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학 마지막 날.
-부제 방학숙제의 대란(大亂)
아아, 방학이 이렇게 짧다니..!
언제나 방학 말미에 느끼는 기분이지만 나는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엘.”
좀비 한 마리에 나타났다!! 라고 소리 지를 뻔 한, 세이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 세이. 너 얼굴이 왜 그래?”
다크서클이라고 읽고 안하흑월판(眼下黑月版)이라고 쓰는 검은 그림자가 세이의 조막만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이는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아아, 요즘 서류처리 하느라 잠을 잘 못자서 그럽니다.”
“설마, 방학 내내 이런 거야? 좀 쉬어야지! 그리고 클로네 족도 그래! 왜 너한테만 서류를 그렇게 맡겨놓는 거야!”
세이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나이트 분들도 다들 바쁘시거든요. 바쁘지 않은 건 왕 뿐이랄까. 왕을 제외하고는 제가 최고 결정권자이니 어쩔
수 없죠. 학기 중엔 중요 서류만 처리하고 방학 중에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다보니 이렇게 되더군요. 하하… 카밀 님도 그랬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걱정해 준다는 거, 의외로 기분 좋은 걸요.”
세이는 정말 기분 좋게 하하, 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피곤한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건 치료해줄 수도 없잖아!!!
하긴, 대륙 최고의 의원이자 약초인 클로네에게 치료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카밀.. 이라면 전에 말했던 네 사촌?”
“네, 어머니 쪽의 사촌입니다. 여러모로 뛰어난 그가 아직 이 환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다는 건, 내년이나 후년 쯤 입학 예정이란 거
겠죠?”
“너, 그를 많이 좋아하는 구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고 저를 많이 걱정해주는 사람입니다.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죠.”
처음으로 보이는 세이의 인간적인 모습에 나는 씩 웃으며 세이를 바라봤다. 세이는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엘, 우리 방학과제 있는 거 알죠? 다 했습니까?”
“응? 방학 과제?”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 아마 과목 별로 방학과제가 있을 텐데… 엘 설마 하나도 안한 건..?”
“아하하… 그, 그런 게 있었어?”
세이는 말 없이 책상으로 가서 뒤적뒤적하더니 파일철 하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냐하하하, 제군들. 방학 첫날! 날이 참 좋지? 그런 의미에서 나와 함께 포크댄스를...!!
이라고 시작하는 첫머리엔 엘뤼엔의 솜씨인지 검은 줄이 쫙쫙 쳐져 있었다.
-그래, 방학의 묘미는 방학숙제 아니겠어? 그러니까 과제를 내줄게. 자, 제군들이여. 나 카노스를 찬양하라, 냐하하하
역시 다음 줄에도 쫙쫙 쳐져 있는 검은 줄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때의 아버지 표정이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공통 과제
방학 중의 일과 중 가장 기억나는 일에 대해 표현하기(ex 그림, 글, 정령, 마법, 그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
룸메이트와 함께 여행 다녀오기. * 그 증거물을 반드시 챙겨오도록.
-과목별 과제 (클래스 별 과제)
역사 : 2학기 때 수업할 중세사 부분을 읽고 천자 이상 삼천 자 미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오기
행정 : 자신이 모 제국의 행정관료라면? 뒤의 첨부 자료 활용.
문학 : 고대사 시간에 배웠던 문학작품. “찜한녀석 사로잡기”의 역사적 관계를 관련 지어 고대사를 배경으로한 문학작품을 하나
써보자. (5천자 이상 만자 미만)
수리 : 3000문제 풀어오기.
미술 : 문학 과제를 만화로 그려보기.
마법이론 : 2서클의 실드 마법에 대한 연산과정을 최대한 짧게 정리해오기.
검술 : 자신의 이름으로 배정된 마법인형의 타격 수치를 2천으로 만들어놓을 것.
-이상. 담임과의 다섯시간 상담을 받고 세배의 과제를 하고 싶지 않다면 과제는 모두 완벽하게 해오길 바란다.
끄아악!! 이건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그만 지우시죠, 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이 넌?”
“아, 하나만 제외하곤 모두 끝냈습니다.”
“그게 뭔데?”
“룸메이트와 함께 여행 다녀오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유안은 아직 마계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엘 역시, 기숙사에 있는 시간이 짧으
니까요.”
“으윽, 미안. 세이.”
“아닙니다. 그보다 어서 과제를 시작하죠. 엘, 오늘이 끝나기 까지 대략 열다섯 시간 정도 남은 것 같으니까요.”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물론 새벽까지 포함한다면, 열 다섯시간이 아니라 스무시간이 남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날 도와주려는 세
이의 모습은 당장 침대에 누워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세이, 일단 한숨 자고 시작하는 건 어때?”
“엘은 지금 일어 나셨잖습니까. 설마, 더 주무시겠다고요?”
“날 잠보로 아는 거야? 너 말이야, 너!”
“아,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 얼굴 가득한 다크서클이나 좀 지우고 말하지 그래?”
“다크… 무엇이라고요?”
“아니 아무튼, 너 엄청 피곤해보여. 일단 나 혼자 하고 있을 테니까 좀 눈 좀 붙여.”
“하지만 여행은….”
“저녁에 가도 돼. 뭐 이 근처 탐험도 괜찮지 않아? 아카데미가 워낙 넓어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엘. 세시간 쯤 후에 깨워주세요.”
“아아,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깨워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푹 자고 일어나게 해야지.
일단 그나마 간단해 보이는 행정과목과 역사과목 그리고 수리과목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마법이론이야, 유안이 9서클 마법사이니
까! 게다가 나도 2서클 마법 쯤은 할 수 있다고!
사각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한 기숙사.
헹! 나도 한다면 하는 몸이라고! 어느 새, 세 개 다 끝낸 나는 슬며시 세이를 돌아봤다. 세이는 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정오를 향해가고 있었기에 나는 목검을 들고 슬며시 기숙사를 나섰다.
다음은 검술과제다!
“A 클래스의 엘입니다. 마법인형을 꺼내주세요.”
물품실에 가서 이름을 얘기하고 인형을 꺼냈는데…
수치는 0(제로)!
으으으, 불타오른다~!!
그렇게 목검으로 인형의 급소를 여러 차례 타격하고 있는데,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
“아, 유안.”
마계에 갔던 유안이 돌아왔다.
“엘,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방학과제 하지.”
“방학… 과…제…?”
“너도 몰랐던 거야? 하긴, 나도 세이한테 들었어.”
“그, 그래? 과제가 뭐뭐 있는데?”
“어… 행정과제랑 역사과제랑 마법이론과제랑 검술과제랑 미술과제랑 문학과제랑 수리과제랑 공통과제 두 개.”
그렇게 하나하나 설명과 동시에 유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지금보니 유안의 얼굴도 세이 못지않게 피곤해보였다.
“유..유안아?”
“응... 그래, 그럼 너 지금 검술 하고 있는 거야? 마법인형?”
“아... 응. 그렇지.
“몇번?”
“2천번.”
“다했네?”
“응?”
타격 수치를 보니 어느 새, 2천번이 조금 넘어 있었다. 2031번이라…
“같이 들어가자. 뭐.. 너 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는데?”
“그, 그런가? 아무튼 안에 세이 자고 있거든. 몇 일 째 못잔 모양인거 같아서 재웠으니까 들어갈 때 깨우지 마.”
“응? 알았어. 세이는 과제 다 했대?”
“아아, 그 여행? 이라는 공통과제 빼놓고는 다 했대.”
“헐.”
나는 유안과 함께 기숙사로 들어갔고, 어느 새 시간은 두시가 조금 넘어있는 상황. 세이는 쿨쿨 자고 있었다. 문학과 미술은 같은
주제라.. 어차피 같이 해야하는 것 같은데. 으음, 차, 창작이라...
“엘? 지금 무슨 과제 하는거야?”
“문학이랑 미술.”
“다른 건?”
“어, 검술은 아까 끝냈고.. 음, 행정이랑 역사도 끝냈고.. 남은 건, 마법이론이랑 공통과제 뿐이네. 지금 하고 있는 걸 제외한다면.”
“아아, 나는 언제 다 하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안의 손은 섣불리 멈추지 않았다. 으음, 왠지 화나는 걸.
“공통과제. 그러니까 여행은 어쩌지? 세이를 깨울 순 없잖아.”
“아, 그러네. 지금 몇시지?”
“대충, 네시 조금 안된거 같은데.”
“으음, 나가려면 다섯 시엔 나가야 하는데. 엘, 나 역사 좀 도와줘. 내가 너 마법이론 도와줄게.”
“아, 응.”
유안이 간단히 적어놓은 것을 바탕으로 분량에 맞게 예시와 말을 늘리면 된다. 말은 쉽지만.. 낑낑거리며 분량을 마쳤을 땐, 유안
은 행정과 수리, 마법이론까지 마쳤다. 그리고 문학을 하고 있었지.
유안에게 설명을 듣고 문학과 미술까지 대강 마쳤을 즈음 다섯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의, 의외로 빠르네?
내게 남은 과제는 이제 공통과제 뿐! 유안은 공통과제와 함께 검술만 남아있었다.
“그럼 엘, 이제 나갈까?”
“세, 세이는?”
“아아, 괜찮아. 사진에 마법부여 하면 돼.”
“아버… 아니, 엘뤼엔이 알아보지 않을까?”
“으음, 담임이 워낙 인간 같지 않… 아니 신이랬지. 그것도 마.신. 내 평생에 마신을 속이는 날이 올 줄이야. 글쎄, 스무 명이나 되
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걸 다 알아보려고 하겠어?”
“그, 그런가..”
“문제가 되면 내가 징계 받지 뭐.”
그러면서 씩 웃는 유안은 당당했다. 유안의 검술과제까지 마치도록 한 뒤, 기숙사로 돌아갔을 땐 어느 새 저녁 11시가 훌쩍 넘어있
었다.
기숙사 안에는 세이가 화난 듯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엘. 유안.”
“아, 세이. 일어났어?”
“지금 ‘아, 세이. 일어났어?’ 라는 말씀이 나오십니까. 엘, 제가 분명히 세시간 후에는 깨워달라고 부탁드렸을텐데요.”
“아하하…”
“아하하, 가 아닙니다. 과제는, 어떻게 다 하셨습니까.”
“아, 응. 유안이랑 같이 마무리 지었어.”
“여행은요?”
“그거.. 유안이 솜씨를 발휘했지!”
나도 찝찝하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당당하게 말하자 세이의 얼굴은 흑빛이 되어갔다.
“세, 세이?”
유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세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기행문이라도 써야겠군요. 담임은 눈치를 챌 것 같으니까 말이죠. 유안, 엘. 적어온 것 있으면 줘 보십시오.”
“아, 여기.”
사진과 함께 적어뒀던 간단한 메모들을 세이에게 넘기자 세이는 곧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 쉬게 하려던 게 더 일을 만
드는 결과가 되어버렸달까. 그렇달까. 음..
나와 유안은 세이의 글쓰기가 끝맺어질 때까지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옆에서 기다렸다.
[9] 개학.
개학은 마침 월요일. A 클래스는 개학 첫날부터 수업이 있었다. 뭐, 우리야 저렇게 수업하고 한 주내내 쉬었지만. 다른 클래스는
첫날 수업이 없는 대신 매일 수업이 있었다. 크하하~
과제 제출을 마무리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보며 잠시 “흐음.” 하더니 곧 “10분 후 수업이다.” 라고 하며 나가버렸다.
역시, 눈치챈 건가. 혼자 움찔거리며 그러고 있는데 유안이 툭 치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담임 성격에 의심이 가면 저렇게 두고만 볼 성격은 아니잖아?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서 눈앞에 들이 밀 성격이지.”
“그, 그렇지?”
“그럼! 안 그래, 세이?”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어찌 할 수 없으니 그냥 마음 놓고 지켜보는 것도…”
말을 흐르는 세이의 모습에 난 삐질하고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세, 세이.. 설마 벌써 포기야..?
