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83.84
♧ 개경에 부는 등극의 바람 .
대통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왕도 개경에 폭풍이 지나갔다.
송악산도 무너지고 오천(烏川)도 뒤집어질 광풍이었다.
고려를 패하고 한양으로 몰려간 신생국 조선의 주역들이 개경으로 몰려와 거센 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는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승패는 갈렸다.
패배자는 방간이었고 승리자는 방원이었다.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 역시 패배자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후속조치가 취해졌다. 연복사에 모여 회합을 가진 방원 일당은 방간을 살려둘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삼성(三省)의 이름으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토산으로 귀양 보낸 방간을 개경으로 끌어다 처형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임금의 지친에게 흉측한 장래가 있으면 반드시 베는 것입니다. 이것은 '춘추(春秋)'의 법도입니다. 방간이 동복아우로서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왕실을 보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였으니 법대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疏)가 비록 적법하나 내가 어찌 골육지친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차마 동모제(同母弟)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임금이 소를 보고서 통곡하여 울었다. 형제를 죽일 수 없다는 정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방간의 처형을 거두고 귀양지를 안산으로 옮겼다. 안산은 이숙번의 아성이다. 토산은 동북면과 가까워 태조이성계와 방간을 지지하는 세력이 어떤 일을 꾸밀지 염려스러웠다. 동북면은 태조 이성계의 오랜 연고지역이고 방간이 한때 다스렸던 고을이다. 권력은 권력 설계사의 도면에서 나온다?
혁명의 설계사 하륜으로부터 상소가 올라왔다. 방원을 세자로 하자는 것이다. 예정된 수순의 길목으로 가는 징검다리이다.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靖安公)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이번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소서." - "경(卿)의 말이 옳다." 자신의 적장자를 무시하고 아우를 세자로 하자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왕제를 세자로 하는 변측도 때론 통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이란 1급수보다 혼탁한 물을 좋아하는 생태 환경적 친화력이 강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용상에 앉아 있었지만 임금은 힘이 없었다.
정종은 도승지 이문화에게 전지(傳旨)했다.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번의 변란은 나라의 근본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다.
나에게 얼자(孽子)가 있으나 혼미하고 유약하여 외방에 둔 지가 오래다. 동복아우 정안공(靖安公)을 세자를 삼아 또 내외의 여러 군사를 도독(都督)하게 한다." 군권까지 방원에게 준다는 것이다. 왕이 군권까지 내주었으니 허수아비의 길로 들어섰다, 어쩜 등극 그 차체부터 식물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빠르게 재편되었다. 좌정승에 성석린 우정승에 민제가 발탁되었다. 민제는 방원의 장인이고 하륜의 친구이다.
방원이 세자의 신분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무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호종했다. 조정이 텅 비어 국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호곶(壺串)에서 매를 놓고 사냥하는 흥겨운 놀이였지만 군사 수백명이 뒤따랐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리를 내놓지 않고 버티고 있는 정종 임금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두번이나 지켜봐야 했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수세미 같았다. 국사에 관여하지 않고 흥천사와 정릉사를 오가며 먼저 떠난 신덕왕후와 이제 그리고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어 불귀의 객이 된 방석의 영혼을 위로하는 불사를 벌렸다. 태조가 신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베풀 것 이라는 정보가 방원의 사저에 날아들었다. "덕비께서 참석하신 다는데 정빈도 참석하시구려." 방원이 말을 꺼냈다. 덕비(德妃)는 정종 비이고 정빈(貞嬪)은 세자비로서 방원의 부인 민씨를 이르는 말이다. "세자께서도 참석하시어 태상왕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자가 참석하면 아버님의 심기가 불편하여 아니 감만 못할 것입니다. 정빈만 다녀오시구려." 권력은 바람이다 태조 이성계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방원은 사양했다. 부인 민씨가 몸종을 거느리고 신암사(神巖寺) 불사에 참석했다. 시주도 두둑이 했다. 부인 신덕왕후와 방번과 방석 그리고 사위 이제의 극락왕생을 비는 태조 이성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불사에 몰입했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지켜보는 민씨는 가시방석이었다. 이때였다. 불사를 주관하던 주지스님이 몸을 비비 꼬며 죽어 버렸다.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깊은 산속 산사는 소동이 벌어지고 불사는 중단되었다. 불미한 일을 겪은 태조 이성계는 불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정빈은 자신의 죄업만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황당한 일을 목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직접 찾기로 마음먹었다. 개경인들의 눈이 부끄러워 칠흑 같이 어두운 사경(四更, 1시~3시)에 개경을 떠났다. 정종이 부랴부랴 서둘러 아버지를 지송(祗送)하고자 숭인문에 이르렀으나 태조 이성계 일행을 따라잡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130여필의 마필이 동원된 태상왕 행차가 임진나루를 건너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다.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자신의 행차에 방원이 따라붙은 것을 발견한 태조 이성계는 행차를 멈추라 명했다. "네가 따라오면 신도에 가지 아니하고 행차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 갈 것이다. 냉큼 돌아가거라." 불호령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명에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대장군(大將軍) 박순이 붙잡았다. "태상왕께서 비록 저하로 하여금 따라 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돌아가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상왕께서 한양에서 오대산으로 거둥 하신다는데 만일 저하가 따라 행하면 태상왕께서 반드시 가시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천을 발섭(跋涉)하여 멀리 오대산에 가실 것이니 뒤에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갔다. 