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99.100
군주의 통치술
가슴 아프지만 공주도 유배지로 떠나라
태종 이방원은 반역을 도모하려 한 이거이를 엄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뿌리치고 이거이 부자를 고향 진주(鎭州)로 유배 보냈다. 이거이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과 그 아들 이저의 상당군(上黨君) 직첩도 폐하여 서인으로 축출했다. 뿐만 아니라 이거이의 둘째 아들 청평군(淸平君) 이백강도 서인으로 폐했다.
헌데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청평군 이백강은 태종 이방원의 사위이고 자신의 딸 정순공주의 지아비가 아닌가? 현존하는 임금의 딸 왕실의 공주가 서인으로 강등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태종 이방원에게는 개인적인 부녀의 정보다도 정치가 우선 순위였다.
태종 이방원은 아비로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공주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딸이 수행하는 이거이의 유배 길에 대언(代言) 노한과 김과를 보내 중로에서 위로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또 다시 소동이 빚어졌다. 유양이 들고 일어났다.
"죄인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어찌 그리 영광스럽습니까? 또 대언(代言)을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 보내는 것이 옳습니까? 대언은 어찌하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난 뒤에 가지 않았습니까?"
"주상이 강제하신 까닭으로 부득이 어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임금을 대리한 지신사 박석명이 궁색한 답변을 했다. 태종 이방원은 좌대언(左代言) 이승상을 불러 공신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지난 일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지만 용납은 하지 않겠다
"지난 무인년과 경진년간에 있었던 일은 공신들 가운데 길(道)이 같지 않아 발생한 일이다. 만약 지금의 일이라면 이거이가 어찌 나를 미워하겠는가? 다만 그가 미련하여 국가에 간범(干犯)되었을 뿐이다. 여러 공신은 이제부터 경계하여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같이하여 왕가를 좌우에서 도와주면 참으로 다행함이 크겠다."-<태종실록>
태종 이방원이 거론한 무인년은 이렇다. 당시 왕은 태조 이성계였고 세자는 방석이었다. 오늘의 임금 이방원은 아무런 직책 없는 야인이었다. 왕자의 난이라 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축출할 때 개국공신 이거이가 혁명동지 이성계에게 심정적으로 동정을 보내고 이성계의 사위 이저가 인간적으로 이성계에게 경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진년도 그렇다. 강한 태종보다 무른 정종이 신하들의 입장에서 더 좋다는 표현은 이거이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지풍파를 일으켰을까? 여기에서 태종 이방원의 통치술이 드러난다. '용서는 하되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공개 청문회를 열어 여론을 환기하고 경종을 울려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복안이다.
지난날은 용서하되 도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한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 박석명과 대언 이승상을 조용히 불렀다.
"경들도 내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공신의 뜻을 따르겠는가? 공신이 이거이의 죄를 청하거든 그 말을 출납(出納)하지 말라."
이거이 효과는 이미 달성되었으니 더 이상 번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허나,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의를 지키려는 것인지 과잉충성인지 알 수 없다. 좌정승 조준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궐했다.
"신 등이 상소하여 이거이의 죄를 청하였는데 전하가 열람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그 소장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내가 공신을 보전하고자 하는데 정승도 또한 그 뜻을 알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왔는가?"
"이거이의 죄가 중(重)하므로 법대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경등이 법대로 이거이의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죽이자는 것인가? 내가 공신을 보전하고자 하는데 공신들이 내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심히 불가하다."
"난신적자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왕법에 따라 마땅히 토죄(討罪)하는 것입니다. 왕법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서는 아니 됩니다. 전하는 이거이 부자의 공을 생각하여 머리를 보전하고 고향에 안치하고자 하나 이것은 부질없는 인애(仁愛)요 종사 만세의 계책은 아닙니다."
혁명동지를 죽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공신을 보전하겠다고 하여 이미 황천(皇天) 후토(后土)에게 맹세하였는데 만약 이거이 부자를 죽인다면 나는 마땅히 천년(天年)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무인년의 공은 오로지 이저에게 있고 경진년의 공은 오로지 이거이와 이저에게 있다. 또 사정(私情)으로 말한다면 이거이의 아들 이백강은 나의 사위이다. 청하는 것이 비록 간절하고 지극하나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태종실록>
"법이란 천하 만세에 함께 하는 것이요 전하가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거이의 죄에 관대하시니 신은 사직이 위태로워질까 두렵습니다. 춘추(春秋)의 법에는 난신적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하가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면 신은 마땅히 옛 법을 따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무엄하기 짝이 없는 협박성 발언이다. 신하들의 뜻은 강경했다. 대언 유양이 총대를 메고 너도나도 충성 경쟁에 뛰어들었다. 4년 전 일이기에 가슴에 묻어두어도 될 일이었지만 만당에 터트려 여론을 조성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펼친 한판 굿이 이제는 탄력을 받아 어디까지 굴러갈지 예측 불허다.
이거이를 죽이자는 신하들의 상소와 상언이 빗발쳤다. 충성 경쟁이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더 이상 방치하면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능상태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그것은 태종 이방원이 원치 않은 결과다.
"경이 이러한 말을 발(發)하니 내 몸도 또한 보전할 수 없겠구려! 이거이를 진주(鎭州)에 유배하겠다는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
마침표를 찍었다. 이거이의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하들의 주청에 떠밀려 이거이를 죽인다면 삽혈동맹의 맹세를 깬 사람은 자신이라고 질타하는 백성들의 눈초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거이를 진주로 내려 보낸 태종 이방원은 개국공신과 정사공신 그리고 좌명공신을 대청관(大淸觀)으로 불러 맹세의 의식을 가졌다.
