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을 저지하는 기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기도의 세 방면
우리의 기도에는 세 방면이 있다. (1) 우리 자신, (2)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하나님, (3) 우리의 원수 사탄. 참된 기도는 이 세 방면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필요나 궁핍한 것이 있거나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도한다. 기도가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채워 주는 것은 사실이나 참된 기도 안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이익을 구해야 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영광과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행정적인 권위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직접적인 유익을 얻기도 하지만, 영적 실제에서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그것이 그분의 자녀들의 요구를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간절하고 위대한지를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나큰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응답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낸다. 그분은 그분의 뜻에 합하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간구하는 자는 우리요, 간구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공적인 기도에서는 양자(兩者)가 다 유익을 얻는다. 간구한 자는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간구를 받으시는 분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는 하나님의 충성된 자녀들로서 기도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 안에서의 이 두 방면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만 유의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직 불완전하다. 분명한 효력이 있었더라도, 우리는 아직 기도의 참뜻을 통달하지 못했으므로 그 기도에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실패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성도들은 기도가 단지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뜻에 절대적인 관계가 있음을 잘 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 간구는 하나님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더 나아가 셋째 방면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과 관련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반드시 손상을 입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잘 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기 때문에(요일 5:19), 사탄은 ‘이 세상 임금’(요 14:30)이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팽팽하게 맞선 두 세력을 볼 수 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승리를 얻으셨다. 그러나 천년왕국 이전인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뜻과 관심을 반대하는 사탄의 대적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면 자동적으로 원수는 무엇인가를 잃는다. 하나님께 속한 자인 우리가 얻은 것의 총계(總計)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의 총계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의 총계는 곧 사탄이 빼앗긴 것의 총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괴롭히고, 억압하고, 발 디딜 틈조차 주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사탄의 속셈이지만, 이 속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 하나님의 보호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사탄의 계획은 좌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사탄의 악한 뜻을 뒤집으시고, 그 결과 사탄은 그의 계획대로 우리를 괴롭힐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도에서 얻는 만큼 원수는 잃어버린다. 우리가 얻은 것과 주님의 영광이 증가하는 만큼 사탄은 잃어버린다. 한편이 얻으면 한편은 잃고, 한편이 잃으면 한편은 얻는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영광과 뜻뿐 아니라 셋째 방면, 즉 원수인 사탄에 대한 것도 주의해야 한다. 이 세 방면을 다 주의하지 못하는 기도는 피상적이고 무가치한 것이며 잘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표면적이고, 불합리하고, 마음에도 없는 기도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기도의 세 방면에서 어떤 면으로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감정적이어서 자신의 이익에 대해서만 열심히 부르짖는다. 그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이익이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필요와 궁핍함을 채우는 것뿐이다. 주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소원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그는 만족한다.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사탄에게 손해를 끼치는 방면은 더욱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다 육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에는 영적인 자녀들도 많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주님이 그들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는 응답만으로 만족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뿐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기도의 응답을 기대한다. 그들은 그들이 기도한 대로 달라고 고집 부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둔다. 여기서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가, 기뻐하시지 않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행정, 계획에 대한 그분의 뜻과 일치되는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 그 자체뿐 아니라 그 기도에 관련된 주님의 광범위한 일들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까지의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 방면만을 다루는 기도이다.
