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을 - 청계리 1구 원청계
원청계 마을은 행림 가시동 원청계 세 마을로 이뤄졌으며 광-목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았다. 청계면 소재지에서 목포 쪽으로 1㎞ 가량 가면 오른쪽으로 마을 입구가 나오는데 행정구역명으로 청계면 청계1리 원청계 마을이다. 자세히 마을 주변을 살펴보면 이 마을을 포함한 전체적인 지형이 거북이 형상이다. 마을 뒤의 태봉산이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거북이 형상이고 구암 마을과 당치가 거북이의 양발에 해당하는 형국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세 마을 다 무안박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진위장군 박제의 아들인 박숙(朴俶. 자-여발, 호-聾窩. 1599- ?)이다. 공의 벼슬은 장악원정(정삼품 문관)이었다. 공은 벼슬을 탐내지 않고 수은 강항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전력을 다했으며 집안에서는 家訓八章을 지어 시행케 하였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원래 원청계 마을은 현재의 위치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폐촌이 되어버린 다음 임란 이후에 무안 박씨 박사번씨가 입향하고 그 후 나주 정씨, 광산 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이에 대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언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행림마을은 무안의 성씨자료를 보면 원청계 마을에서 살던 주민이 위쪽으로 올라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杏林’ 마을의 입향조는 정조(1776-1800)조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사정까지 지낸 경주 김씨 김성집(金星集 - 호는 송포)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마을 또한 원청계마을의 무안박씨가 분가해서 형성한 마을이다.
佳時洞 마을도 또한 무안박씨가 형성한 마을로 지명의 한자표기는 무안박씨 족보에 표기된 것이다. 하지만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에는 加柴洞으로 나온다. 가시동 마을의 주민들은 지명의 유래를 가시목과의 가시나무가 많아서 연유된 이름으로 알고 있다. 더 자세한 지명유래를 알고자 주민들을 만나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의 가시동 마을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로 보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은 와우형의 지형을 지니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야산개발이 이뤄지면서 산이 잘려나가고 마을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고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아름답던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원청계 마을은 우리 지역의 문화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는 마을 뒷산인 태봉산으로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이 발견되었으며, 또 하나는 승달산 계곡의 맑은 물로 70년대까지 청계막걸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청계천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淸溪’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시내인 ‘淸溪川’에서 비롯된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깨끗하며 마을 주위에서 맑은 지하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태를 묻었던 석실이 있어
1950년대 자유당 시절에 원청계 마을 뒷산에서 태실을 발견했다. 6명의 마을 주민들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려 산에 올라갔다가 발견한 태실은 절구통 같은 모양의 석실 두 개, 주민이 마셔버렸다는 누런 탯물, 그리고 수저 자루 같은 손가락 길이의 금, 태를 담았던 항아리 속에 넣어져 있던 벽돌 모양의 옥돌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광명 정덕’이란 한자가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또한 태의 주인도 ‘명나라 황족의 태’라는 추측에서 ‘고려 혜종의 태’라는 주장도 있다.
胎室의 조성은 왕실에서 왕자나 왕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묻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태실을 전국 도처의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였다. 이러한 태실이 있는 산을 胎封山이라 하는데 전국에는 ‘태봉산’이라는 이름의 산들이 많이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청계면 태봉리와 청계리의 태봉산 등 같은 이름이 있는데 台峰리는 한자가 다르다.
마을 아래에 주민들에 의해서 원태라고 불리는 원 터가 있다. 원 터는 관리나 여행객이 묵어가는 숙소가 있었다고 해서 불렀다는 설과 이 마을의 원래의 터였다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영진포구에 왔던 舟商客主들이 마무는 곳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곳 원 터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을 듯한 당산목이 두 그루가 있고 그 다운데 여흥민씨 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원 터 아래 시내가 흐르는 곳에 ‘수문터’가 남아 있다. 또한 원 터 앞길에는 해안가와 관련이 있을 듯한 모랫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 위에 자리 잡은 행림 저수지에는 고기가 잘 살지 못한다. 얼마 전에 증축한 이 저수지에는 위에서 흘러오는 물보다도 바닥에서 솟아나는 맑은 지하수가 더 많아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저수지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방주기도원’이 있는 자리에는 서당재라는 지명이 있다. 실지로 월선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청계 초등학교로 등교할 때 넘었다는 고개다. 행림 마을에서 목대로 넘어가는 재를 딩굴재라 한다.
