다. 이 작품은 이러한 박해시대 신자들의 생활상을 재현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이도기는 충청도 청양(靑陽)출신이었다. 그는 글을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성령(聖靈)의 학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을 실천하는 일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선교사업에 모두 썼고, 정산고을의 어는 옹기 공장에 자리잡고 조그만 장사로 살아갔다. 당시 신자들은 질그릇을 만들 수 있을 흙과 풍부한 물, 땔나무가 많은 곳을 찾아서 옹기가마를 설치하고 옹기를 구워 팔았다. 옹기는 그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방도가 되었고, 옹기점은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들이 모듬살이를 하던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옹기에 신앙을 담아 널리 전하고자 했다.
8. 앵베르 주교의 고해성사 집전 <작품 설명> 앵베르(Imbert, 1796-1839)성인은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이었다. 그는 1837ssu에 조선에 입국한 이후 서울 북부 민가에 숨어서 신자들에게서 고해를 듣고 있다. 주교는 한복에 보라색 영대를 했다. 답호를 입은 70세가 넘은 노인이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있다. 덧저고리에 조바위 차림의 부녀자가 고해성사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교리서인 “성경 직해”를 보고 있고, 그 옆에 몸종이 쓰게 치마를 들고 있다. 나이 많은 할머니는 고해성사를 하는 노인과 부부인 듯 쾌자 차림을 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앵베르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였다. 1819년 신부가 되었고, 1820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전교를 시작했다. 그는 1830년 중국 사천(四川)교구의 보좌주교로 중국에서 선교하던 중, 1837년 제2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837년 정하상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는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 때문에 화가 다른 신자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관헌에게 자수했다. 그리고 함께 조선에서 선교하던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탕(Chastan)신부와 함께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한국교회는 그의 입국을 통해서 창설 53년만에 완전한 교계제도를 갖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 노력했고, 이 땅에서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힘쓰다가 자신의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였다. 교회는 그를 1984년 성인으로 선포했다.
9. 상재상서를 전하는 정하상 <작품 설명>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기해박해 직전 조선교회의 eoy적 인물이었던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은 이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체포를 예상하고 신앙을 변호할 글을 지어서 준비했다. 이것이 ‘재상에게 올리는 글’(上宰相書)이었다. 그는 1839년 체포된 다음날 종사관(從事官)을 시켜서 이 글을 당시의 재상인 이지연(李止淵)에게 전달했다. 이 상재상서는 모두 3,400여자에 이르는 짧은 글이지만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고 신앙의 자유를 호소한 호교론이었다. 이 작품에서 인형작가는 대담한 상상을 시도해 보았다. 즉, 작가는 정하상이 박해 직후에 상재상서를 작성했고, 자신이 체포되기 전에 이를 미리 재상(宰相) 이지연(李止淵)에게 전달하려고 했다고 상정했다. 또한 작가는 정하상이 박해에 대한 대책을 당시 조선 교회의 중심임물이었던 유진길과 함께 상의했으리라는 점에 착안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작가는 작품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역사적 배경> 정하상은 1801년의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이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조카로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친 정약종이 순교한 직후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1813년에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여교우 조증이(趙曾伊)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에 힘썼다. 그는 그후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을 찾아가서 교리와 한문을 배웠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 그는 교회재건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1816년부터 전후 아홉 차례에 걸쳐서 사신행차에 노복이나 상인의 신분으로 동행해서 북경(北京)에 갔다. 여기에서 그는 선교사들을 만나서 조선교회의 재건과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교구의 설정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맞아들였다. 그는 앵베르 주교 밑에서 전교활동을 도왔고, 앵베르 주교는 속성 신학교육을 시켜서 그를 신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해 9월 교회 사상 대표적 천주교 지성으로 지목될 수 있으며, 박해시대 신앙인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1984년에 시성(諡聖)되었다.
10. 김대건의 사제 서품 <작품 설명>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金大建, 1812-1846)을 위해서 사제서품식을 집전했다. 이 서품을 통해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신부가 되었다. 페레올 주교가 주관하는 서품식을 중국인 복사 두 사람이 도와 주고 있다. 페레올 주교 옆에서 복사 하나가 성유를 들고 있고, 또 다른 한 복사는 주교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서품식에서 도유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김대건 성인은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고,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서 몰락했다. 그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1796-1839)도 19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했고 성인의 반열에 올았다. 김대건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한 직후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이 세 명의 신학생 가운데 최방제는 그곳에서 질병으로 죽었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서품을 받은 후 입국하여 복음 선포에 투신했다. 김대건은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사제에 서품되었다. 그의 사제 서품은 한국인에게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그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이는 겨레의 복음화를 위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으며, 한국교회가 한국화해 나가는 데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11. 김대건 성인의 탄생 <작품 설명> 김대건( 金大健 ,1821-1846)은 1846년 9월 16일 서울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가 복음을 선포했던 이 땅과 그의 피가 적셔진 새남터에서 25세의 청년 김대건은 성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순교는 곧 성인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 작품에서는 김대건 성인 이외에 금부도사, 서리, 희광이, 선비, 보부상, 미장이, 포졸 3인, 거지, 강촌의 노인 2인, 아이들 2명등 모두 15명이 등장하고 있다.