그러나 셋째 방면, 즉 사탄에 대해 생각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히 적다. 참된 기도의 목표는 개인적인 유익(간혹 이 방면은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탄의 손상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의 셋째 방면까지 주의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이익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사탄을 손상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를 최고의 것으로 여긴다. 그들이 기도에서 바라는 것은 원수(怨讐)를 손상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야(視野)는 그들의 환경으로 가려져 있지 않아서 멀리, 전세계의 하나님의 역사와 뜻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나 사탄의 방면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개인적인 방면을 아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사탄이 손해를 볼 때에는 반드시 그들도 유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단계는 그의 기도가 어느 방면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
누가복음 18장의 비유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타난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기도의 세 방면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언급된 세 사람, 즉 재판관, 과부, 원수에 대해 주의하기 바란다. 재판관은 하나님(소극적인 면에서)을 대표하고, 과부는 오늘날의 교회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며, 원수는 사탄을 대표한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재판관과 과부의 관계에만 주의한다.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이지만 과부가 그를 귀찮게 하므로 원수를 갚아 준다.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 하나님은 이 재판관처럼 부덕(不德)한 자는 아니니까 우리가 기도만 하면 신속히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비유를 보고 깨닫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하다. 생각해 보라. 만약 원수가 없다면 그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과부는 원수의 억압 때문에 재판관을 찾게 된 것이다. 특히 그 과부가 재판관에게 한 말을 볼 때, 이 비유에서 원수의 역할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성경에는 간단하게 “내 원수를 갚아 주소서”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짤막한 구절에 얼마나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여기에는 과부의 가장 괴로운 형편이 담겨 있다.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은 원한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원한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다름 아닌 원수에게서 온 것이다. 이 말은 과부와 원수 사이의 깊은 원한을 나타내고 있으며, 과부가 원수에게서 받은 심한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그 과부가 재판관 앞에 호소한 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과거의 경험이며 현재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녀가 구한 것은, 그 원수를 재판하여 그녀에게 악하게 행동한 원수를 갚아 달라는 것이다.
어느 면으로는 이 원수를 이 비유의 주역(主役)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없다면 재판관이 법으로 재판해야 하는 소동도 없을 것이고, 그 과부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 원수가 없다면 이러한 비유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야기한 자가 바로 그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모든 혼란과 고통을 조장한 장본인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 이 비유에 나타난 세 인물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재판관
이 재판관은 어떤 도시의 유일한 권위자이다. 그는 온 도시를 통치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한다. 비록 사탄이 잠시 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는 억지로 세상을 점령한 반역자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 세상의 임금을 내쫓으셨다. 주님은 그분의 죽음으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골 2:15)하셨던 것이다. 아직도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있는 것은 완전히 불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을 정하셨는데 그날에는 왕국이 회복되어 그분의 아들이 천 년 동안, 또한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이다. 그때가 이르기 전까지 하나님은 사탄이 활동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만, 이 세상을 통치하는 고삐는 여전히 그분이 쥐고 계신다. 사탄은 사탄에 속한 자를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께 속한 자를 핍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잠깐이다. 잠시 후면 사탄은 완전히 결박될 것이다. 사탄이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은 어떤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허락하신 한계 밖에서는, 사탄은 아무런 권세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을 우리는 욥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이 재판관이 온 도시를 통치하듯이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재판관의 통치 아래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을 괴롭혀 원수가 되는 것이 큰 불법인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사탄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도 불법이요, 극악한 일이다.
이 재판관의 인품은 그 자신의 말로 알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하니 그는 부덕(不德)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과부가 끊임없이 와서 복수(復讐)를 해 달라고 성가시게 조르므로 결국 원수를 갚아 준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소극적인 의미로 이 재판관을 인용하셨다. 하나님은 이 비유의 재판관처럼 부덕한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은혜가 충만한 아버지시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신다. 재판관과 과부의 관계에서와 같이 그분과 우리 사이에도 어떠한 관계가 있다. 이 비유에서의 재판관도 끊임없이 조르는 과부의 원수를 갚아 주려고 할진대, 그렇게 인격적이고 친밀하고 우리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시지 않겠는가? 부덕한 재판관도 과부의 끊임없는 부르짖음 때문에 원수를 갚아 주는데, 우리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위하여 역사하지 아니하시겠는가? 결국 그 과부가 재판관의 승락을 얻은 것은 그녀가 끊임없이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판관의 부덕함을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우리의 구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 그 비유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는 말씀을 포함시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은 비교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과부가 요구를 관철(貫徹)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간구에 의존한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구하는 것이 넉넉히 받아들여지지 않겠는가?
