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별이 맘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비는 이제 제법 굵은 빗줄기들로 변해 저희 거실 유리창에 와서 사정없이도 부서져 내립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느 새 제 마음은 까마득히도 먼~ 그 옛날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곤한답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낳고 자란 저는1953년 십리 길의 머난 먼 농촌의 조그만한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학교길은 집을 나서자 마자 논뚝 길, 밭 길, 나즈막한 야산의 오솔길, 다시 논길, 밭길, 징겁다리가 있는 개울물을 건너면
높은 언덕을 올라서면 왕복 경부선이 길게도 가로놓여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건널목은 아예 없습니다.
그 경부선 너머 저만치 나즈막한 야산 양지바른 곳에 저의 국민학교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답니다.
일제 시대의 목장으로 쓰여졌고 지금은 저의 학교로 쓰여지고 있답니다.
전교생이라 모두 360여명.
한 학년 한 학급 씩입니다.
오늘같이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푸대를 쓰고 학교엘 간답니다.
어느 푸대는 너무 낡아 못 쓰고 갈 것도 있었고, 또 어느 것은 새 것인데도 그놈의 쥐들이 여기 저기 다 뚫어 놔서 참으로 아까운 것도 있곤 했었답니다.
그러므로 *푸대를 고를 때면, 요리 보고 저리 보고 잘 살핀 다음에 집어 들어야 했답니다.
*푸대가 크고 구멍이 나지 않을수록, 비를 잘~ 피할 수 있었답니다. 그것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위에 언니나 오빠한테, 빼앗기기 일 수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되는 날이면 하는 수 없이 보릿겨 등이 묻은, 낡고도 구멍 난 *푸대를 땅바닥에 탁~ 탁! 털어서, 그것이라도 쓰고 가야..... 아니 꼭 쓰고 가야만했답니다.
그런 푸대를 쓰고 가는 날에는 여자아이인 저는, 별로 기분이 썩~ 좋질 않았답니다.
학교에 가는 다른 동무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제 행색이 영~ 말이 아니어서, 학교 가는 길 내내~ 영~ 마음이 개운칠 않았답니다
쓰고 가는 푸대를 엄마나 아버지께서 챙겨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그 건 농촌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고, 비가 날에도 꼭 해야만 하는 들일들도 꼭~ 있었답니다.
수수모종, 들깨모종..... 기타, 그 때에 맞춰 하는 일들이 꼭~ 있었습니다.
농촌에선 자급자족이므로 논, 밭은 저희 여러 식구인 온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됐었습니다.
그렇기에 때 맞추어 들 일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저희 반 재식이는 학교에 어린 동생을 포대기로 등에 업고 왔습니다.
저라고 온전히 결석않고 학교에 잘 다닐리 만무합니다.
"얘~ 오늘은 학교 빠지거라~! 타협도 아니고, 사정도 아니고...... 그저 명령이십니다.
남자 일꾼들 열 댓명 사서 모를 심는데 학교를 빠지라 하셨습니다.
들에 싸리까지로 만든 밥광주리에 일군들 밥을 이고 내가야하는데, 물지게에다가 물이랑 국을 지고 가라하셨습니다.
설령 기운이 딸려 물지게를 못 지게 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집에서 많은 동생들을 보살펴야 엄마, 아버지께서 들에나가 일을 하실 수 있기때문입니다.
일꾼들 많이 얻어 모심기나, 벼 베기 할 때 물지게에다 물, 국을 지고 따라가봐도.....
집에 돌아 오면 아무런 보상은 없었습니다.
일꾼 얻어 밥을 많이 지을 때는 큰~ 자반고등어는 저희 집 단골 메뉴였습니다.
그 자반고등어는 들에 다 내 가시고, 집에는 국물만 남기십니다.
들에서는 그 맛있는 자반고등어가 남아올 리 만무합니다.
농촌은 시장도 멀고, 자급자족이라 1년 동안 자반고등어 구경도 못 하는데.....
일꾼들 얻어 들에 밥 내갈 때, 그 때 뿐인데그 자반고등어가 간절히도 먹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저는 맨 밥에 집에 남기고 가신 자반고등어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었습니다.
비가 안 와 논에 물이 말라가면, 또 저희 아버지 안달이 나십니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쯤에서부터는 "얘~ 물 품으러 가자~ " 하시며 두레를 드시고 또 앞장 서 가시네요.
저는 무서우신 아버지 말씀을 거약할 순 없었답니다. 부모님께서 학교에 안 보내 주시어(집에서 아기 보라고), 못 가는 동무들도 많은는데.... 거기에 비하면 저는 그래도 행복이라 여겼었습니다.
벼들이 잘~ 자라 벼 이삭이 패서 익을 무렵이 되면, 그 놈의 참새들이 또 와서 말썽을 부립니다.
훤~ 했던 하늘에 한 쪽하늘이 어두워지는가 싶으면..... 얄미운 참새떼가 어디서 그렇게 몰려들 오는지요.
저희 아버지께선 또, 그걸 보시고 그냥 계실리 만무하십니다.
그 때 국민학교* 4학년 때였었는데요......
저희 논 근처에 있는 그 높은 방죽 둑에다 저를 두시곤 근처 야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큰~ 참나무 큰 가지를 하나 꺾어 오시더니..... 방죽 둑 위에다 그 걸 꽂으셨습니다.
여기 그늘에서 새 쫓아라~ 하시곤 가버리시네요. 근처 사람들도 안 보이고, 가뭄에 콩 나듯이 멀리 하나, 둘 보이곤 하는데..... 그 무서운 들판 높디 높은 방죽 둑 위에다 저를 세워놓으시네요.
그래도 저는 참 ~ 행복했습니다.
부모님 슬하에서 사는 게 늘~ 행복했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예전부터 말이 전해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농삿치가 많은 집은 일부자라고......
아버지께서 평상시 늘~ 혼자 하시는 말씀이있었습니다.
"석화는 이 담에~ 농촌으로 시집 절대 안 보낸다. 농촌은 너무 일이 많고 눈 코 뜰 새 없이 바뻐....... "
남아 선호사상으로..... 자주~ 저를 쓸데 없는 지지배*라고 서운해 하시며 늘~ 입에 그 말씀을 달고 살으실 땐 언제시고...... 하하~ 이런 땐 또, 제 생각을 끔직이도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해방되던 이듬해에 태어나고
해방되던 이듬해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저는, 1953년도에 4 KM 쯤 떨어진 외진 어느 야산 양지바른 한 쪽 농촌의 어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답니다.
저희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목장을 하던 곳이었다 들었습니다. 나무가 썩지 말라고 까만 칠을 한 목조 건물에 교실 6개..... 한 학년에 한 학급 씩입니다.
1학년 때 만난 반 급우들은, 졸업할 때까지 모두 한 교실에서 6년을 함께 공부합니다.
학년이 올라 갈 때마다 한 칸 씩 교실만 옆 교실로 옮겨다닙니다.
일제 강점기 때 말 목장이었었다는 학교는 운동장엔 늘~ 풀이 동산을 이뤘습니다. 틈나는 대로..... 전교생이 수시로 호미로 풀을 캐내었으나, 여름방학 때도 하루는 날을 잡아 호미들고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 풀을 캐내는 작업이 연례행사였었습니다.
날이 풀리는 따뜻한 봄이 오면 학교 가는 등하굣길은동네 어귀를 나서서 부터......
논두렁, 비탈진 야산, 논두렁, 야산..... 또, 논두렁, 시냇물, 경부선 복선 철도, 밭두렁, 논두렁을 차례로 지나다 보면, 어느 새 저희 학교에 도달하게 된답니다. 족히 4 KM는 되는 것 같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학교길...... 한발~ 한발! 내 딛기가 매우 힘이 들고 신고가는 검정고무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이나 진흙투성이가 되곤 한답니다.
학교 길의 맑은 시냇물
바닥의 모래 한 알 한 알까지도...... 훤히~ 시원스레 속속들이 다~ 들여다 보이는 맑은 시냇물! 이 시냇물이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같이 저희들에겐 소중하답니다.
늘~ 송사리 떼들이 노닐고 있는 아름다운 시냇물.....
지금까지 고생하고 신고 온 진흙이 달라붙어 형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그 검정고무신!
신고 왔던 신발이 너도나도 그 맑은 시냇물 속에 들어가면 어느새 새까만 예쁜 검정고무신으로 돌아옵니다.
마음속까지도 말끔히 도 닦이는 것 같습니다.
용의 검사하는 날에는 그 개울물들에 들어가 다시 세수도 말끔히 하고, 어느 동무들은 고운 모레로 싹싹~ 이를 정성 들여 문질러 닦습니다.
