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편찬 경위 '고종실록'은 본문 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망국 이후인 1927년 4월에 시작되어 1935년 3월에 완료되었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일제 통치 기간으로 1927년 '이왕직'을 설치한 뒤 임시 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을 배치하고, 실록 편찬에 필요한 자료인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기록 2,455책을 경성제국대학에서 빌려 자료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필요한 자료가 확보되자 1930년 4월에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역대 실록 편찬의 예에 따라 실록 찬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편찬 초대 위원장은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였으나, 그는 1932년 7월 이왕직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이왕직의 예식과장이던 이항구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실록 찬술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실제 편수의 총책임은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가 맡았다. 편찬실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밑에 편찬에 필요한 공·사의 문서를 수집하며 사적의 조사 및 관계자로부터의 사실 청취의 일을 맡는 사료수집부, 각 사료에 기초하고 역대 실록에 준하여 편년체의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편수부, 편집된 원고에 대하여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고 문자 장구를 장리하여 실록 원고를 작성하고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는 감수부의 3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만은 다시 1, 2, 3반으로 분리하고 각 부에는 위원, 보조위원, 서기를 두었다. 한편, 위원장 직할로 서무위원, 회계위원을 배치하고 편찬실 서무는 보조위원서기가 담당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기술, 체제, 편찬을 위한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작업 원칙을 세우고 <고종실록>과 <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은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들의 간여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편찬 각 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가 편찬 총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에 의해 감색, 감증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또한 실록 원고는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록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그 밖의 관찬 기록들에서 중요한 내용을 채록하였기 때문에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 (1852-1919. 재위 기간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만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유전조례', '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 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 개혁 등으로 세도 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 정책과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 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보다 2개월 먼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에 '신미양요'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셔먼 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 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 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 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비 민씨가 대신들과 유럽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 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개항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단을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한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서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전락시키는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인으로 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신원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반 민간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 부대를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의 신변 위협은 더욱 심화된다.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년 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고종의 밀서에 호응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 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때에 전국 각지에 그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한 7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6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미금시에 있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
* 고종 시대의 세계 약사 고종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일본의 팽창이 뚜렷해져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중국 내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족의 독립운동이 전개된다. 한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해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신민 정책을 수립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수하고, 내부적으로 남·북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감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