“아, 그런데 다른 차원으로 실습을 나간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세이는 화제를 바꾸어 아까 아버지가 말했던 조회 사항을 짚고 넘어갔다.
“글쎄 과목하나가 더 신설된댔지? 각 기숙사, 그러니까 룸메이트 별로 조를 짜서 다른 차원으로 나간다는데. 거기서 뭘 한다는 거
지?”
“환 아카데미의 수업은 독창성이 높기로도 유명하니까요. 도무지 예상을 할 수가 없군요.”
“그렇지. 으음, 일단 담임이 설명을 더 해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세메이온 님께라도 가보시겠습니까?”
“아아, 그거 좋겠다.”
라는 말에 의해 방과 후, 세메이온의 교무실을 찾았다.
“세메이온 님.”
“아, 세이 님. 그리고 엘퀴네스 님, 류칼레시안 님. 다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며 우리 세 사람을 반겨주는 세메이온.
“아, 세메이온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세메이온 선생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곧 그 정적이 무색할 만큼, 세메이온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사를 하러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어쩐 일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세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저희 담임 선생님은 여쭤보기가 죄송할 정도로 바쁘셔서 세메이온 님께서 바쁘시지 않다면 여쭈어봐도 될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세메이온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별로 바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세요.”
“지금 1학년에 신설되는 과목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설명, 해주시겠습니까?”
“아, 실습과목 말이군요. 기꺼이 해드려야죠. 일단, 앉으세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잠시 차를 준비 해오겠습니다.”
그렇게 세메이온이 일어서고 세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저녁도 먹지 못할 거 같습니다. 기숙사 가서 시켜 먹어야할 것 같습니다만?”
“아아, 그… 그런거야?”
“아하하…!”
앉아서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 세메이온이 티세트를 준비해가지고 왔다.
“그럼, 천천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다섯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결심했다.
-다시는 세메이온에게 설명을 요청하지 말자!
나는 정령의 몸이라서 그다지 배고프지 않았지만 세이와 유안은 상당히 지친 얼굴로 교무실을 나섰다.
“저희 뭐 먹을까요? 유안? 엘?”
“아아, 나는 어차피 안 먹을 거니까… 유안이랑 세이가 정하면 될 것 같은데…”
속으로 내가 울고 있다는 건 모를 것이다. 흐허헝… 나도 먹고 싶어…
“저도 그다지 가리는 음식 없습니다. 그럼 유안?”
“아아, 세이… 먹고 싶은 거 없어?”
“네… 뭐 그다지… 유안은요? 먹고 싶은 것 없습니까?”
“음… 그냥 간단하게 볶음밥 같은거나…”
“네, 그럼 그걸로 시키죠. 엘은 언제나처럼 생과일주스면 되나요?”
“하하, 응.”
“힘드시면 안 드셔도 됩니다.”
“응. 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방송이 나왔다.
-A클래스의 세이라키아 로비니아. 세이라키아 로비니아 학생은 지금 학생부실, 엘뤼엔 선생님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알려드립니다. 세이라키아 로비니아…
“세이, 너 찾는 거 맞지?”
“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만.”
“같이 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혼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식사 중에 자리를 뜨는 건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아냐, 얼른 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세이가 나가고 나는 그대로 기숙사 바닥에 벌렁 누웠다. 유안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엘, 네가 정령왕인 건 알지만.. 이 머리색 참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색이 나오지?”
“나도 처음엔 신기했어. 근데 너 머리 색만 하겠냐. 미네르바처럼 은발이잖아. 아니 미네르바보단 더 반짝 거리지.”
“하하, 세이 눈동자 색이나 머리 색이나 완전 신비의 극인데 뭘. 그러고보니, 우리 다 머리 색이 독특하네.”
“그러게 말야.”
그렇게 우리는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이]
같이 가주겠다고 하는 엘을 말린 후, 천천히 학생부실로 향하는 나는 담임 선생님인, 엘뤼엔이 나를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단, 오늘 제출한 과제라든지 정도 밖에 불릴 만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하겠으나 굳이 자신만 방송으로 부를 이유는 되지 못했다.
직접 찾아오고도 남았을 선생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부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유력한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똑똑.
“누구지?”
“세이라키아 로비니아입니다.”
“들어오도록.”
짧은 대답이 들리고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많이 바쁜 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처리하고 있는 담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임이 말 없이 펜 끝으로 소파를 가르켰기에 나 역시도 말 없이 가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십여 분 쯤 지났을까. 담임이 나직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공격 받았을 때 말이다. 세메이온과 상의를 좀 해봤다. 라휄하고도 대화를 해보려고 했지만 카노스 만큼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서 일단, 왠만한 클로네 족의 사건은 세메이온과 상의하는 편이긴 한데. 뭐, 잡소리가 좀 길었군. 어쨌
든, 그 때 너는 마물족 이외에 너를 공격할 만한 게 없다고 했지?”
“예. 일족이나, 그 외엔 대부분 이곳에서 처음 만난 인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래서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좀 알아봤다. 세메이온이 수고해주었지. 보다시피, 내가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은 엘뤼엔은 서류철을 하나 들고 내가 앉아있던 소파 가까이로 왔다.
“이걸 읽어보아라.”
나는 그가 내미는 서류철을 잡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타론에 관한 신상 명세.
종족 : 마물족
신분 : 중급. 환 아카데미의 입학을 허가 받은 바 없음.
외형 : 은발의 머리.
특이사항 : 마지막으로 발견된 아스란 제국 외의 공간에서 발견되지 않다가 최근 환 아카데미 내에서 발견됨.
간단한 프로필과 함께 그의 행적이었다.
“우리는 그 타론이라는 마물족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세메이온은 물론, 아스란 제국 출신의.. 그러니까 일부 고위급
귀족층에게서도 비슷한 답변을 얻을 수 있었지. 지금 환 아카데미 내에선 그의 신분을 구류 중이다. A클래스와 B,C 클래스 내엔
마물족과 그와 협약을 맺은 일부 인간들의 프로필 역시 조사해 두었지. 아카데미 내에서 상해와 폭행은 최대 엄벌이다.”
“이들이 했다는, 그러니까 직접적 증거는 발견되었습니까?”
“당일 알리바이가 없는 두명 중 한 명이 마물족이지. 나머지 한명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알리바이에 대해서
얘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그와 상황적 증거와 함께, 심증도 분명히 있지만 물리적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일
단, 클로네 족의 최고 결정권자는 너의 아버지이자 왕인 라휄이겠지만. 그가 지금 행방이 묘연하므로 피해자이긴 하지만 너에게
물어보라고 하더군.”
“세메이온 님이 말입니까?”
“나이트 들의 의견이 모두 동일하다. 는 뜻을 알려왔다. 피해 일족의 의견은 최대한 들어주도록 하겠다.”
“직접적, 물리적 증거가 발견될 때까지는 처벌하지 않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내 대답에 딱딱한 사무적인 표정이었던 담임이 표정이 달라졌다. 미소를 짓는 다거나 눈빛이 따뜻해 졌다는 그런게 아니라, 공기
자체가 바뀌었다.
재미있다는 느낌?
“왜지?”
짧은 물음, 하지만 그 물음이 나오기 까지의 침묵은 엘뤼엔이 이 상황을 상당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글쎄요. 아직 확실한 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은...”
난 말끝을 흐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엘뤼엔은 피식 미소 지었다. 정말 재밌다는 미소.
“그래, 아직은 알리고 싶지 않겠지. ‘집안 사정’이니까 말이야. 좋다. 그만 돌아가봐라, 세이라키아.”
알리고 싶지 않다. 그런 건가.
미소가 흘러나왔다. 날 진실로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안에서... 더 웃고 싶었다.
더, 미소 짓고 싶은 그런, 욕심이 생겼다.
[10] 새로운 수업.
세메이온의 설명으로, 수업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우리는 어떤 차원으로 가게 될지, 어떤 미션을 받게 될지 예상하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씩이나 걸릴 이 수업은 미션 세 가지에 성적을 매긴다. 그리고 1,2학기 수업을 통틀어 진급 시험 혹은, 졸업 시험을 치르게 된다.
사실 그렇게 어려워보이지 않는 수업에 우리는 안심하고 있었다.
“A 클래스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수업이 추가 된 이후 첫 시간이었다. 그런데 타 차원에 다녀오는 수업을 맡은 건 담임인 엘뤼엔이 아니었다.
“세, 세메이온 님?”
세이가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싱긋 웃으며 눈인사로 인사를 대신했고, 어리 둥절하는 A클래스를 쭉 둘러보며 입을 열
었다.
“안녕하세요. 세메이온 라울이라고 합니다. 3학년을 담당하고 있지만 최근에 개설된 과목, ‘타차원의 이해’ 라는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기소개를 마친 세메이온은 들고 온 출석부와 서류를 잠시 보면서 호명하기 시작했다.
“… A02호. 세이라키아 로비니아, 엘, 류칼레시안 세르피오.”
“예.”
“아? 네.”
“네.”
우리의 대답을 들은 세메이온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로 시선을 잠시 옮겼다.
“세 분의 배정 차원은, 제 9차원 지구입니다.”
뭐? 지구?
세메이온의 말을 들으며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세이와 유안을 바라봤다. 유안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고, 세이는 의문을 가득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연도는 다를 수도 있지만, 2000년 5월 초로 가게 될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나도 모르게 세메이온에게 되묻고 말았다. 세메이온은 내 표정을 잠시 보더니 옅은 미소만 띄우며 말을 이었다.
2000년, 4월 26일.
강지훈이, 죽은 날.
“조금 빠르거나 느릴 수도 있으니 가셔서 너무 놀라시지 않길 바랍니다.”
세메이온은 말을 마치고, 왼편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차가운 인상의, 초록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였다.
“오랜만입니다, 아스카 님.”
세이가 그를 ‘아스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그리고, 정령왕 엘퀴네스를 뵙습니다. 클로네 일족의 두 번째 나이트 아스카 파인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나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아스카 님.”
미미한 미소를 잠시 입가에 담은 아스카는 곧바로 본래의 표정임이 분명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 아스카. 부탁드립니다.”
아스카의 뒤에 있던 문에 손을 대고, 무언가 힘을 보내자 문이 파르르 진동했다. 밝은 빛이 문틈 사이로 새어나왔다.
-달칵.
물을 연 아스카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엘 님.”
종이를 확인하던 세메이온은 지나가듯 나를 불렀다.
“네.”
“B 클래스는 이틀 쯤 뒤에 출발하게 될 겁니다.”
“네?”
“궁금해 하실 거 같아서요. 그리고 이건, 임무입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싱긋 웃으며 말하던 세메이온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봉투를 내밀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종이봉투를 받고
나와 유안, 그리고 세이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한 빛이 우리를 감쌌고, 우리는 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이동되기 시작했다.
설핏 보이는 새파란 지구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떨구고 말았다.
유안은 뭔가 아릿한 표정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는 처음 보는 신기한 지구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더 걱정되는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와 유안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세이.”
유안이 조금 갈라지는 듯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옛날의 어느 한 하루가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세이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역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정령왕이 되기 전에, 인간일 때 이곳에 살았었거든. 좋은 기억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니까. 나의 한 부
분으로, 그걸 바라봐주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너도 그렇지, 세이?”
“아… 네.”
세이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로 들어섰다.
-빠앙.
자동차의 어긋난 클락션 소리가 우리의 귀를 괴롭게 했다. 내가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사거리, 그 땐 고수머리에 촌스런 우리학교
교복을 입고 있던 내가 이 자리에 누워있었지.
“야이, 미친 놈들이!! 차도 한복판에서 뭐하는 거야! 죽고 싶어?!!”
격한 운전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서둘러 인도로 올라갔다. 유안의 투덜대는 목소리는 덤이었다. ‘여전하군.’ 이라고? 유안
도 지구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다는 건가?
“엘?”
유안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우리 미션보자.”
나는 품 속에 넣어놨던, 세메이온이 쥐어준 봉투를 꺼내들었다.
세이와 유안은 말 없이 내 행동을 바라봤다. 봉투를 열자, 편지 한통과 열쇠가 들어 있었다.