지금 같으면...... 하하하~
학교길엔 건널목이 없는 경부선 왕복철도
지금까지 걸어온 학교 길! 농촌이 다~ 그러려니 하지만........ 맑은 시냇물의 돌 징검다리를 조심스레 건너 비탈진 오르막길 뚝 위로 올라서면, 바로 경부선 긴~ 왕복 철도가 앞을 딱!! 가로막습니다.
바로 저~ 건너편, 약 700~ 800 M 전방, 저희 학교가 빤히도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좌, 우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건널목은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삼지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동네도 한 군데도 없고......
보이는 것은 오직 너른 들판의 논과 밭, 그리고 야산뿐이랍니다.
왕복 경부선 복선 철도! 저희들은 두려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경부선 철도를 수시로 넘나 듭니다.
학교 갈 때 넘어가고, 올 때 또, 넘어오고.......눈치껏, 넘나듭니다.
주변에 무슨 표지판이나 말리는 사람이나, 그 철도를 안전하게 건너 주는 어른들은 단~ 한 분도 없으십니다.
그냥 그 게...... 아주~ 저희들에겐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저희들은 그 경부선 철도가 情이 들을 대로 들었습니다.
어느 남자아이들은 큰 대못을 주머니칼로 만들어 쓴다고 간혹...... 선로 네로 위에 올려놓습니다.
기차가 지나간 다음에 보면, 칼 만들기 좋게 납작하게 눌려져 있었습니다.
저희 여자아이들은 하굣길......
그 철도 주변의 잔 자갈 깔아 놓은 곳에서, 공깃돌도 줍기도 하고......
대여섯 명이 선로 위에 마주 보고들 앉아 담소도 나누며 재밌게 놀다가들 집에 가는 일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 철도가 무섭기는커녕..... 저희 어린이들에겐 아주 재밌는 놀이터가 되곤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두가 다~ 위험천만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양철 필통과 양철 책받침
저의 책보자기 속엔 미군들이 다~ 먹고 버린 통조림통을 잘~ 씻어서 잘 핀 다음, 재활용 격인 양철 필통과, 울퉁불퉁~ 일그러지기 일 수인, 양철 책받침이 들어있었습니다.
양철 책받침을 쓰려고 책상 위에 꺼내 놓으면, 책받침 겉에 찍혀 나온..... 옆으로 챙이 아주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코가 아주아주~ 큰 미국 아저씨가 저를 보고 평화롭게도 웃고 있어 저와 눈이 딱! 마주칩니다.
저보다 세랑이나 많은 제 짝꿍인 정자가 그 책받침 미국 아저씨가, 저의 아버지라고 장난을 쳐 저는 늘~ 참 많이도 속상했었습니다.
양철 필통 속엔 오무르르.....
몽당연필들이 옹기종기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등굣길엔 허리춤에 책보를 꽁꽁~ 묶고는 지각할까 봐 뛰고, 하굣길에는 집에 가서 빨리 어린 동생들 돌보기 등 집안일 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뛰었습니다.
설령~ 새 연필을 장에 가셔서 아버지께서 등에 쌀을 지고 가셔서 그걸 팔으신 다음 양철 필통 등 학용품을 사다 주신다 해도 며칠을 못 갑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머니께서 솜이불 빨래하실 때 빼어놓으신 솜을 뜯어서 제 양철 필통 속 연필 등에 신줏단지 모시 듯......
잘 동여매도, 싸매어도..... 그렇게 허구한 날 뛰어다니는 데는 별로 효과를 보지 못 했답니다.
모두가 다 어려움 속에 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니는데, 저희 반에 딱 1명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오는 동무가 있었답니다.
서울서 피난 온 옥련이의 가죽 책가방
옥련이..... 그 옥련이는 서울에서 피난 와, 아주 시골에 눌러앉아 저희 학교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옥련이는 1학년 국어책에 영이, 철수, 바둑이에 나오는 그 멋있고도 네모진 가죽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습니다.
그 동무는 그렇거나 말거나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다 떨어진 푸대를 쓰고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도록 최대한 앞으로 구부리고, 부지런히 도 학교에 가야만 되니까요......
비가 참 많이도 내리던 날의 지각
낡은 푸대를 쓰고 행여 허리에 묶고 가는 책보 속의 책이 행여나 젖을까......
노심초사 최대한으로 몸을 구부리고 학교를 부지런히 도 가던 어느 날!
사방을 둘러봐도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안 보입니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 시절 저희 집엔 그때까지 단 한 개의 시계도 없었답니다. 아니.....
동네 50여 가구 다른 집들도, 사정은 다~ 비슷비슷 들 했었답니다.
저희는 그래도 동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비교적 富農에 속한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도시에서 살으시다가, 저희 동네로 이사오셔서 터를 잡으셨다 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라고 하셨습니다.
歸農을 결심하시고, 그 당시 논: 20마지기 (4,000 坪), 밭:1,000坪 하나......
천안 역에서 4 KM 저희 동네에 사서 들어오셨다 하셨습니다.
좀 여유가 있는 집이나 그렇지 못 한 집이나..... 사람들의 차림새와 생활은 대개가 다 비슷비슷 들 했습니다.
학교 가는 10 리 길(4 KM)의 등굣길은 농촌의 들길, 산길, 철길, 시냇물을 차례로 건너는 동안 시간이 지연되어, 자연 쓰고 간 푸대는 물에 불을 대로 퉁퉁~ 불어, 어린 제 몸뚱이에 얼마나 무겁고 힘에 부치던지요.
주변에 학교 가는 동무들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꽤~ 많이도 늦은 것 같습니다. 노 배기*를 하고, 낡은 푸대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학교 교실로 부지런히 도 향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려 선생님을 바로 뵐 수 있는 앞 문을 열으려니, 평소에도 고장이 나 빡빡~ 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저처럼 노 배기* 하고 푸대자루에서 물이 뚝! 뚝~ 떨어졌을 동무들이, 계속 이 문으로 많이들 들어갔으니 가외나 아귀가 안 맞아 애를 먹던 교실 앞 문 문짝이 순순히 잘~ 열리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퉁퉁~ 불을 대로 불은 교실 앞문을 가까스로 밀어 부쳐 여니, 한참 공부를 지도하시고 계신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선생님!"
"어엉~ 엉! 어엉~ 엉~ 으앙~~~"
한꺼번에 설음이 있는 대로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공부에 한참 열심이던 동무들이 일제히 저를 바라다봅니다. 제 딴에는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또렷이 말씀 드릴 양이었는데, 그만.... 아휴~ 제 꼴이 영~ 말이 아닙니다.
학교 *낭하엔 우유가루가 그득~ 담긴 미국 *도나무깡이
학교의 긴~ 낭하*에는 뽀얀~ 우유가루가 가득 든 *도나무깡이 늘~ 놓여져 있었습니다. 통이 다~ 비워지면 새 통이 옵니다. 아주~ 큰 그 *도나무깡에는 우유가루가 가득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 우유가루가 가득 들은 큰 도나무깡*은 누르스름한 베이지색을 여러 겹으로 덧대어 압축해서 만든 아주~ 튼튼히 만든 종이 *도나무깡으로, 미국에서 원조를 보내온 것이라 했습니다.
6.25 사변으로 온~ 나라가 다 폐허가 되었으니, 한참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유가루*를 고루고루~ 가도록 학교에 보내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 *도나무깡에는 우리 한글은 한 글자도 안 보이고, 모두가 다 영어로만 빼곡히 써져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께선 조개탄 난로 위에 큰 주전자에 물을 그득 부으시곤..... 수업받고 있는 저희들 책상 위에 우유가루* 탄 우유 물을 마시라고 하시며, 손수 타 주셨습니다. 다 마신 다음에는 그다음 동무들에게 모두 다 돌아가며 마시게 하셨습니다.
*우유가루가 다시 오는 어느 날에는 선생님께선 하굣길에 책을 책보자기에서 다 꺼내라고 하시고, 대신 그 책보자기에 우유가루를 배급을 주셨습니다. 여기저기 뚫어진 헌 책보자기! 언제 빨은 것인지도 모를 꾀죄죄한 책보자기.....
그 책보자기에 우유가루를 타 가지고 집에 가는 날에는, 아주 아주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빨리 집에 가서 이 소중한 우유가루를 어머니한테 안겨드릴 생각에 그저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동네 공동 우물과 저의 물 지게
그 시절 지금같이 수도시설이 있는 것이 아니었답니다. 시멘트 *녹강이 가슴 위까지 차 오르는 동네 공동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양철 초롱의 물을 물지게로 져 날라 *두멍에 붓습니다. 그래야 식구들이 세수도 하고, 밥도 짓고, 소죽도 끓이고 다~ 해야 했답니다. 물지게를 지면 긴 물초롱이 땅에 끌립니다. 방법이 하나 있답니다.
