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Luoyang (웨)Luoyang. 옛 이름은 허난 부[河南府].
중국 허난 성[河南省] 북서부에 있는 시.
통칭 허난[河南]으로 불린다. 9개 나라의 수도이자 불교중심지로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였다. 뤄양은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나뉘어 있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뤄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BC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오늘날의 동시의 북동쪽으로 이전했다. 이 도시가 뤄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뤄수이 강[洛水] 북쪽(중국어로 '陽'은 북쪽을 뜻함)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은 오늘날 뤄양 고성유적지(古城遺跡地)로 유명하다.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시가지는 대체로 옛 낙읍의 자리에 있었지만 뤄양이라고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근대까지 허난 부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뤄양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도(國都)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 전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AD 68년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 가운데 하나인 바이마 사[白馬寺]가 오늘날의 동시에서 동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
4세기에 뤄양은 동진(東晉)·후조(後趙)·연(燕)의 통치자들이 번갈아 차지했고, 494년에 북위(北魏:386~534)의 효문제(孝文帝)가 뤄양을 재건할 때까지는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그후 뤄양 남쪽에 있는 룽먼[龍門]에는 북위 황제들의 명령에 의해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이 석굴사원은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석굴사원의 조각품들은 중국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뤄양은 당(唐:618~907)의 동쪽 수도(東京)로서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의 동시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새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에 반란이 일어난 뒤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 경제적 침체는 20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1949년부터 트랙터 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곧 중요한 공업 및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면화·밀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가공한다. 뤄양은 여러 간선도로의 중추이며, 쑤저우[蘇州]와 시안[西安]을 잇는 룽하이[隴海] 철도 연변에 자리잡고 있다. 인구 759,752(1990).
룽먼 석굴 (중국 석굴) [龍門石窟, Lung-men caves, 용문석굴]
중국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 남쪽 강기슭의 높은 곳에 있는 석굴.
이곳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 중국 석굴사원들이 모여 있다. 육조시대의 북위(北魏:386~536) 때에 건축을 시작하여 6세기와 당대(唐代:618~907)까지 산발적으로 공사가 계속되었다. 494년 북위가 수도를 평성(平城: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다이퉁[大同])에서 남쪽 뤄양으로 옮긴 후, 수십 년에 걸쳐 윈강[雲崗]에 석굴사원을 건축한 대역사를 본받아 시작한 것이다(→
윈강 석굴).
룽먼에 있는 북위 때의 석굴들은(유명한 구양[古陽] 석굴과 빈양[寶陽] 석굴 포함) 꾸밈새가 더욱 치밀하고 조상(彫像)이 더욱 복잡하며, 또한 단단한 돌에 가벼운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정밀하고도 우아하게 다듬어져 있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의 원형은 중국 학자들이 입던 의상이며 그 옷의 주름이 평평하게 조각된 몸체 위를 물결이 흐르듯이 덮고 있다. 이 양식을 윈강 양식(→ 북위조상)과 구별해서 룽먼 양식이라 부른다. 현장에서의 작업은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중 당대 3년(672~675)에 걸쳐 조영된 펑셴 사[奉先寺] 석굴은 룽먼 석굴 최고의 걸작이다. 한쪽면의 길이가 약 30m인 이 석굴의 뒤 벽면에는 약 10m 높이의 거대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양편으로 여러 불상 또는 보살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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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
뤄양[洛陽] 남쪽 약 14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과 동산(東山)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는 동굴 1,352,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
석탑 39,
불상 9만 7306체라고 기록(룽먼寺保管所)되어 있다.
석굴은 북위(北魏) 때 만들기 시작하여 수(隋)·당(唐)으로 이어지고
송(宋)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造營)되었다. 북위굴(北魏窟)이 있는 서산의 석굴군(石窟群)은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華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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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 | 등이 유명하며,
우수한 북위 불상이 많다.
