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을 내가 읽다
이동민
나는 1994년에 첫 수필집 ‘떠내려간 고향’을 출판했다. 출판 이전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니, 1980년 대에 쓴 글도 있을 것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10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돌아서서 지난날을 보니 나는 줄곧 쓰기만 하였고, 내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수필집을 발간하고는 밀쳐버려 두고 다시 새 글을 쓰기에만 바빴다. 첫 번째 수필집을 꺼냈다. 제일 앞에 실린 글이 ‘시골집’이다. 시골집은 나의 유년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떠날 때까지 청, 소년기를 보낸 보금자리이다. 그때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창고이다. 그 추억들이 나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글이 너무 감성적이어서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내 글을 읽기로 한 것은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서이다. 글쓰기의 숙련도는 말하지 않겠다.
수필은 정의에서 ‘자아의 표출’이라고 하였다. 나의 자아 형성에는 유년기와 청소년 때의 일들이 가장 풍부한 자료가 되어 있다.
나는 경주의 시골 농사집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초, 증,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시골 마을을 떠나왔다. 초, 중, 고를 다닐 때 나는 무척 내성적이었다. 더구나 운동신경이 둔해서 체육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풍금 반주에 노래를 부를라치면 교실에는 웃음이 터졌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 만한 재주가 없으니 혼자서 만화책을 읽고, 동화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의 유년기에는 책 때문에 그려진 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내 문예반에서 활동했다. 이때서야 문학으로 불리는 책들을 읽었다. 문고판이었지만, 100권 쯤 되는 문학전집을 읽었었던 것 같다. 문예반 친구들과 설익은 문학지식으로 토론도 하였다. 그때 워즈워드와 바이런을 알았고, 아이반호를 읽었다. 뒤마도, 빅톨 위고의 작품도 문고판으로 읽으면서 알았다.
이때 원형갑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1992년에 수필로 등단할 때도 도움을 주셨다. 나더러, ‘너는 운문보다 산문이 더 좋아’ 하는 말을 듣고는 시는 일체 쓰지 않았다. 그 말이 오늘 내가 수필을 쓰게 된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유난히도 예술지향적이었지만, 문인이 된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그렇더라도 그때의 일들이 지금, 내가 수필을 쓰게 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대학에 진학하여 대구로 옮기고는 문학은 나와 멀어졌다. 학과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차서 문학 서적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었다.
문학을 잊고 지낸 시간이 길게 흘러갔다. 30대 초반에 개원하여, 40대 중반을 넘어가니 시간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수필이랍시고 감상문 정도를 써 보곤 하였다. 다시 원형갑 선생님을 찾으면서, 수필쓰기를 시작하였다. 개원의의 생활이 그렇듯이 시간이 나는 틈틈이 시간을 보내는 기분으로 그림책과 문학 서적을 읽었다. 짬짬이 수필도 썼다.
다행이라면, 아내는 성당의 유치원에 다니면서 크레욘으로 그림을 그렸다 색상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서 중, 고등학교 때 미술반을 하였단다. 대학 진학을 한 후에 그림에 대한 미련으로 붓을 잡고 서예를 하였으나, 나에게 시집와서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잊고 살았다. 내가 개원하면서 다시 서예를 시작하였다. 서예는 한문도, 중국 문학사도, 중국 미술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아내와 아침 산책을 하면서 중국 예술 이야기를 나눈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것은 아내의 영향인지 모른다.
시골집을 읽으니 나의 유년이, 나의 청소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필로서의 형상화는 무어랴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는 중요하다 싶어 여기에 올린다.
시골집
이동민
내가 자란 시골집은 허물어질 듯한 골기와 집이다. 농사집답게 널찍한 마당의 구석구석에는 음습하고 퀴퀴한 흙 냄새와 더불어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방, 한지로 발라 둔 벽지의 틈 사이로 벽의 흙먼지가 비집고 나오기도 하였다. 동짓달의 바람소리가 방 공기를 헤집으며 호롱불을 흔들어 깜박거리게 하였다. 선뜩선뜩한 한기가 느껴지는 어깨에 이불을 추슬러 덮으면서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소설책을 읽던 윗방의 아랫목이 지금 자꾸 내 머릿속에서 맴을 돈다. 그 어둑한 방의 정경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한다.
추녀가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대는 날에는 이끼 자욱한 골기와장이 마당에 떨어져 깨어지는 소리에 놀라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럴 때면 어머니는 이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집을 지으려 몇 번이나 새집의 도면을 그리곤 하시다 끝내 뜻을 못 이루신 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원망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이미 수년 전에 세상을 등진 형님으로부터 내 바로 밑의 여동생까지 유년을 보내고 학교를 다녔고 짝을 지어 떠나갔으니 헐어버릴 수 없는 기억들이 수없이 많이 새겨져 있다.
내 어릴 때만 해도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윗마을의 부잣집마냥 우람하지 못함이 부끄러웠고 읍내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친우네 집의 산뜻하고 깨끗함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꾀죄죄하고 초라하기 이럴 데 없어 보이던 시골집, 말만 와가였지 덕지덕지 버섯이 피어 축 늘어져 있는 골기와에는 마흔이 갓 지나 혼자되신 어머니의 생애만큼 고달프고 피곤함이 이끼되어 베여 있었다.
