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에서 5일(2)
(2024년 1월 3일∼7일)
瓦也 정유순
2-2. 소림사(2024년 1월 4일)
하남박물관에서 버스로 약 두 시간 정도 이동하여 하남성 북부, 덩펑[등봉(登封)]의 북방 15km 지점에 있는 쑹산(숭산)의 소림사에 도착한다. 중국 100대 유명 사찰 중 하나인 소림사(少林寺)는 중국에서 오악 중 중악이라 불리는 허난성(하남성)의 숭산에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찰이며,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본산이다. 쿵푸라는 무술로 유명하여 중국인으로 무술을 사용하는 승려는 다 소림사 출신이거나 소림사 승려라고 불릴 정도다.
<소림사 입구>
소림사는 495년 천축(인도)에서 온 발타선사(跋跎禪師)가 창건하였으며, 이후 527년 천축(天竺)에서 온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사에서 수련하여 돈오(頓悟)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중국 선종의 대표사찰이 되었다. 실제로 도교의 중심 도관(道觀) 중 하나인 무당파와 마찬가지인데, 스케일 면에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다. 북송 대에는 승려가 7천 명이 넘어서 이미 숭산에 수많은 말사나 암자를 두어서 공부와 수련 등을 행했고, 소림사 자체는 중앙 총괄본부 정도의 위치로 모여서 회의하는 기능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림사 동자상>
소림사 입구로 걸어 들어가면 숭산소림(嵩山少林) 패방이 나타난다. 청나라 황실 후손으로 당대 중국 서법가 치궁[계공(启功)]의 글씨다. 치궁은 중국서예가협회 주석을 역임했다. 패방(牌坊) 양쪽에 새겨진 ‘선종조정(禪宗祖庭)·무림승지(武林勝地)’는 소림사가 바로 불교 선종의 발상지이자 무술 명승지라는 뜻인 것 같다. 그리고 패방 앞의 큰 바위에는 장쩌민[강택민(江澤民, 1926∼2022)] 전 중국 주석이 쓴 ‘소림문화(少林文化) 인류유산(人類遺産)’이라는 글씨가 소림사의 가치를 말하는 것 같다.
<숭산소림 패방>
대문에서 소림사까지 약 20분 정도의 도보거리다. 소림사에는 10여개가 넘는 무술학교가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800여 개의 반을 운영하고 있어서 혹시 무술 연습을 하는 모습이라도 보일까 하여 목을 길게 뽑았으나 안 보인다. 안내판에는 공연 시간표가 있었는데, 우리가 그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1979년 영화 <소림사>에서 이연걸(李連杰)이라는 배우가 혜성처럼 나타나 소림사의 쿵푸 무예를 세상에 알렸고, ‘중국쿵푸는 세계가 공유(中國功夫 世界共享)’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소림무술관>
선종의 주류가 된 소림사는 무림 도장도 겸비했다. 소림무술이 처음 창시된 시기는 수나라 말기에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과 싸울 때 13명의 소림사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이세민은 당나라의 황제 태종이 된 뒤 소림사에 크게 보답했다. 그 후 홍건적들이 습격하여 불상을 파괴할 때 불목하니로 있던 긴나라왕(緊那羅王)이 불쏘시개 들고 홍건적을 다 때려잡은 것이 시발이라고 한다.
<강택민 주석의 '소림문화 인류유산'비>
실제로 소림 무술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유대유(兪大猷)의 <정기당집(正氣堂集)> 등 일부 사료에 소림 무술이 등장한다. 정기당집에 따르면 유대유가 소림곤법(棍法)이 창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소림사를 방문했으나 이미 소림사의 무술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에 승려 2명을 군대로 불러서 3년간 곤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림사 쿵푸 - 네이버캡쳐>
이후 소림사의 대표무술이 곤법이 되었고, 소림사는 외부의 무술들을 받아들여서 양적 성장을 하면서, 소림사가 총괄 지휘소 역할만 하고 각 말사에서 알아서 적당한 방법을 선택하여 수련했기 때문에 당연히 소림사 사내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협소설에서 소림사만 72종 절예 운운하면서 양으로 때우는 경향이 보여주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림사 계곡의 고드름>
소림무술관을 지나면 소림사 산문이 나온다. 산문(山門)의 ‘少林寺(소림사)’편액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글씨다. 소림사는 당 태종의 보답으로 번성했으며, 송나라 시대에 5,000칸에 이르렀고 승려도 2,000명에 육박했다. 명나라 후기에는 척계광(戚繼光)을 도와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몰아내는 데 참여했고, 왕조와 결탁하면서 성장했다. 1928년에는 군벌 스여우싼[석우삼(石友三)]의 공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전소되고 유물이 소실됐다.
