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오쿠시 주민에 대단한 선행" |
상록수부대 동티모르 4년 - 제1편 석별의 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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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시에 상주한 상록수부대원들이 귀국을 앞두고 철수신고식을 가졌다. | 2003년 10월 18일. 상록수부대 철수기획단의 일원으로 나는 동티모르 오쿠시에 도착했다. 서티모르내에 위치하고 있는 오쿠시는 서울시만한 크기에 인구는 약 5만명으로 우리네 40~50년대의 전형적인 시골풍경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나는 상록수부대의 6~7진 교대업무로 꼭 1년전 이곳 오쿠시를 방문했을 때보다 너무나 변화된 모습에 적잖이 놀랬다. 내전의 상처가 많이 아물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공공건물만이 내전의 참상을 알리듯 불타버린 채 무너져 내린 벽체와 기둥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 이제 1년전 을씨년스런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국군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거리엔 생기가 돌았고 현지인들은 우리 일행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보답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 한 봉지를 건네자 웃음 가득 ‘감사합니다’라고 우리말로 또박 대답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론 놀랍고 한편으론 뿌듯한 무언가가 가슴에 치밀었다. 1년전 처음 오쿠시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우리말로 인사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었으며 그저 낯선 이방인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엔 호기심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합동참모본부의 철수기획단과 함께 동행한 국내 방송 3사 기자를 비롯한 관계자 일동은 우리말로 인사하는 현지 주민들과 밝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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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지도(지도상 왼쪽 검은 부분이 오쿠시) | 10월 22일. 상록수부대가 철수하기 위해 동티모르 바우카우 국제공항으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사실상 오쿠시를 완전히 떠나는 날이다. 하늘은 푸르렀다.
주민 500여명 공항서 하루종일 "환송"
오쿠시에 파병된 249명 전부대원을 대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50명씩 3시간 단위로 유엔이 제공한 항공(DAC-7)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철수를 위해 이동하는 부대원들의 바쁜 걸음과 오쿠시 공항에는 하루종일 장병들을 환송하기 위한 500여명 가량의 현지 주민들이 몰려와 떠나는 자와 떠나보내는 자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벽체는 없고 그냥 기둥 몇 개에 덩그러니 슬레이트를 얹어 지붕을 대신하고 있는 오쿠시 공항은 글자 그대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우리나라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이 연상되듯 지금 이곳에서는 만남이 아닌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장소로 돌변하고 만 것이다.
태권도 제자 40여명 몰려와 울먹
현지 주민들은 그동안 알고 지냈던 장병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서로 껴안고 헤어지기 아쉬워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동행 취재하던 기자들도 눈시울을 적시었다.
특히 오쿠시 성베드로 고등학생들은 장병들을 위해 작사한 동티모르를 잊지말아 달라는 이별의 노래와 함께 올드 랭 샤인이 울려퍼질때엔 장병들 모두가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한 채 몇 발자국을 가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곤 했다.
매일 3시간씩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해온 김상범 중사는 제자 40여명이 몰려와 울먹이는 소리로 ‘사범님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한 채 바우카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50분 내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았다.
나 또한 지난해 상록수부대 6진이 귀국할 때 이곳 현지주민 수백여명이 장병들을 눈물로 환송하던 모습을 보았음에도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1000여명 미사 봉헌 석별의 정 나눠
이에 앞서 19일 현지주민들은 귀국을 앞둔 상록수부대원들을 위해 오쿠시에서 가장 큰 눈바이 성당에 모여 마지막 미사로 석별을 정을 나누기도 했다. 평소보다 많은 1000여명이 성당을 가득 채운 채 “오브리가드 바라크.”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로 떠나보내는 장병들을 위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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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시 주민민들은 지난 19일 휴일을 맞아 눈바이성당에 모여 '감사하다'라는 뜻의 '오브리가드 바라크'를 연신 연호하며 그동안 한국군이 베푼 고마움에 대신했다. |
신부님 대신 미사를 집전한 젤라 다 꾸냐 수녀는 “한국군이 오쿠시 주민들을 위해 베푼 점은 성직자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대단한 선행이었다”며 “고국에 안전하게 돌아가기까지 이곳 주민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겠다”며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10년전 소말리아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귀향길에 올랐던 나는 당시 현지 어린이들이 자기들을 한국에 데려가 달라고 울던 모습이 이곳 아이들 모습이 함께 오버 랩되면서 더욱 가슴이 저려왔다.