한양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에서 정근법석(精勤法席)을 베풀고 옷을 벗어 부처에게 시사(施捨)한 다음 오대산으로 떠나버렸다. 태상왕의 행적이 오리무중에 빠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법왕도승통(法王都僧統) 설오(雪悟)를 한양에 보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청하였지만 설오가 오히려 설득당하여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져 버렸다. "창업한 임금은 자손이 마땅히 받드는 법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태상왕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수상(首相)과 두세 훈로(勳老)를 보내어 나라 사람의 정을 진솔하게 전달해서 거가를 돌이키도록 청하여 성체(聖體)를 보전하고 편안하게 하여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태상왕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비록 재상을 시켜 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힘없는 임금을 마구 흔들어대는 실세들 정종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방원 때문에 상심한 아버지를 돌이킬 미력도 없었고 아우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부복하여 석고대죄 하라 설득할 힘도 없었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었다.
임금이 힘을 잃고 흐느적댈수록 방원 세력의 압박은 거세어졌다. 좌우에 포진한 방원의 추종세력 때문에 숨 막힐 지경이었다. 견디지 못한 정종은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을 불렀다. "왕세자(王世子)에게 선위(禪位)하겠다." 도승지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라 명했다. 폭탄 아닌 폭탄선언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며칠 전부터 수창궁 후원에 밤마다 부엉이가 나타나 울고 여우가 울더니만 불측한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정종에게는 어쩌면 홀가분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학문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는 교서(敎書)를 받들고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은 국보(國寶)를 받들어 인수부(仁壽府)에 나아가 방원에게 바쳤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친 것이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84
♧ 혁명아 왕으로 등극하다
정상은 내려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1400년 11월 13일. 수창궁에서 조선 제3대 왕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방원이 태종으로 재탄생하는 날이다.
송악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성대하게 베풀어져야 할 즉위식이 스산하다. 수창궁 정전 앞에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도열했지만 정작 축하해 주어야할 아버지와 형은 자리에 없었다. "상왕(上王)께서 적장자로 보위에 즉위한 지 이제 3년이다. 적사(嫡嗣)가 없어 미리 저부(儲副)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소자가 동모제의 지친이고 또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정사(定社)할 때 조그마한 공효가 있다 하여 나를 세자로 책봉하고 대임(大任)을 받으니 무섭고 두려워서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종친, 재보, 대소신료들은 마음을 경건히 하여 내 덕을 도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천지의 덕은 만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은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위로 아래로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공경하고 어질게 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에 따라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겠다. 너희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포부를 받들도록 하라." -
즉위교서를 반포하는 태종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나 험난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회군으로 스물한 살 젊은이가 정변의 회오리에 휩쓸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가던 일. 하여가로 회유하자 단심가로 응수하던 정몽주의 얼굴, 송현에서 파리한 모습의 정도전,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방석, 왕도에서 시가전을 벌였던 방간형.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백성들의 축하 없는 즉위식 만백성의 경하를 받아야 할 즉위식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개경인들의 눈초리도 알고 있었다. 경사를 외면하는 백성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두렵다고 회피할 태종이 아니었다. 구겨진 백성들의 마음을 펴주는 것은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주는 이 별로 없는 즉위식에서 그래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하륜과 부인 민씨였다.
일찍이 왕재(王材)를 알아보고 밀착 접근했던 하륜. 18년 동안 변방을 떠돌며 오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야 가슴에 담고 있는 치세(治世)를 펼칠 수 있으니 자신이 천하를 손에 넣은 것만 같았다. 열일곱 어린 새색시가 두 살 연하 신랑에게 시집가 가슴 졸이며 살았던 민씨. 자신이 왕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민부인. 때론 신랑이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따듯한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던 민씨. 방원이 갈등의 기로에서 방황할 때 갑옷을 입혀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민부인. 그랬던 부인 민씨는 자신의 신랑이 면류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즉위식을 마친 태종 이방원은 각사(各司)의 관원을 거느리고 장단 마천(麻川)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방원의 즉위식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태조 이성계는 오대산에 다녀오는 길에 장단에 머물며 즉위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친과 대신들이 참여하여 주연을 베풀어 노여운 마음을 풀어주었다. 건배가 오고가는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하륜이 태종에게 다가왔다. 정상 정복은 하산을 완료했을 때 완성되는 것 "전하, 경하드립니다."