또,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奉先寺洞)의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서, 협시(脇侍)인 보살상·나한상·신왕상(神王像)·인왕상 등과 함께 당(唐)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기술(造像技術)의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할 만하다.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동산의 간경사동(看經寺洞) 등은 모두 당대에 조영한 것이다. 동산의 북쪽에는 백낙천(白樂天)의 묘가 있다. 룽먼의 북위불은 윈강의 불상에 비해 조상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작풍에도 날카로움을 안에 숨긴 우려전아(優麗典雅)한 멋을 풍긴다.
불상이 가지는 유암(幽暗)한 표정, 당당한 체구, 정돈된 착의(着衣)와 상현좌(裳縣座), 힘차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나는 신선과도 같은 천인(天人) 등 모두 남조(南朝) 불상 작풍의 영향을 받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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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먼석굴 龍門石窟(용문석굴)
중국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윈강석굴[雲崗石窟]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이다. 뤄양[洛陽] 남쪽 약 14km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용문협이라고 하는 협곡이 있는데 협곡에서 내물이 졸졸 흐르고 기후가 알맞아 현지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암석체와 석질이 우량하고 조각에 적합하여 고대사람들은 벼랑에 석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낙양은 중국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의 하나로서 역사적으로 불교가 한때 흥성하였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후 첫 사묘가 이곳에 세워졌는데 그것이 바로 백마사(白馬寺)입니다. 백마사는 기원68년에 건설되였는데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후 궁전에서 세운 첫 불교사원입니다. 많은 종교파벌을 가지고 있는 중국에는 사묘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불교사에서 백마사는 그 특수한 지위를 공인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불교의 <조정>(祖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용문석굴은 감숙(甘肅)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과 산서(山西)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岡石窟), 중경(重慶)의 대족석각(大足石刻)과 함께 <중국 사대 석각예술보물고>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석굴은 최초에 기원471년부터 477년사이에 건설되였는데 그후 400여년 동안 계속 확장되여 나중에 남북길이가 약 1000m 나 되는 규모로 형성되었습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과 동산(東山)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동산의 간경사동(看經寺洞) 등은 모두 당대에 조영한 것이다. 석굴은 북위(北魏) 때 만들기 시작하여 수(隋)·당(唐)으로 이어지고 송(宋)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造營)되었다. 동산의 북쪽에는 백낙천(白樂天)의 묘가 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입구
석굴 들
석굴 모습
석굴 불상 전면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는 동굴 1,352,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 석탑 39, 불상 9만 7306체라고 기록(룽먼寺保管所)되어 있다.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奉先寺洞) 조각군은 완미한 예술통일체입니다.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서, 협시(脇侍)인 보살상·나한상·신왕상(神王像)·인왕상 등과 함께 당(唐)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기술(造像技術)의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할 만하다. 북위굴(北魏窟)이 있는 서산의 석굴군(石窟群)은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華洞) 등이 유명하며, 우수한 북위 불상이 많다. 고양동은 용문석굴에서 제일 먼저 개척된 동굴로서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양동에는 수많은 불대조상이 있습니다. 이런 불대조상에는 그당시 불상을 만든 사람의 이름과 시간, 원인이 기록되여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중국서예와 조각예술을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로 되고 있습니다. 빈양중동은 기원4세기 석굴예술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동굴은 선후하여 24년동안에 걸쳐 건설되였는데 건설주간이 제일 긴 동굴입니다. 이 동굴에는 11존의 대불상이 있습니다. 그중 석가모니의 불상은 얼굴형상이 청수하고 안색이 태연합니다. 석가모니불상의 앞에는 두 마리의 형상이 생동하고 자태가 웅장한 돌사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룽먼의 북위불은 윈강의 불상에 비해 조상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작풍에도 날카로움을 안에 숨긴 우려전아(優麗典雅)한 멋을 풍긴다. 불상이 가지는 유암(幽暗)한 표정, 당당한 체구, 정돈된 착의(着衣)와 상현좌(裳縣座), 힘차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나는 신선과도 같은 천인(天人) 등 모두 남조(南朝) 불상 작풍의 영향을 받았다
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