오쿠시민 눈물이 현지활동 대변
오쿠시 공항의 작별 모습을 취재하던 모 방송국 기자는 정말 감동 그 자체라며 “이 눈물의 작별 하나만 보더라도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그동안 어떻게 활동하고 현지 주민들을 대했는지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도 울먹이며 리포트했다.
바우카우 공항에 도착한 나는 그곳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인 23일 서울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 무엇이 상록수부대 장병들과 현지 주민들간에 눈물의 작별을 하게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현지인이 늘 우리 장병들을 만날 때마다 전한 ‘이타 코레가’(우리는 친구다)의 참뜻도 되새겨 보았다.
24일은 더구나 제58회 유엔의 날이다. 아직도 딱히 뭐라 얘기할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4년동안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동티모르에서 쓴 파병일지와 현지 방문시 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하나 풀어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생각이다.
" 중장비 조작법 가르치며 자립심 고취" |
상록수부대 동티모르 4년 - 제2편 자립의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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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오전 10시. 오쿠시 오에바우 축구장에는 그동안 상록수부대가 2년여동안 오쿠시에 머물면서 사용해온 차량을 비롯한 각종 공병장비 320여종 3만2000여점을 동티모르에 기증하는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알카트리 동티모르 총리를 비롯해 평화유지군 사령관인 말레이시아의 만유소프 중장, 유진규 현지 대사, 특전사령관 김윤석 중장 및 장병들과 지역주민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거행됐는데 이 행사에는 오쿠시 내에 있는 초·중·고교생 800여명도 학교측의 배려로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록수부대의 철수는 사실상 이번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8진에 앞서 7진(단장 김영덕 대령, 육36)이 상주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됐다.
상록수부대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그동안 현지 주민들의 현실이 귀향의 기쁨보다 더욱 아팠기 때문이다.
상록수부대원들은 철수작전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대로 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 청년들을 대상으로 20명씩 1개반으로 편성해 1개월간 4개반에 대해 중장비 조작 기술을 가르쳤다.
제7진이 철수하고 8진때부터는 구급차를 비롯해 불도저·페이로다·포크레인·진동로라 등 기증키로 한 장비를 운전할 5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 8월 부터 2개월 동안 하루 6시간씩 교육, 운전뿐만 아니라 정비능력까지 길러 주었다.
교육책임을 맡은 박일영(소령, 육사46) 지원대장은 “철수작전의 일환으로 주민들에게 장비 운용 및 정비 교육을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자립심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며 “교안작성도 교육생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1차로 영어로 번역한 뒤 다시 그들의 공용어인 테튬어로 번역해 만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교육과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불도저 교육생이었던 프란시스코(24세)는 교육에 임하는 상록부대원들의 진지함과 세심한 배려에 대해 “동티모르가 일어 설 수 있도록 장비를 기증해주고, 운전교육까지 해 준 대한민국 상록수부대에 말할 수 없이 감사하며 열심히 익혀 잘 활용하겠다”는 인사말에 장비별 교육과정에 참여한 부대원들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상록수부대는 만 4년동안 동티모르의 평화유지활동을 하면서 다른 국가에 서 파견된 유엔군과는 물론 정부관계자, NGO 단체 및 현지주민들과 사전에 긴밀한 협조를 통해 조그마한 마찰 없이 임무를 수행해 왔다.