물지게의 고리 바로 위는 헝겊을 단단히 꼬아 줄을 길게 느러뜨렸는데..... 최대한으로 그 줄을 물지게 끝에까지 돌돌 말아..... 갈고리 끝을 제 몸 쪽으로 최대한 밀착시켜 움켜쥐고 뛰면 물초롱이 안 끌립니다. 양철 물초롱 3분의 1 씩 져 날랐습니다. 그래도 칭찬은 없었습니다.
입학식 날 가슴엔 하얀 코 수건을
같이 입학한 다른 동무들은 모두가 다 OO국민학교 1학년 1 반 OOO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그 명찰 바로 밑에는 새 하얀 코 수건을 직사각형으로 예쁘고 길게 해 늘어뜨렸습니다. '하얀 콧 수건'! 그 하얀 콧 수건은 신입생의 표시입니다.
저는 엄마가 보이시지 않는 것이 서운한 게 아니라..... 그 같이 입학한 동무들의 하얀 콧 수건이 너무도 더 부러웠었답니다. 그 옛날에는 왜 그리도 아이들이 코가 많이도 나왔는지 모릅니다. 하도 코를 옷소매로 문질러 대, 소매 끝이 반질반질~ 합니다.
학교에서만이라도 옷소매에 절대로 코 문지르지 말라고...... 그래서 코 수건을 달아 준 걸까요?! 그래도 저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저희 동네 50가구 中 같은 동갑내기가...., 남,녀 합해서 11명이 입학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 11명 중에 3명은 입학통지서를 받고서도 부모님께서 집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라고, 학교에 입학시키시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거기에 비하면 저는 얼마나 행복하고 신이 나던지요......
남아 선호 사상과, 깊숙이 뿌리 내린 유교 사상
유교사상 또한, 뿌리 깊이...... 아주 깊숙이도 뿌리내린 시절..... 그러니 딸자식은 아무리 잘~ 키워봤댔자 남의 집에 시집 가면 말짱 헛~ 일이라는 생각들이 지배해 있던 시절! 뉘 댁 할 것 없이 모두 다~ 집집마다 아들들을 원했습니다. 유교사상으로 제사를 소중히 생각해서였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1950년 제가 다섯 살 때 6.25 사변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는 게 모두 다~ 궁핍해서 일까요..... 이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농촌에선 모처럼 한가한 겨울밤입니다. 등잔불 아래, 그것도 석유가 귀하고 너무도 아까워서, 아래 웃방...... 방이 2개였었지만..... 미닫이를 아예~ 터 놓고 등잔불 한나만을 켜고 살았습니다.
제 작은 새끼손가락 1마디 만하게만 불꽃을 해 놓고는..... 그 침침한 등잔불에 이마를 맞대고 이를 잡는 건 뉘 댁이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리에는 머릿니가 있었으며, 머리카락에는 서캐가 희끗희끗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개가 누구나 다 그랬었습니다. 집집마다 대개가 돼지를 한 마리씩 길렀으며..... 소는 농삿치가 많은 부잣집들만 길렀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의 폐결핵과 사망률
자연 적으로 쇠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으니.... 파리가 아주 많았었고, 빈대도 많았고, 숲이 있으니.... 모기 또한 정신없이도 많았었답니다. 소독이라야 여름엔 더우니까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 식사들을 거기서 하셨으며..... 식사 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가족 간에도 나누고 할 때 모닥불을 피우는 정도였었습니다.
전염병과 어린아이들의 사망률, 그리고 多産
아이는 태이는 대로 다~ 끝까지 낳았습니다. 농촌인 저희 동네 50여 가구 중..... 산부인과에 가서 출산을 하는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셨습니다. 밭에서 밭 매다 뛰어와서 출산하고...... 고깃국은 아예~ 없습니다. 그냥 미역국입니다. 자연 적으로 건강 관리를 못 해서 일까요..... 농촌 마을인 저희 동네에서는 평균 수명이 50대였습니다.
부모님들이 61세가 되시는 해에는 동네분들을 초청 해, 환갑잔치를 모두~ 해드리는 게 관례였습니다. 살아가기도 빠듯한 농촌 살림인데도, 자손들이 부모님 장수하셨다고 동네 어른들을 모두 초청 해 큰 잔치를 벌이곤 했습니다.
남아 선호사상으로 집집마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낳았습니다. 아니~ 산아제한이 아예~ 없었습니다. 어느 댁이시 건 산부인과에 가시는 일은 아예~ 없으셨습니다.
아니...... 가족계획이란 이름 자체가 없었습니다. 자기 먹을 건 자기가 다~ 타고난다고들 인식이 됐었던 시절입니다. 자연 시어머님 되시는 분들은, 아들 못 낳는 며느리들을..... 자연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저~ 쪽, 영식이네는 11남매입니다. 그렇게 가족계획을 안 해도 5~6남매 밖에 안 되는 것은, 각종 전염병으로 乳兒 기 때의 사망룰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 전염병이 돌아 병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참~ 많았습니다.
이른 아침 가마니에 둘둘 말아.... 삽을 들고 저희 집 앞으로 가는 그 댁 아이의 아버지들을 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의 이름은 호적 이름 외에 집에서 부르는 이름을 따로 지어주는 댁도 참 많았습니다.
붙들이... 명 길으라고. 개똥이... 천하게 이름 지어야 오래~ 명 길다고. 딸 그만 낳고 아들 태어나라고... 끝순이, 막순이. 乳兒기 때 자꾸만 사망률이 많아지니까...... 시름시름~ 앓는 아기들은 백일, 돌잔치를 안 해야 오래 산다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건강하게 자란 아기들...... 살아남은 아기들이 동네에, 대개는 5~ 6남매들을 두셨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년! 어떠랴 싶었을까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아무튼 학교 가는 준비물은 제가 다 알아서 챙겨가야 하고, 책보 역시도 제가 다~ 알아서 챙겨가야 했답니다. 그저~ 등교하는 그 모든 것을, 설령~ 비가 많이 쏟아지지 않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여기저기 기침을 달고 사는 폐결핵 환자가 늘어났습니다. 그 시절 같은 시기에 3분이나 폐결핵으로 늘~ 기침을 하시더니..... 사망하셨습니다. 모기도 참~ 많았습니다. 저희 앞 집에 사는 제 동무가 학교 입학도 하기 전 뇌염으로 사망했습니다. 관청에서 웬 관용차가 왔나 했더니...... 소독을 하고 갔습니다.
처음 본 신기한 비닐
제가 비닐을 처음 본 것은 아마 국민학교 4학년 때쯤일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는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저희 농촌에서는 그랬었습니다. 요소 비료푸대!! 2~ 3 겹 종이로 된 그 비료 요소 푸대를 맨 안쪽..... 비료가 닿는 부분만을 살짝~ 얇디얇게도 발라 입혀져 나왔습니다.
습기도 안 차고..... 참으로 신기한 비닐! 처음으로 그 비닐을 접한 저희 동네 사람들은..... 너도 나도 그 다 쓴 요소비료 푸대를 큰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몇 날 며칠을 퉁~퉁! 불을 대로 불을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곤 다섯 손가락 끝으로 살~살! 아기 달래 듯..... 종이를 밀어 떼어 내어 마침내 비닐 한 장을 얻어냅니다. 너무도 얇아 까딱 잘 못하다가는 다 미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아주아주~ 조심조심 작업들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그 비닐이 꽤나 갖고 싶었으나...... 농삿치가 원래도 많고 많아 일이 밀려서, 엄두가 나질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난생처음 본 영롱하고 예쁜 색동 나일론 양말
1957년 5학년 때 어느 추운 날입니다. 겨울 방학을 얼마 앞둔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쪽 마을에 사는 영철이가 아주 곱디 고운 색동 나일론 양말을 신고 학교에 왔습니다. 영철이가 신고 온 그 색동 나일론 양말은 그야말로 색상이 너무나도 영롱하고 고와서....... "와~~~" 하마트면 저도 모르게 탄성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습니다.
교실 난로에 조개탄을 피우거나, 그도 모자라면 뒷 산에 가서 전교생들이 다~ 솔방울을 따다 난로에 피웠었습니다. 난로 위에는 늘 양은 도시락이 층층으로 놓여 있었고, 간간히 위아래를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그런 난로 였었는데..... 학교 오는 길에 영철이가 *메기를 잡은 모양입니다.