<소림사 산문>
지금의 소림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산문을 지나 통로를 따라가면 무성한 나무와 숲을 이룬 비석군(碑石群)을 지나면, 거의 단층으로 된 천왕전(天王殿)이 이곳에서는 2층 건물로 되어 있다. 세로로 쓴 편액이 2층 두공 사이에 걸려 가깝게 갈수록 보일 듯 말 듯하다. 이 편액은 당대 학자이자 서화가인 추투난[초도남(楚圖南)]이 썼다고 전해지고, 문 위에 있는 ‘天下第一祖庭(천하제일조정)’은 건륭제(乾隆帝)의 필체로 전해진다.
<천왕전>
천왕전을 지나면 종루와 고루가 나온다. 4층 건물로 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는 ‘아침 종’과 ‘저녁 북’을 나타내어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다. 종루 앞의 ‘태종문황제어서(太宗文皇帝御書)’비석은 당나라 현종의 필체로 728년에 세웠다. 태종문황제는 당 태종 이세민을 칭송한 비(碑)로 수나라 말기 민란이 발발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질 때 이세민을 도운 소림사의 공로를 예찬한 비문이다.
<종루(4층)>
<태종문황제 어서비>
고루 옆에 초조(初祖)인 달마와 함께 6대까지 모신 육조당(六祖堂)은 잠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5칸 2층 건물 규모로 옛 모습대로 1980년대에 복원했는데, 편액은 서화가 자오푸추[조박초(趙樸初)]가 썼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을 모시면서, 두 제자인 아난과 가섭도 있다. 뒤쪽에 등을 맞대고 관음불이 좌정하고 있다. 대웅보전을 지나면 장경각이 나온다. 장경각(藏經閣)은 1928년 방화로 전소되기 전 수만 권의 서적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들>
1750년 가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60년의 재위 기간 전국을 여러 차례 순행했지만 숭산에는 제례를 올리려 딱 한번 왔다. 이때 승려와 백성이 열렬히 환영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현장의 모두에게 백은 한 량씩을 하사했다. 당시 가뭄이 극심했었는데, 밤에 갑자기 큰비가 내리자 황제는 기쁜 마음에 한밤중에 시를 썼다. 그 때 쓴 시가 시비로 만들어져 서있다.
<건륭제 시비>
달마정으로도 불리는 입설정(立雪亭)은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을 수행할 때 신광(神光)이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달마를 신봉했다. 어느 겨울 대설이 내렸다. 아침에 문을 여니 밤새 눈을 맞은 신광이 불법을 전승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청하자 달마는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응답하겠다고 했다. 이때 신광은 칼을 들어 왼쪽 어깨를 베어버렸다. 붉은 피가 눈 위로 쏟아지자 달마는 ‘혜가(慧可)’라고 소리쳤다. 지혜가 아주 괜찮다는 말로, 혜가는 바로 제자가 되어 이조(二祖)가 되었다.
<장경각>
소림사와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소림사 승려는 한 손으로 합장하는데, 이는 이조 혜가를 존중하는 표현이다. 입설정 안에 달마를 중심으로 이조부터 오조까지 봉공하고 있는데, 육조인 혜능(慧能)이 없다. ‘보리(菩提)는 본래 나무가 아니라(本無樹)’는 게송(偈頌)으로 유명하다. 게송은 불교 교리를 짧게 시처럼 읊는 형식이다. 혜능의 재능을 알아본 오조 홍인은 가사와 바리때를 전수하고 남방으로 떠나게 하였는데, 다른 제자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했다. 혜능은 남방에 선종을 전파했다.
<소림사 와불>
가장 뒤에 천불전이 있고, 서방성인(西方聖人) 편액이 걸려있다. 마당에 신발 한 짝 들고 서쪽으로 향하는 달마 조각상이 있다. 달마는 소림사를 떠나 구름 따라 떠돌다 열반하여 장례까지 치렀다. 사망 소식을 모른 체 서역을 다녀오는 동위(東魏)의 사신 송운이 지팡이 짚고 신발 한 짝만 들고 맨발인 채 서천으로 가는 달마와 만난 사실을 황제에게 털어놓는다. 황제는 무덤을 확인했는데, 시체는 사라지고 신발 한 짝만 남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세상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인 서방정토로 갔다고 달마를 칭송했다.
<서방성인>
<달마대사 상>
https://blog.naver.com/waya555/223333991597
첫댓글 저 나라는 심 하게 춥지 않던가요?
지금 우리 나라 같으면 어림 없을것 같은데,
그 지방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했고,
그래도 겨울인지라 춥긴 추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