과 부
과부는 의지할 사람이 없다. 과부라는 그 말이 그녀의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그녀가 의지했던 남편이 죽게 되어 이제는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적절히 나타내 준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셨다. 육신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처럼 의지할 곳이 없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고, 핍박과 멸시를 받는 나약한 자들이다.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합법적인 권리라도 주장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람들의 멸시와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분깃이며, 주께서 우리 앞에 놓으신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저항과 불평 한마디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더 좋은 대우를 기대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볼 때, 그 과부는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임을 잘 나타내 준다.
원 수
그 과부에게도 원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원수가 있다. 그 원수는 사탄이다. 사탄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원수’이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은 “너희 대적(원수) 마귀를 … 대적하라”고 말한다. 마귀는 곧 우리의 원수이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원수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재판관인 하나님 앞에 나와 그를 고발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와 마귀 사이에 있는 원한의 근원을 자세히 알려면 배후(背後)에 있는 긴 역사(歷史)를 찾아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원한은 에덴 동산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사탄이 인간을 해(害)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마음에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도 원한을 두셨다. 여기 창세기에 언급된 여자의 후손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과 사탄의 관계는 영원한 원수의 관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 편에 서 있다. 따라서 주님의 원수는 곧 우리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원수인 사탄도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고, 소홀히 맞서지도 않을 것이다. 사탄 역시 주님을 원수로 여기므로 주님의 제자들을 자기의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사탄의 자녀요(요 8:44), 사탄은 자기의 자녀를 좋아한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과 연합되었으므로 주님을 미워하는 사탄에게는 우리 역시 미움의 대상이다.
이러한 원한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이 원한은 아주 깊은 것이어서, 사탄은 과부처럼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힘을 다한다. 우리가 그에게 당하는 괴로움은 너무 크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괴로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괴로움이 보상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손해를 보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직도 사탄의 횡포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유감스런 일인가!
사탄과 성도들
원수가 그 과부를 괴롭힌 것처럼 사탄도 오늘 성도들을 괴롭힌다. 우리가 그에게 당한 괴로움을 그 누가 알겠는가? 물론 그는 우리를 괴롭힐 때 절대로 자신을 직접 나타내지 않는다. 그의 모든 역사(役事)는 사람이나 어떤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 숨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움직이도록 조종한다. 사탄이 처음 공작을 꾸밀 때 자신을 뱀의 모양으로 감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는 자신을 감춘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실제의 원수를 잘 알지 못한다. 어떤 때 사탄은 성도의 몸을 약하게 하여 병고(病苦)를 당하게 한다(행 10:38). 그러나 성도들은 치료의 문제나 과로했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 배후에 사탄의 공작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이 사탄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어떤 때 그 원수는 이 세상 사람들을 꾀어 성도들을 핍박한다(계 2:10). 그래서 성도들은 그 이웃이나 친구,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서까지 괴로움을 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이 그들을 꾀어 충동질한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 악한 자는 때로 환경 가운데 역사하여 성도들을 어려움과 위험에 몰아 넣는다. 그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오해를 받게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갈라놓아 비탄(悲嘆)과 눈물에 빠지게 한다.