특히 7진때는 오쿠시 지역에서 국경선 116킬로미터를 도보로 답사하면서 인도네시아군이 설치한 150여개의 경계 표식주를 찾아내고 이를 PKF사령부에 보고, 동과 서티모르간의 국경선을 확정짓는데 단서를 제공했다.
당시 PKF사령관이었던 싱가포르의 탄헉짐 소장은 직접 상록수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의 수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상록수부대는 오쿠시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극복하며 발견한 150개의 경계 표식주에 대해 인접 주민들에게 상호 확인시킴으로써 양국간의 국경마찰 소지를 근원적으로 없애려고 노력했다.
제7진 당시의 공보과장 위용섭 소령은 “전우들이 수색작전을 펴면서 국경통제소까지 운영하느라 이중삼중의 고통이 뒤따랐지만 양국간의 확실한 국경선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작전에 임했었다”고 전했다.
특히 우리의 오랜 우방국의 하나인 서티모르 지역의 인도네시아군과 매주 한차례씩 상호 방문을 통해 동티모르와의 중재역할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단 한건의 마찰이나 분쟁이 없었던 점은 지금 생각해도 우리 부대원들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이렇듯 부대는 철수를 앞두고 동티모르 국경순찰대와 인도네시아군간의 협조회의를 완전 정례화 될 수 있도록 양쪽의 지휘관 만남을 주선하는 등 상호 신뢰의 싹을 틔워주었다.
2년전 상록수부대가 이곳 오쿠시에 주둔하기 전에는 동티모르와 서티모르 국경선은 대충 주요 지형지물을 연하는 선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지금의 국경선은 경계표식주를 대신하고 있으며 우리의 비무장지대처럼 양측간 1킬로미터 정도의 완충지대를 두었다.
국경통제소는 동티모르와 서티모르를 연결하는 주요 길목에 5곳에 배치했는데 한국전쟁 직전 우리의 38도선과 같은 개념의 국경선으로 소정에 절차만 밟으면 서로 왕래도 할 수 있다.
부대원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운 국경통제소는 올해 초 동티모르 국경순찰대에게 이양하면서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군과 동티모르 굮경순찰대간에 대화로서 문제를 풀도록 매주 한번씩 정례적인 협조회의를 갖도록 한 것이다.
한편 상록수부대는 1진때부터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자립심 배양차원에서 태권도를 교육해 왔다. 태권도 교육시간의 절반이상을 예의범절 교육으로 편성한 것도 태권도를 통해 자립심과 용기를 기르기 위함이었다.
수도 딜리 근교에 있는 방위군 훈련소에도 7진까지는 태권도 교관 2명을 파견해 태권도를 교육하면서 자체 교관까지 양성, 현재는 정규과목으로 태권도가 편성되어 있다.
지난해 10월 필자가 국내 취재진과 함께 방위군 훈련소를 방문했을 때 훈련생들의 ‘태권’이라는 힘찬 소리를 듣고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해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동티모르 태권도 선수단도 상록수부대 장병들이 오쿠시에 앞서 주둔했던 로스팔로스에서 태권도를 배운 학생들이었다.
상록수부대는 동티모르인들이 혹시나 자존심이 상할까봐 아주 세심한 곳까지 배려했다. 지금 귀국한 장병들은 좀 더 잘 해주고 많이 가르치진 못한 점을 아쉬워하지만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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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 봉사에 한국의 거리 만들어 화답" |
상록수부대 동티모르4년 - 제3편 인간 사랑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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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시에 주둔한 상록수부대 지원대 막사전경. | 상록수부대 정문에는 ‘첫 마음’이라는 대형 슬로건이 걸려 있다. 장병들이 내전으로 상처입고 굶주린 동티모르 사람들을 위해 평화의 사도가 되겠다는 첫 마음을 잊지말자는 부대원들의 다짐을 새긴 것이다.