형의 집행관인 금부도사는 군복에 전립을 쓴 차림에 손에는 등채를 들었다. 허리에는 남색 전대를 띠고 목화를 신고서 호상(胡床)에 걸터않아 있다. 그 옆에 선 서리는 행의(行衣)위에 답화 차림으로 손에는 '사형죄수'의 조목을 적은 기록을 들고 있다. 포졸 3명은 모두 벙거지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소매 없는 아청색 더그레를 입었고 삼지창을 들고 경계하고 있다. 더벅머리 회자수는 맨발로 언월도를 어깨에 메고 있다. 당시에는 사형장에 이른 죄수는 웃옷을 벗기고 복두리는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태연하게 순교하겠다고 복두를 거절했다. 구경나온 동네 꼬마 아이 형재 손에는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을 들고 있다. 연은 김대건 신부가 하늘 나라에 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밥 바가지를 든 거지는 육신의 양식을 구하려 거리를 헤매다가 순교 장면을 보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깨우친다. 보부상은 목화 솜뭉치를 매단 패랭이에 용장 지팡이를 짚고 있고, 옆에는 부담 짐이 내려져 있다. 미장이나 노인들은 당시 천주학을 하던 서민들의 존재를 상징한다. 김대건 신부에게 교릴를 배웠을 법한 선비 하나가 먼길을 걸어 왔는지 행전을 치고 괴나리봇짐을 메고서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해서 활동하던 때는 조선 연해에 서양의 선박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던 때였고, 조선의 조정에서도 이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주교가 서양의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건은 선교사를 맞아들일 바닷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체포되었고, 1846년 역률(逆律)을 적용받아 26세의 나이로 서울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는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12. 최양업 신부의 선교 <작품설명> 최양업(崔良業, 1821-1861)신부가 산골 우물가 무궁화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천주가사 중 사향가를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물동이에 물을 기르러 온 여인, 하루종일 일하다가 우물가에 잠깐 쉬러 온 농부 부부, 친손녀는 거닐과 외손주는 업고 바람쐬러 나온 할머니, 모두 최양업 신부의 전교 대상이다. 최양업 신부는 중치막 차림에 갓망건으로 술띠를 띠고 있다. 무릎아래는 행전차림이다. 때는 늦은 여름,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했던 것처럼 최양업 신부도 어느 교우촌의 우물가에서 물을 청해 마셨다. 우물가에는 무궁화가 있다. 그 꽃 다섯 송이는 성모마리아에게 드릴 무궁화 화관이다. 무궁화나무의 뿌리로 하느님을, 무궁화 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자 했다. 무궁화 잎 103개는 한국의 순교 성인 103위를 나타낸다. 할머니가 업은 아기는 한국의 아기 예수이다. 농부 부부는 한국의 성모와 요셉, 나무꾼은 목자의 인도를 기다리는 길 읽은 양 한 마리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최양업의 세례명은 도마였다. 그는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최경환, 어머니 이성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이미 교회 초기에 이존창(李存昌)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므로, 그는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최경환과 이성례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교향을 떠나서 서울로 다시 과천, 시흥으로 옮겨 다니며 살던 중 1893년 기해박해를 만나 순교했다. 최경환은 1984년 시성되었다. 최양업은 1836년 서울에서 전교하던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뽑히어 최방재, 김대건과 함께 유학차 마카오를 향해 떠났다. 최양업이 15세였다. 만주, 내몽고, 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 그곳에서 신하교를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후 그는 전후 4차례에 걸쳐서 귀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양업은 28세 때였던 1894년 4월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쓰까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성사를 받아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849년 12월 의주의 변문을 통햐여 입국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가기 힘든 지역만을 골라 다니면서 산골에서 숨어살던 신자들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생활 12년만에 충청도 진천에서 여독으로 40세의 장년으로 1861년 병사했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한국의 두 번째 신부였다. 그는 박해 사실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했고, 교리서를 번역하여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그는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지어서 가사문학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했다. 그는 직접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땀을 흘려서 하느님을 증거한 사람이다. 오늘날 청주교구에서는 그의 성덕을 기려서 복자품에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
첫댓글 국립국악원에서 공연을 축하드리며 참조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