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바람이 분다. 언제나 바람처럼 떠나고픈 마음을 누구나 일게다
그러나 땅끝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역사의 바람은
면연히 흐르는 황토색 황하의 떨리는 음성과
태항산맥의 험준한 고도에서 흐르는
뜨거운 사람 냄새와 열정을 감싸안고
이곳 면산으로 불어오고 있다.
둥둥 가슴의 북이 메아리친다.
내려다보는곳에선 저멀리 아득히 보이는 대지에
생명이 잉태하는 푸르름에 존경스러움을 보내며
법고소리는 대라궁의 온 경내를 울리며
이곳 면산을 왔다간 신라의 슬픈 육두품 최치원님을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라궁
아침 식사를 마치고 즉시 대라궁으로 떠났던 우리는
대라궁관광을 마치고 다시 윈펑수위안(운봉서원雲峰墅苑)으로 돌아왔다.
지나가면서 와룡빈관이라는 표지는 보았는데
도통 건물이 보이질 않아 이상하게 여겼다.
와룡빈관
알고보니 이 호텔이야 말로 우리가 지나는 길 아래
제비집처럼 대롱대롱 메달린 아찔한 빈관이다.
우리가 다시 호텔로 돌아 온 것은
우리 숙소인 운봉서원 옆에 있는 윈펑스(운봉사雲峰寺)를 보기 위해서 였다.
해발 2000여m 절벽에 세워진 공중 호텔,
운봉서원은 면산 관광의 하이라이트다.
고요한 협곡에서 하루를 지내다 보면
잠시 신선이 된 듯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이 호텔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절벽 위에 매달린 것처럼 건설되었다는 점 때문인데
이 객실을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또한 이 호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운봉서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건
운봉사(雲峰寺, 윈펑스) 높은 절벽에 걸려 있는 아슬아슬한 잔도이다.
다음으론 운봉서원의 엘리베이터 통로가 인상적이다.
운봉호텔 측면
건물 외면에 하늘색으로 돌출하여 수직으로 치솟은 모습이
양 옆으로 매달린 객실의 모습을 압도한다.
투숙객이나 호텔 식당 이용객이 아니면
별도의 엘리베이터 이용료를 내야 한다고 한다.
관광지 중에 호텔이 그지역 대표명소인 것처럼
유명세를 타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운봉호텔
그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명소가 되는 것 또한 드문 일이다.
호텔 이름을 보면 중국도 참 자긍심이 강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같으면 모두 호텔이라고 외래어 표기를 할 것 같은데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숙소가 주점, 반점, 빈관 등의 중국식 한자 표기를 고집한다.
여사나 초대소 등의 숙박 시설 이름 이외에도
서원이나 객잔 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10층에 또 로비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이 호텔에는 로비가 2개나 된다.
운봉호텔 10층로비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한 구조이다.
10층으로 올라 호텔 건물 밖으로 나가니 바로 운봉사로 통하는 편한 길이다.
엘리베이터라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면 저 밑에서부터
120계단을 고생께나 하며 올라왔을 터인데 벌써 반 이상은 올라온 셈이다.
가마를 타고 운봉사에 오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마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다.
우리의 송회장께서 재미로 가마를 타고 올라 오셨는데
역시 저런 분이 계셔야 가마꾼들도 생계를 유지할듯 싶다. ㅋㅋㅋㅋㅋ
휴~ 내가 탔으면 가마꾼들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따거회 송준엽회장이 가마를 타 보고있다.
그래서 가인님도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운봉사를 보았다고 하지 않던가?
운봉사 절의 입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양쪽에는 범종각과 법고각이 있고 그 밑으로는 계단이 가파르게 펼쳐져 있다.
계단은 모두 120계단이다.
이계단의 숫자는 108 번뇌의 108개와 십이지신을 뜻하는 12개를 합한 숫자라고 한다.
운봉사서 내려다 본 120계단
절벽 동굴에 지어진 불교사원 윈펑스(운봉사雲峰寺)는
당태종 시대에 서안의 가뭄을 해결했던 고승이 있던 곳으로
그 이야기는 잠시후에 하자.
