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에서 5일(8, 完)
(2024년 1월 3일∼7일)
瓦也 정유순
4-3. 문자박물관(2024년 1월 6일)
은허유적지에서 약30분 정도 이동하여 중국문자박물관으로 간다. 2009년에 개관한 문자박물관은 국가1급박물관으로 갑골문, 금문(金文), 간독(簡牘), 백서(帛書)를 비롯한 유물과 한자의 발전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첨단박물관이다. 3만5,000㎡ 면적으로 소장 문물이 4,000건이 넘는다. 은허유적지에서 본 갑골문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갑골문을 비롯해 1급 문물이 305건이다. 여권을 보여주면 무료입장권을 발매해 준다.
<중국문자박물관 상징물>
<불사조(Phoenis Bird)>
중국문자박물관의 전시장은 본관의 1, 2, 3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면적은 7554㎡에 달한다. 홀, 기본전시장, 전문전시장, 특별전시장 등으로 나눠져 있고, 중국문자박물관에 진열된 문자문물을 보면 한자의 기원, 발전과 변천의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안양의 갑골문 발견, 발굴과 연구 과정이 한눈에 나타난다. 주 문왕이 주역을 발전시킨 곳이며, 세계 최초의 문자 중 하나인 갑골문자의 고향으로 문자의 성지라고 불리고 있는 곳이다.
<중국 문자박물관>
문자박물관 본관으로 통하는 길 양측에는 구리로 만든 갑골 편 28쪽이 비림(碑林)을 이루고 있다. 이는 상은(商殷)시기를 대표하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상징하기도 하고, 28성숙(星宿)을 나타내기도 하여 사람과 자연의 화합통일의 뜻을 담고 있어 고전 철학의 천인합일의 생동한 표현이다. 갑골 비림 속을 거닐면서 우리 전통 민속놀이인 윷판의 28수(宿)를 떠올리기도 한다. 상은문화와 함께 선조들의 발명과 언어문자 운용의 지혜를 느낄 수 도 있다.
<갑골편 비림>
문자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셔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4층 건물 높이 그대로 툭 트인 천정과 사방의 벽에는 문자에 관한 글들이 적혀 있다. 1층 중앙부에는 갑골문자에 관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안에는 4천123개의 소장품이 있고, 그 중 1급 문물이 305개이며 특히 8개 명문이 적힌 청동기도 있다. 갑골문과 한자 발전사를 통해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려는 속셈이 엿보인다. 이런 글자를 한자(漢字)라기 보다는 은자(殷字)가 맞을 것 같다.
<문자박물관 천정정>
<갑골문지 발굴 장면>
벽면에 까막눈이라 알 수 없는 글들이 진열되어 있는 데, 다행이 ‘流觴曲水(유상곡수)’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 놀이는 사람들이 모여 물가에 둘러 앉아 술잔을 채워 시냇물에 흘려보내서 술잔이 자리 앞에 멈춘 사람이 시를 짓고 술잔을 비우는 놀이의 일종으로, 주로 삼월 삼짇날 액막이 의식을 치르고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중국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수계(蘭亭修禊)가 유명하고, 우리나라는 경주 포석정(鮑石亭) 유상곡수가 알려졌다.
<많은 글자 속에 '유상곡수(流觴曲水)'>
창일(蒼頡 또는 倉頡)은 최초로 문자를 창제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로,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며 눈이 네 개로 총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전국시대( 戰國時代) 후기의 <순자(荀子)>에 나타나며, 한(漢)나라 때에 황제의 사관이었다고 밝혀진다. 진시황(秦始皇)의 재상이었던 이사(李斯)가 창힐의 이름을 딴 <창힐편>이라는 초학자용 자서를 만들었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문 창제자 창힐>
<점괘를 본 후 내용을 읽어주는 왕>
은허에서 발굴된 5,000여 개 갑골문 중 해석이 가능한 글자는 1,500자에 불과하지만, 모양을 본뜬 상형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한자의 시원을 보는 것 같다. 사물은 아니지만 방향처럼 그냥 봐서 알 수 있는 글자도 있다. 둘 이상 합쳐서 만든 글자도 많은 것 같고, 소리와 뜻을 구분해서 결합하는 형태의 문자도 있는 것 같다. 발음이나 모양을 빌려서 만드는 글자들도 소개한다. 2층의 전시실에는 발굴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갑공문자 형성자>
<갑골문>
청동기 속에 새긴 금문은 갑골문에서 변화한 것을 알려준다. 대형 쟁반 안에 21행 360자가 새겨져 있다. 서주의 왕을 보좌해 출정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내용을 적었다. 갑골문이 청동기 속과 도자기에도 글자를 새겨 넣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연나라의 진품 도기에 새긴 도문(陶文)도 있고, 화폐나 도장에 새긴 문자도 있는데, 설명이 없어 조금 답답하다. 전국칠웅(七雄)의 전국시대를 거쳤으니 나라마다 표기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금문을 새긴 서주 시대 내반>
전국칠웅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왕을 황제(皇帝)로 바꾸고 짐(朕)을 지칭한다. 도량형(度量衡) 등을 통일하고, 문자의 표준을 만들어 문자통일을 했으며, 대나무 조각에 새긴 죽간(竹簡)과 비단에 쓴 백서(帛書)도 생겨났다. 종이가 발명되자 서체도 다양해지고 어휘는 날로 발전했으며 지식은 기록이 되어 책으로 전승됐다. 그 이전에 껍질과 뼈를 빌려준 거북과 동물이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일을 기록으로 남긴 상(商)나라가 돋보인다.
<진시황>
<종이 제조장면>
1939년 3월 중국 하남성 안양 은허의 농경지에서 출토된 사모무정은 무게가 875㎏, 높이가 133㎝, 길이가 110㎝, 너비가 78㎝로 세계적으로 제일 큰 청동기 솥이 출토되었다. 이 솥의 내부에는 ‘사모무(司母戊)’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사모무정(司母戊鼎)>이라고 불린다. 이 솥은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가운데 금문이 주조된 것으로는 글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은왕(殷王)이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내용인 것 같다.
<사모무정(司母戊鼎)>
문자박물관을 끝으로 4일 째 되는 오늘 중국 하남성의 공식 여정은 모두 끝났다. 5일 째 되는 내일은 특별한 일정 없이 귀국만 하면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2015년 11월에 왔을 때는 박물관에서 별도로 동이(東夷)문명을 전시하였으나, 지금은 동이문명에 대한 유물이 안 보인다. 다 치워 버렸는지 아니면 새로운 문화공정을 통해서 동이문명을 말살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문자박물관 전시물>
중국 사람들도 동이족은 부지런한 지혜와 해박한 해양지리의 장점으로 해안가의 특징을 지닌 ‘동이문화’를 창조했다고 칭찬했었다. 그리고 땅덩어리가 넓은 지역이라 이동하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많은 유물과 유적들을 다 섭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너무 짧은 지식과 견해 때문에 눈으로 본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에게 송구할 따름이다.(完)
<점괘를 새긴 소뿔>
https://blog.naver.com/waya555/223352846477
첫댓글 날짜의 숫자상으론 그다지 길지 않은것 같은데
꽤 오래 게시며 다니신것 같네요,
피곤 하지 않으셨을가요? 날자 수만 봐도 지치네요, 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