원청계 마을에는 빈집[空家]이 없다. 비록 농토는 적고 세대수는 작지만 주민들의 근면함과 부지런함이 있어 주변의 어느 마을보다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있으며 떠나는 세대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 가꾸기도 잘해 집들이 번듯하고 깨끗하다. 샘가에 내[川]가 있다 해서 ‘샘갓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주민 서유조씨 댁에서는 도자기 굽는 가마에서나 사용됐음직한 황토벽돌이 많이 발견되어 가마터가 있었지 않을까 추측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앞 광 - 목간 도로 옆에 있는 밭에서는 가마터가 발견되고 수많은 도자기 파편과 ‘마상배’ 두 개가 발견되어 관심을 모은 적도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는 마을에서 태봉산 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에서 슬러그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청계야철지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목포대학 박물관에서 발간한 ‘무안군의 문화유적’이라는 자료에서는 이 마을에 지석묘가 6기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에게 물어 보아도, 있음직한 곳을 찾아보아도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에는 2개의 기도원이 들어서 있으며 가시동 마을에 무안박씨 제각인 영사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다. 안에는 7개의 현판이 있으며 삼문 밖에는 2003년에 세운 박용화 공적비가 있다.
철 제련소와 역참이 있었던 마을 - 청계2리 구암
조선시대 무안에는 세 개의 院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남면 연리 원동과 삼향읍 유교리 원동 그리고 청계면 청계리 구암마을의 고철소원이다. 또한 철을 제련했던 곳도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무안읍 성암리 성암 마을의 철소재이고 또 하나는 구암 마을의 고철소원이 그것이다.
이러한 원과 제련소가 있었던 구암마을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광-목간 도로를 따라 목포방면으로 2㎞ 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국도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다르게 국도와 접한 담벽에 동양화를 그렸으며 마을 앞에 솟대와 장승을 세웠다. 벽화는 그린지가 오래되어 희미해졌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청계2리 구암마을이다.
원래 청계리는 무안군 일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행림리 구암리 학유정리 가시동리 당치 중신기를 합하여 청계리라 해서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예전에 구암 마을을 포함한 이 일대엔 철 제련소가 있었다. 실지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예전에 철을 제련했던 지명으로 보이는 ‘고철소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금만 파면 ‘쇠똥’으로 부르는 철 제련소에서 나오는 찌꺼기가 나오는 곳이 많다. 이러한 철 찌꺼기들이 나오는 곳을 이곳 주민들은 땅밭이라 불렀다. 이런 땅밭이 여러 곳 있으며 솥다리 포구라는 鼎足浦가 현재의 ‘원 터’ 앞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 건너편을 쇠 터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이곳에 제련소가 세워지고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해서 이 마을의 이름도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水鐵店이라고 나온다. 수철점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가마솥, 농기구 등을 만드는 마을이었다. 후에 주민들에 의해서 이 마을 이름이 마을의 풍수적 지형을 따 龜岩으로 바뀌었다.
자세히 보면 이 마을을 포함한 전체적인 지형이 거북이 형상이다. 마을 앞에서 보면 태봉산이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거북이 형상이고 이 마을과 당치가 거북이의 양발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즉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으로 이 마을은 우백호의 지형에 해당된다. 그러나 현재의 마을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학유정 마을 앞의 원이 막히면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九岩으로 바뀌였다.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거북이에겐 물이 있어야 하는데 둑이 생기면서 물이 없어지자 이름도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마을의 왼편 뒷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아홉 개의 바위가 있다 해서 구암이라 했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10개도 넘어 보이는 바위들이나 주민들은 이 바위들이 마을 이름을 상징한다고 여겨 오래전에 장승도 두 기를 세워 장승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원 터는 명당 중의 명당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김해김씨이다. 현재 김해김씨를 포함하여 나주정씨 밀양박씨 달성배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김해김씨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마을 이장을 역임했던 김해김씨인 김몽룡씨의 집안에서 12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김해김씨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병자호란 이후인 16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제련소와 院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해서 별다른 농지가 없어도 풍족한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院이 폐지되고 제련소가 무력해지면서 실질적인 수입원이 없어 어렵게 살기도 했다. 그러다 마을 앞 바다가 간척으로 농지로 바뀌면서 비로소 일정한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아랫 마을인 학유정에는 복길 간척지를 막기 전까지는 ‘영진포’라는 이름의 포구가 있었다. 이 마을 앞까지 바다였을 때 나락 2-3천 가마를 실은 범선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신들이 드나들었던 항구이며 포구였다. 이 포구는 오래 전부터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되었던 항구로 중국의 불교가 승달산으로 들어오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승달산의 원래 이름이 영취산이었는데 당나라 승려 500여명이 이 산에 들어와 모두 道를 깨치면서 道를 얻고자 하는 승려는 이 산에 들어오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뜻의 ‘僧達山’으로 바뀌었다. 이때 당나라 승려들이 정족포에서 내려 승달산을 향해 올라갔던 고개가 지금의 이 마을 아래에 있는 송학동 마을 뒷산의 당재[唐峙]다. 이곳이 영진포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기록 뿐 아니라 현재 ‘영나루’라는 이름으로 이곳 사람들이 마을 앞의 둑을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역문인 돌 두 개가 남아 있으며 삼향면 지산리에 역마촌과 하인촌이 있었다.