양말이 다 젖었으니 난로 가까이 대고 말렸습니다. "앗 뜨거워!!!" 영철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양말이 순식간에 바닥이 다 오그라 붙고 양말 등만 남았습니다.
영옥이의 집에서 만든 바가지 벤또*
그 시절 플라스틱을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그릇은 겨울에는 놋그릇! 여름에는 사기그릇을 썼습니다. 가난한 집은 겨울에도 사기그릇을 썼습니다. 플라스틱이 없기에...... 바가지 역시 천연 바가지입니다. 부엌바가지를 모두 집에서 만들어 썼습니다.
앞마당 양지바른 곳에 박을 심고, 그 박 덩굴을 초가지붕 위로 다리를 놓아 덩굴이 벋어나가게 했습니다. 초가지붕에는 집집마다 박을 올려 보름달같이 둥근 박이 지붕 위에 많이 열리곤 했습니다.
그 박이 익었나, 안 익었나..... 바늘로 찔러봐서 바늘이 안 들어가면 익은 것이고, 바늘이 들어가면 더 있다 따야 했습니다. 다 익은 박은 톱으로 반을 잘 켜서, 속에 있는 씨만 잘 파 낸 다음 큰 솥에다 잘 삶습니다. 박 속의 보드라운 속은 좋은 반찬거리가 됩니다. 고추장으로 갖은양념을 하면 맛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곤 바가지 딱딱한 부분을 잘 남겨 놓고 속의 것만 살살~ 잘 파 내면 훌륭한 바가지가 됩니다. 바가지의 겉 표면도 수저로 박박~ 긁어 다 벗겨내야 됩니다. 햇볕에 잘 말립니다. 훌륭한 바가지가 탄생되는 순간입니다.
영옥이네는 매우 형편이 어렵습니다. 영옥이는 어느 날 그 바가지 벤또*를 가지고 학교엘 갔습니다. 양은 벤또*를 사실 형편이 안 되시는 모양이십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같이 갈 양으로 영옥이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영옥이 어머니께서 영옥이의 도시락을 싸고 계셨었습니다.
양은 벤또가 없어서 이실까요?..... 그 바가지에 밥을 담으시고, 뚜껑이 마땅한 게 없으니, 울타리에 올린 호박잎을 골라 뚝! 따시더니..... 그 바가지 벤또 위에 덮으셔서 영옥이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영옥이는 그날 그 바가지에 담긴 벤또*를 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렇게 살림이 어려움 속에서도 영옥이를 학교에 보내 주시는 것만으로도, 참~ 힘에 겨우실 듯하십니다.
그 시절 *국민학교는 무상교육이 아니였었습니다. 월사금이라 하여, 수업 도중에도 월사금 못 낸 동무들을 일어나게 하시어, 언제 가져올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동무는 "아버지께서 이번 천안 역 마루 부시* 간주* 타시면 그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동무*는 수업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시어, 집으로 돌려보내신 일도 있습니다.
벤또*는 일본말의 잔해로,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쯤에서야 도시락이란 우리말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도시락이란 우리말이 영~ 어색하고 쑥스러워 *벤또라고들 했습니다.
아예~ 점심을 굶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가는 저희들은 점심시간 학교 뒷산에 올라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머니께서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을 먹습니다.
수저와 젓가락은 아예 넣어 있질 않았습니다. 근처 도토리나무나 갈참나무 가는 줄기를 뚝~ 꺾어, 쭉~ 잎새를 훑어버리고 반으로 자르면 훌륭한 젓가락이 되곤했습니다. 그걸로 엄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을 동무들과 낮은 소나무 그늘 아래 빙~ 둘러앉아 맛있게도 먹습니다.
반찬은 고추장 한 가지, 아니면... 새까만 무장아찌 한 가지였습니다. 고추장을 반찬으로 싸 왔을 때 어느 해는, 그 고추장이 묽어 도시락 밥 전체가 다 고추장 투성이가 돼 있어, 밥이 고추장에 불을 대로 다~ 불어서 맛도 없거니와...... 같이 먹는 다른 동무들에게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름철에는 쌀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
여름에는 쌀알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입니다. 좀 부자로 사는 집 아이들은 쌀이 희끗희끗 어쩌다 보이긴 했지만,
대개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저희 집은 50 여 가구 사는 마을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비교적 형편이 나은 편에 속했었습니다.
고기도 넣지 않은 미역국에 꽁보리밥은, 시금털털 하니 이상 하게도 신맛이 나서 역시 꽁보리밥엔 된장찌개가 제격입니다. 그리고 참! 생일날에, 꼭~ 빠지지 않는 반찬이.... 특식이 있습니다.
애호박! 흙으로 된 토담 짚으로 영을 엮어 올렸습니다. 그 담장 밑 양지바른 곳에 서너 군데 작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쇠 외양간 친 거름을 폋 삽 씩 퍼~ 넣고 흙으로 좀 덮은 다음...... 거기에 호박을 심으면, 여름내 애호박 반찬 걱정은 안 합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윤기 나는 애호박은 찌개를 하거나 가마솥 넓은 솥바닥에 집에서 큰 밭 하나 가득 농사 지어 기름을 짜 온, 햇 들기름으로 부쳐 먹으면, 고소하고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그 애호박이 생일날 유일한 특식으로 밥상에 꼭~ 올라오곤 했습니다.
여름 생일날 꽁보리밥에 소고기 없는 미역국
흰 쌀밥에 쇠고기 넣은 미역국도 우리 엄마가 안 끓여 주어 속상하다...... 만약에 이 소리를 동네의 때꺼리 걱정하는 댁에서 들으셨으면 아마~ "부잣집에서 태어나 배지가 부르니 별~ 소리를 다 듣겠네...." 아마~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하셨을 건 뻔~ 합니다.
하기야 큼직큼직~ 먹음직스러운 쇠고기에 흰쌀밥을 먹는 것은, 세월이 참~ 많이도 흐른 뒤의 일이어서....... 그때는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먹고 싶다는 생각은 가져본 일이 없었습니다. 여름 생일이라서..... 그 시절 저희 집뿐만 아니라 대개는 다 사정이 비슷비슷~ 했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미군 국방색 담요 몸빼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아버지께서는 나이 어린 딸이 행여 등하굣길에 춥고 얼을세라.... 머나먼 읍내 천안 5일 장날 장에 등에 하얀 쌀을 한~ 짐 끙끙~ 지고 가셔서는....... 제 담요 몸빼바지랑 검정 제 고무신이랑....... 식구들의 필요한 이것저것을 사 오십니다.
아버지께선 저를 야단 치실 때면, 쓸데없는 *지지배들~ 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어떻게 동네에 2~ 3명 정도밖에 못 입힌, 그 귀하디 귀한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 미군 국방색 담요 몸빼바지를, 전교생 중에 아주 극소 밖에는 입지 못 한 그 귀한 몸빼바지를...... 저에게 사다 입히실 생각을 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시장에서 물품 구입을 하는 일은 주로 아버지께서 하십니다. 무거운 곡식을 수시로 장에 내다 팔으려면...... 50여 가구중에 운송 수단이라곤 저 아래 영식이네의 우마차 1대 뿐입니다. 그 우마차에 동네 사람들의 농사지은 쌀, 보리살, 잡곡, 수박, 참외 기타 등등을 다 싣는다는 것은 태부족입니다.
바쁘지 않을 때는 혹 몰라도 바쁠 때는 하는 수 없이 멜빵을 해 푸대에다가 쉬울 선 쌀, 보리쌀 등을 지고 가는 일이 아주 흔한 일입니다. 지금같이 버스가 다니는 것도 아니고..... 겨우 우마차 1대가 갈 수있는 행길입니다.
그 행길이 저의 동네나.... 이웃 동네가 천안 읍내로 가는 최 첨단길입니다. 천안 역까지는 불과 4 KM 도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등에 지고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 가부장 제도가 됐습니다.
국방색 미군 담요 구호물자로 물도 들이지 않고 만든 몸빼바지는 살을 에일듯이 추운 엄동설한을 나기엔, 아주~ 안성맞춤입니다. 그것도 좀 산다는 집안 여자 아이들만 어쩌다 입었었습니다.
귀하디 귀한 미군 구호품 국방색 몸빼바지...... 제 앞 무릎이 불쑥~ 튀어나올라치면, 아버지께선 어떻게 그리도 잘도~ 알으셨는지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석화야~ 몸빼 무릎 떨어져 구멍 나기 전에 얼른~ 돌려 입거라~" 하십니다. 그래야 그 몸빼 바지가 무릎이 더디게 떨어지고, 더 오래오래~ 입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주머니가 뒷 쪽으로 입구가 돼 있어 그 한 겨울 강 추위에 손 넣기도 영~ 거북스럽고, 불편하기 그지없었으나......