-To 엘 님, 세이 님, 류칼레시안 님.
안녕하세요, 세메이온입니다.
여러분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수원의 한 거리입니다. 대한민국은 1 특별시 8도 5광역시로 이루어진 한 국가입니다. 한국이라고도 부르며, 그 중 수도인 서울 특별시의 근교에 있는 경기도에 여러분들이 지금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것은 학교에 가시면 더 깊게 배우실 것입니다.
일단, 여러분들의 미션은 다른 분들과 다르게 특별합니다. 함께 동봉되어 있는 열쇠는 앞으로 세분이 살아가게 될 집입니다. 여러분들이 서계신 장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 도보로도 충분히 찾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에서 여러분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 지내시게 될 것입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지구 특히나 여러분들이 활동해야 할 대한민국에서는 신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했기에, 간단한 신분은 저희가 만들어두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분은, 평범한 학생으로서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게 될 것인데 아카데미 내에서 세분을 평가를 하고, 보고를 받기 위해 두 분의 선생님들이 파견이 되어있는 상태고,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서 파견된 선배들이 몇 있습니다만 세분이 계신 경기도 수원에는 3학년 칼프 루니퍼스, 트로웰 님이 계실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분이 수행하셔야할 미션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작은, 아크아돈의 흑마법사 세 명이 마족의 힘으로 차원이동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그 도착지에 대해 아무도 알 수가 없었죠. 그것이 포착된 것은 2년 전, 대한민국에서였습니다. 추적에 추적을 거듭했지만 경기도 수원 지역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 위치가 발견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악신의 재 부활이었습니다. 주신께서 담당하고 계시는 지구 차원은 마력도, 신력도, 정령력 조차도 극히 미약해 탐지할 수 있는 영역조차도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작은 앰플에 자신의 마력을 모아가
서 마법진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행적은 여전이 묘연합니다.
그들은 일단, 학교라는 공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나타나든, 그들의 협력자가 나타나든지 말이죠. 그들에 대한 행방에 대한 조사를 해주세요. 혹은 그 협력자에 대해서라도 알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요.
세분이 가실 곳은 근교의 고등학교로, 소문으로는 밤마다 학교 내에서 제사와 같은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한국의 말로는 ‘흑마술’이라고 불리우는 것인데, 제물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흑마법과 유사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고 나머지 필요하신 것은 아마 세분이 거주하게 될 숙소에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분의 행보에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세메이온 드림.
경기도 수원시 **동 ***번지.
우리는 그 아래에 적힌 주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세이와 유안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내 귓가에 틀어박혔다.
“만만치 않겠군요. 기숙사에 틀어박혀 서류처리나 하는 나날보다는 훨씬 낫지만 말이죠.”
“으음,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정말 세이 네 말 따나 만만치 않을 거 같아.”
우리의 한숨은 그렇게 늘어갔다.
[11] Mission (1) Start(시작)
“어디보자, 우리 이름은 그대로고. 이게 교복인 것 같은데?”
“미션을 빨리 끝내라는, 세메이온 님의 배려인가 봅니다. 셋 다 다른 반이로군요. 그런데, 엘? 왜 그렇게 굳어져 있습니까?”
“응? 아니야.”
짤막하게 대답한 나는 유안이 가르킨, 감청색의 교복을 보고 잠시 얼굴을 굳혔다. 설마 하긴 했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복일
줄이야. 나는 슬며시 떠오르는 생각에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엘의 반은 1학년 7반, 세이는 1학년 3반, 나는 1학년 5반. 셋 다 전학생으로 가게 될 거라는데?”
“7반?”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유안은 조금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안의 얼굴은 전에 없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응, 7반.”
내가 강지훈이었을 적, 나는 1학년 7반이었다. 분명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과 만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엘’이지. 강지훈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 나설 수 있는 건, 오직 ‘엘’ 뿐이었다. ‘강지훈’은 죽은 자 일테지만.
“아, 유안. 오늘이 몇일이지?”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유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물음에 유안은 탁자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아, 4월 28일. 조금 일찍 왔네.”
“나 잠시만 나갔다올게.”
유안과 세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익숙한 거리 아니, 어쩌면 어색해진 거리… 기억 속에 남은 골목을 돌고, 기억 속에 서 있던 가로수를 지났다. 기억 속의, 병원…
나는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
장례식장.
흰색 배경의 간판. 나는 네 글자를 잠시 응시 하다가 안으로 향했다.
울음 소리와, 장례식장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 나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얼굴, 하지만 그 얼굴 가득히
퍼져 있는 건…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미소가 아니었다. 가득히 퍼져 있는 슬픔에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주의 표식을 어깨에 달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굳어진 얼굴. 그는 나를 발견했는 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지훈이를 찾아오셨나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17살의 하태진. 지금 난 23살의 하태진의 얼굴을 봤지만,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 지 무엇에 힘들어 했
는 지를 지금부터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네.”
“지훈이 녀석한테, 외국인 여자 친구가 있는 지는 몰랐네요.”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의 말에, 나는 문득 내 머리를 보았다. 긴 푸른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역시 푸른색이니 외국인으로 오
해해도 할 말은 없지만, 으윽 태진이 마저 나를 여자로 오해하다니!!
“여자 아닙니다. 하태진, 맞죠?”
“아, 네? 흐음… 죄송합니다. 제가 하태진이 맞습니다.”
잠시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듯이 바라보더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엘이에요. 사실, 지훈이를 만나기 위해 이리로 왔는데… 급작스럽게 연락을 받았네요. 지훈이에게 말 많이 들었
어요.”
내가 손을 내밀며 소개하자, 태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엘. 나는 하태진이에요. 많이 놀랐겠군요.”
태진이, 뿐만이 아니라 모든 친구들 앞에서 나는 ‘강지훈’이 아니었다. ‘엘’ 이라는 외국인 친구…….
“네, 조금요. 사실 지훈이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됐어요. 태진, 당신도 그 학교를 다니고 있죠?”
“아, 네. 1학년 7반입니다.”
“저도 그 반으로 배정이 되었어요.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잠시 눈썹을 일그러뜨린 태진은 지금의 나, 엘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친구가 죽었는데 편하게 잘 지내자고 하다니… 하긴 나
여도 이해 못하겠지. 그리고 나는 조금 풀 죽은 것처럼 보이려고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훈이에게 인사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지훈이 녀석도 좋아할 겁니다.”
사실,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그렇기 때문에, ‘강지훈’의 죽음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건 내가 죽었을 당시에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기에. 내 죽음을 슬퍼해주던 태진이나 다른 친구들에게는 미안했다.
여긴 바뀐 미래일 것이다. 아마, 바뀌지 않았다면 ‘강지훈’의 영혼이 이곳에 있었을 테지만, 내 기억 속에 푸른 머리의 외국인이 분
향한 기억은 없으니까.
분향을 마친 뒤, 태진이와 인사하고 병원을 나섰다.
내 기억 속의 모습처럼, 친구들은 많이 울어줬다.
“강지훈 이 녀석, 크허헝. 시험 전날에 죽다니 이 복도 많은 녀석 같으니라고!”
추하게 우는 친구의 모습도, 구석에 쳐 박혀서 어두운 얼굴로 슬퍼하던 친구들의 모습도 모두 꼭 같았다. ‘강지훈’의 가족이 보이
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서 단, 한 명의 모습만이 보이지 않았다. 는 것이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되어, 내가 억지로 눌러 버리려던 ‘강지훈’일 때의 기억을 다시 마주보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립던 친구들의 얼굴을 본 것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세이와 유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엘, 괜찮아?”
“아, 응.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돌아보고 왔어. 여긴 내가 살았던 곳이야, 인간이던 시절에 말이야.”
“걸리는 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이가 사무적으로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나는 슬며시 미소 지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장례식을 보고 왔는데… 미래란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예단하긴 이른 것 같아. 일단, 우리가 언제부터 학교를
가야하지?”
“내일은 토요휴업일이고, 5월 1일 월요일부터 가면 될 것 같아.”
장례식이란 말에 조금 움찔거린 유안이 얼굴을 굳히곤 종이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곧 시험일 텐데, 뭐… 여기서 졸업할
것도 아니고 상관없겠지.
“으음, 이틀이라… 일단, 이상한 건 모두 유념해두는 게 좋겠지?”
“그래.”
유안이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세이는 무언가를 뒤적이다가 서류철 하나를 건넸다. 이곳에 준비해져 있던 것 일 테지. 나는 그것
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의식은 1주에 한번, 가장 최근의 의식은 이틀 정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됨.
-1학년 김규현, 3학년, 김규영 형제가 지금으로썬 가장 수상함. 일단, 자극하지 말고 지켜보는 게 필요함.
-파견되어 있는 아카데미의 교사는 두 명.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 하르파스 브로켈, 학생은 두 명. 트로웰 (3학년), 칼프 루니퍼스
(3학년). 학생의 경우 본인의 희망으로 이곳에 배치되었음.
-그에 따른 협력자는 두명 혹은 그 이상으로 보여짐. 흑마법사의 위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음.
-악신의 재부활에 필요한 영혼의 수는 666개, 현재까지 441개. 각 의식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고 있음. 특별한 자의 영혼의 경우
한 번에 열 개 이상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음.
그들이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굳이, 그 학교에 ‘전학’이라는 수단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이곳에서 거주
하면서 조사를 하게 된 것도 모두 예정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몇몇 ‘특별한’ 영혼들. 그러니까 태진이와
같은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한 통증이 느껴졌을 테지만,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걱정이 더
많이, 두려움이 더 많이 나를 둘러 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배후는 이미, 대부분 파악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우둔한 내 머리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세이와 유안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류칼레시안 세르피오,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마왕. 마족 중 유일한 9서클 마법사. 세이라
키아 로비니아, 클로네 족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스스로 인간계에서 자신의 터전을 만들어 살아갈 만큼 유능한 자다. 본인의 상처
때문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뿐이지, 기본적인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셋을 굳이 이곳에 보낸 이유는 우리가
알아야만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나’ 인가.
나는 점차 붉어져 가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유안은 말 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엘, 걱정하지 마.”
“우리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이 ‘폭주’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린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 것으로 그렇게 믿었다.
[외전] 회의.
“여기, ‘특별한 자의 영혼’ 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 있어?”
“그, 글쎄?”
내가 손가락으로 서류에 적혀 있던 단어를 가르키며 말하자, 유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는 살짝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신의 영혼, 혹은 그에 버금가는 고귀한 운명으로 정해진 영혼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역시 세이, 랄까.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갑자기 묻는다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한 영혼은 666개지. 그리고 지금까지 441명의 영혼이 그들에게 붙들려 있어. 최악의 경우엔 스물 여섯, 서른이 안 되는 수로
도 충분히 악신의 부활이 가능할 거라는 거야. 그리고 악신이 부활하면 적어도, 지구는 날아가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아마 신
계?”
“뭐? 엘! 그게 대체…!”
“그나마 다행인 건, 신계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 유추를 했다는 거야. 저번 아크아돈처럼, 직전에 발견했다거나 한 것이 아니지. 아
직 어느 정도의 시일은 있어. 하루에 한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이라는 것부터도 아직 시간이 있다는 반증이지.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이 서류안에 있어.”
“그 말은, 엘이 인간…이었을 적에 알았던 사람이 연루 되어 있다는 건가요?”
“아아, 그리고 가장 위험한 사람이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것이 추가 되야지.”
“가장 위험하다니?”
“이른 바, 특별한 영혼이란 거지. 너희도 알 거야. 태진이… 그 녀석은 전대 이프리트였거든.”
그제서야, 상황인지를 한 듯 유안은 얼굴을 강하게 굳혔다. 세이는 이미 처음부터 예상한 듯 싶었다.
“그럼 일단, 그… 태진? 이라는 인간을 보호 해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겨우 전학생은 우리가 어떻게?”