동굴 안에서 본 전경
동굴 안쪽에서 내려다보는 사원과 면산의 풍경이 가히 절경이며
간절한 기원이 깃든 절벽 위의 종들도 이국적이다.
주전인 공왕보전(空王寶殿)으로 드는 길은 좁다.
‘만고유방(萬古流芳, 영원히 이름을 남김)’이라는 비석 옆을 간신히 통과해 들어간다.
주전 앞에는 대형 향로가 있어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도록 되어 있다.
중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향을 팔고 있는 사람은 배우로서 밤에는 강희제(康熙帝) 황제로 분하여 공연을 하고
낮에는 향을 팔고 있다고 한다
다시 일주문 앞으로 오니
‘면산운봉사기우공덕대사기(綿山雲峰寺祈雨功德大事記)’라는 편액 밑으로
내력과 그림을 그린 벽면이 나오는데
앞서 말한 당태종 관련 기우 일화를 적은 글인 듯하다.
이곳 운봉사가 유명한 것은
공왕의 진신사리를 모셔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왕은 이곳에 계셨던 고승인 지초스님을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당태종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태종 14년에 서안 일대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면산에만 풍족한 비가내려 농사가 잘되니
사람들은 운봉사에 계신 고승 지초스님이 때문이라 했다.
신하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이 면산의 지초스님께 비를 구하자,
지초스님은 제자에게 명하여 쌀뜨물을 서남방향으로 뿜으니,
장안 일대에 단비가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1년이 지나 지초스님이 입적을 하시게 되었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모르는 당태종이
군신들을 이끌고 지초스님을 만나려 면산에 도착했다.
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의 원적을 알리자 당태종은 깜작놀라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念佛)이다.”라고 탄식했는데,
이때 면산 운봉사 절위 하늘에는
‘공왕고불(空王古佛)’이라는 네 글자와 지초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태종은 이를 보고 지초스님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했다는 내용이다.
공왕보전에서 절벽 위로 건설된 나무 잔도를 따라 끝까지 걸으니
‘배일배월단(拜日拜月壇)’이라는 참배 장소가 나온다.
절벽에 달린 종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내 풍경이 일품이다.
표석을 보니 역대 고승들이 참선을 하던 곳이란다.
중간에는 아들을 원하고 복을 빈다는 동굴도 있고 몇 채의 다른 전각들도 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절벽에 달아 놓은 작은 종들이다.
붉은 천에 무언가를 적어 매달아 놓은 것인데 소원을 빌기 위함이란다.
종을 달아 소원을 빌었다.
이것 또한 유방과 조조의 기량을 갖춘인물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당태종이 이곳에 와 절벽에 종을 매달고 소원을 빌었는데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이 절벽에 종을 달면 효험이 있다고 믿는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종을 달기 위해서는 우리 돈 약 40만원을 지불해야 한단다.
그리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시 종을 걷어 들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또 돈을 지불해야 한단다.
이를 보면 소원을 빌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예전에는 이 쇠줄을 타고 올라 정과사로 갔다고 한다.
운봉사에서 옆길로 한 100m정도 가면 갈지(之)자 모양의 잔교가 나온다.
무척 아슬아슬하고 오금이 저린 가파른 잔교이지만 이곳을 지나야
정궈스(정과사正果寺)로 갈 수가 있다.
정과사로 가는 잔도
물론 이 계단을 따라 오르기 힘든 사람들은 다음 모퉁이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쉽게 정과사로 갈 수있다.
.
정과사로 가는 엘리베이터 타는 곳
이 엘리베이터는 암벽 사이를 180미터 뚫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이번에는 3층에서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의 엘리베이터는 층수의 개념이 없는 것같다.
암벽 속으로 180m나 올라갔는데 3층이라니....
정과사는 이곳 면산에서도 이름이 있는 곳이다.
정과사로 가는 잔도
갈지자의 잔도를 어렵게 걸어올라가면 커다란 건물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곳이 정과사인줄 알았다.