추위를 막는 데는 그래도 그보다 더 따뜻한 옷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말씀대로 돌려서 입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몸빼 바지도 없이, 그 얇디얇은 속내복만 훤히 들어낸 채..... 얼굴이 시려우니까, 짧디 짧은 깡똥 치마* 끝을 걷어 올려 머리 위로 걷어올려 쓰면, 꼭~ 낙하산 마냥 바람이 잔뜩 들어가 부풀게 됩니다. 그 치마를 뒤집어쓰고, 눈만 겨우 빼꼼히 내놓고 구부리고 학교엘 뛰어다녔습니다.
장갑은 대개는 없었으며, 손이 시려우면 입에 대고, 호~ 호~ 입김을 쏘이거나, 허리에 질끈 맨 책보자기 옆구리에.......
손을 찔러 넣고, 추우니까 너도 나도 뛰어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리도 씹고싶었던 껌
껌은 동네서 몇 집 빼곤..... 아니 전교생 중 몇 명만 빼곤..... 사서 씹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껌은 꼭 옛날 비과라고 있었는데, 그 밀크 캔디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도 더 굵고 크고 먹음직스러웠으며, 겉에는 굵은 노란설탕으로 한 번 굴려, 정말 먹음직스럽게 해 분홍색 아니면 초록색 또는 청색 고운 바둑 문양이 있는 참으로 먹음직한 씹고 싶은 껌이었습니다.
껌이 씹고 싶으면 대개는 검정 고무줄을 등잔불에 태워서 식으면 그걸 씹기도 하고, 혹은 양초를 불에 녹여서 그 걸 껌이라고 씹어보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이 공놀이하는 자그마한 공이 있었는데 낡으면 바람이 빠집니다. 그 공을 갈라서 그 공속에 보면 공젖이라고 하는 자그만한 고무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공젖을 떼어 껌대신 씹어보기도 했습니다. 하굣길 집에 오는 길에 근처 야산에 다다르게 되면, 껌이 너무도 씹고 싶어서, 소나무에서 흘러내린 굳은 송진을 따서 씹는 게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흔들이 점점 잊혀갈 때 쯤..... 제 기억으로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쯤이 아니었나 기억됩니다. 껌들을 사서 씹을 형편이 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너도 나도 그 귀한 껌들을 사서 씹었습니다. 그 때의 형편들 역시 그리 좋은 편은 못되었습니다.
그 껌을 아껴서 씹어야 했습니다. 그 신기한 사서 씹은 껌! 쉬는 시간이면 너도 나도 껌들을 씹었고, 수업시간에는 책상 밑에다가 잠시 붙여둡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잊지 않고 그 껌을 떼서 씹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와서도 역시 잘 때는 내일 다시 씹으려 방의 벽에다 잠시 붙여둡니다. 깜빡 잊고 그냥 잠이 들을 경우 머리카락에 그 껌이 붙어 하는 수 없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허다했습니다.
한 번 사서 씹은 껌의 수명은 입속에서 다 삭아 가루가 되어서야 그 때서야 그 껌의 역할은 끝이납니다. 아마 *국민학교 5학년 때 쯤 너도 나도 껌들을 사서 씹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비위생적이고..... 말 할 수없는 수치스러운 우리나라의 생활상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껌 조차도 형편이 더 어려운 집 아이들은 그냥 남이 껌 씹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께선 어떠셨을진 모르시지만..... 그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전혀 불편한 줄을 모르고 자랐답니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아 보질 못하고 자란 저희들이기에..... 그저 세상이 다~ 그러려니 하고, 마냥 세상이 즐겁기만 했답니다.
여자 아이인 저도, 고무신은 역시 남자아이와 똑같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여자고무신이라야..... 어머님들께서 하얀 버선에 신으시는 여자고무신인 새하얀 코고무신입니다. 어머니들께선 버선을 안 신으실 때도 늘상 하얀 여자코고무신을 늘상들 신으셨습니다.
사는 것이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가 다~ 바쁜 농촌이지만, 늘~ 그렇게 일에 쪼들리는 일은 아닙니다. 바로 학교 오가는 등하굣길입니다.
맑고 깨끗한 시냇물엔 송사리떼들이 노닐고
학교길엔 정강이까지 닿는 개울 물에 고운 모래가 훤~ 히도 들여다 보였으며, 맑은 햇살에 비친 여울진 개울물은 너무도 해맑고도 깨끗하여,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운 개울물엔 작은 송사리들이 여유 로히 노닐고 있었습니다.
송사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아 검정 고무신 안에 넣어놓고 놀기도했답니다. 개울 모래톱을 두 손으로 파고 물을 넣어, 거기다 송사리들을 넣고 들여다보며 노느라면..... 참으로~ 사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는 놀이가 되었습니다.
한참 노는데 정신이 팔려갈 즈음..... "아이고~! 큰일 났다.... 집에 빨리 가서 어린 동생들 돌봐야지??!....." 생각에 잡아서 놀던 송사리 물고기들을 도로 놓아주고, 다시 책보를 허리에 잔뜩 꼭꼭~ 묶고는 어린 동생들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에 냅다~ 또 집을 향해 뛰어갑니다.
허리에 맨 책보 속에서 양철 필통 속의 몽당연필들이, 찰칵~찰칵! 찰칵~찰칵! 필통 벽에 부딪는 소리들이..... 다시 요란스럽게도 들려와 제 마음을 또, 아프게합니다.
깡통을 든 거지와, 손에 갈고리를 한 상이군인
도시의 공장은 폐허 속에 가동이 되지 않았고, (6.25 동란으로) 어수선하고, 폭격에 집 잃은 도시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집단으로 천막 생활을 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읍내 천안 장날 장터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갈 때면, 지나다가 실지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도 보기도 했습니다.
거지와 상이군인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쩌다 동생들을 돌보며 집에서 집을 보노라면, 옆구리에 깡통을 찬 거지도 자주 찾아왔었습니다. 또 갈고리 손을 가지신 상이군인 아저씨들도 찾아 오시곤 했는데, 그 갈고리 한 모습이 몹씨도 무서웠습니다.
우리 조국을 구하기 위해 조국의 부름을 받으고 전장에 나가 싸우시다가, 그리 되셨다는 안타가운 사연은 제가 나이가 좀 들고난 후 부터이었습니다.
밤이면 칠흑같이 도 어두웠던 저희 동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전등불은 없었고, 해가 지는 농촌 마을은 칠흑같이 도 어두 었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등잔불을 켰으며, 세기 지름* 단다고, 등잔 심지를 조그맣게 제 작은 새끼손가락 한 마듸 정도로 해놓고 살았습니다.
부엌엔 따로 조명 시설이 없었습니다. 석유 아끼려고 등잔을 따로 놓지도 않았습니다. 안방과 부엌의 중간에 두껍게 가로놓인 두꺼운 흙벽돌로 지은 벽을, 등잔이 충분히 좌우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도록 뚫었습니다.
직사각형으로 네모지고 약간 둥글게 뚫어 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유리를 대고, 다시 흙으로 예쁘게 발라 놓으면 훌륭하고 예쁜 유리 구멍이 되었습니다.
옛날 농촌의 부엌은 조명 시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집집마다 다 깜깜한 밤에 부엌에서 일하는 것도 문제지만, 잠시 가마솥에 숭늉이라도 뜨러 부엌에라도 갈라치면 깜깜한 부엌에서, 저녁식사들을 하시는 안방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 유리 구멍에 등잔불 좀 넣어 주셔유*~~~!" 그러면 깜깜절벽이던 부엌에도, 어렴풋이 희미한 등잔 불빛이 새어 들어와 일을 보곤 했답니다.
밤중에 변소* 가기가 제일 무섭고 싫었습니다. 옛날엔 왜 그리도 귀신 얘기들이 많았는지, 저녁 일찌감치 먹고(어린 딸들은 저녁 먹은 설거지를 다 해 놓고 서야) 동네 마실을 갑니다. 그것도 추수를 다 하고 난 한가한 겨울 방학 철에만 갔습니다.