“예전의 인간이었을 적의 친분을 이용할 거야. 내가 그라는 건 밝히지 않고 그의 친구라는 식으로 일러뒀어. 게다가 같은 반이니
조금 더 수월할 거야. 물론 마법에는 당할 수 없겠지만, 그 녀석 역시 쉽게 당하는 성미는 아니고 말이야.”
“그렇다면 엘이 그 보호를 맡아야겠군요. 괜히 저희가 끼었다가는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동안은 저와 유안 둘이서 조사를
해나가야 할 듯 싶습니다. 일단, 내용을 보건데 가장 의심이 가는 이 형제를 먼저 조사해야할 것 같습니다.”
“동생 녀석은 나랑 같은 반일 거야. 형 녀석은 아마 우리가 조사하기가 힘들거야. 일단 학년이 다르고… 아, 트로웰과 칼프가 이곳
에 있다고 했지?”
“아, 네. 3학년은 2인 1조로 움직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트로웰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지만, 일단 협력을 요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학교는, 선후배 간의 위계랄까. 뭐 그런게 좀 강
한 편이거든. 1학년 교복을 입은 우리가 3학년 교실 근처에서 알짱 댄다면 소란이 일어날 지도 몰라.”
“아아, 그건 알아. 게다가 3학년은 수능도 있고 말야. 아마 좋은 인상으로 살피긴 힘들겠지.”
“응? 유안이 어떻게 수능을 알아?”
내가 되묻자, 유안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괜시리 긁적거렸다. 그리고 어물거리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으음, 나도 한국에 있었거든. 고3 때, 수능을 망쳐서 어… 한강에 갔다가… 아스타로트 씨에게 붙들려서 말야, 하하하…”
“한…강? 너 설마..”
“하하하, 에, 엘. 일단 그 얘기는 좀 접어두자. 중요한 건 미션이잖아.”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는 유안은 흥미롭게 바라보던 세이가 한 마디 했다.
“둘 다 인간계에, 한국 출신(?)이라니 세상 참 좁군요.”
“아하하..”
유안이 어설프게 웃는 걸 보며 나와 세이도 같이 웃고 말았다.
[12] Mission (2) protection and… (보호 그리고…)
5월 1일 월요일. 우리 셋은 학교에 등교했다. 나는 1-7반으로, 유안은 1-5반으로, 세이는 1-3반으로. 각기 배정된 반으로 들어섰
다. 엘뤼엔은 3학년의 담임이었고, 하르파스는 세이의 담임이었다.
내가 들어섰고, 담임 선생님의 소개를 받고 앉았음에도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 역시 내 기억과는 다
른 선생님이었다. 이것도, 연관이 있는 건가? 어쩌면 엘뤼엔과 하르파스가 들어왔기 때문에 바뀌었을 지도…
“오랜만.”
헤어질 때, 말을 놓자고 했던 것을 기억 했는 지 태진이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오랜만이야. 음, 3일장은 잘 끝냈어?”
“응, 화장해서 지훈이가 좋아하던 산에 뿌려줬어.”
지금은, 바다가 더 좋은데 말이지. 나는 튀어나올 뻔 했던 말을 삼키며 말했다.
“아아, 미안해. 가보지도 못하고. 수속이니 뭐니, 뭔가가 많아서 말이야.”
“아,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 녀석이라면 괜찮다고 말하면서 웃었을 거야.”
어이, 나 그렇게 안 착했는데? 하지만, 태진이의 표정이 너무나 아파서 차마 그렇게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응, 그랬겠지…”
나는 웅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머리에 턱하고 무언가가 올라와서 슬며서 고개를 드니, 태진이가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까, 하는 건 지훈이 녀석과 판박이네. 일단 지금은 수업 시작했으니까 다음 시간에 친구들 소개시켜 줄게.”
씩 웃으며 어딘가를 가르키는 태진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어느 새 9시 10분을 가르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아, 그래. 고마워.”
수업은 그다지 재미 없었다. 지루한 수학시간엔 모두가 달콤한 수면을 맛보고 있었다. 나도 최대한 선생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
게 하품을 하며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내 기억으론, 저 선생님은 걸리면 상당히 골치 아팠었단 말이지. 학생부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때리는 건 둘째 치고 짜증나는 벌들
을 많이 시켰으니까.
일단, 남게 해서 수학문제 풀게 라든지… 청소를 하게 한다든지… 이런 거야 가장 가벼운 벌 줄 하나다. A4 용지를 나눠줘서 자신
의 죄목을 ~하지 않겠습니다- 체로 가득히 써야 했다. 물론 글씨 크기는 새끼 손톱만큼 작게.
“아, 그래. 거기, 졸고 있는 하태진이 한 번 풀어볼까?”
걸.렸.다.
하태진은 잘 안보이게 한다고 졸은 모양인데, 그게 보였던 모양이다. 태진이는 한숨을 폭 내 쉬고는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
분 나쁘게 웃는 수학선생은 오랜만에 학생이 한 명 걸리기를 바라는 눈치 였다.
다행스럽게도, 태진이는 가볍게 문제를 풀었다.
“………⅞ⁿ+⅓입니다.”
“들어가라. 졸지 말고.”
경고의 말을 잊지는 않았지만 아쉽다는 표정을 풀지 않은 수학선생은 다시 지루한 설명모드로 진입했다.
지루하디 지루했던, 그리고 내겐 가슴 졸이게 했던 수학시간이 끝나고 힐끗 내 쪽을 바라보다 나가는 수학선생의 눈길에 오한이
잠깐 일긴 했지만. 시간표를 확인하니 다음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여학생들은 화장실이나, 붐빌 게 뻔한 여학생 탈의실로 향했다. 남학생들이야, 뭐 적당히 교실에서 갈아입는다. 탈의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귀찮아서 거기까지 가고 싶진 않으니까.
“엘.”
태진이가 조금 소리를 높여서 날 불렀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씩 웃으며 수근 대고 있었다.
“어? 뭐야, 태진이 너 벌써 이 미인과 친해졌단 말야?”
“근데 왜 남자 교복을 입고 있지?”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빠직! 하기는 했지만 듣지 못한 척 태진이를 불렀다.
“아, 태진아.”
태진이는 씩 웃더니, 이내 남자교복을 왜 입느니 뭐니 했던 녀석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짜악.
“으!! 따가워! 너 그 괴력으로 어딜 때리는 거냐! 전치 3주는 나오겠네!”
“그 정도로 세게 때리진 않았다. 그리고 엘은 남자야, 여자가 아니라고.”
“뭐? 저 이쁘장한 얼굴로?”
다들 여자라고 생각했는지,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쉬는 시간 끝나겠다. 얼른 나가자.”
“아, 또라이 체육이 난리 치겠네. 서두르자.”
뛰어 나가면서 태진이는 이미 알고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읊어주기 시작했다.
“저기, 키 크고 껄렁한 녀석이 김규현, 이쪽에 완전 범생이처럼 생긴 녀석이 반장인 유지태, 저기 키 조그맣고 멍하게 생긴 녀석이
이정민, 저쪽에 얼굴을 굳히고 오는 녀석이 최민식. 지금은 조금 바쁘니까 체육시간 끝나고 제대로 소개해줄게.”
“아, 응. 고마워.”
줄을 서자마자 치는 종소리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몇몇 여자아이들과 헥헥 거리는 남자아이 두 명이 걸리
기는 했지만.
“이번 시간에, 남자는 농구를 하겠다. 짝수번호는 푸른색 조끼를 입고, 홀수번호는 붉은색 번호를 입도록. 여자는 발야구를 하도록
하지.”
나는 짝수 번호였지만, 태진이가 붉은 색 옷을 들고 왔다.
“어? 나 짝순데?”
“괜찮아. 짝수 하나가 더 있어서 수가 안 맞거든.”
나는 강지훈이던 시절 역시, 홀수 번호였음을 기억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진이가 건내는 붉은 색 조끼를 받아들었다.
농구를 하면서 알아낸 건데, 정령왕의 몸은 신체능력도 좋구나. 라는 것이었다. 강지훈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앉아서 쉬거나 뒤
에서 항상 수비역만 맡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가볍고 무엇보다 내가 게임을 리드하고 있었다.
“엘! 멋지다!”
내가 3점슛을 성공시키자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전혀 헝클어지지 않았지만.
게임이 끝나고, 홀수가 이길 수 있었다. 조끼를 벗어두고 올라가면서 태진이는 때때로 슬픈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
하는 모습과 같이 농담도 했고, 장난도 쳤다.
옷을 갈아입고 대강 누가 누군지 소개를 받았다. 물론, 이미 알고 있긴 했다. 나를 위해 말없이 도시락을 두 개씩 싸오던 최민식,
내 잦은 지각을 눈감아주던 유지태, 내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던 이정민, 그리고 판타지의 맹신자였던 김규현…
하지만 나는 처음 본다는 듯이 그렇게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슬퍼졌다. 나는 이유를 뻔히 짐작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넘어갔다. 김규현은 짐짓 심각한 표정이었다.
3교시는, 국사였다.
다들 체육시간에 이리저리 뛰느라 힘들었던 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국사시간이 끝날 때까지 눈을 뜨고 있던 건, 오로지 나
하나 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사선생님이 나가시고, 4교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엘.”
김규현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 응. 김규현, 맞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담고 있는 지 모를 검은 눈동자에 나를 가득 담았다.
“학교 끝나고,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둘만.”
“어? 으음… 그러지 뭐…”
“역시, 똑같네.”
입가에 슬며시 기분 나쁜 미소를 올린 그가 말을 내뱉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뭐가?”
“바로 그런 점이, 똑같아. 모르는 척 하지 마. 이미 알고 있잖아, 강지훈. 아니, 엘퀴네스라고 불러줄까?”
어떻게 알았지? 지구에서만 있었을 김규현이 어떻게, 엘이 엘퀴네스라는 것을, 엘퀴네스가 강지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 혼
란이 가중되어 있었다. 김규현은 이름 모를 미소만 가득 띄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방과 후에. 너도 그 편이 더 좋겠지?”
“…그러지.”
이 녀석의 성격이라면, 그 흑마법사들에게 흑마법을 배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몸을 악신의 숙
주로 내줬을 가능성 역시…
[시큐엘.]
정령어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아크아돈과는 조금 다른 그런 물의 늑대가 나타났다.
[저를 탄생시켜주신 우리의 왕, 엘퀴네스 님을 뵙습니다.]
[탄생…?]
있던 정령이 아니라는 건가?
[이곳, 지구에는 정령들이 없습니다. 아니, 대부분이 이미 소멸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미약한 정령력은 남아있
지만 그것으로 상급 이상의 정령의 실체를 만들긴 힘듭니다.]
[아아, 그래. 시큐엘, 미안하지만 이곳 어딘가에 있을 엘뤼엔과 트로웰을 찾을 수 있겠니?]
[물론 가능합니다.]
[그럼 그 둘에게 가서 네가 본 바를 전하고 1-3반의 세이, 1-5반의 유안에게도 전해달라고 말해줘.]
[그 명 받들겠습니다.]
시큐엘은 빠르게 이반 교실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본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이 아직도 수면에 빠져 있었고,
김규현 역시도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형 혹은 흑마법사들이겠지만.
하긴, 시큐엘은 자연체의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한 기분이었다. 아니길 바랬는데.
[13] Mission (3) dangerous(위험)
원치는 않았지만 수업은 빠르게 끝났다. 4교시가 끝나서 트로웰이 찾아오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오지 말라고 말리는 것에서 상당
히 애를 먹었다. 내가 엘퀴네스인 것은 안다면, 트로웰이 땅의 정령왕이라는 것은 더욱 쉽게 알 터였다.
일단, 세이와 유안에게는 알렸다고 전갈이 온 지라 나는 걱정을 좀 덜었다.
내가 쉽게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이곳은 아크아돈이, 정령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엘.”
태진이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가방을 싸는 김규현을 노려보았다. 가방을 싸서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는 그의 모습은, 내가 알던 규현이와 같아서…
“그래.”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 웃기만 했다. 웃으며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내가 강지훈이던 시절, 그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이 만나고 많이… 놀던 곳.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그들
이 그렇게 함께 있어주었던 곳.
