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진실
서둘러 출근하는 길이었다. 학교 담장에 기대어 핀 선홍색 장미가 돋보였다. 저 아름다운 장미도 담장이 없었다면 홀로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간밤에 할머니가 아닌 엄마 집으로 간 아이가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이 아이 앞에 펼쳐질 일을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교문을 막 들어서는데 엄마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는 어젯밤 나무 밑에서 자느라 심한 몸살이 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벌써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도 맞추기 전에 아이와 엄마를 만나지 않도록 하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됐느냐며 무섭게 쏘아붙였다. 나의 잘못으로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한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할머니 집으로 가면 안 되겠느냐며 사정했다. 할머니한테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오후에 할머니 집에 가서 얘기하기로 약속했다. 돌아서서 가는 할머니의 걸음이 예전과는 달리 처진 모습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아이 아빠는 서울에 살면서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세 가족이 살기에는 아주 큰 집이었다. 그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거실에 놓인 프리지어와 안개꽃이 무거운 집안의 공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를 펴고 누워 있었다. 원래 천식이 있어서 신경을 쓰면 잦은 기침과 가래로 힘들다고 했다.
겨우 일어나려는 할머니를 다시 눕혀 드렸다. 할머니는 나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동안 나의 눈에 비친 그녀는 눈물도 없고 억센 할머니였다. 부자 할머니로 살면서 통이 크고, 무슨 일에든지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여장부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약해진 할머니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를 보며 그녀에게도 ‘틈새가 있었구나’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속으로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그녀의 행동에 반응하였다. 할머니는 뜻밖에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아서 억척같이 돈을 모았다. 결혼하고 나서 조그만 가내공업을 시작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늘 불안하였다. 남편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마음이 허하고 슬펐다. 남편의 배려로 어렵게 입양을 한 것이 지금의 아이 아빠였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을 키우면서 가정에 웃음의 기운이 돌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부러운 것이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지만, 아이 아빠는 그녀의 요구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애써도 아들은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자랐다. 부지런하고 눈썰미가 매서운 그녀에게 아들의 소심함과 빈둥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에게 공장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들이 결혼하면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생기고, 성실해지리라는 기대를 했다.
마당발인 그녀는 아는 친구를 통해서 지금의 며느리를 소개받았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아들이 걱정되었지만, 워낙 며느리가 똑똑하고 싹싹해서 가정이 평안하고 아들이 가장 노릇을 잘 할 줄 알았다.
4년을 못 넘기고 아들이 이혼할 때는 하늘이 무너졌다.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고 살았는데, 네 살짜리 손자를 남겨놓고 돌아선 며느리를 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다행히 남겨진 손자는 그녀에게 살아갈 소망이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줬다. 부모의 울타리가 없는 집이지만, 할머니의 담장 역할로 훌륭한 아이로 자랐다는 주위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아이의 담장 역할을 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할머니 때문에 아이 버리겠다.’ 혹은 ‘저렇게 아이를 키워서 사람 되겠냐.’며 입을 모았다. 이 말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두고 보자는 그녀의 뚝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를 이을 유일한 손자를 위해 4년 동안 울타리가 되어주고,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며 키웠다. 그러나 아이는 매일 지칠 때까지 울었다. 잘 먹지도 않았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고, 친구와 싸워서 집에 온 날이 더 많았다. 엄마에게 보낼까도 수십 번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 건강까지 잃으며 돌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 키우는 일이었다며 휑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내내 맴돌았다. 더 늦기 전에 아이의 슬픔과 분노를 녹일 방법이 있기는 하느냐고, 손자를 아이답게 키우기 위한 담장의 역할은 누가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할머니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홀로서기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는 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