또 어떤 때 그 원수는 성도의 물질적 공급을 끊어 놓고 궁핍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영을 억눌러 답답하게 하고, 안식이 없게 하고, 목적이 흐려지게 한다. 혹은 성도들의 생각을 혼돈시켜 자유로 선택할 힘을 잃게 하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또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불어넣기도 하고, 감당 못할 무거운 짐을 지게도 하며,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지치게 한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결하고 난잡한 생각을 불어넣어 사탄에 대한 대항을 약화시키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한다. 참으로 사탄의 소행을 다 열거하기는 불가능하다. 간단히 말해서, 그 원수는 성도들을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괴롭히고, 죄에 떨어지게 하며, 손실을 입게 하는 짓이면 무엇이든지 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탄의 손에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사탄의 공작임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일을 우연한 일로 여기거나, 그 원인을 어떤 사람에게로 돌린다.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 같은 일에 악한 자의 궤술(詭術)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우연한 말속에 마귀의 음모(陰謀)가 얼마나 무섭게 도사리고 있는지, 인간의 행동 속에 원수의 사악(邪惡)한 책략(策略)이 얼마나 많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원수를 분별하라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원수를 분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원수가 누구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장본인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괴로움이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에게서 괴로움을 받을 때 그 혈과 육(肉)의 배후에 사탄과 어둠의 권세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의 배후에 도사린 사탄의 책략(策略)으로부터 하나님의 일을 분별해 내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영을 훈련해서 영적인 것을 더 밝히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불꽃 같은 눈앞에 사탄의 은밀한 공작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우연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발생되었다고 생각하는 일에도 원수의 공작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사탄이 도처에서, 모든 일에서 우리를 좌절시키고 괴롭힌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를 괴롭히는 자가 사탄인 줄도 모르고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던가! 우리는 사탄의 간교함에 대해 분노를 느껴야 한다. 사탄에 대한 우리의 원한이 너무 깊어지지 않을까 겁낼 필요가 없다. 승리를 앞에 두고, 우리는 사탄을 단호히 대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의 권세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탄에게서 당한 괴로움은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한이다. 그는 우리를 괴롭힐 권한이 없으면서도 우리를 괴롭혔다. 이것은 분명 불법이다. 이 원한을 갚지 않고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한을 풀어 달라는 부르짖음
이 과부는 많은 고통을 당하고 난 뒤 재판관에게 가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구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재판관에게 가서 탄원(歎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재판관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고후 10:4), 우리는 사탄이 휘두르는 혈과 육의 도구에 대해 세상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그것들을 가볍게 여기는데, 이는 그것들이 마귀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서, 육(肉)의 병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럴 뿐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탄에게 먹히고 만다. 영적인 전쟁은 오직 영적인 병기로 싸워야 한다. 영적인 병기는 에베소서 6장에 기록된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8절에 기록된 기도이다. 사실 우리는 원수를 갚을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원수에 대한 가장 좋은 공격 무기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방어선을 지킬 수 있고, 원수를 공격할 수 있으며, 그의 계획과 작전과 전력(戰力)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약한 여자인 그 과부는 사나운 악한 자인 그 원수를 이길 수 없으므로, 그녀는 그녀 혼자서 그 원수와 싸울 수 없음을 잘 알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원수를 고발하고 그분께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애쓰다가 사탄의 화전(火箭)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로 사탄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탄을 심판하고 벌하여 원한을 갚아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사탄을 저지하는 기도
성경은 사탄을 저지하는 기도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한 기도를 훈련하기 위하여 다음의 구절들을 보기로 하자.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최초로 악한 짓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벌하고 저주하셨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그 저주에서 하나님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낼 것임을 분명히 예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에게서 고통을 당할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함으로써 그에게 결정된 형벌을 이용하여 그의 허(虛)를 찌를 수 있다. “오 하나님! 사탄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그를 다시 저주하소서. 당신은 에덴 동산에서 이미 그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를 다시 저주하시고 그를 십자가의 능력 아래 두소서. 그를 묶으소서.”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즉시 곧 우리를 해할 용기를 잃고 만다.