사실 동티모르 평화유지단의 ‘상록수’라는 애칭은 10년전 소말리아에 공병대대가 파견될 당시 대대장이었던 장정훈 중령(육35기)이 부대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만들었는데, 우연히도 안산시에 주둔한 부대와 심훈의 소설 ‘상록수’ 작품 배경이 안산시 일대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채영신과 같이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는 장병들의 파병동기가 부대이름으로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부를수록 가슴에 와닿는 애칭이다.
해외파병 장병들이 임무교대를 위해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를 보면 거의 말이 없다. 출국때는 가족을 비롯한 친지들과의 이별, 물설고 낯선 이국에서의 임무수행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움에 말수가 줄어들고, 귀국때는 힘들게 살고 있는 현지 주민들을 좀 더 도와주지 못한 아쉬움으로 인해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동티모르에서 본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언제나 유쾌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제8진 정보작전과장 임대섭 소령은 “남을 돕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기에 힘이 생기는 것 같다”는 말하면서 “장병들이 비록 열악한 환경이지만 동기부여가 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라 신명나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할 수 있었던 같다”고 설명했다.
군에서는 해외파병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 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또 임무수행 기간중 여건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4박5일간의 휴가도 허락하고 있다. 그 덕분에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호주 다윈에 있는 유엔 휴양소에 팀별로 다녀오기도 했다.
특히 장병들은 조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대신 인터넷으로 편지를 보낸다. 전화사용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통화중에 그동안 쌓인 그리움이 폭발할지 몰라 통화보다는 감정절제가 가능한 편지를 쓴다고 한다. 디지털시대에도 아날로그문화가 필요한 법이다.
상록수부대가 주둔한 동티모르 오쿠시에는 일본 공병중대가 1.5㎞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업무협조 차원을 비롯해 장병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장병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기간 중에는 오쿠시 지역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미니 월드컵 경기를 공동으로 주최,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지난 10월 22일 장병들의 철수시간에 맞춰 일본 장병들이 상록수부대를 방문, 그간의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서 그동안 장병들은 일본군에게도 상록수의 기개가 가슴깊이 느껴졌음을 알 수 있었다.
4년전,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 로스팔로스 지역에 첫발을 디뎠을 때 현지 주민들은 반기기는커녕 장병들에 대한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았다. 25여년간 인도네시아의 폭압과 독립에 반대하는 민병대의 만행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그들이기에 군인에 대한 반사적인 거부감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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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순찰에 앞서 지형숙지 등을 위한 작전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 상록수부대원들은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면 현지 주민들도 마음의 문을 열 것이라는 확신에 그들에게 성급하게 다가서진 않았다. 우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민병대들이 활동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어서 경계근무 및 치안활동을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현지주민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틈나는 대로 대민지원사업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상록수부대의 활동과 실체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타국가의 평화유지단보다 빠른 2년만에 로스팔로스는 동티모르에서 가장 안전한 치안유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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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시간대 지역순찰에 나선 상록수부대원. | 로스팔로스 지역에는 ‘말룩 코레아(한국의 거리)’라는 대형 입간판이 있다. 상록수부대원들의 지역주민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에 감동받은 그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한국의 거리’를 명명한 것이다.
‘한국의 거리’와 관련한 일화 한 토막. 이 거리에서 아무나 잡고 ‘베드로 코리아’가 누구냐고 물으면 주민 모두가 소상히 알려준다. 제1진 상록수부대가 처음 동티모르에 도착할 당시의 박인철 단장(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어수선한 지역 분위기로 경계근무가 삼엄한 당시, 한밤중에 관할 구역내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응급환자는 만삭의 임산부로 곧 출산 기미가 있는데다 산고에 지쳐 정상분만이 어려운 상황. 현장으로 달려간 군의관 임기열 대위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환자와 가족을 안정시키며 야전병원으로의 후송 도중 앰블런스내에서 아이를 받게 되었다. 이내 야전병원에 도착, 사후 안전조치를 끝마쳤을 때 먼동이 터오고 아이와 산모는 모두 무사했다. 이를 지켜본 이웃과 아이의 부모들이 감사의 뜻으로 아이의 이름을 ‘베드로 코리아’라고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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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민봉사 차원에서의 의료활동을 철수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 이라크·아프간·서부사하라 등 어느 곳에서든 장병들의 인기는 최고다. 장병들은 메마른 땅에 단비를 주듯이 현지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부터 도와주고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도와주니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병들이 현지 주민들과 어울리는 노하우는 부대가 교대할 때마다 전수된다. 심리전을 비롯 민사작전 이론 외에 마켓팅 기법까지 원용해 현장 경험과 접목시켜 대단한 노하우가 된다.
