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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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정부흥회 담다, 닮다]
02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부부
골 3:18-19 엡 5:31-33
지난주에 한 목사님께서 젊은이교회에서 말씀전하시면서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젊은이교회 또래지기 모임에서 결혼 기도 응답에 대한 간증을 하신 겁니다.
“얘들아, 나는 결혼 못할 줄 알았어.” 이 분이 당시 본인의 외모에 좀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배우자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전도사님은 응답받고 성공해서 결혼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기도 열심히 해봐. 이런 내용이었죠. 그런데 한 청년이 전도사님께 묻더래요.
“전도사님은 그렇다 쳐도, 전도사님과 결혼한 사모님은 뭡니까? 사모님은 기도 안 해서 실패한 건가요?”
그날 큰 싸움이 날 뻔했대요.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다행히 진정을 시키고 무사히 모임을 마쳤답니다.
그러고 나서 모임을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목사님이 거울을 보는데 그런 마음이 들더래요.
“아... 내 아내가 정말 괜찮은 걸까?”
여러분, 오늘은 부부에 대한 주제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부부 관계는 정말 괜찮으십니까?”
결혼이 존재하는 이유
결혼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혼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마련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과 아내의 부부 관계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와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32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리키는 은유요 상징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결혼 제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영원한 결혼의 형상을 반영하기 위해 이 땅의 결혼 제도를 만드신 겁니다. 따라서 결혼한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약속과 신의를 지키는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 의도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일시적인 제도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진짜 이 땅의 결혼이 보여주었던 실재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8절입니다.
[계 19:7-8]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바로 어린 양이자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거룩한 신부인 성도들의 혼인이 실재요 완전한 결혼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상에 존재하는 결혼 제도요 부부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사진을 보지만 만나면 더 이상 사진을 보지 않듯이,
주님이 다시 오셔서 거룩한 신부들인 성도들을 차지하게 되면 더 이상 결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번은 예수님께 물었지요.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자식 없이 첫째가 죽어 둘째가 형수를 맞이하고, 그렇게 셋째, 넷째, 일곱째까지 고엘 제도를 통해 형수를 맞이하여 나중에 다 죽으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성경을 모르는구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왜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겁니다.
부부 관계는 이 땅에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요?
바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부 관계는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무엇이 기준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순종하듯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하는가?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섬기듯이,
남편과 아내가 한눈팔지 않고 오직 배타적으로 서로만을 사랑하는가?
그것을 통해 우리 부부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실한 사랑의 관계를 이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이것이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여 괜찮은가? 라고 물었을 때 상당히 많은 부부가 그렇지 못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 설계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부부
하나님이 의도하신 부부의 모습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31입니다.
[엡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온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도 이 구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9:5]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은 성경에서 네 번이나 반복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의도하신 부부의 3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부모를 떠남, 아내와 연합, 한 몸이 됨, 즉 떠남, 연합, 한 몸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부부의 3요소입니다. 이것을 삼각형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삼각형의 맨 위에 떠남, 왼쪽에 연합, 오른쪽에 한 몸입니다.
이 삼각형이 유지될 때 건강한 부부와 가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 삼각형이 어느 하나라도 부서지거나 빠지게 되면 부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를 떠나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떠남”을 보십시다.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부부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부모와 단절하라는 뜻이 아니라, 부모 가정의 권위에서 떠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모 공경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모가 더 이상 새로운 가정에게 최종 권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했으면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입니다. 최종적인 의사 결정은 이제 남편과 아내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더 이상 자녀를 부모 아래 통제하려 하거나 자녀 부부의 의사 결정권을 가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창세기 2장 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했을 때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당시 아담에게는 부모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아담의 자손들을 위해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요 또한 훗날 부모가 될 후손들에게 주신 성경적이고 행복한 결혼의 기준을 말씀하신 겁니다.
“아담과 하와야, 너의 자녀들이 너희를 떠나서 온전한 가정을 이루도록 떠나보내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한 남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분명히 “남자가”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떠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닙니다. 부모를 떠남에 있어서 키가 남자에게 주로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결혼하면 아들은 이제는 어머니보다 아내가 1순위입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서운하겠지만,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맞습니까? 아내보다 어머니가 1순위가 되니까 자꾸 남편 소리를 듣는 겁니다(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과 아내의 남편이 된다는 의미를 혼동하게 되면 여기서 부부 삼각형의 상단 꼭짓점에 균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한국의 이혼 위기를 겪는 가정들의 원인 중에 시댁과의 갈등이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의 갈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도 있지만, 갈등의 본질 중 하나는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라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 같다는 점에 있습니다. 분명 남편은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났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아들처럼 행동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아내가 느끼는 심정은
“아, 나는 시집을 가서 부모를 떠났는데 이 남편은 아직도 어머니의 아들이지 내 남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느끼는 아내의 극심한 외로움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여전히 남편,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느끼게 되면 아내는 심각하게 이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있죠? 성경적으로 보면,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혼 위기 상담을 했던 결혼한 지 5년이 안된 커플들의 이슈는 많은 경우 이 문제였습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거나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위기였습니다.