아홉 살 때의 겨울, 꽁꽁 얼어붙은 마당에서 마지막 하직을 하던 아버지의 상여를 붙잡고 섦게 우시던 어머님의 애절함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시골집, 제사를 모시는 날에는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집안을 정갈하게 청소를 하고 나면 친척들이 모여 제수 준비에 부산하였다. 7대 째 이어온 종가를 지키던 어머니는 큰 방의 방문을 열어두신 채 숙모와 형수께 이것저것 시키는 종부의 위엄이 마당에 가득 울렸다
아버지 떠나가실 때 소복을 한 모습이 처연하여 이웃들이 애련해하였던 누님이 시집갈 때는 친척들이 모여 떠들던 웃음소리가 흙담을 넘어가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며느리 한 명 따르지 못하였던 것을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큰 형수님이 시골집으로 혼수를 보내 올 때는 온 뜨락에 흰눈이 쌓였었는데 어머니의 눈물이 희디 흰 눈 위에 떨어졌다.
농사집 안 주인이 되어 머슴들을 다독거리며 지은 볏가리가 마당 가운데 높다랗게 쌓일 때면 창백한 가을달이 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의 창호지에 그림자를 두리우곤 했다.
밤 사이 내내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가 창틈으로 새어나와 마당을 건너 사랑채에 뒤척이며 누워있는 내 가슴을 아리도록 아프게 해주었는데------. “밤 새워 셈을 해 보아도 일년 내내 지은 농사인데도---, 어떻게 네 학비를 대고 농비를 감당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잠 못 이루었다”니, 소리없이 흐느끼던 속울음이 얼마나 많이 기침 소리에 담겨 있었을까.
가난하고 쪼들린 가계로 7남매의 학업을 맡으시고 또 시집, 장가를 보내면서 갈무리 핸 낸 것이 어머니의 현실이었다면 긴 인고의 세월을 세월을 말없이 같이 해 온 시골집 또한 그 어려운 어머니의 세월과 더불어 퇴락하고, 사그라져가고 있었나 보다.
그 오래 된 집에 일곱 남매가 석류알처럼 올망졸망 채우고 있었더라도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안 계신 자리를 얼마나 메꾸어 주었을까.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자주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형님들이 장가를 드실 때도, 형님들이 새 살림을 나실 때도, 방문을 열 어두고 멍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짓던 모습이 바래진 사진이 되어서 나에게 남아있다.
한 여름의 후덥지근한 밤에는 뒷담 너머 이어진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골집 마당을 휘돌며 지나가곤 하였다. 우리 가족은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별똥별이 이리저리 흩어진 여름밤을 이야기로 보내곤 하였다. 마당 한 가운데 피워둔 모깃불에서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담 너머 들녘 저쪽의 당메골에서 도깨비 불이 돌아다닌다 하여 어릴 때는 밤이 되면 후미진 뒤안에는 얼씬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가슴속을 파고 들기만 하였다.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가버리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지만 어머니의 삶 속에 용해되어 있는 나의 시골집도 흘러가고, 변해가고, 퇴락해져 갔다.
담장따라 둘러서 있던 홍도화는 봄철만 되면 낡은 고가를 온통 꽃속에 묻어버렸는데,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복숭아 나무는 액운을 준다고 하여 모두 잘라버렸다. 그래서 봄이 와도 낡은 시골집은 벌거벗은 채 어머니처럼 추워보였다.
막내 여동생마저 시집을 가버린 후에는 모처럼 시골집을 찾아가보면 마당 구석에서 우리집 만큼 오래 자란 감나무의 잔 가지가들이 삭아서 삭정이가 된 채 떨어졌고, 잎도 성글어지면서 고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곁을 잔가지 마냥 떨어져서 떠나버린 아들, 딸들, 그 넓디 넓은 집을 홀로 지키는 어머니의 피부가 거칠어져 가는 만큼 시골집에는 어머니의 지난 세월이 회한이 되어 적막감만 수북히 쌓여가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낡은 것은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간다지만 우리의 지난 세월, 지난 삶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추억이란 단지 아름답기만 한 속성 때문일까.
형제들 모두가 뿔뿔이 어머니의 둥지를 떠나와서는 생각하는 방식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어머니의 삶과는 너무나 다르게 살아들 가고 있다. 모두들 자기 삶의 고달픔에 목소리를 높이고, 바쁘기만 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어머니가 겪은 질곡의 삶곡의 삶을 그때의 세월 탓으로만 돌려버린다면 푸른 빛 도는 달빛마냥 서럽기만 한 어머니의 한숨은 어디에다 벗어두어야 할까.
이제 여든이신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가던 시골집을 잊지 못하신다. 노아집처럼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가 쌓이지도 않는 깨끗한 집, 내가 어릴 때 부러움으로 바라보았던 읍내의 친구집만큼이나 산뜻한 집을 우리 형제들이 마련하여 살고 있다. 시골집을 떠나 온 어머니는 그 산뜻한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떠도는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우리가 사는 일이 뜬구름같은 허망한 인간사인데도 아들집에 터집지 못하는 어머니만 탓하였으니. 불효의 죄업이 씻어질 수 있을런지.
내 아이가 자라서 벌써 내가 어머니 곁을 떠나올 적의 나이가 되어가는구나. 더군다나 아웅다웅 오늘을 사느라 흐르는 세월조차 잊어버렸는데 어머니의 그림자를 통해 되돌아 보니 왜 우리가 사는지------. 새삼 서러움만 가슴 속에 쌓이는구나. 어차피 억겁 윤회를 되풀이 하는 것이 사람사는 일일텐데 그리워하고, 만나고, 탓하고, 헤어지는 것이 모두가 덧없어라.
홍도화가 피었던 옛 시골집 마당에 우리 동기들이 다시금 모여 앉아 우리 사는 인간사는 무엇일까를 밤이 늦도록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구나. 얘들아 밤이 늦었다. 이제 그만 잠이나 자거라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구나.
(1992)
첫댓글 내남 없이 힘들게 살아왔던 그 시절
동민형의 유년시절이
나도 그 시절을 넘어와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