마을 아래에 원 터라고 불리는 곳에는 고철소원이 있었다. 살펴보면 원래 이곳은 땅 밭이라 부르는 곳으로 제련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후에 원이 들어섰던 자리이다. 이곳 원 터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은 이팝나무를 포함한 당산목이 두 그루가 있고 그 가운데 여흥민씨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묘 주변에는 개미 등 벌레가 있지 않아 여름철 주민들의 쉼터로는 적격이다. 그런데 이곳에 민씨가 묘를 쓸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주변에 땅밭샘이 있었으며 주막이 있기도 했다. 또한 원 터 아래 시내가 흐르는 곳에 ‘수문터’가 남아 있다.
뒷산의 중턱에 ‘넘샘’이라는 마을의 공동 우물터가 있다. 현재는 식수로 먹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주변 마을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물이다. 그 위에는 팽나무가 있어 주민들이 여름철 쉼터로 활용하기도 했다.
마을 주변 곳곳에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된다. 마을 앞 삼거리인 현재 구암식당의 자리를 모랫등이라 불렀다. 지금도 조금만 깊이 파면 모래가 나온다고 한다. 주유소 옆에 경매시장이 들어서 고문서 가구 등 오래된 물건을 팔고 산다. 매주 토요일마다 시장이 열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다고 한다.
주민들이 살려낸 학교가 있는 마을 - 청계3리 장부교
장부교는 청계3리에 속한 마을로 송학동 당재 중신기 독골 장부교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광-목 간 도로 구암 마을 삼거리에서 일로 쪽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여러 마을이 모여서 이뤄진 마을인 만큼 주민들의 단합이 염려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다른 마을보다 양보와 협조가 잘 이뤄진다고 한다.
송학동은 청계2리 구암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1980년대 취락구조 개선 사업 때 형성된 마을이다. 순복음청계 교회가 들어서 있다. 당재 마을은 원래 당치에서 비롯된 마을로 당나라 사람들이 넘었던 고개이름이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도 지명이 나오는 마을로 승달산과 관련이 있다. 승달산의 원래 이름이 영취산이었는데 당나라 승려 500여명이 이 산에 들어와 모두 道를 깨치면서, 道를 얻고자 하는 승려는 이 산에 들어오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뜻의 ‘僧達山’으로 바뀌었다. 당나라 승려들이 정족포에서 내려 승달산을 향해 올라갔던 고개가 바로 마을 뒷산의 당재[唐峙]다.
중신기 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1917년의 자료에서 나온다. 마을 뒷산인 당치에는 사찰 터가 있고 마을에 중샘도 있어 중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마을에 있는 샘은 중들과 연관이 깊은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중들이 탁발 행각을 하면서 시주가 많으면 물이 넘치고 시주가 없으면 물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언제나 가을이 되면 샘물이 마르는데 가을에는 늘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기 때문에 물을 먹지 않아 필요가 없어 마른다는 것이다.