추운 겨울 고무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빨래를
아무리 추워도 가족들의 빨래는 어머니 께서들 하셨습니다. 지금같이 집 안에서 세탁기를 쓰는 게 아니고, 집 밖에서 얼음 같이도 차가운 물로 손빨래를 하시는 것입니다. 엄마 따라 마을 공동 우물에 가서 빨래하는 것을 돕는 동안 제 손등이 빨갛게 부풀어 올라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 대가족 가족들..... 이런 일은 어머니들께서 자주들 하시곤 하셨는데..... 어떻게들 그 시절을 견디셨는지...... 감이 안 잡힙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을 사셨던 어머님들께 퍽~이나 미안하고 또 미안감을 느낍니다. 그 시절 어머님들 고맙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어머님들께선 밤새도록 화롯불에 인두... 광목 바지저고리 손바느질
아버지, 어머니의 옷은 늘~ 한결같습니다. 흰 광목 바지, 저고리십니다. 아버지께서 시오리 먼~ 장에가시어 광목을 아예 한 통을 사오십니다. 자로 재서 끊어서 사오시는 게 아니라.... 아예 한 단위로 된..... 저는 그 단위를 모릅니다만....
그 게 한 필인가요? 한 통인가요..... 그 걸 사오십니다.
어머니께선 큰~ 가마솥에 물을 적당히 붓고, 양잿물을 풀으십니다. 거기에 그 광목을 넣고 푹푹~ 삶습니다. 꺼내어 방망이로 척척~ 이겨 두둘기시며, 양잿물을 말간 물이 나오도록 잘 헹구십니다. 야산 양지바른 곳에 널으십니다. 그걸 이튿날 또 물에다 넣고 방망이로 척척~ 이겨..... 맑은 물이 나오도록 헹굽니다.
자배기에 그 걸 이시고 또 야산 너른 잔듸밭에 널으십니다. 한 2~ 3번을 반복하십니다. 그제서야 누렇던 그 광목도 뽀얗고 예쁜 광목으로 변합니다.
그걸 풀을 쒀서 풀을 먹여 빨래 줄에 잘 펴 널으시곤 다 마르기 전에 걷어다 주름을 잘 펴서 잘 개어 다디미돌 위에 놓으시고 다듬이질을 하십니다. 다디미질로 곱게 펴진 광목은 가위로 마름게질(재단)을 하십니다.
그제서야 아버지 어머니의 바지 저고리를 손으로 일일이 한 땀 한 땀, 꿰메십니다. 이 이야기는 몇 날 몇일을 해도 끝이 안 날 것 같아 줄여야겠습니다. 이제 어머님들의 손바느질은 시작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사실 말이 백의 민족이지...... 어머님들의 그 고생하시는 것을 곁에서 고스란히도 보아왔기에 지금의 나일론 옷 빨아 훌훌 털어 그냥 입는 지금의 여자들은 그 때 안 태어나시길 정말 잘들 하신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어머님들의 대가족 삶이 너무도 안 됐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요.
진숙이네 집에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저녁에 진숙이네서 놀다가 배가 출출해 지면 몇몇 동무들이 각자 자기 집에 동무들을 데리고 가서 망을 보게 한 다음 부엌으로 가서 살 그마니.... 무쇠 가마솥뚜껑을 열고 먹고 난 찬 밥을 꺼내와 엄마한테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 감에, 키득거리며 진숙이네 집으로 도로 가지고 갑니다.
한 겨울 꽁~꽁! 언 새파란 청솔까지 꺾어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펴 김치 볶음밥을 하려면..... 왜 그렇게 연기는 굴뚝으로 바로 안 나가고 역풍이 불어 애를 있는데로 먹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청솔가지에도 불이 붙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들 신이나게 김치복음밥 만드는데 열성입니다.
진숙이네 집에서 짠 들기름에, 진숙이네 배추 김장김치를 썰어 진숙이네 나뭇간에서 청솔가지로 만든 김치볶음밥!
어려운 진숙이네 집에가서 저희들은 그렇게 눈치없이 맨날~ 가서 보금자리를 쳤습니다.
그 진숙이네는 사람이 좋아..... 항상 저희들은 그 집에서 놀곤했습니다. 다른 집들은 모두 갈 엄두를 못 냅니다.
그때 제 또래보다 좀 나이 든 진숙이 오빠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인 동네 오빠들도 어쩌다 오곤 했었는데, 겨우 한다는 얘기가 제일 무서운 바로 그 귀신 얘기를 합니다. 여자아이들이 무서움을 잘~ 타니까, 무서우라고 일부러 장난을 친 것입니다.
그 귀신 얘기를 농담께나 하는 오빠들이 하곤 하는데, 하필 깜깜 절벽 어두운 밤에 변소 가려면 불현듯, 꼭~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까 진숙이네 집에서 김치 볶음밥을 만들 때 서슬 시퍼런 건강하기 그지없는 생 소나무가지를 제겨다 땐 것!
제가 여기서 그 이야기를 안 할래야 안 할 재간이 없게 됐습니다.
그 시절 저희 농촌 동네의 실상들이 다 그러했었는데..... 이 나이에 옛 농촌 고향에서 자랄 때 이야기를 말씀드리려는 이 마당에 뭘를 숨기고 말고 할 그 무엇도 없을 것 같습니다.
관청에선 수시로 山監이 나와서 단속을
山의 나무를 누가 베어다 아궁이에 때는지 수시로 山監督을 하시는 분이 관청에서 오시곤했습니다. 山監이라고 하시는 분이 저희 동네 앞 山 나무 숲 속에서 누가 山의 나무를 베어다가 집으로 들여가나..... 망원경으로 보면서 수시로 감시를 했습니다.
그 시절 농사 지을 때 나오는 볏짚은 대개는 소의 먹이로 사용됐었습니다. 잘게 썰어서 쌀겨와 버무려 쌀뜸물 등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넣고 소죽을 끓여 주었습니다. 온돌 문화인 우리나라는 겨울에는 군 불도 때야 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때는 집이 참 많았습니다. 아니 거의가 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땠습니다.
대개가 청솔가지*를 낫으로 아무런 생각들도 없이 마구 제겨다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그 시절 저희 농네에선 거의가 다~ 아니 다~ 그렇게 山의 소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아궁이에 때고 살았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말입니다. 그져 그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 됐습니다.
저희 동네 山은 國有林이 아닌 개인 소유의 山이었습니다. 山 주인이 수시로 숨어서 누가 자기네 山의 나무를 베어가나 자주 山에와서 망을 보곤 했습니다.
방에 온돌로 넓은 돌인 구들장을 놓고, 그 밑에는 불길이 온돌을 더필수 있게 그 구들장을 따라 떠받치는
받침대 돌들을 질서 정연하게 세워놓았습니다.
그 골골~ 사이사이마다 불길이 들어가고 방을 더피고......
제 할 일을 다 한 쓸모 없는 연기는 집 밖을 빠져나가 높은 굴뚝을 타고 하늘 향해 올라갔습니다.
부엌의 아궁이이 위에는 넓은 부뚜막이 있는데, 불을 때면 무쇠솥들이 죽~ 걸려있어 밥이며 찌개며 소죽 끓이고 물 데우면..... 자연 적으로 방은..... 온돌인 구들장 덕분에 온기가 가득하고 아랫목은 늘~ 가족의 제일 어른이신 아버지 차지이십니다.
"응? 뭔데?......."
'아궁이'
진숙이네 집에서 손수 농사지어 방앗간에서 짜 온 들기름에,
진숙이네 배추 김장김치를 썰어 진숙이네 나뭇간에서 청솔가지로 만든 김치볶음밥!
어려운 진숙이네 집에가서 저희들은 그렇게 눈치없이 늘~ 보금자리를 쳤으니.....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진숙이네는 사람이 좋아..... 항상 저희들은 그 집에서 놀곤했습니다. 다른 집들은 모두 갈 엄두를 못 냅니다.
그때 제 또래보다 좀 나이 든 동네 오빠들도 어쩌다 오곤 했었는데, 겨우 한다는 얘기가 제일 무서운 바로 그 귀신 얘기를 합니다.
여자아이들이 무서움을 잘~ 타니까, 무서우라고 일부러 장난을 친 것입니다. 그 귀신 얘기를 농담께나 하는 오빠들이 하곤 하는데, 하필 깜깜 절벽 어두운 밤에 변소 가려면 불현듯, 꼭~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수시로 密酒,누룩 조사 나오고
세무서에서 자주 술 조사, 누룩 조사를 나왔습니다. 그 시절 술은 뉘 댁 할 것없이 다 집에서들 담그셨습니다. 밀 농사를 지으면, 방앗간에가서 밀가루를 뽑습니다. 겉의 겉 껍질은 벗겨내고 속의 뽀얀~ 가루만 냅니다. 그 밀가루는 여름내 수제비, 칼국수, 찐빵등 아주 좋은 양식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 밀의 겉 껍질 밀기울 집에서 어머니들께서 촉촉하게 그 밀기울에 물을 촉촉히 섞으신 다음 잘~ 이겨서 모양이야 각자 알아서 들 하시고..... 틀에 넣어 천을 놓고 꼭~ 꼭~~ 정성드려 밟으십니다. 그 걸 그늘에다 말립니다. 완전히 물기가 없도록 잘~ 말립니다.
