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쌍스 / 문인수 (1945~2021)
동구시장 입구 삼거리 코너 건물, 이 연립상가 이층에
내 단골 다방이 있다. 어느 기숙사 구내식당용으로나 쓰던 건지,
헌 호마이카 식탁 여섯 개가 있고 여덟 평 공간을 엉성하게
메우고 있다. 식탁마다 비닐 커버를 씌운 철제 의자가
어수선하게 딸려 있고, 시퍼런 활엽 화분 몇 개가 여기저기
마지못해 놓여 있다. 사십대 중반? 갈 때마다 주인여자 혼자다.
혼자 책 읽다가, 먼 데서 떠오르는 듯 천천히 일어선다.
일어서는 바람에 떨군 마른 티슈 낱장처럼 희끗, 웃는다.
웃을 뿐, 도대체 뭔 말이 없다. 소리가 없는 여자는 그렇게,
어쩌다 간혹 들어서는 손님을 썩 반기지도, 그야 물론 박대하지도
않는다. 손님이 나갈 때도 여자는 천천히 진공 상태 같다.
여자한테 아마도 작은 뱃전에 매단 폐타이어 같은 완충이
항상 붙어 있는 게 틀림없다. 화장기 없는 답답한 얼굴,
여자는 늘 흰 블라우스에 검정 주름치마다.
나도 늘 같은 자리에만 앉는다. 찻길, 그리고 시장 쪽 창가다.
창밖 채소·과일 노점들, 노점 할머니며 장 보러 나온 주부들,
집에 가는 학생들, 저기 신호등이며 얼룩덜룩한 횡단보도며
차량들, 복잡하게 엇갈리는 사람들, 옥신각신하는 볼일들이
데면데면 다 내려다보이는 포인트다. 그러나 바깥은 참 오랫동안
변화라고 모르고, 축제도 모르고…… 여자와 나는 또한 몇 해째
서로 성씨도 모른다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월이다. 썩지 않는 평화야 없겠지만,
이 다방 안에서는 어쨌든 다시는 그 누구도 망할 일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부흥’도 들이닥칠 리 없는 이 편한 자리, 나는
걸핏하면 ‘르네쌍스’의 관람석에 갇힌다.
비의 뿌리 / 문인수 (1945~2021)
지상엔 아직 슬픔의 입자가 반짝이며 떠돈다.
비 그치고 개여서 햇볕 쨍쨍한 여름날 오후 지렁이 한 마리가
화단의 나무그늘 흙 속으로 느릿느릿 몸 밀어넣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얼마나 화급한 동작이냐.
웬 毒한 불인지
금세 소각돼 흔적 없어질 것처럼 쫓기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새빨간 끈 같은 것이 참 간발의 차이로 마침내
멀쩡한 대낮의 환한 바닥을 뚫고 길쭉하게 마저 들어갔다.
제, 젖은 암흑과 단단히 비끄러맨 자국인지
그런 구멍이 나 있다.
비의 뿌리가 지금 막 깊이 숨었다.
빗소리 모아 듣다 / 문인수 (1945~2021)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