독골 마을은 月亥마을로도 불리는데 얼마 전까지 월선3리에 속했다. 마을의 主된 山인 투구봉이 돼지 형국이라 해서 돈곡(豚谷)이라 불렸던 지명이 독곡으로 변한 것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돼지 샅에 해당되는 곳에 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다. 67, 68 大旱害 때도 마르지 않았던 샘인데 여자의 성기를 닮은 샘이다. 하지만 계곡에 돼지 돈사가 들어서면서 물이 오염돼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장부교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놓여진 장부다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래에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장부다리는 장보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전 국도 1호선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청계3리 5개 마을의 중심인 중신기 마을의 입향조는 확실치가 않다.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한양조씨 창령성씨 밀양박씨 수원백씨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창령성씨가 먼저 들어왔다. 창령성씨 입향조는 나주에서 온 성순보(자-구종, 1804-1970)이며 밀양박씨 입향조는 삼향읍 석교에서 온 박옥림(자-춘서, 1822-?)이다.
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장군봉과 말매봉 칼봉 투구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군봉은 장군이 앉아 있다는 형국 즉 장군대좌혈로 나주김씨들이 혈처에 묘를 써 발복을 했던 산이다. 말매봉은 말을 매는 형국이며 칼봉은 칼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마을 앞의 투구봉은 산 정상의 바위가 마치 투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군대좌혈이 있어
마을에는 이런 지명을 엮어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장군이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승리를 하지 못하고 패해 돌아오게 되었다. 장수는 돌아오면서 마계산에 말을 매 두고 질마재에 말 안장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칼봉에 칼을 내려두고 투구봉에 투구를 벗어 놓은 후에 삼향읍의 왕수산(또는 목포의 유달산)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전투에서 패했음을 고하는 형국의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는 물이 많았다. 월선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전부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데 이 물들이 학유정 앞까지 가면서 주변 마을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이 계곡물에는 세 개의 보 이름이 있다. 성보 줄보 장보이다. 줄보는 방아다리 형국에 세워진 보이며 장보는 긴 보, 큰 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부다리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다리인 장보다리가 변한 것이다. 예전에 이곳은 국도 1호선이 지나는 다리였다.
일제강점기 때(1910년대) 학유정 마을에 둑이 막히면서 장부다리 주변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향 일로 몽탄 청계 등 네 개 지역의 사람들이 목포를 가거나 일로장을 볼 때 드나들었던 곳이어서 장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해서 삼향 동뫼에서는 윷놀이 자랑을 말고 장부다리에서는 화투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 만큼 돈이 많은 곳이었고 도박이 성했으며 흥청거렸다고 한다. 오래 전에 청계 사는 촌부가 일로장에서 황소를 팔고 돈을 갖고 오다가 이곳에서 도박으로 대부분이 털렸다는 소문 아닌 소문도 있다. 한때는 주막이 7개가 있을 정도로 돈이 넘쳐나기도 했던 곳이다.
이 마을에는 이농현상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초등학교를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살려 낸 학교가 있다. 나주 김씨 문중이 땅을 희사해 1956년에 개교한 청계남초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학생중심의 교육을 실천하는 무지개학교로 교사 학부모 지역주민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여러 명의 학생이 목포에서 전학 올 정도로 특화된 학교이기도 하다. 특색교육프로그램으로 한문서당, 초의다도교육, 분청사기, 논술교육, 사물놀이, 민요교실 등이 운영되고 있다.
마을에는 두 개의 재각이 있다. 하나는 나주 김씨 제각인 석류정으로 주변에 학교가 없었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아이들의 배움터이기도 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90년대에 지어졌다. 또 하나는 영양천씨 제각인 영모재이다. 1962년에 지어진 것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8개의 주련과 2개의 현판이 있다. 지금은 잡초에 묻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제각 앞에는 1974년에 세운 ‘학산천공보배창선비’가 있다. 장부다리 옆에는 호화주택 단속이 한창일 때 전남 1호의 호화주택으로 지정되었던 주택도 있다.
통정관이라는 관리가 살았던 학 마을 - 청계4리 학유정
학유정은 청계4리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학이 먹이를 찾아 놀고 있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마을 중간에 해남윤씨 묘가 있었는데 그 묘를 둘러싸고 12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에는 해마다 수많은 학들이 놀러 왔으며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유복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60여년 전에 해남 윤씨들이 그 소나무들을 베어 팔아버렸다. 그러자 그때부터 마을에는 안 좋은 일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젊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죽거나 자살하고 다치는 등 변을 당하고 마을에도 우환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현재는 윤씨 묘도 없다. 몇 년 전에 파묘하여 납골당에 안치한 것이다.