익숙하면서도 어색해져버린 이곳의 풍경에도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공원의 벤치에 자신의 가방을 적당히 던져둔 규현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지만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보였다.
“엘, 네가 올 줄은 몰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널 만나러 가기 위해 형에게 협조했지. 여긴, 그 사람의 수족들이 없으니까 괜찮아. 경계하지 않아도 돼. 지훈아.”
갑자기 달라진 규현의 태도에 나는 엉거주춤 선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규현은 벤치에 쓰러지듯 앉으며 말했다.
“내 이야기, 안들을 거야? 듣지 않으면 네 친구들이 위험할텐데.”
장난스럽게 말하는 듯 했지만 그것이 진심임은 규현의 눈으로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말했다. 내 한 몸 못 지킬 정도로 연약한 자가 아니니까, 나는.
“내가 널 믿어도 되는 거지?”
“믿지 않으면, 네 친구들이 위험해. 난 너를 본 것으로 그걸로 됐으니까.”
나는 규현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왠지 지쳐버린 듯한 규현의 모습에 난 목이 메어왔다.
[외전] 규현의 이야기.
[지훈이가… 죽었어.]
이를 앙다문듯한 태진의 목소리가 딱딱한 전자음을 타고 내 귀에 닿았다. 질나쁜 농담이었다고, 태진이가 말하길 기대하며 난 애
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하태진. 장난치면 재미없다?”
하지만, 이미 불길한 예감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목소리는 떨려오고 있었다. 태진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병원이야. 영안실로 와.]
낮고, 떨리는 태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게 웃으며 내일 보자고 말하지 않
았던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학원이 있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태진이가 말한 병원으로 달려가
야했다. 태진이가 말한 것이 거짓일거라고 애써 날 위로하며, 지훈이를 보기 위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병원 영안실로 내려갔다. 다들 와있었다. 지태도, 민식이도, 정민이도 그리고 의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듣
는 태진이도.
나는 그들이 애써 시선을 외면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온히 누워있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느때보다도 평온해보이고
평화로워보이는 지훈의 모습에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지훈의 장례식 비용을 걷어 지훈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난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무엇을 듣고 있는지,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상태가 이상함을 안 친구들이 형에게 전화해 날 챙기게 했다.
“규현아. 그 친구 많이 좋았냐?”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도 얼마 전 친구를 사고로 잃었다. 그뒤로 형은 말수가 극도로 적어졌다. 몇 달만에 형제가 말하는
지도 모른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알싸한 담배냄새가 내게도 불어왔다. 형은 잠시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날 위로하는 듯한 말은 별로 듣고 싶
지 않았다. 그 녀석은 좋은 곳에 잘 갈거다, 행복할 거다. 이런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녀석이 행복한 것을 내가 보고 싶었다. 단 한번도 내게 자신의 속사정을 제대로 이야기해준 적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어두운 듯한, 나와 닮아버린 듯한 녀석의 표정. 그것에 나는 결심했다. 적어도 그 녀석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내가 지켜보겠다고. 나는 내가 행복해질 용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 죽어버렸다.
“…친구를 다시 볼 방법이 있는데. 너도, 같이 해볼래?”
형의 진지한 말에 나는 놀라서 형을 보았다. 형이 그동안 어울리던 친구들이 아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듯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나는 알고는 있었다. 그게, 이런 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나. 평상시 판타지를 보는 나를 한심스러워하던 형이었기에 형
이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가능해?”
하지만 그것보단,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녀석을 위해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형과, 형의 친구들과 밤마다 준비를 했다.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흑마법의 제사라는 것을…
처음엔 신기했다. 우리가 죽인 사람들은 ‘살인’이 아니라 ‘돌연사’ 나 ‘자연사’로 판명이 되었다. 형과 형의 친구들을 도와주는 세
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흑마법사’라고 소개를 했다. 누군가를 ‘부활’시키는데 그 ‘분’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줄 거라고 했다.
믿지 못하는 내게, ‘흑마법사’ 라는 사람들은 작은 병을 들고 무어라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소환된 동물도 아니고 괴물처
럼 보이는 지구에선 볼 수 없는 ‘마물’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진짜’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두려워졌다. 점점, 지훈이 행복해한다면 굳이 내가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라는 회의감과 함께 내 욕심으로 시
작한 일에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그만 둘 결정을 하게 된 것은 ‘흑마법사’들이 한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였다.
“드디어 오는군, 정령왕 엘퀴네스가.”
“악신께오서 이곳 지구에 탄생시키셨던 그를 제물로 바친다면 더욱 그분의 부활은 빨라질게야.”
“규현이 녀석이 친구라고 했던 ‘강지훈’이라지? 그녀석의 소원은 들어줄 수 없겠군. 어차피 그녀석의 또다른 친구인 ‘하태진’이라
는 녀석도 제물로 바쳐야하니까 말이야. ‘특별한 영혼’이 몇이나 더 조사가 되었지?”
“이곳은 그런 녀석들이 많아, 켈켈. ‘하태진’ 녀석을 포함에 셋정도 되더군. 아마 일은 쉽게 풀리게 될 거야.”
엘퀴네스라고 불린, 물의 정령왕이 지훈이라니. 그녀석은 정말이지 내가 부러워하는 모습도 가져간게 아닌가. 아마, 그정도라면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녀석이 온다면 이걸 모두 이야기해줘야겠다고., 그녀석이 믿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지 못해 한 행동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막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 손으로 제물로 바쳐진 생명들에.
[14] Mission (4) Truth(진실)
“아마, 오늘 태진이를 급습할거야. 태진이가 약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마법을 쓰니까. 하지만 아직 시간은 남았어. 아직 여섯시 밖
에 안됐지. 그들은 언제나 8시 이후에 움직여. 너의 친구들도 모두 표적이 될거야. 그들은 지금 매우 급해질거야. 나의 배신 소식을 알았을테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내가 시간을 끌게. 친구들과 함께 태진이를 지켜줘.”
“됐어. 김규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우리쪽은 결코 약하지 않아. 악신이라면, 전에도 싸워봤으니까. 겨우 그들의 수하한테
밀리지는 않아. 일단, 너도 보호를 해야할 것 같으니까. 있어봐, [시큐엘, 나와!]”
[저의 주군이신 엘퀴네스님을 뵙습니다.]
일어나려던 규현의 팔을 잡은 채로 시큐엘을 불렀다. 아크아돈과는 여전히 조금 다른 시큐엘의 모습이지만 본질은 같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난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이와 유안, 그리고 트로웰한테 알려줘. 당장 태진이를 우리집으로 데려오라고. 그리고 규현이를 내가 데리고 간다고. 알겠지?”
[명을 받듭니다.]
우직하게 인사한 시큐엘은 곧 날 듯이 뛰며 그들에게로 갔다.
“그럼, 가도록 하자. 다행이야. 네가, 정말 그쪽으로 가지 않아서.”
“그 말은 내가 연기를 너무 잘했다는 말이 되는 거야?”
“물론. 하지만, 내가 네말을 믿는다고 해서 친구들도 다 믿지는 않을거야. 그래서 트로웰이 너와 이야기를 할 건데 어, 음… 익숙해
지는데 시간이 조금 오래걸릴거야. 그는…”
“알고 있어. 땅의 정령왕. 마음을 읽는다지? 이래뵈도 주워들은 게 상당하다고. 쳇, 그나저나 정령왕이라니 부러워지는 군. 넌, 물
의 정령왕이랬지? 막 물 다루고 그러는거야?”
“물속에서 숨도 자유자재로 쉰다구! 치료도 할 수 있고 말이야.”
“오오, 그게 인… 간… 아니구나. 넌 이제, 인간이 아니구나. 하하, 신기하고 부럽고 그런 걸?”
정말 내가 알던 규현이로 돌아온 것 같아서 집에 가는 길 내내 나는 웃었다. 마치 예전에 그날처럼. 이미 바래진 그날의 기억처럼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외전] 태진의 이야기.
“엘은요?”
게이트의 앞에서 세메이온이라는 선생을 보자마자 난 외치듯 소리쳤다. 그는 미미하게 웃으며 나직히 말했다.
“엘퀴네스님이라면, 이틀 쯤 전에 세이님과 류칼레시안님과 함께 출발하셨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엘뤼엔님과 트로웰님,
그리고 칼프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그리고 이젠, 하태진님도 가시겠지요.”
“또 가는 사람은요?”
“B클래스를 모두 보낸 뒤, 엘뤼엔님께서 증원요청을 하신다면 아마 저와 아스카님이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직까지 가기로 예
정이 되신 분은 또 없습니다. ‘지금’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이미 ‘겪은’ 당신이라면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급박하겠
지만 진정하시지요. 당신이 알고 있던 ‘과거’와는 다를 겁니다.”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세메이온의 모습에 나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자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든지 다 알고 있
는 듯 말하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내가 알고 있을 과거와 변하는 것은 결과뿐. 모든 상처의 원인은 엘의… 지훈의
성격이었으니까. 미련하게 믿기만 하는 그 녀석의 성격…
다른 과거? 그런 건 상관없었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엘이… 나보다 행복해야할, 행복해지고 있을 엘이 상처입을까봐. 많이 성장하고 또한 강해졌지만 내가 아는 지훈이는… 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가… 해야할 일은?”
“지금 가 있는 A클래스 여러분과 과거의 본인에게 들키지 않고 서포트 하는 겁니다. 아마 당신의 서포트가 없어도 A클래스는 모두 임무를 완수할 겁니다.”
확신하는 듯한 세메이온의 말에 나는 그가 내미는 종이와 몇가지 아이템들은 거칠게 받아 챙겼다. 그는 다시금 미미하게 웃었다. 결국 바라보고만 오라는 거군.
“가시자마자 엘뤼엔님께 보고를 하기 바랍니다. 물론 A클래스 분들 모르게요.”
“알겠습니다.”
아스카라는 선생은 차갑게 나를 보다가 게이트를 열었다.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빨리 도착해야했다. 그 녀석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지훈이… 그 녀석을 다시 믿어서 상처를 받지 않도록. 그때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제발… 엘, 무사해줘.
그 자식을… 믿지 마.
[15] Mission (5) Betrayal (배신)
집에 도착했을 때, 트로웰은 없었다. 태진을 데려온 유안과 세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집에 있었을 뿐이었다.
“엘, 무슨 말인지 설명을 조금 해줬으면 좋겠는데…”
유안의 말에 나는 태진과 규현을 자리에 앉히고 말을 시작했다.
“일단, 태진이… 너한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엘이 맞아. 풀네임은 엘퀴네스. 지금 이름은 말이지. 그리고 예전 이름은, 강지훈이야. 믿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지금 너에게 강지훈이던 시절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널 이해시킬 생각은 없어.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졌거든. 사실, 이런 것도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말이야. 일단, 난 원래 지구에 살지 않고 있어. 아크아돈이라는 곳인데 넌 아마 오지 못할 거야, 지금은. 아무튼 그 아크아돈에 문제가 생겨서 이곳 지구에 다시 오게 되었지. 그 문제로 인해서 태진이, 네가 위험해.”
“뭐? 엘? 대체 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태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해하지 규현이 손을 들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엘. 이 부분은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다. 그동안 넌 네 친구들한테 상황을 설명해줘. 그게 더 효율적인 것 같아. 아직 그… 트로웰은 안온 것 같고 말이야.”
“응, 그래줄래? 어, 그럼 유안, 세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까… 그러니까 말이야…”
설명을 모두 끝마치고 났을 때, 유안은 의심스런 눈으로 규현을 잠시 바라보았고 세이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믿기는 힘든가.
그리고 규현의 설명을 들은 태진의 표정 역시 심각해져 있었다.
“엘, 네가 지훈이라면 내 실력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누구하고 싸워도 난 지지 않아.”
“물론 주먹다짐만이라면 네가 이길지도 모르겠다. 음, 하지만 넌 이런 거 할 줄 모르잖아? 그들은 이런 거 할 줄 안다고.”