일례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나눠줄 때도 직접 주지 않고 현지주민들의 관습에 따라 촌장에게 분배하게 한다. 주민들을 만나면 장병들이 먼저 ‘본디아(안녕하세요)’라고 현지어로 말한다. 제7진이 머물 때는 그 본디아라는 현지어대신 우리말의 ‘안녕하세요’라는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렇듯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언어도 가능한 현지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치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할 때 그 친근감이 배가 되듯이 잘 활용했다.
그러나 장병들은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걱정이 많아진다. 정이 그만큼 깊어져 그들과 동화돼 어느덧 그들의 걱정이 장병들의 걱정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민진료 활동차 마을을 방문하면 꾀병환자들이 절반은 된다. 약이 귀하기 때문에 약을 타내기 위해 괜히 배탈이 나고 두통을 호소한다. 군의관들은 야단도 쳐보지만 그들의 속내를 알기에 모른 척하고 약을 건네곤 한다.
장병들은 속아주는 맛에 하루 해를 보내기도 했다. 제5진때 ‘지또’라는 10살난 아이가 있었다. 좀도둑질이 잦은 지또의 행동에 장병들은 알고도 모른 체 하며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장병들은 아예 그 아이 집을 방문,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돌봐주자 그 아이가 감동해 나쁜 버릇도 고치고 태권도도 열심히배우는 아이로 변모했다. 지또는 제5진 장병들이 귀국할 때 삼십리를 뛰어와 눈물로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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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부대원의 철수직전 환송식에 나온 현지 주민들. | 순수한 눈을 가진 사람만이 순수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장병들은 구호품 몇 개로 주민들과 친해질 수 없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인간 상록수들은 그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끊임없이 베풀었다.
6개월 단위로 파병된 장병들의 생활습관이 파병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우선 음식은 먹을 만큼만 준비하고 절대로 남기지 않았고, 가정의 평화 없이 조국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가 없음을 깨닫고는 가정에 충실하게 된 점이다.
또 평화유지활동에 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지에서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과 자신을 대신해서 조국을 지키고 있는 전우들의 노고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귀국한 간부들 중에서 늦둥이가 태어나는 점이다. 이것이 해외파병 임무수행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아직 10년은 더 지켜봐야 하기에 굳이 밝히지 않으련다.
장병들은 6개월간의 파병생활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기간이라고 서슴없이 얘기한다. 한 국가가 어떻게 해서 무너지고 또 어떤 과정을 밟으며 다시 일어서는지를 보았다. 인간 본능이 다 들어나는 전장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국제사회에서 냉엄한 질서를 피부로 느끼며 진정한 사랑을 실천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짧은 기간이지만 그토록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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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분쟁지역에서의 작전 경험이 큰 소득" |
첫댓글 ㅡㅠㅡ
감동 받을게 그리 없었나...
감정이 메마른 놈. -_-; 인간 대 인간이 가장 가깝게 대면하는 데서 휴머니즘이 피어나는 거다. 또 우리나라 군인들이 가서 세계평화에 공헌한다는 점도 자랑스럽고 말이야. 뭐 군대 조직의 특성상 과장하는 것이 없잖겠지만, 그래도 구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