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우신 서예 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유형재를 따라서 붓을 잡았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예와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 개인전을
열 정도로 조숙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유행재를 떠나서는 나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의 인연이 깊다.
나는 그가 개인전을 할 때 무려 8점의 찬조작품을 출품했다.
지금 생각하니 눈치 없고 염치도 없는 행동을 한 것 같다.
그는 글씨에 입문을 하게해준 고마운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기본 필법을 지도해준 스승이었다.
친구의 폭넓은 배려가 없었다면 서예와 그렇게 빨리 가까와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형재는 함께 대회를 나가면 자기 글씨쓰는 것을 제켜두고 나의 화선지를 먼저 접어주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친구는 넓은 이마 만큼이나 도량이 무척 넓었다.
스승복이 있어서인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장암 이곤순선생을 만났다.
당시 그분의 연세는 20대 중반이었지만, 점잖은 4, 50대를 연상할 정도로 중후한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그분을 만났던 70년대 초반 갑자기 서예붐이 일어났다.
당시 서예학원을 찾는 사람은 주로 성년이었으며 아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회원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았다. 그렇게 여성서예인구가 많아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시집을 잘 가기 위해서 서예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서예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조건이었다.
글씨를 쓰지 않으면서도 붓말이를 들고 다니며 서예하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아가씨가 있을 정도로 서예의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서예의 황금기때 대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신 분이 장암 선생이시다. 30세가 채 되기도 전인 젊은 나이에
문하생전을 여러번 가졌다. 전시회를 열면 서예를 하는 사람뿐아니라, 서예문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러주었다.
당시는 서예가의 권위도 대단했다. 서예학원을 처음 다니던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전에서
국전 작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특선작가가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의 연고지는 본래 서울이었으므로
그를 제외하면 특선작가는 한분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입선작가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가끔 서울에서 대가선생님이 대전에 오시곤 했다. 당시 대전에는 호텔이 없어 여관에 모셨다. 대가 선생님이 오시면
글씨를 받으러 여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보다 생활이 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거금의
윤필료를 지불하고 애써 작품을 받으려고 한 것을 보면 서예의 인기가 지금보다 월등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인사동에서 글씨를 배웠다. 76년 초봄 여초 김응현선생께서 운영하는 동방연서회(인사동)에서
전서를 배웠다. 전설처럼 여겨졌던 여초 선생으로부터 직접 전서체본을 받았을때의 감동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회원들의 작품을 벽에 걸어놓고 품평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는 한학자 홍진표선생도 계셨다.
품평회 진행을 보시는 여초선생의 모습은 투사를 연상케했으며 쇠소리나는 큰 음성이 아주 남달랐다.
여초선생 특유의 음성으로 "한 마디 해주세요"라고 불쑥 내놓은
부탁에 응수하는 홍진표 선생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다.
큰 소리로 "할 말이 있어야지" 하며 묵언하셨다.
홍진표 선생은 꼬장 꼬장하고 쟁쟁함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다.
홍진표 선생은 한학의 대가이면서 書論에 정통한 분이고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동방연서회에서 발행하는 서예잡지 "書通"에 보면 그분께서 얼마나 서론에 밝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정상 동방연서회는 오래 다니지 못했다. 학과의 수업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하숙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예학원에 나가
공부하는 것이 감당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년 쉬었다가 다시 인사동을 찾았다. 그때 찾은 곳이 일중묵연이다.
당시 一中선생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으며, 그분의 글씨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일중선생과 여초선생은 형제분이면서도 얼굴의 모습도 글씨의 느낌도 달랐다.
연구하시는 서예의 법첩 또한 달라 이분들이 형제인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기질적으로는 공통적인데가 있었다.
두 분의 음성은 쇠소리가 날 정도로 힘찼으며 꼿꼿하고 누구를 대하던 기세가 당당했다.
일중선생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규칙생활이다. 그분의 생활은 시계 그 자체였다.
2시에 출근하여 회원들에게 체본을 해주시고 3시가 되면 노인회원 몇분을 데리고 학원밖으로 차를 마시러 나가신다.
3,40분 정도 자리를 비웠다가 4시가 가까워오면 다시 학원에 돌아오셔서 나머지 회원들에게 체본을 써주시고
5시가 되면 어김없이 퇴근을 하신다. 따라서 선생께서 학원에 출근하셔서 계신 시간은 고작해야 3시간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신문보시는 시간, 손님만나는 시간, 티타임시간을 빼면 지도하는 시간은 참으로 짧다.