나는 조용히 얼음창을 만들었다. 물론, 이건 나만 할 줄 아는 거긴 하지만……
다행이도 태진은 바로 이해해준 듯 싶었다. 태진의 입장에선 초능력자들의 전쟁 쯤 되려나…
우리가 모든 상황이해를 마치고 나서도 트로웰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시큐엘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트로웰에게 보고를
마친 뒤, 다시 돌아와야하는데 아직 안왔다는 것은 전달하지 못했나? 아니면 전달할 수 없는 상황?
“음… [시큐엘].”
가만히 시큐엘을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시큐엘, 나와봐.]
나는 결국 시큐엘 한마디를 새로 만들었다.
[왕을 뵙습니다.]
“시큐엘, 트로웰이 어디있는 지 알겠어?”
[네, 알고 있습니다.]
“어디있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유안, 세이. 잠깐 트로웰을 데려올게. 일단 여기서 태진이랑 규현이랑 같이 있어줘.”
“알았어, 엘.”
“알겠습니다, 엘.”
시큐엘을 타고 트로웰에게 가던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금 그들을 살폈다. 뭐, 괜찮겠지.
근처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듯 오래걸리지 않아 트로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던 나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니, 직감했다
는 그런 거창한 말이 필요가 없었다.
-쿠과광.
4천년 전, 암흑의 주군이던 시절의 트로웰을 보았을 때 이후로 본적이 없는 거대한 땅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폭발의 중심지로 갔
다.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트로웰은 지친 얼굴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트로웰!”
내가 그를 부르며 달려가자 그는 곧 미소를 띄우려다 곧 얼굴을 굳히고 소리쳤다.
“엘! 하태진은?”
“세이와 유안이랑 규현이랑 같이 있어!”
“…뭐? 김규현? 엘, 젠장. 어서 돌아가!”
“트로웰, 너… 다쳤잖아?”
“이정도는 괜찮아. 방심했을 뿐이야. 엘. 그보다 어서 돌아가. 그녀석은 위험하다고. 같이 두면 안돼.”
“아냐, 규현이 괜찮아.”
“지금 내가 싸우고 있는 게, 그의 형인 김규영이야. 그리고 그녀석이 하는 말이, 우리들 사이에 동생을 잠입시켰다고 했어. 엘, 너
에게 김규현은 친구였겠지만 지금은 아닐지도 몰라. 곧,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가 있어. 최악의 상황이 생기면 안돼.”
트로웰의 말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큐엘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트로웰이 걱정
하는 일이 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규현이가… 배신을 한다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
집에 다 왔을 때, 나는 아까와 다른 것 같지않은 겉모습에 안심했다. 역시 트로웰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문
고리를 잡아돌리는 순간 집안에선, 들려선 안될 소리가 들렸다.
-쿠과광
마치 마법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에 나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세이! 유안!”
한쪽 구석에 실드를 치고 태진과 세이를 보호하고 있는 유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타오르는 검은 불의 구체를
들고 있는… 규현의 모습이 보였다.
“…엘, 나로서는 이게 한계였어…”
실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찬지 땀을 흘리며 말하는 유안의 모습을 안절부절 보고 있는 세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진은
기절한 듯 실드의 영향권 아래에 누워있었다.
“유안, 세이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만. 유안이…”
“유지만 하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아… 엘. 이럴 때만큼은 드래곤이었으면 하는 걸? 그보다 세이, 팔은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저도 이때만큼은, 에페스가 있었으면 하게 되는군요.”
애써 유쾌하게 말하는 유안과 세이를 보고 나는 어느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의 양손엔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이
들려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결심한 이유는 전혀, 규현이처럼 보이지 않은 규현의 모습이 가장…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은, 흔히들 말하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16] Mission (6) Before War(전쟁 전)
전처럼 이성을 잃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규현이라는 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 어쩌면 나는 세이와 유안이 다치고 나서도 머
뭇거리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전에 악신과 싸울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 친구라고, 믿을 수 있는자라고 생각 했는데…
너무 안일했는 지도 몰랐다.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순간적으로 인지 하지 못한 나는 한 순간 방어를 게을리 하고 말았다.
-푸욱.
그가 휘두른 손톱이 내 팔을 파고들었다. 손을 서둘러 빼내긴 했지만 이미 피가 흐르고 있는 상태. 물론 이건… 정령으로서 환각에
불과할테지만.
“엘!!!”
“엘!!”
저들에겐 아니었나보다. 내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놀라서 소리치는 세이와 유안을 보니, 내가 규현의 배신이라는 핑계로 모든
친구들의 믿음을 배신해버린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충격을 받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규현’은… 이제 ‘내’ 친
구가 아니었다. 과거 ‘강지훈’의 친구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팔에 마나를 덧입혀 상처를 지워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유안과 세이에게 씩 웃어주며 팔을 흔들었다. 내가 얼음창의 날을 세워 그에게 향하게 하자 규현은 잠시 동물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우… 후우우…”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위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지, 싶은 기분이긴 했지만 일단 얼음창을 소멸시키고 세이와 유안에게 다가섰다.
“세이, 유안. 괜찮아?”
“엘, 너야말로 팔 괜찮은 거야?”
“엘, 피가 많이 났습니다.”
“이런, 내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잊은거야? 정령의 본체는 이곳에 있지 않아. 내 본체는 지금 아크아돈에 있으니까. 물론 조금 특수
하긴 하지만… 그보다 세이, 팔 이리 줘봐.”
힐링을 할 시간이 없었던 듯 옷으로 대강 동여맨 세이의 팔은 생각외로 상처가 깊었다. 나는 세이의 팔에 손을 대고 언령을 외웠
다.
[치료]
이곳이 지구여서 일까, 아니면 전처럼 악신의 상처에 치료가 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까. 완벽하진 않았다. 대강 피를 멈추고 상
처의 회복을 더 빠르게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정령왕의 능력을 잘 몰랐었는지 세이는 말은 안해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네. 정령이 없단 것도 그렇고 이곳 지구가 전체적으로 자연력이 약한걸까. 아니면…”
후자의 경우는 생각하기 싫었다. 물론 지금은 크로아첸의 이름으로 함께 있긴 했지만 그 때의 난 정말이지 두려웠다. 엘뤼엔도, 라
피스도 모두 내 곁을 떠나가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 역시도… 혹여 세이와 유안이 떠나갈까봐 조금은 두려웠다.
역시 난, 나이만 먹었지 변한게 없었다.
“엘!”
트로웰이 조금 헝클어진 모습으로 뛰어왔다.
“트로웰? 괜찮아?”
“아아, 물론이지. 그런데 김규영 그자식이 갑자기 변화하더니 어디론가로 뛰어가버렸어. 상황을 보니, 김규현도 같은 상황인 것 같
은데.”
“응, 역시 빠르구나. 근데 엘뤼엔은?”
“너희랑 같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엘뤼엔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무엇보다 마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이
니까 말이야. 그런데, 엘. 세이 치료 안해?”
조금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트로웰은 세이의 상처를 흘긋 보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하던 걸 이야기할 수 밖에 없
었다.
“했어. 그런데 저 정도에 그쳤어. 아마… 생각하긴 싫지만 전과 같은 상황이 있게 된다면 그거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할 거야.”
“상황파악이 빨라졌는데? 음, 지금 봐서는 악신의 재부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만큼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는 힘들어. 아마,
지금은 전체적인 자연력이 약해서 그럴 거야. 그보다는, 아카데미에서는 추가 병력을 지원하진 않을 것 같으니 일단 지금 지구에
내려 와있는 우리들끼리 해결해야할 거야. 혹여, 여러 가지 이유로 너의 치료술이 먹히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간단한 응급치료법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어. 세이도, 유안도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밥을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밥을 안먹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하태진은 괜찮은 것 같으니 우리가 싸우는 동안 보호할 방법도 좀 생각해봐야겠어.”
역시, 트로웰. 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상황을 정리해버리고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을 짚어내는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유
안은 단순히 마나를 급작스럽게 많이 소모해서 잠시 쉬면 괜찮아진다고 어깨를 으쓱였고 세이는 동여맨 붕대를 잠시 보다가 이정
도는 괜찮습니다, 라고 어떻게 보면 평상시와 같이 조금은 밉살맞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태진은 의외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적에 대해, 전투에 대해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이 다치거나 아파할까, 그게 두려웠다.
*
[놈]
“가서 엘뤼엔을 찾아.”
트로웰은 가볍게 놈을 불러서 그렇게 말했다. 놈은 이마를 땅에 대듯 인사를 하더니 이내 땅속으로 다시금 들어가버렸다. 엘뤼엔
을 찾으러 간 것이리라. 트로웰은 상당히 심각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로웰.”
“아, 엘.”
“왜 그래, 조금 심각한 얼굴이네?”
“김규현은 어떤지 땅의 기억을 조금 읽어봤어. 물론 흐릿하기도 하고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자연에도 상당한 충격이었던지 다른
건 몰라도 김규현의 모습은 확실히 보였지… 김규영도 마찬가지였어. 그들은 대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신계에서는 대강
파악하고 있는 듯 한데 말이야. 임무라는 핑계로 알려주질 않으니, 답답하네.”
트로웰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심통어린 표정에 난 풋, 하고 웃었다.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언제나 어른스럽던 트로
웰의 가끔 이런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트로웰은 내가 웃는 이유를 바로 안 듯 피식 하고 웃어버렸지만 말이다.
“일단, 아버지하고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야할 것 같은데. 본거지를 안다고 해도 우리끼리 갈 수는 없을 거고.”
“응, 그래서 놈을 보냈지. 하지만… 연락이 될지는 모르겠어. 사실 엘이 아까 보냈던 시큐엘은 김규영의 공격으로 소멸했거든. 다행히도 너에게 큰 타격이 가진 않았지만. 놈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최악의 경우엔 우리끼리 적과 싸워야할 수도 있지.”
“저, 트로웰님.”
“무슨 일이지, 세이?”
“칼프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 칼프. 아마 그녀석도 엘뤼엔과 함께 있을거야. 걱정하진 않아도 돼. 조금 걱정이 되긴 하겠다. 두 다혈질이 먼저 급습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트로웰이 말한 두 다혈질이 누구들을 지칭하는 지 쉽게 안 나와 세이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때 갑자기 집안에 인기척이 났다.
“누구야!”
나는 바로 소리치며 얼음창을 소환했다. 트로웰 역시 흙을 단단히 굳혀 인기척이 난 쪽으로 움직이며 세이를 보호했다.
“이런…”
흙먼지가 가득해졌지만, 트로웰의 능력인지 곧 가라앉은 흙먼지가 드러낸 것은 신기한 눈동자의 남자였다. 세이가 밝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인 듯한 이름을 불렀다.
“에페스!”
“쿨럭! 엘뤼엔이란, 마신이 가보라고 해서 말이야. 왔는데 생각 외로 처참하군 그래. 정령왕과 마왕까지 있는데 말이야.”
트로웰은 흙을 잔잔히 가라앉히고 나는 얼음창을 소멸시켰다. 그는 고개를 살짝 휘틀려 유안에게 까딱이며 말했다.
“마왕, 류칼레시안이군. 물론 난 주인이 있으므로 인사는 해두겠지만 그 이상의 대접은 바라지 말도록.”
“아아, 블랙 드래곤인가? 알고 있어요. 클로네의 가디언에 대해서는 충분히. 하지만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
“조금, 그런 것 같군. 하지만 나름대로 초초했다고.”
유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조금 무례한 듯 보였다. 하지만, 트로웰도 묵인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일단, 우
리 편이 생긴 것에 대해서는 좋아해야 할 것 같았다. 엘뤼엔이 보냈다니…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걸까?
또 다른 의문만 늘어버렸다.