아내와 연합하라
그러나 “부모를 떠남” 못지않게 부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연합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삼각형의 좌측 변은 배우자와의 연합입니다. 31절의 “합하다”는 뜻을 직역하면 풀로 붙이다(glue on)입니다. 부부 관계는 마치 두 장의 종이를 풀로 붙여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떼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찢어집니다. 다칩니다. 상처 납니다. 자녀들이 있다면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부부는 부모보다도 심지어 자녀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연합이 되었다는 것은 사랑하기로 결정되었고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상대방 하는 것을 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연합되었고 하나 되었으므로,
그 사람의 모든 허물과 약점도 내 것으로 품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연합된 사랑이 부부가 육체적으로도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부부간의 연합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갈라서게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게 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 되고 연합된 부부를 멀어지게 하고 심지어는 완전히 갈라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의 부부 관계는 괜찮은지를 점검할 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부부의 문제는 증상이고, 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죄입니다.
배우자에게 죄를 짓는 방식이 여러 가지인데, 입과 눈과 몸입니다.
먼저 “입”을 보십시다. 배우자에게 흔히 죄짓는 방식이 폭언입니다.
분명히 19절에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이 말로 아내를 모질게 대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고함, 거칠고 냉담한 말과 욕설, 모욕적이고 비하하는 말, 조롱하는 말, 무시하는 말, 위협하는 말, 거짓말, 그리고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일입니다.
설령 폭언은 하지 않더라도 “말투”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남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내들도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고 거칠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33절에 보면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내가 남편에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말하고 있는가? 아내들은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이 종종 저와 아내에게 묻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도 싸우시나요?
이것이 궁금해서 예전에 어떤 분들은 이 주제를 저희 아이들에게 물어본 분들도 계세요.
네, 저희도 가끔 싸웁니다.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디에 있겠습니다.
단지 어떻게 싸우고 갈등을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요.
저와 아내가 몇 년 전에 부부 싸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 나단 선지자가 살고 있는데 그 날도 선지자 역할에 충실하셨어요. 저는 그때 아니라고 했고, 그분께서는 맞다라고 하신 거예요. 맞는다고 쳐도 그 말을 좀 더 부드럽게 담아냈으면 했는데, 선지자니까,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날 캔사스시티에 한국에서 유명한 원로 목사님 부부가 오셨어요. 유목사님보다 더 연세가 많으신 분이세요.
사모님은 사모님들끼리 한 자리에 다 모여서 대화를 하다가 사모님은 목사님과 싸우실 때가 없느냐고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때 사모님께서 그러시더래요. 왜 없겠냐고. 있지요. 그래서 기도한답니다.
“주여, 이 아무개 목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어느 날 목사님이 집에 왔더니 사모님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더래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본인 기도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러나 그 다음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항상 남편을 작은 주님을 대하듯 하신다는 겁니다. 왜요? 남편을 존경하라!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에도 사라가 여전히 아브라함을 주님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처럼 자신은 남편을 작은 주님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제 아내가 그 말씀을 주님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어요. 그날 이후로 저와 아내는 서로 존칭을 씁니다.
서로 존칭을 쓰니까 서로 더욱 존중하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중하는 시작은 바로 입술이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연합을 위해 우리의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죄를 짓는 또 다른 통로는 ‘눈’입니다.
부부의 연합을 해하려는 죄는 입술만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도 옵니다.
또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자를 주목하는 것, 그리고 음란물 시청입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남성 그리스도인들의 50% 정도가,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20% 정도가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다고 합니다. 배우자를 두고 음란물을 시청하는 것은 사실상 간음입니다. 그것은 점차 부부 사이의 연합을 갈라서게 하고 붙어 있던 종이를 서서히 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벌써 수년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유명한 찬양 사역자가 음란물 중독에 빠졌던 것이 밝혀져 충격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의 아내가 받은 상처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한번은 결혼한 이후에 음란물 중독 때문에 고민하는 분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결혼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순결을 지키기 위해 힘썼는데 음란물에 중독이 되었고 이것도 결혼하면 치유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겁니다. 오히려 음란물이 부부 관계에 장애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자녀가 태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키우느라 남편과 오히려 더 멀어진 겁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너무 귀하고 예쁘지만, 동시에 아이에게 아내를 빼앗겼다고 느끼는 겁니다. 아기는 아내의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것이 남편에게는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는 겁니다. 신혼부부가 많이 실수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자녀도 중요하지만 부부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사람은 자녀가 아니라 배우자입니다. 그러나 이때 부부 관계가 멀어지고 소원해지다가 부부간의 틈이 생기고 바로 이때에 실제 간통하거나 아니면 음란물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여러분, 부부의 연합과 한 몸을 갈라서게 하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가 부부의 삼요소를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 그 피해는 부부만이 아니라 고스란히 자녀들에 갑니다.