그러나 정과사로 가려면 다시 산을 넘어오면 엘리베이터와 만나게 되고
조금 걸으면 정과사라는 방향표시판을 만나게 된다.
정과사 일주문
여기서 좁은 산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일주문이 보인다.
이 일주문을 들어서며 우리 자유주의 가이드를 찾았으나
다시 보이지를 않는다.
아! 그래서 다시 나는 마음의 눈으로 등신불을 만나기로 한다.
마음으로 마음의 눈으로
슬 기 샘
정과사에 모셔저있는 12분의 등신불.
운봉사에 계신 공왕스님의 제자들이라고 한다.
이곳에 계신 12등신불은 스님이 8분이고 도인이 4분이다.
모두 살아서 성불하신 부처님들이다.
김동리선생의 '등신불'에서 처음 그 뜻을 알게되었지만
실지로 이번에 처음 볼 수 있다니 기대가 되며 가슴이 뛴다.
등신불이란 자신의 발원에 의하여 열반 당시에 앉아서 열반에 들게되고
그대로 독 속에 참숯과 함께 넣어 미이라 형태로 만들고
진흙을 입혀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부처님을 말한다.
정과사에 모셔진 등신불
따라서 열반 당시의 표정이나 옷차림이 그대로 살아있다.
드디어 등신불이 모셔진 주전에 들게 되었다.
이곳부터는 절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이곳에 올린 등신불의 사진은
정과사 참고문헌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사실 사진을 찍으라고 해도 경건한 분위기에 감히 카메라를 들이 댈 수도 없다.
더구나 등신불은 주전 정면이 아니라 뒷편 좁은 공간으로 돌아들어가야 한다.
정과사에 모셔진 등신불
이곳에 8분의 스님 등신불이 횡으로 늘어서 있다.
안내하던 스님이 가까히 다가가 보라고 한다.
웬지 조금 으시시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스님이 다가오더니 한 등신불 앞에서 손톱을 가르킨다.
눈치로 자세히 보라는 줄은 나도 알기 때문에 가까히 간다.
손톱이 겉으로 들어나 있다.
다음 등신불에서는 입고계신 가사(袈裟)의 자락이 밖으로 노출된 것도 있고
이마가 보이기도 해서 마치 금시 조성한 느낌이 나게한다.
정과사에 모셔진 등신불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다.
스님과 도인들의 표정이 틀리다.
스님 등신불의 표정은 모두 인자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이라
정말 깨달음을 얻고 득도한 표정이라 매우 곱게 생기셨는데,
도인들의 표정은 매우 근엄하고 경직된 모습이다.
등신불의 생전 치적이 적혀있다.
다 같이 득도해서 성불한 분들인데 왜 그런 차이가 날까? 등신불을 본 탓인지 우리일행은
불가사이한 일일까?
아니면 그렇게 조성했을까?
정과사 전경
전각앞에는 긴 회랑같이 생긴 건물이 있고 관람객이 앉아 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벽면에 12분의'포골진신'(중국에서는 등신불을 이렇게 부른다고 함)
이 분들의 살아생전에 지은 글과 이력 등이 적힌 석판이 걸려있다.
"저기 저 탑을 올라가 보지 않겠습니까?"
영응탑
일행 중 한명이 나에게 주전 옆에 위치한 영응탑을 가자고 했지만
나는 몹시 피곤함을 느껴 먼 발치서 보며 즐기기로 했다.
이 영응탑은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가파른 계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과사에서 내려 본 모습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 대라궁과 운봉사, 그리고 정과사까지 감상한 우리는
다시 운봉서원으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분주로 몸을 풀고 있는 중여동 여행꾼들
으시시한 정과사의 포골진신을 본 탓인지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 전부터 산시성(山西省)펀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의
중국8대 명주인 고급 분주(汾酒)는 아니라도 분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호텔서 파는 동양화는 대략 2만원 선이다.
역시 점심시간에도 동양화 감상시간은 여전히 진행되고
맛없는 탕국은 우리 상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호텔 음식치고는 글쎄?
2011.11.1
면산 운봉사,정과사,개공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