*
“그다지 전령의 역할을 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지만, 내 주인이 바라는 일이니 그렇게 해주지. 그, 엘뤼엔이라는 신
이 말하길 ‘곧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그 때까지 섣부른 짓은 하지 말도록. 특히, 엘은 다른 곳에 들쑤시고 다녀서 일을 더 크
게 만들지 말도록. 트로웰도 마찬가지. 그리고 내 아들이 털끝하나라도 다치면 가만두지 않겠어.’ 라고 하더군. 신도 팔불출이 있
긴 한 모양이야, 여기까지 질문 있나?”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세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안은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어지
간히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별로, 그런 건 없지만. 결론은 여기서 닥치고 있으란 말인가요?”
“뭐, 그렇게 받아들여도 무방하지만 난 나의 주인을 건든 자를 가만히 놔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같이 가겠나?”
“좋죠.”
아아, 아버지. 아버지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할 사람을 보낸 거 같아? 우리한테 화내기 없기야?
트로웰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본거지라도 급습하겠다는 거야? 겨우, 막 성년이 된 드래곤이?”
“못할 것은 없지. 이곳이 지구라는 곳이라고 해서 빌빌대는 모양인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어쨌든, 정령왕이라는 것도 딱히 대단
하지도 않군.”
“에페스. 정령왕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삼가주십시오. 그들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아, 알겠다고. 세이라키아. 하지만 일단 가서 병력과 위치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 누구, 같이 갈 사람 있나?”
“내가 같이 가도록 하지. 일단, 세이 너는 팔부터 치료하고 있어.”
유안이 겉옷을 하나 걸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걱정이 된 내가 잡으면서 물었다.
“유안, 피곤하지 않아? 아까 마법 많이 썼잖아.”
“괜찮아, 엘. 단지 연습이 부족했을 뿐이야.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보다 엘, 정령도 만들고 해서 너야말로 피곤할 것 같은
데.”
“참나, 정령왕의 체력을 뭘로 보는 거야. 아무튼 꼭 가겠다고 한다면 손 이리 줘봐.”
나는 유안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언령을 외웠다.
[회복]
“여기선 확실하게 회복시키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체력회복정도는 될 거야. 무리하지는 말고.”
“알겠어, 엘. 지금 보니까 엘도 잔소리 쟁이 인걸.”
유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역시 웃어버렸다. 누군가를 챙긴다는 것, 누구한테 챙김 받는다는 것, 누군가를 소중히 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가슴 한 켠이 무척이나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
[외전] 유안의 이야기.
“마왕이 생각 외로 유약하군.”
“무슨 소리입니까?”
집을 나서자마자 세이의 가디언인 에페스가 낮게 말했다. 나는 그를 쏘아보며 낮게 되붙였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미
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마왕 류칼레시안은 잔혹한 성품을 가진 자라고 하던데 지금 보니 허풍이었던 것 같군.”
“그건, 제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에페스씨라고 했던가요? 조금 예의라는 걸 배울 필요가 있으실 것 같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지 이런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도 그런 것 같았다. 엘은, 얼굴에 그런 게 다 들어나서 불리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엘다웠다. 그래서 내가 먼저 오겠다고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 때도 이랬다. 마지막 선택의 시간에, 유예기간을 이곳 환 아카데미에서 가져버린 것이. 대체 왜 나는 그 때 머뭇거렸던 것일까.
물론, 이곳에서의 인연, 마계에서의 인연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저 조금, 두려웠을 지도 몰랐다.
“뭘 그렇게 생각하지? 다 온 것 같은데, 넋을 빼놓고 오면 위험해.”
“…결계가 쳐져있는 것 같군요. 억지로 깨부수는 것보단 일단 돌아가서 지원병력을 기다리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에페스
씨.”
“마왕이 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그의 마나의 움직임이 활발해 지는 것에 마법을 쓰려는 것을 눈치챈 난 그의 팔을 잡았다.
“신들과 정령왕들이 그렇게 심각한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지금 저들을 날려버려서 안끝나면요? 그땐, 어떻게 하시려구요? 패기
가 없는 게 아니라, 에페스씨가 너무 생각이 없으신 겁니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아까부터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꾹꾹 참고 있었다. 이래뵈도 하르파스에게 말 놓기
까지 한참이 걸린(...) 동방예의지국의 소년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아까 말하지 그랬나. 소심하긴. 뭐, 알겠다. 그럼 위치도 알았겠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곧 지원병력이라
고 부를만한 자들이 올테니까 말이야.”
정말 끝까지 밉살맞은 자였다.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빠르게 날아가는 세 개의 검은 구체를 보았다.
“에페스씨, 저건…”
“서두르지.”
에페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심각함이 어렸다.
[17] Mission (7) War(전쟁)
유안과 에페스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곧, 지원 병력이라는 사람들이 도착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엘님 그리고 세이님?”
나름대로 초호화판이였다. 세메이온, 아스카, 크로아첸, 이프리트, 그리고 자신을 마족이라고 소개한 바라크 고모리와 무지개의
신녀라고 소개한 7명의 클래스메이트들, 그리고 …정말 오지 않았으면 싶었던 카노스까지.
“카노스, 아버지는요?”
“엘뤼엔은 곧 올거야. 그보다 위치는 확실하게 잡아낸 거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리는 카노스 대신 새침하게 대답하는 이프리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유안이랑 에페스씨가 올거야. 확실한 위치를 잡아내려…”
말을 마치기 전에, 이 흐릿한 지구 안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그때와 비슷한 감각에 나는 말을 멈췄다. 다른 이들도 다들 느꼈는지
전부다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 유안과 에페스가 안 왔는데… 세이도 말은 안하지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무지개의 신녀 중 가장 작지만 무언가 범상
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에머티스, 라고 소개했었나. 무언가 자존심이 매우 강해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왔다.”
그가 중얼거리자마자 집안엔 다시금 흙먼지가 일었다.
“누구냐?”
바라크가 들고 왔던 거대한 검을 꺼내들며 흙먼지의 중심지로 향해 겨누었다. 트로웰 역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정령왕들과 신들, 그리고 마족들에… 인간들이라… 이정도면 한 번에 악신께서 부활하실 수 있겠군.”
“켈켈, 그럴 거야. …챙겨왔지? 헤인?”
“물론. 누구부터 시작할까?”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들이 기분 나쁘게 들렸다. 이것들이, 감히 정령왕과 신들을 두고 그런 소리를 해? 나 역시도 양손에 냉기와
회오리치는 물을 모으고 싸움 준비를 했다.
“…늦어서 미안. 조금 빨리 도착했어야 하는데, 공격을 받아서.”
유안과 에페스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도착을 했다. 에페스의 양손에는 규현 형제가 붙들려 있었다.
“에페스, 그들은…?”
“공격 해오 길래 일단 잡아왔다. 그래야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세이가 묻자 짤막하게 대답한 에페스는 이미 기절한 두 형제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잔뜩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대강 쓸어 올린 그
는 ‘기분이 나쁘다.’ 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듯 서 있었다.
가장 먼저 그들을 공격한 것은 신녀들이었다.
각자의 특성을 살린 무기들인지 각자 다른 것들을 들고 공격 하는 신녀들의 모습을 잠시 보던 우리들도 그들에게 공격을 하기 시
작했다.
의외로 가만히 있는 카노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일단은 저들을 해치우던 붙잡던 해야 끝나기 때문에 앞에 있는 자들에게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의외로 약했다. 거의 제압이 되어가는 모습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분명 강대한 것처럼 느껴지는 힘의 기운이었지만 예전 악신과 싸울 때처럼 거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평온한 느낌. 경험이 쌓여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어색할치만큼. 게다가 세메이온과 아스카 역시도 싸움에 집중한다기보다는 우리를 살피는데 더욱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가만히 팔짱끼고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카노스가 눈을 찡긋 거리며 외쳤다.
“…시험종료.”
그와 동시에 앞에 있는 세 흑마법사들을 사라졌다.
나와 세이, 그리고 유안의 표정만 X씹은 표정이 되었다.
[18] Mission (8) End(끝)
“수고 했어. A클래스의 삼인방. 냐하하하, 오랜만에 내 진중한 모습이 멋있었나?”
“하나두요! 카노스! 이게 대체 뭐에요!”
“우리 사랑스러운 학생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야 있나, 당연히 Show 였지! 물론,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김규현, 김규영 형
제가 그것에 가담한 것도 사실이라고. 우리가 먼저 손쓰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 피해가 있었을 거야.”
“그럼, 아버지는요?”
“엘뤼엔은 말이지… 오, 저기 오네.”
“야, 이 썩을 자식아!! 감히 이런 짓을 벌여!! 아들, 괜찮아?”
“아아… 응.”
잔뜩 화가 나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난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뭔가, 허무해. 세이만 다치고… 잔뜩 불평하려던 나는 멈추고
말았다.
잠시 그런 우리를 보다가 슬그머니 나가시는 세메이온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라도 마무리라도 하러 가는 걸까? 나 역시도 슬그머니 그를 따라나 왔다.
[외전] 태진의 이야기.
과거에서 엘은, 울었다. 엘의 친구, 인 유안과 세이는 크게 다치고 그의 아버지이자 담임인 엘뤼엔 역시도 다쳤기 때문이다. 나 이
외에도 특별한 영혼을 이용한 흑마법사들에 의해 악신은 결국 부활하고 말았고 결국 주신이 나를 제외한 지구와 지구인 전체를 봉
인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친구들이 없다.
엘이 물었을 때, 나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다 보셨나요, 태진님?”
“네.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요.”
“태진님이 기억하는 것과는 다를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당신의 기억을 이용해 미래를 바꾸어버린 우리가 원망스럽지는 않나
요?”
“엘이, 울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족합니다.”
내가 무엇보다 안도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엘은 황당해하긴 했지만 울지도 않았고 상처입지도 않았다. 지구에서의 인연으로 지
훈… 아니, 엘이 상처 받는다면 그것은 결국 더 큰 상처로 다가 올 테니까, 다가 왔었으니까.
“엘님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가, 이런 걸 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곧바로 들려오는 미성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버렸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엘.”
“태진님,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엘님은 더 이상 새 장속에 여린 아기 새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태진님께 보호받으며 그렇게 살아
오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신을 지킬 만큼 커버린, 엘님이 계십니다. 굳이 감추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당신, 일부러 이런 건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용히 나왔는데도 알아채신 거보면 엘님은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단아하게 웃고는 뒤돌아서 가는 세메이온을 보던 태진은 이를 악물었다.
“태진아. 나한테 설명해주지 않을 거야?”
“난, 네가 알지 않았으면 좋겠어. 엘.”
“태진이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내가 상처 받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거면 말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모르는 6년
간 태진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하는 것도 친구의 역할이니까. 그걸 가르쳐준 것은 태진이, 바로 너였으니까.”
태진이는 옅게 미소 지었다. 타오르는 검은 눈 가득 투명한 물이 고였다. 태진이는, 외로웠던 것이다. 태진이는 나직하게, 그리고
세세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잠자리의 아이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것이 지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19] comeback
“아, 이 침대가 그리웠어. 지구는 역시, 신경써야할게 너무 많았거든.”
유안이 침대로 뛰어들며 그렇게 말했다. 세이도 자신의 침대에 살며시 앉으며 중얼거렸다.
“유안도 지구 출신이라고 하셨으면서 가족들 안보고 와도 됩니까?”
“아아, 괜찮아. 돌아 갈 거거든. 그리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모두 이 모습으론 못 알아봐.”
“그게 무슨…?”
“음… 속이는 건 내 성격도 아니겠다~ 대강 말하자면, 난 원래 류칼레시안 세르피오가 아니야. 한국의 대성 고등학교 3학년에 다
니던 하유안이라는 평범한 어, 학생이었지. 난 아스타로트씨와 계약을 맺었어. 그가 부탁하는 일을 해준다고. 그리고 그 일은 류칼
레시안의 대역을 맡는 일이었지. 일이 모두 끝나고 아스타로트씨는 내게 제안을 했어. 류칼레시안으로써 남은 삶을 더 살아가지는 않겠느냐고. 난, 두려워서 대답을 보류해버렸어. 그래서 잠시 생각할 기간 동안 이곳, 환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던 거야. 그리고 오늘 깨달았어. 마계에서, 그리고 이곳 아카데미에서 내가 맺은 소중한 인연들은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옳기도 하고.”