마가복음 1장에서 주님이 귀신들을 내쫓으셨을 때, 주님은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람들을 통해 오해의 말이나 난폭한 말을 할 때, 우리는 주님께 그들의 입을 막아 그의 말함을 허락하지 마시기를 구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탄이 청중을 꾀는 것을 막아, 청중이 의심을 품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않도록 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자 굴속의 다니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때의 기도는 참으로 효력이 있었다. “오, 주여! 사자의 입을 막으소서! 그가 당신의 백성을 해(害)하지 못하게 하소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기도에 관해 또 다른 말씀을 공급해 주신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절). 여기의 강한 자는 사탄이다. 사탄을 이기려면 먼저 우리는 그를 묶어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 강한 자를 묶어 우리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탄을 묶어 힘을 잃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먼저 우리가 기도로 사탄을 묶는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하다. 우리는 항상 “주여, 강한 자를 묶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우리는 마귀의 일을 분별하는 즉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오, 하나님! 당신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일을 멸하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지금 또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그의 일을 다시 멸하소서. 우리의 일을 교묘히 조종하는 그의 술책을 멸하시고, 우리 환경에서 그의 책략(策略)과 그의 모든 일을 멸하소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직접 당면하고 있는 환경에 대해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사탄이 우리 안에서, 가정에서, 직장이나 학교에서, 혹은 온 나라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에는 바로 그 방면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일을 멸하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유다서에는 천사장 미가엘이 사탄에게 선포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9절). 이 말을 듣고 사탄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주께서 원수를 꾸짖으시도록 간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 그러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꾸짖으시기를 기도하면 그분은 꾸짖으신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사탄을 꾸짖으신 후에는,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는 원수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주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을 때 그것들은 주님의 꾸중을 듣고 즉시 잔잔해졌다. 주님의 꾸중은 사탄에게도 똑같은 효력을 발한다. 시편을 보면 주님의 꾸중이 얼마나 강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시 18:15).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시 76:6). “그것이 소화(燒火)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꾸중)을 인하여 망하오니”(시 80:16).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시 104:7).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시 106:9). 이 구절들은 모두 주님의 꾸짖음의 위력(威力)을 보여 준다. 주께서 사탄을 꾸짖으시면 그는 꼼짝도 못한다. 우리는 원수가 우리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 그를 꾸짖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인정(人情)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로 가심을 막았다.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23절)고 그를 꾸짖으셨다. 사탄이 우리의 친구나 친척들을 통해 인정(人情)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 할 때, 우리는 사탄이 우리 뒤로 물러가게 되도록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절). 악한 자가 언제 우리를 괴롭힐지 모르므로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한다.
주님은 정사(政事)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우리는 사탄이 날뛰는 것을 볼 때마다, 십자가를 근거로 그가 한번 더 부끄러움을 당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마귀는 이미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 첫 번째로 당한 부끄러움을 근거로 하여 주께서 그를 다시 부끄럽게 하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사탄은 부끄러움을 당할 때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며 그때에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오, 주여! 우리는 십자가의 근거 위에 서 있습니다. 사탄을 다시 한번 부끄럽게 하소서!”
기도의 지속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얼마나 오래 지속해야 하는가? 우리는 한 번의 기도로 그칠 때가 많다. 그러나 사탄을 공격하는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염려될 것은 없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비유(눅 18장)의 목적은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재판관은 정의(正義)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부가 자주 오는 것이 귀찮아서 원한을 풀어 준 것이다. 그가 혼자서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5)고 중얼거리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기도는 그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원수를 저지하는 그러한 기도는 특별히 필요한 때에만 하지 말고 꾸준한 마음가짐으로 계속해야 하며, 평상시에도 끊임없는 호흡처럼 영 안에서 지속해야 한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도는 늘 그치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우리의 원수를 고소(告訴)해야 한다. 그 원수는 우리를 밤낮 참소하는 자이다(계 12:10). 그가 밤낮 우리를 참소하는데, 어찌 우리가 밤낮으로 그를 고소하지 않겠는가?