그러면서도 당시 한국서예계에서는 비교할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제자를 누구보다 많이 길러낸 것은 그분의 남다른 경영철학이 작용한 것 같다.
일중선생께서는 작품을 함부로 판매하지 않았다.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인품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해도 작품을 팔지 않으셨다.
언젠가 병풍을 써주면 천만원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천만원은 지금의 수억원에 해당된다)
선생은 그자리에서 당신은 무, 배추 장수가 아니라며 단번에 거절했다.
내로라 하는 정치가도 장성들도 그분 앞에서는 위세를 펴지 못할 정도로 선생은 호연정기가 대단한 분이었다.
일중선생을 무서워하지 않는 제자는 거의 한명도 없었던 것 같다.
선생이 계시는 연구실에 들어갈때 반드시 심호흡을 한 후 들어갈 정도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좋았다. 그분의 눈을 보면 어린아이의 눈과같은 순수함과 치기(稚氣)가 느껴졌다.
원칙이 아주 뚜렷하신 분이었다. 화를 내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기분 내키는대로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시키기 위한 엄한 꾸지람이었다.
초서작품을 써서 선생님께 보인적이 있다. 200자 가량되는 글씨중에서 오자 한 자가 발견되었다. 난리가 났다.
4층연구실에서 불호령을 내리시고, 다시 회원들이 글씨쓰는 3층까지 내려오셔서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한바탕 꾸짖으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확실히 변한 것이 있다. 세월이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서예작품을 쓰건 논문을 쓰건 조그만 수필을 쓰건
수십번씩 검토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한번은 "자네는 글씨를 어디서 배웠나"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글씨가 왜 그렇게 더러운가"하며 심하게 꾸짖으셨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에 고민하면서 인사동 전시장을 배회했다.
때마침 동산방에서 동양화가 심산 노수현 선생의 유작전이 있었다.
점묘화법으로 처리된 선생의 그림은 점 하나 하나가 마치 목욕한 듯 깨끗해보였다.
그분의 작품을 보는 순간 노대가의 맑은 그림의 기운이 나의 모습을 비추는 듯했다.
묵연에 가서 다시 글씨를 썼다. 종전과는 달리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면서 진중한 마음으로 점획을 그었다.
그후 며칠이 지나 선생 앞에서 글씨를 썼다. 선생께서는 글씨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혼잣말로 말씀 하셨다. "알아 들었군!" 감격의 순간이었다.
선생께서는 나의 글씨에서 맑은 기운(淸氣)의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특별지도를 하셨던 것이다.
평상시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 속에 등장한 분들을 글로 옮기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글씨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오늘따라 서예와 인연을 맺게해준 친구 유형재가 그립고,
정성스레 지도해주신 장암선생님, 그리고 돌아가신 여초선생님, 일중선생님이 고맙게만 느껴진다.
첫댓글 감사하는마음으로 잘읽었습니다 교수님~훌륭하신선생님을모시고 공부하신 교수님이 많이 부럽습니다...늘 건안히 행복한 봄 맞이하세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의 생생한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현대서예사를 몸소 체험하신 귀한 자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힘드셨겠지만 부럽습니다. 꾸지람을 들으며 열심히 붓글씨를 쓸 수 있는 날 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선생님 글을 대하면 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듭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사람 뒤에는 항상 훌륭한 스승님이 계셨는데 정말 부럽습니다~~~잘 읽었습니다~~
일중선생님으로부터는 쏠리지 않는 중심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쉽게 알수 있는 글 그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와 닿는 글 감사합니다 ^^
좋은글 읽고 갑니다. 그리고 부럽습니다.
가슴이 찡 하네요.. 저도 저의 서예선생님께서 작고하시면 같은 마음일거 같습니다. 며칠전에 스승님께서 하시는 말씀"숨을 고르고 글씨를 써라." 아직도 어렵습니다. 그 말씀의 바른 뜻을..
글씨가 더럽다는 말씀. 혹시 저도 해당되지 않나싶습니다. 아름다운 사제간의 사연을 나누어주시어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말씀이십니다. 스승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학문과 직결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격스러운 글입니다.좋은글읽고 갑니다^ ^
요즘에 이윤용 선생님으로부터 사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선생님이십니다. 사경을 하시면서도 전통서예, 현대서예, 서양미술, 문자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조예와 관심을 가진 분이십니다. 어느날 선생님 노트를 보니 피카소 게르니카를 스케치했는데, 뎃상력이 대단하셨습니다. 70대의 연령을 그렇게 젊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신의 큰 은총이지요. 오늘 문자메시지를 보내니, 시립미술관에서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를 관람하고 계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