“그럼 유안은….”
“난 환 아카데미의 2학년으로 올라가지 못 할 거야. 하지만, 지구에서 대학생이 되겠지.”
싱긋 하고 웃는 유안의 모습은 모든 고민을 털어낸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불꽃처럼 환하게 웃어주는 것 같아서…
“유안, 꼭 다시 만나자. 다른 모습으로라도.”
유안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세이 역시 웃었다. 나도… 웃었다.
[외전] 마무리.
“정말… 돌아가시는 겁니까?”
떨리는 하르파스의 목소리에 난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결심한 내용을 하르파스와 아스타로트씨에게 전했을 때의 반응은 극과 극
이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둘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는 지도 몰라. 하르파스. 나는 선택 할 수 있는… 뭐랄까, 어쩌면 누구에게도 오기 힘든 선택지를 받았
는 지도 몰라. 하지만… 난 고민하고 있었어.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는데, 하르파스와, 아스타로트씨와, 바라크씨와 미엘과 카켄
과 그리고… 자키와 루스와 같이 평생 만날 수 없었을 이곳에서의 인연들과 모든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서… 그래서 겁을 내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는 지도 몰라. 이곳에서의 관계가 중요한 만큼… 그곳에서의 관계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오늘 알았어. 헤
어진다고 아주 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가 마계에서 지냈던 날들을 하르파스도 다들 기억 할 거잖아? 물론 나도 기억할 거
고 말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어.”
하지만 내가 말을 마쳤을 때 두사람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유안. 확실하게 결심한 것 같구나.”
아스타로트씨가 그렇게 말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하르파스도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붉은 눈은… 슬퍼보이기도 했고 날 칭찬
하듯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이죠. 제가 결심을 하면 확실하게 한다구요!”
“그래, 알겠다. 하지만… 1학년 정도는 확실하게 마치고 가라. 마계의 왕으로서 마지막 일 이겠구나. 1학년을 잘 마무리하는 것.”
“네, 아스타로트씨. 그럴게요.”
아스타로트씨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다시 교무실로 들어갔다. 하르파스만이 붉은 눈으로 가득 나를 담고 있었다.
“하르파스. 미안해. 하지만 똑똑한 하르파스라면 알 거야. 내가… 사실 더 이상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난, 여기에 속해있는 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돌아간다손 치더라도 하르파스도, 다들 나를 잊지 않을 거니까. 안 그래?”
“네, 유안님.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제 마생에 유안님을 만난 건, 정말이지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유안님으로 인해 전 많이 달
라졌으니까요.”
나는 빙긋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똑똑한 그라면. 나 역시도 많은 부분들이 달라졌으니까. 하르파스도 눈물 가득 고인 얼굴로 나를 향해 웃었다.
이렇게 마무리 하는 거였다. 나는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족의 몸이란 대단해서 눈을 감으면 벌써 몇 년 전에 보았던 형들과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선명하고… 또한 선명하게… 하지만,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돌아갈 수 없는 자도, 돌아가선 안 되는 자도 있다.
나는 정말이지,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옅게 불어, 이제는 익숙해진 은발머리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곧, 검은색 짧은 머리로 바람이 분다 손쳐도 이렇게 내 머리
를 볼 수 있는 날은 별로 없겠지… 슬프기도 홀가분하기도 했다.
마치 내가 모든 일을 다 마무리 했을 때처럼…
[외전] Christmas
-전체 스토리와는 크게 상관없는 외전입니다. 작은 단편처럼 봐주세요.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 성탄절 : 12월 24일부터 1월 6일까지 예수의 성탄을 축하하는 명절. 우리나라에서는 12월 25일을 공휴일로 하고 있
다.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
"세이!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면, 반짝이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휘날리며 헐레벌떡 달려와 집안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인사를 건네던 카밀에게 인사하던 한 마디
"메리 크리스마스, 카밀."
*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 크리스마스 이브라고도 부르는 날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크리스마스 휴일이지만.
나는 세이라키아, 모두들 세이라고 불렀다. 신분은 환 아카데미의 1학년생이었다.
올해 초에 입학해 아카데미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분주했다. 파티도 준비하고 미숙하지만 직접 파티음식을 준비하는 조리과 학생들, 그리고 수업이 없는 교실을 빌려 조용히 기도하는 종교 동아리 학생들, 평상시와 다름 없이 공부를 하는 아이
들,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축제의 활력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등 다양한 아이들이 보였지만 세이는 가만히 창가에 서서 조금 어
두운 듯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다고 할 지는 몰라도, 세이는 눈이 오는 게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유일하게 자신의 친구이자 형제인 카밀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이 아카데미에 입학 했는 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너무도 급작스럽게 이 아카데미로 왔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건 맞지만, 환 아카데미는 '바깥'에서도 유명했다. 상당히 수준 높고 자유롭지만 허가 된 자 이외엔 발을 들
여놓을 수 없는 학교.
세이는 가만히 손을 모아 입김을 후우- 하고 불었다. 눈이 올정도로 서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하늘은 어두워지기만 할 뿐 눈 한송
이가 내리지 않았다.
*
익숙한, 그리고 청명한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세이."
"아, 엘. 무슨 일이십니까?"
푸른 물빛 머리카락, 청명하고 맑은 푸른색 눈동자에 상당히 중성틱하게, 그러나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게 생긴 사람. 이곳에 와서
친해진, 그리고 룸메이트인 엘이었다. 정식 이름은 엘퀴네스, 물의 정령왕이다. 사실, 클로네 족인 나로서는 물을 지배하는 자는
경외의 대상이지만 그가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오로지 '엘'로써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 곧 파티 시작할거 같아서. 어서 가자."
"네."
나는 슬그머니 등 뒤의 창가를 다시 한번 흘긋 본 뒤 그를 따라나섰다.
눈은,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엘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자 상당히 많이 꾸며진 교실이 먼저 보였고 여느 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입가에 잔잔한 미
소가 어린 담임, 엘뤼엔 역시 조금은 낯설었다.
"어? 세이 데려왔어?"
"응. 저쪽 창가에 있더라구!"
엘이 웃으며, 유안이 내미는 장식을 받아들었다. 나는 흥미롭게 그들이 이곳 저곳에 장식을 달고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끝낸 임무에서 나 혼자만 조금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엘과 유안이 절대 안정을 자꾸 주장하고 있어서 돕지도 못하고 그냥 적당히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빛이던 그가 지금 내 곁에 없어도 나의 곁엔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만한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날이 아니면 별로 그를 떠올릴만한 일이 없었다.
곧, 한 해가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
파티가 마무리가 되고 피곤했는지 유안은 꾸벅꾸벅 졸다가 엘이 뭐라고 속닥거리자 화들짝 일어나며 “화장실 좀!”하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전체적으로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이, 우리가 선물을 준비했어.”
엘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그곳에는 유안과, 유안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머리를 한,
“카, 카밀님?”
“세이, 오랜만이다! 어째 한번을 안오냐! 네 친구라는 류칼레시안이라는 친구가 날 데려오지 않았으면 널 1년 동안 보지 못했을 거야! 그보다, 여긴 대체 어디야?”
1년동안 별로 변한 게 없어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카밀님도 들어 보셨을텐데요. 이곳은 환 아카데미,입니다.”
이제, 카밀. 너에게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의 부족한 질투심으로 존대말을 했던 내가, 너에게.
어느 새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에필로그]
2학년이 되었다.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엘뤼엔은 여전히 서류에 파묻혀서 주1회 수업을 고수하고 있었고 세이는 전과 다를 바 없이 바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태진이는 B클래스에서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리브로부터 말을 전해듣는데,
요즘엔 ‘아스카’님에게서 검을 배운다나? 원래 운동신경도 있던 애이니 만큼 쉽게 배울 것이다.
나도 배웠는데 뭘.
안타깝게도 마법에는 재능이 없다고 했다. 4000 년 전 나에게 기초마법도 못하냐고 타박했던 그가 떠올라서 한참을 웃었다. 하긴, 절대 인간이 되지 않을 거라 말했던 그 ‘이프리트’가 ‘하태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충격이었다.
그리고 세이는 이번에 새로 입학한 그의 사촌이자, 우리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 환아카데미에 초대했던 카밀이라는 아이와 어색해보이지만 -사촌에다가 같이 자랐는데 왜 저렇게 어색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노력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유안은 말했던 것처럼 돌아갔다. 그녀석이 원래 돌아가야했던 곳으로. 그를 보내고 온 아스타로트 선생님은 묘한 표정으로 내게, 그 말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슬프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순 없을 지라도.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새로 만들어진 인연들도, 기존에 있었던 인연들도 모두 내게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이 아프거나 울지 않도록 행복하게만 지낼 수 있도록, 나는 가만히 그렇게 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나역시도 행복할 수 있도록.
오늘도 소중한 이들이 내게 외쳐주는 한 마디가 감사하다.
“생일 축하해!”
예전엔 미처 몰랐던 행복.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챙겨준다는 것. 아크아돈에 와서 아버지와 그리고 미네, 이프리트, 트로웰, 페르데스, 크로아첸들이 아니었으면 그것의 소중함과 행복감을 몰랐을 일. 그리고 새로 생긴 세이와 유안이라는 새로운 친구들 역시도 나에게 행복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마치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당연한 수순으로.
I'm so happy today(나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End*
*
으아, 1년 짜리 리퀘였습니다^^ 전 약속은 지켰습니다!!!!
세현님 생일 축하드리구요... .. 뒷부분이 저런건... 웃으시라고...... ... 죄송합니다..
^^ 보시기 편하라고 엔터와 수정작업은 잠시 했더니... 편지를 올린 시간에서 한시간이나 오버했네요....
어..음... 에이, 1시도 세현님 생일이고~ 0시고 세현님 생일이잖... 죄송해여....^*^....
아무튼 다들 웃으며 해피하게 끝났기 때문에 ^^ 세현님도 해피하게 하루를, 일주일을, 한달을, 일년을, 십년을, 평생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ㅂ^
+) 더하여, 처음 이곳에 연재했을 때 약간의 문제로 인해 연중 후, 완성작을 가지고 오겠다고 했을때 기다려주신다는 분이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글기준 88877자입니다^^ 외전 7편, 본편 19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꽤 길어져버렸네요. 처음엔 중편으로 시작했는데. ^^ 끝을 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 글을 받으실 세현님도, 이 글을 읽어주신, 읽어주실 많은 분들 웃으며 제가 망상한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실수 있다면 더 기쁠 것 같습니다.
p.s 글자수좀 길다고 렉걸리는 제 컴퓨터 때리고 싶어요.진심.
p.s2 ..... 다음자식... 1메가 용량제한이 있었다니...! 충격입니다.
첫댓글 ㅇㅁㅇ?!!!!!거...겁나 길군요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역시 전 액션이 좋아요♥좋게좋게 끝나서 다행입니다!!그건그렇고 강지훈...역시 인기많았....하핫
...뭔가 글자 수가 엄청나군요...
우...우와...엄청기네요... 잘봤습니다! 엄청 재미있어요!
초성 수정해주세요~
엄청 기네요.. 쿨럭! 그래도 재밌게 봤습니다!!
아잣님 너무 잘봤습니다!!이 엄청난 길이...!멋있어요!!! 보면서 내내 우리 하르파스는 어디나오지 한건 안비밀이네요!환아카데미라니, 저도 입학하고 싶습니다!ㅠㅠ
자음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잣님 최강이시군요..
학교물이 보고 싶어서 academy라는 이름에 읽어봤는데.. 엘 유안 세이가 룸메이트라는 설정에다가... 실감나는 학교생활도 너무 좋았고... 깨알같은 환 아카데미라는 이름과 찜사드립...^p^ 지구로 가는 것도 재밌었고요..내용이 재밌고 훈훈했어요!^^
긴 분량이었지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흥미진진했어요! 잘 보고 가요♥
이..이야.. 엄청난 분량이네요..:Q... 다음에 찬찬히 읽어 봐야 겠구..! 상 하편 모두 검사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