그것이 바로 술의 원료인 누룩입니다. 그래서 술 조사 나오면 꼭~! 누룩 조사도 함께 했습니다. 술은 뽀얀~ 백미로 만듭니다. 너무도 맛이 좋아 술을 못하는 여자들도 마시기 딱! 좋습니다.
농촌에서 농사 지으려면 일꾼들을 품앗이나, 사서 모내기, 벼베기, 보리타작, 벼 바당질* 등등...... 꼭~ 집에서 담근 뽀얀~ 백미로 담근 술을 참으로 내놓으시곤들 했습니다.
몰래 심던 담배와 대마초 조사
담배농사는 그 시절 농촌에서 많이 짓는 농사가 아니었습니다. 대마초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몰래몰래~ 밭 한 쪽 귀퉁이에 몰래 재배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수시로 조사를 나왔습니다.
모두가 어렵고, 빈부격차가 거의 없었으니...... 불편하다는 것을 전혀 못 느꼈습니다. 이웃과도 情이 참으로~ 좋았고요. 동네 누가 상이라도 당하면 동네 사람들은 다 모여서 꼬박 3일은 만사 제처 놓고, 자기 일 같이 합심하여 친절히 고맙게 동네 일을 봐주곤 들 하십니다.
누구네는 산소까지 일 보주러 가셨다가 그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버려, 힘겹게 거의 거의 다~ 말려놓은 빨간 고추를 (옛날엔 다 태양초) 마당 멍석에서 미쳐 걷질 못해, 그만 다~ 흙탕물에 범벅이 됐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속으론 어떠실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원망도 없이..... 이웃 간의 情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누구네 집에 손님이 오셨다 가셨다..... 그 댁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다 정도로 그 집 사정들을 다 꿰뚫고 계실만큼 이웃 간에 흉허물이 없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갔습니다.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했던 어린 시절
하늘은 온통 파~아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내 고향 마을......
그 구름에는 토끼, 사자, 예쁜 강아지의 모습들이 금방 금방 전게 되어 나타납니다.
십리 길 멀리~ 천안 읍내가 발 아래로 훤히~ 다 내려다 보이는 높고 울창한 노태산에는, 봄이면 온~ 山이 온통 연홍색 예쁜 진달래꽃으로 빨갛게~ 물들곤했습니다.
친구들과 올라가 진달래도 꺾어 쥐고, 더러는 입이 빨~ 갛게 물이 들도록 달콤한 진달래 꽃잎을 따 먹기도 했던 그리운 내 고향 노태산 자락.....
뻐꾹~ 뻐꾹, 뻐뻐꾹~ 뻐꾹~~ 뻐꾸기가 짝을 찾아 낙랑 하고도 영롱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새로이 새싹이 돋아 통통하게 반 발쯤 뻗어 나온 굵고도 보드라운 칡순은, 봄이 되어 땟거리 없이 바싹 마른 농촌의 저희 어린이들에겐, 더 없는 좋은 간식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어요. 우선 집에서 등어리 땀띠 나도록 동생들도 업어주지 않아도 되죠, 보리쌀도 안 닦죠..... 이러니.... 자연~ 나이 어린 딸들은 학교 가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학교에는 크고 넓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도 있죠,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선율은 내는 신기한 풍금도 있죠..... 친구들도 아주 아주~ 많죠..... 엄마, 아빠 눈치 안 보고 실컷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죠~ 일에서 벗어나 학교 가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여자아이들은 으레 껏, 우르르~ 운동장에 몰려나가 깡충깡충 고무줄놀이를 한 바탕 신나게 합니다.
더러는 공기놀이, 공놀이, 땅뺏기, 사방치기 아니 여자들은 동네에서 널 뛰기도 하지만, 그건 농한기의 정월달에 주로 많이 합니다. 남자애들은 연날리기, 자치기, 썰매 타기 등등.....
그저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와도 친해야 놀 수 있기 때문에, 어닌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구 관계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지요.
왜냐하면 지금은 어린 초등학생들도 방과 후면, 피아노 학원이다, 영어 학원이다 뭐다 해서 시간도 없고 짬도 없지만, 어쩌다 짬이 나기라고 하면 집에 있는 컴퓨터 아니면, 휴대폰으로도 얼마든지 혼자서도 놀 수 있지만.....
예전엔 혼자서 노는 놀이가 그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재밌는 고무줄놀이도 하려면, 양쪽에서 고무줄을 붙잡아 주고 하려면 적어도 세명이 필요했고..... 줄넘기도 그렇고, 공기놀이 또한 놀아 주는 상대방이 있어야 재미가
있었습니다.
고무줄놀이는 아래 복숭아 뼈 있는 곳부터 낮게 고무줄을 내리고, 제일 낮은 데는 '산토끼 토기야~'로부터 시작됩니다. 점점 고단수로 올라가는데..... 제일 높이 올라가는 고무줄놀이는 손을 있는 힘껏 위로 올려, 고무줄을 아주아주~ 까맣게 들어올립니다.
고무줄놀이하는 상대방의 동무들이 그 고무줄을 발고 있는 힘껏 채서 내려오게 해서 다음 동작을 해야 하는데. 한 손은 허리에 대고 지지대를 튼튼히 한 다음, 다른 한 손은 만세삼창 때보다도 더 높이 손가락 끝까지 펴서 끝까지 추켜올려, 상대방 발로 고무줄을 못 채 내려오게 합니다.
바로 '무찌르자 오랑캐'입니다. 고무줄놀이 중에 최 고 단수입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줄넘기 놀이도 즐겨했습니다. 양 쪽에 한 명 씩 줄을 붙들고 한 방향으로 박자를 맞춰 줄을 돌립니다. 그런 다음 여러 명이 그 줄을 밟지 않고 박자 맞춰서 계속 뛰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겨울 방학 때 동네 진숙이네 집 마실을 갑니다. 언제 어떻게 진숙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집이 저희들 놀이터인 셈입니다.
*오재미 놀이를 합니다. *오재미는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는 일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모두 동무들 각자가 만들어서 놉니다. 그 오재미 속에는 밭에서 거둬들인 팥, 좁쌀.... 등이 제격입니다.
"얘~ 우리 시바 꾸리 할래?~" 동무들이 모이면 오재미 놀이 중 시바 꾸리 놀이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시바 꾸리 나와 나지 와라지와 스꼬시~
오야나 데와 스끼 오도도와 세와세~
교다이 로꼬 로꼬 고 고 스꼬시~
미야 음마 미야 음마~ 겐~ 지로~
*오재미를 공중에 낮게 띄워, 한 손으로 올려 주고, 다른 한 손으로 받아 내고..... 이렇게 *오재미를 놓치지 않고 손으로 계속 받아내면, 그 게 1 '동'입니다. '3 동, 4 동'까지 해도 땅에 안 떨어뜨리고 계속 하는 동무도 있습니다.
유독*오재미 잘~ 하는 동무들이 있습니다. 고무줄놀이도 유독~ 잘하는 동무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맛있었던 밀기울 개떡과 보릿겨 개떡
간식이라곤 밀기울(방앗간에 가서 밀가루 만들고 나머지 빨간~ 밀껍데기)에감자나 강낭콩 까넣고, 개떡을 쪄서 먹습니다. 방앗간에서 보리쌀 찧고 나면, 맨~ 나중에 고운 분가루 같은 겨가 나옵니다. 거기에 소다, 달착지근한 사카린과 강낭콩 까넣고 개떡을 쪄 먹으면 더 없는 좋은 간식거리가 됩니다.
그 곱디 고운 뽀얀~ 보리 속 겨는......
돌도 함께 아주 아주~ 고운 분가루같이 곱게도 갈려져서 나옵니다. 하하하~ 지금지금~ 아작아작~
돌 씹히는 소리입니다.
고운 돌이 씹히긴 하지만, 그래도 목에 걸리는 게 없으니, 그게 큰 문제 될 건 없었고, 맛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돌을 그렇게 먹다 보면, 맹장에 걸린다 하던가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었습니다. 나중에 커서야 그 시절 어른 들께선, 정말 정말로 대단들 하시단 것을 알았답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분들께서 말입니다. 먹을 것조차 변변히 없는데도, 그 여러 남매를 전쟁 후 폐허 속에서 다~ 먹여 살리시고..... 정성껏 학교도 보내셨으니 말입니다.