완전한 보복은,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는 만큼 우리도 대적하는 것이다. 그 과부의 부르짖음은 그 원수가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 그녀의 원한이 풀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탄이 아직 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한, 그가 아직 무저갱에 감금되지 않고 불 못에 던져지지 않은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은 한, 그를 저지(沮止)하는 기도는 그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사 사탄이 실지로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질 때까지 우리의 기도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보이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마귀에게서 당한 괴로움은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그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적의(敵意)를 나타냈고, 우리의 영육(靈肉)에 극심한 괴로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기도하여 마귀를 저주하지 않는가? 우리가 일어서서 그를 하나님께 기도로 고소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원수 갚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나아가 원수를 고소하여, 오랫동안 억눌렸던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가? 주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기도로 마귀를 저지하라고 하신다.
기도의 효력
그러한 기도의 효력은 어떤 것인가? 그 효력은 두 번에 걸쳐 다르게 나타난다. 첫째로는 직접적인 효력이다. 우리가 사탄을 고소할 때마다, 그는 우리를 해치는 행동에 제한을 받는다. 시간이 경과한 후, 그는 다시 기회를 엿보지만 고소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감히 다른 악행(惡行)을 범하지 못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선포할 때마다 그 승리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실제가 된다. 우리가 원수를 저지하는 기도를 할 때마다 그의 공작은 주님에 의해 파괴되고, 그는 또다시 주님께 꾸지람을 듣는다. 우리가 한 번 더 기도하면, 사탄은 한 번 더 빼앗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한 번 더 들으실 때, 사탄의 이익은 한 번 더 상실된다.
그러나 이 효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님은 완전한 보복을 꾀하신다. 우리가 되풀이하여 기도할 때, 주님도 되풀이하여 사탄을 꾸짖고 멸하신다. 그러나 그것도 영 단번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탄은 일시적으로 저지당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결정적 패배를 당해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이것은 사탄의 최후의 멸망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사탄이 천년왕국 시대에 무저갱에 감금될 것을 알고 있다. 그 후, 그는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진다. 그때가 바로 성도들의 원한이 풀릴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마귀를 저지하는 기도를 많이 드려 우리의 원한이 영원히 풀리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때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귀의 일을 저지하시기는 하지만,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마귀를 완전히 추방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도들이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할 때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더욱 속히 이루어지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과부가 계속하여 탄원하지 않았다면 그 재판관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녀의 끊임없는 탄원이 원한 푸는 날을 단축시켰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8상). 마치 주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기도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항상 기도로 사탄을 고소할 때 하나님은 속히 갚아 주신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 사탄을 내어쫓고 그의 모든 권세를 빼앗으신다. 사탄을 고소하는 기도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재촉한다.
우리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신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한 단면에 불과할 뿐 전체적인 사실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역사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원칙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실 때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의 일에 동의하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그분과 동역할 사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분이 결정하신 뜻을 속히 이루신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녀들의 기도가 없다면 그분은 그분이 뜻하신 일을 결코 이루시지 않는다.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그 과부가 재판관에게 와서 탄원하지 않았다면 그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도들이 사탄에 대한 탄원을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시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과의 동역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사탄을 고소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성도들은 사탄에게 당하는 확실한 학대를 하나님께 고해야 하는데, 이는 이러한 고소만이 사탄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나 인자(人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하).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분의 백성들의 이러한 기도가 크게 부족할 것 같다. 그들이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탄을 하늘에서 내어쫓고 불 못에 던지는 일은 너무도 크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일축해 버린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고 하신 그 약속이 이십 세기가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내 기도로 하나님이 사탄을 끝내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그 비유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그분이 홀연히 오실 때 그 일에 대해 기도하는 믿음이 부족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을 저지하는 매우 보기 드문 그러한 기도를 드림으로 사탄의 지위와 권세를 잃게 하는 소수(小數)의 신실한 무리들이 될 수는 없는가?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이 유난히 더 발악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해서 그의 술책을 뒤엎어야 한다. 참으로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누가 즐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탄을 박살내는 기도를 드릴 것인가?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傷害)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시 35:1-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