"공으로부터 전하라는 소리를 들으니 민망하구려."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정상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됩니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길이라 알고 있소. 정상 정복은 야망으로 가능하지만 하산은 희망으로 부족하다 생각하오. 정상의 희열을 낸들 모르리오만은 죽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는 것은 정상정복의 미완성이라 생각하오. 내려가는 길을 잘 보살펴주시오." 권좌를 물려받고 세습으로 물려주는 절대왕정시대에 획기적인 발상이다. 역시 자력으로 정상에 오른 혁명가다운 생각이다.
하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권좌에 오르는 날 내려갈 것을 생각한다니 무서운 위인이라 생각되었다. 서른셋 청년이 정상에 올랐다. 오르기 위하여 피와 땀을 많이 흘렸다.
하지만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정상정복은 하산이 완료되었을 때 진정한 정상정복이라는 그의 신념은 훗날 양녕대군 폐위 파동을 거치며 세종에게 선위되어 가시화 되었고 현실화 되었다.
"법도를 바로잡아 태평성대를 이루소서." "법은 원칙의 아랫것이고 폭력은 법의 아랫것입니다. 법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짐의 소망이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말이오. 원칙을 벗어 날을 때 제재하는 수단이 법 아니겠소? 그러하지 아니하오?
하공!"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륜은 머리를 조아리며 지당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륜은 성리학을 필두로 유, 불, 선을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도참(圖讖)과 잡설(雜說)에 능해 당대의 도사라는 별칭을 들었다. 이러한 하륜의 입을 얼어붙게 한 태종 이방원의 논리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방원 역시 성리학을 공부했고 불온한 서적이라 지목받았던 맹자(孟子)를 책장이 헤지도록 독파했으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끼고 살았던 인물이다.
"원칙이 원칙을 벗어나 법도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법의 아랫것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슬픈 일이지만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겠지요." 이것이 그의 법률관이었다. 법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법의 하위개념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때 극명하게 나타났다. 광화문 앞 노상에 천막을 치고 아버지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낼 때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적장자를 벗어난 권좌는 원칙 없는 권력이라 규정했다.
원칙 없는 아버지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것으로 소임을 다 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원칙에서 벗어난 권력은 그 좌(座)에서 부패하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관이었다. 부패하기 시작한 권좌는 소금도 약발을 받지 않으며 폭력을 부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원칙은 법의 상위 가치이고 폭력은 법의 하위 개념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직계를 먼저 잡아라" 삽혈동맹 태종은 흩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는 따르는 직계를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암(馬巖)의 단(壇)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들을 불러내어 삽혈동맹(歃血同盟)의 맹세식을 가졌다.
살아있는 사슴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돌려 마시고 벌건 입술로 서약(誓約)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神)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삽혈동맹(歃血同盟)이라 부른다. "조선국왕 이휘는 삼가 훈신 의안 대군 이화, 상당군 이저, 완산군 이천우, 문하좌정승 이거이, 우정승 하윤, 판삼군부사 이무를 거느리고 황천상제(皇天上帝), 종묘, 사직, 산천백신(山川百神)의 영(靈)에 감히 고합니다.
어질지 못한 내가 오늘에 이른 것은 실로 종친과 충의한 신하들이 힘을 합하여 난을 평정하고 익대 좌명(翊戴佐命)한 힘에 힘입은 바이니 그 큰 공을 아름답게 여기어 영원토록 잊기 어렵습니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상전을 거행하고 길한 날을 가려서 밝은 신령께 제사하여 맹호(盟好)를 맺습니다. 맹세한 뒤에는 길이 한마음으로 서로 도와 환난을 구제하고 과실을 바로잡아 시종일의로써 왕업을 보존하여 자손만대에 오늘을 잊지 말 것이다. 혹시라도 이익를 꾀하여 해(害)를 피하고 사(私)를 껴서 공(公)을 배반하고 맹호(盟好)를 범(犯)하고 기망변사(欺罔變詐)하고 음모참소(陰謀讒害)하면 신명(神明)께서 반드시 죽이어 앙화(殃禍)가 자손만대에 미칠 것이며 범한 것이 사직(社稷)에 관계되는 자는 마땅히 법으로 논할 것이니 내가 감히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취(自取)인 것입니다.
각각 맹세한 말을 공경하여 영원히 이 정성을 지킬지니라." - 철혈통치를 예고하는 의식이었다. 맹세식에 참석한 모두 돌처럼 굳었다. 허나, 흩어지면 모아지고 모아지면 흩어지는 것이 세력이라고 했다던가. 이거이가 하륜을 탄핵하고 나섰다. 인사가 만사인데 하륜이 인사를 전단한다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