이만 줄여야겠어요. 방금 저의 반려견 '별이'가 소변 누울 자세를 취하네요. 치워주러 가 봐야겠어요.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겠네요. 아파트 거실 유리창에 부딪치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다 보니 그만..... 아련한 추억 속으로의 긴~ 여행을 또 했군요.
어느덧 비는 개어 푸르른 초목의 나뭇잎들이 산들~ 산들~ 7월의 산들바람에 힘을 얻은 대지가 더욱 싱그럽습니다. 아파트 창 너머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시원한 여름의 운치를 더 하네요.
다시는 그 시절..... 아름답던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정든 내 고향 노태산 자락...... 뻐꾸기가 아름답게 노래하고 연분홍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던 정든 내 고향 노태산 자락......
그 이 후로 환갑이 벌써~ 지난 지금도, 저는 진달래를 참으로~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때 그 매미들도 저렇게 노래했었는데......
맴~맴~맴~ 매 앰~~~
*벤또 : 일제강점기 일본말의 잔해로 초등학교 5학년쯤 돼서야 아이들 사이에서 점차 도시락으로 상용.
*깡똥 치마 : 그 시절 어머니들께선 흰 광목으로 치마를 길게도 입으셨으나
아이들은 무릎 아래 약간 내려오는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충청도 사투리 같습니다.
*책 보 : 지금의 책가방 역할로 면 보자기로 책을 쌀 수 있는 정 사각형 큰 보자기.
*낭하 : 일제강점기 일본말의 잔해로 복도
*우유가루 : 가루우유
*도 나무깡 :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해로 지금의 드럼통
*마루 부시 : 저희 동네 어느 아저씨께서도 천안 역 마루 부시 다니신다고 늘 출근하실 때
도시락을 싸 가셨는데..... 혹 철도 선로 수리하시는 건지요? 제가 직접 보질 않아 잘 모릅니다.
혹 소화물 운반하시는 일이신지요?.....
*지지배: 계집아이의 충청도 사투리
*유리 구멍 : 1950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 안방과 부엌 중간의 가로놓인 벽을 부엌에도 밝힐 수
있도록 등잔이 충분히 들어가 부엌에도 넓게 밝힐 수 있을 만큼 벽을 뚫어 밖으로는 유리를
덧 댄 조그만 공간.
*세기 지름 : 충청도 사투리로.... 석유
주셔유*~ : 충청도 사투리로.... 주세요
*변소: 지금은 화장실로...
*시바 꾸리 : 옛날 일제 강점기의 잔해로, 우리말 콩 주머니
*오재미: 옛날 일제강점기 때의 잔해로.... 지금의 콩주머니
*메기 잡다: 아이들이 옛날 얕은 논 등 얼음판 위에서 놀다가 깨져 발이 빠지는 것
*노 배기 비를 오랫동안 흠뻑 도 맞아 옷과 몸이 매우 젖은 것.(혹 일본 말인지요?... 혹? 충청도 사투리인지요?
첫댓글 푸대자루 쓰고 학교 다니던때가 있었지요. 밀기울에 강남콩 넣어서 찐 개떡도 꿀맛이었고. 하얀쌀밥을 먹고 싶어 산넘어 고모댁에 갔었어요 여덟살때. 우리 고모는 청상과부였는데 우리집보다 살림이 나았는지 고모집에 가면 쌀밥에 고추장 맛이 좋았지요 1958년 서울로 전학을 했고 서울에선 우비나 우산을 썼고 꽁보리밥도 아니고 쌀밥이고...냉장고엔 먹거리가 많은데 다이어트 한다꼬 일부러 안먹고,,,없어서 못먹었던 춥고 배고팠던 지난날들이 있었지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냇가에 물이 불어나 학교를 못가고 개울가에서 동동구르다 집에온 기억도 배곺은기억도 많습니다.
그 때그 매미들도 저렇게 노래 했었는데.......넘 마음에 와 닿읍니다....
-언젠가 이땅에도 다녀갔던 `헬레나 노르배리-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글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면서-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라다크는 검소한 생활과 협동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깊은 생태적 지혜를 통하여 천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왔고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긴밀한 가족적 ,공동체적 삶속에서 사람들이 정서적,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을 받는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주었는데 그러한 사회에 서구적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사회의 환경파손과 사회적 분열이 생겨났고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이 일어납니다.이리하여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생태적 지형과 사회적 조화가 산업주의적 압력 밑에서 붕괴 되지요.나는![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5.gif)
이맘님의 '추상'을 단숨에 읽으면서 같은 세대에 태어나 같은 경험을 공유하며 살아온 아름다운 60대의 모든 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나처럼 추상하면서 오늘을 돌아보고 진보의 개념 자체를 묻고 현대 산업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와 오늘날 사회적 생태적 재앙에 직면한 우리 모두의 장래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고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가 허용되는 세상을 위해서 이 글이 큰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새벽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합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이 카페에 들어온지 3년! 저에게 가장 다가오는 글 입니다. 아주 가끔씩 들어오는 삶 이야기 방에서 흐러지던 지난날 저의 삶 상당부분을 옮겨다 놓은 듯한 님의 글을 읽고서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 빚이 될것 같다는 특별한 마음이 들어 댓글에 참여 한답니다.지난 날을 회상할수 있도록 세심하게 또 담담하게 들려주신 님께 감사 드립니다.
6.25라는 전쟁이 할키고 간 자국은 노태산 자락의 이야기가 아니고 한반도 전체의 이야기 입니다.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던 그 시절, 다시 뒤돌아 보기도 싫은 기억들 이지요. 재미있게 구성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나보다 어리신 분이 6.25때 기억을 아주 생생히 해주시네요...맞아요 저 1학년 입학하자마자 6.25가 터져서 피난을 갔는데 ...걸어서걸어서 지금 용인쯤 어디 시골로 갔지요..입학선물로 사주신 자주색 네모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갔는데 그때 시골 아이들이 그 가방을 자꾸 잡아다니고 귀찮게 해서 울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시골서만 꽁보리밥 어려운 시절을 보낸것이 아니라 서울서도 많이 어려웠습니다...그 청계천가에 집들이 지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인도 ...등 여행다니면서 보는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무서운 상이용사들이 가게에 들어와 갈코리 쇠손으로 주인을 호통치고...무서웠어요. 다시는 그런세상 오면 안됩니다.
6.25를 몇일 앞두고 태어난 저는 선배님과 흡사한 어릴적 추억을 가지고 있지요 단지학교는 5리 정도밖에 안떨어 졌지만요 이글을 첫머리 읽을때부터 선배님은 충청도 분이란걸 알았어요 모든 어귀가 낮설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천안과 온양 중간에 있는 배방에서 태어났어요. 어쩌면 그렇게도 생생하게 어릴적 힘겹게 살던 이야기를 잘 표현 해주셨는지 마치 나 어릴적 이야기 같아서 한참을 추억에 젖어보네요 좋은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그시절 농촌출신이라면 약간의 정도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똑같은 경험해 보았고 누구나 그걸 기억하고 있지만 이처럼 적나라 하게 표현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표현력이 대단하십니다
정말 길고 긴 장문인데도 몇 초에 다 읽었지 싶습니다.저도 옆지기따라 직장 옮겨 다니며 아산, 천안,청주 안 가본데가 없어서 천안이라는 말씀에 어중이 떠중이도 천안을 안다고 동질감같은게 생기곤 하며 읽었습니다.참 잘 쓰십니다.많은걸 느끼며 선배님의 깊은 동심에 세계로 빠져본 시간 잊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사람 사는 건 천안이나 김해나 비슷했군요 . 나도 우산기억은 별로 없고, 마다리 기억만 납니다 . 9 남매의 막내라 다 행 히 동생들 뒷치닥거리 할 일만 없었다 뿐이지 내 어린시절과 대동소이 하군요, 우리는 김해 비행장과 근거리라서 그런지, 내가 어린시절 전깃불이 있었씁니다, 그런데 그때도 계량기가 있었던지 맨날 천날 30촉 이상은 안 켜다보니 참 갑갑했던 기억이 납니다 ,
님의 긁을읽으면서 지난날의 제이야기 와 흡사하여 옛기억으로 더듬게 함니다 누구나 그시절엔 똑같은 처지였으리라 믿어짐니다 아련한 추억더듬으며 삶이야기 방에 들어와 님의 글읽으며 주마등처럼 지난일들이 머리속에서 펼쳐짐니다
옛날 옛적에......요즘 애들은 그리 말할겁니다.
예. 요즘 애들은 전후 세대라 전쟁의 참상을 전혀 모르지요.. 100 년 후 쯤의 우리나라의 생활과 문명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