이 마을은 영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에는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간척을 하기 전에는 이렇다 할 농지가 없어 어렵게 살았으나 1970년대 간척이 되면서 부자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뒷산을 영암산이라 한 것은 영암 사는 밀양 박씨들이 뒷산에 와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구암마을이나 장부교 마을이 모두 이 마을에서 분리(分里)되어 갔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정씨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효종 때 나주정씨 정도하가 최초로 입향 하였으며 그 후 나주김씨 김용규가 이거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역사를 보면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고 주민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마을은 영진포라는 큰 포구였으며 조선시대 이전에도 배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실지로 나주김씨 족보를 보면 이 마을 나주김씨 입향조는 몽탄에서 넘어온 김상칠(자-문겸, 1780-1838) 공이다. 마을유래지에서 입향조로 제시한 김용규의 할아버지 때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나주정씨 족보는 입향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 이름에 대한 문헌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군 일서면 鶴遊亭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 일서면 학유정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에도 청계면 청계리 학유정으로 나온다.
현재 이 마을은 두 차례의 간척(1910년대와 1970년대)으로 넓은 농지를 갖고 있지만 조선조 말까지도 마을 앞은 바다였다. 내륙으로 깊숙이 구암 마을까지 들어온 지형적인 영향으로 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포구가 형성되었다. 포구는 마을 서쪽 끝 갯고랑 부근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해적들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영나리라 해서 대수롭지 않은 포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포구를 통하여 중국의 사신 및 수많은 스님들의 왕래가 자주 있었으며 벼 2 - 3천 석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포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통정관(通政官)이라는 관리가 있었으며 그가 살았던 곳을 예전에는 통정골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통사골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주민들은 이러한 마을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통사골에는 나주김씨 문중산이 있는데 수많은 고총들이 있다고 한다. 오래 전에 통사골 주변과 김씨 문중산 주변에 도굴꾼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검침봉으로 쑤시고 다녀 수많은 유물들을 찾아내 도굴해갔다고 한다. 도굴품 중에는 고려청자에 해당하는 유물도 있어 주민들은 이제서야 안타까와 하고 있다.
소타령[牛歌]을 불렀던 마을
통정골은 학유정과 가시동 마을 사이에 있다. 예전에 이 통정골에는 14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석각으로 된 통정샘이 있으며 지금도 샘 주위를 파보면 기와와 통나무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자료에는 고려자기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정골이 현재의 통사골로 변한 것은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시체를 다 치울 수가 없어 그대로 버려두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학이 먹이를 찾아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마을 앞에는 학의 먹이라 일컫는 떡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떡처럼 반반하고 넓은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으나 현재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문 형태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복길 간척지를 만들면서 사용해버려 지금은 없다. 이 석문은 중국의 사신들이 드나들 때 사용했던 통문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의 부녀자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이 새벽에 일어나서 물 받는 것이라 할 만큼 마을에는 물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느 마을 못지않게 이름을 가진 샘이 많이 있다. 물이 항상 넘친다 해서 넘샘, 새샘 황샘 통정샘 갯샘 고을샘 구석샘 도롱밭샘 영나리샘 서그태샘 등이 있다. 마을에서 구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큰 잔등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그곳은 공동묘지 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곳이어서 어렵게 살았던 시절 굶주렸던 거지나 주민들이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죽어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주 민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20여일간은 일을 하지 않고 놀이에만 열중한 적도 있었다. 해서 이 마을 농악은 주변에 널리 알려졌었다. 뿐만 아니라 20여년 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불렀던 ‘소타령[牛歌]’이 민속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때 수상 기념으로 무안군수가 마을 앞길을 포장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마을의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소 타령은 다음과 같다.
소야 소야 망망소야
오양곱장 망망소야
생길몸도 새였는데
소몸으로 생겼느냐
나무휘어 코를 뚫고 이하 생략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잔등 작은잔등, 영진포구를 나타내는 영나리, 방구등 원건너 엽댕이, 서쪽 끝이라 해서 서그태, 마을 입구의 도롱밭, 그리고 뒷재가 있다. 마을 입구에 광림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