우리는 이 부부의 연합을 해체시키고 무너뜨리는 죄에 너무나도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부부의 첫걸음은
우리 힘으로는 이 관계를 지켜낼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중독에 무기력한지, 우리가 얼마나 유혹에 약한지,
우리 힘으로는 부부 관계를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죄, 배우자를 아프게 하는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내가 말로 상처를 준 일, 남편을 더 존중해주지 못한 일,
내가 한 눈을 팔면서, 아내를 남편을 속인 일, 마음으로 간음한 일,
아내를 보호해주고 그녀의 필요를 공급해주지 못한 일, 배우자에게 정직하지 못한 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배우자에게 고백해야 할 죄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부부의 삼요소를 완벽하게 이루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이 땅에 오셨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육신의 어머니를 떠나셨어요.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고 했을 때 온전히 이루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지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연합하시고 한 몸이 되셨어요.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고 감사치도 않고 불순종하고 신실하지 않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서에 나오는 고멜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음녀입니다. 호세아 3장 1절을 보세요.
[호 3:1]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 음녀 고멜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이자 아내인데, 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딴 남자, 즉 바알을 사랑하여 떠난 거예요. 배우자를 속이고,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한 자가 고멜이요, 이스라엘입니다. 그 고멜이 우리입니다. 주님 외에 돈과 명예와 쾌락과 권력의 우상을 사랑한 우리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음녀와 같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우리와 연합하셨고 우리와 한 몸이 되셨습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실 기반을 십자가에서 다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부인 교회를 버리시고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으십니다.
아무리 교회가 창녀 고멜처럼 티나 흠이 많고 주름 잡힌 여인과 같을 지라도,
주님은 신부인 교회를 버릴 마음이 없으시고 마찬가지로 우리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으십니다.
주님은 고멜과 같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수십 번 버릴만한 배우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죗값을 다 치르셨어요.
바로 그리스도만이 깨어지고 상한 부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크다고 한 거예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32, 33절을 보세요.
[엡 5:32]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그리스도가 교회인 우리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서 행하신 완전한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볼 때 창녀 고멜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거룩한 주의 신부로 보시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배우자를 본다면, 바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배우자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배우자를 보라
바로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그들은 부끄러워서 몸을 가립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관점을 잃어버렸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 아름답냐, 흉하냐, 좋으냐, 싫으냐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 선악과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늘 배우자의 단점과 부족한 부분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보세요.
[창 2: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부부의 관계입니다.
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배우자의 약점과 단점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고멜과 같은 죄도 있고 연약함이 있지만, 십자가의 눈으로 보면, 사랑스러운 주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비록 창녀 고멜과 같은 자이나 나의 신부이기에 죄를 간과하고
여전히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를 용서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
저희 막내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운동회의 마지막에 계주가 있었습니다.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홍팀의 첫 주자였던 아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장애가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뛰는 것도 꽤 잘 뛰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이가 장애가 있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시력 혹은 방향 감각에 약간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로 그 옆에는 아빠가 함께 뛰었습니다. 아빠가 함께 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저는 그것이 꼭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방향도 제대로 잘 잡지 못하는 우리,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곁을 떠나지 않으세요. 고멜과 같은 우리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인 겁니다. 그래서 항상 곁에서 동행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랑이신 주님이 신부인 우리를 보시는 관점입니다.
너는 완벽하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지만 십자가 보혈 아래서
“너는 안전하다. 너는 완벽하다. 나의 순결한 신부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자를 볼 때 절대로 그냥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남편은, 아내는 나에게 주신 가장 완벽한 짝입니다.
그 남편 안에, 아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습니다.
부부 관계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복음 안에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듯이,
복음 안에서 배우자를 보면 벌거벗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가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로의 죄와 연약함과 허물을 고하고 용서하고 용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언약이 신실함을 보여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결혼하신 지 30년이 지난 후, 아내 되시는 사모님이 병이 드셨습니다.
뇌종양이 생긴 것이지요. 병 때문에 사모님은 명확하게 생각을 할 수 없었고 남편은 아내를 하루 종일 지켜야 했습니다. 병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도와주어야만 했습니다. 밥 먹는 것부터 해서 씻는 것, 옷 입는 것, 모든 것을 도와주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15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그쯤 되자 사람들이 남편에게 권면했습니다. “아내를 불치병 환자를 위한 요양소나 병원으로 보내세요.”
그때 남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저의 아내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입니다.
아내를 그런 요양소나 병원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모님이 죽기 바로 전에 어떤 분께 이 말을 하시더랍니다.
“제 남편은 제가 결혼할 신부였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꼭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결혼할 때 하는 혼인서약이 있습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다 기억나실 겁니다.
이제부터 평생토록 괴로우나 즐거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할 것이며
오늘의 이 약속을 굳게 지키기로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다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누구의 서약입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교회요 신부된 우리에게 하신 서약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어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형편에 처해 있고, 사랑받을 만한 조건들이 없을 때에도,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마음으로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그렇게 사랑할 때,
그 부부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실한 언약적인 사랑이 아름답게 증거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아름답게 회복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주의 나라가 임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