"무조건 충성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손에게도 재앙이 있을 것이다
"조선국왕 신(臣) 휘는 개국 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을 거느리고 감히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에게 고(告)하고 종묘사직과 산천의 여러 신령에게 굳게 맹세합니다. 삼맹(三盟)의 신하들이 맹세한 뒤에는 충성으로 서로 믿고 은애로 좋아하고 친애하기를 골육같이 하고 굳건하기를 금석 같이 할 것입니다.
맹세를 어기거나 두 가지 마음을 품거나 참언을 꾸며 흔단을 만들거나 붕당을 나누어 결당하거나 나라를 경복하기를 꾀하거나 같이 맹세한 이를 무함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천지를 속이고 군부(君父)를 저버리는 것이니 반드시 왕법이 있을 것이며 죄는 그 몸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맹세식에 참석한 사람은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66명 이었다. 삼공신(三功臣)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맹세식이다. 주는 것은 적고 받는 것은 많다.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이다. 맹세를 어기면 그 후환이 자손까지 미칠 것이라는 협박성 맹세다. 맹세식을 마친 신하들을 태종 이방원은 무일전으로 초치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맹세식이 끝난 후 이거이 부자에 대한 정치공세는 수그러들었지만 끝나지 않았다. 공주가 난신적자의 아들과 혼인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하니 이혼시키라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의 주청을 일축했다. 오히려 유배지에 있는 이저와 이백강을 왕도에 불러들여 위로했다. 이 모습에 신하들이 또 다시 성토하고 나섰다.
"사사로운 정으로 난신적자의 아들을 경도에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흐른 훗날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저와 이백강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왕도에 살도록 허락했다. 이거이는 왕도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태종 이방원에게 이거이는 왕권에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기억되어 있었다. 이방원이 세자로 있을 때 정종 임금이 군사를 삼군부(三軍府)에 통합하는 군부개편을 단행했다. 이 때 모든 절제사들이 병권을 삼군부에 반납했는데 오직 이거이와 이저만이 병권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판의흥삼군부사 이무가 논박하자 '한 덩어리 고기'라고 조롱했다. 벨 수 있다는 뜻이다. 왕명을 어긴 자를 추궁하는 신하를 벨 수 있다는 것은 왕을 벨 수 있다는 불괘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00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한양 천도
"가자 남으로! 한양이 천년의 터전이다"
한양천도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고 나라가 이사 가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국채가 이사 가는 것이다. 우선 선발대로 상왕 정종이 대비와 함께 먼저 떠났다. 태종 이방원이 보현원(普賢院)까지 따라 나와 먼저 가는 형님을 전송했다. 임금이 구도를 떠나기 전 나라의 역사를 신도에 운반해야 한다. 국사(國史)를 운반하여 경복궁에 안치했다.
태종 이방원은 제릉(齊陵)에 배알하여 한양 신도로 옮기는 것을 고(告)하고 친히 인소전(仁昭殿)에 나아가 제사 지냈다. 한양으로 옮기는 것을 조상님께 고했으니 이제는 살아있는 어른을 찾을 차례다. 태조 이성계가 있는 태상전을 찾았다.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던 무학대사의 죽음으로 침울해 있던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양 천도는 태종 이방원의 선택이라기보다 아버지에 대한 효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개경에서 탈취한 정권을 한양에 가서 아들에게 빼앗기고 개경으로 돌아왔다'라고 조롱하는 개경인들의 시선에 아버지는 괴로워했다.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을 피하여 소요산과 한양 그리고 금강산과 고향 동북면을 주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또한 생모 신의왕후 한씨와 계모 신덕왕후 강씨마저 잃고 홀로 살아가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가까이 두고 모시고 싶었지만 변방으로 떠돌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사랑하는 부인 강씨의 정릉과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 방석의 묘가 있는 한양으로 모시게 되어 다행이었다.
거가를 타고, 한양으로 가다
11월 8일. 드디어 임금의 거가(車駕)가 개경을 출발했다. 문무백관이 임금의 가마를 뒤따랐다. 임금의 행렬이 선죽교를 지나고 숭인문 마루턱에서 잠시 머물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개경인들이 숭상하는 산.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의 산이나 다름없는 산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서를 바꾸어도 되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대들었다 '발칙한 놈' 이라 꾸중을 듣고 송악산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호되게 가르쳤던 스승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스승 원천석을 이제 한양에 돌아가면 모시고 싶었다.
임금의 환도 행렬이 임진 나루터에 닿았다. 수십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초겨울 강바람이 쌀쌀하다. 태종 이방원을 태운 배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강심을 지날 무렵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는 전갈을 받고 포천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가기 위하여 부리나케 임진강을 건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장마철이었지. 나룻배를 타고 떠난 직후에 나타난 최영 장군의 수하. 그 때 그들의 손에 내가 잡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어머니를 개경으로 압송하여 아버지에게 인질극을 벌였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나왔을까? 아니었을거야. 내가 정순공주를 희생시키듯이 아버지는 우리를 희생 시켰을거야."
만감이 교차했다. 가정과 국가. 국가를 생각하는 사나이와 가족. 어쩌면 하나의 운명체 인 것 같지만 한 덩어리로 동화할 수 없는 별개의 구성단위라고 생각되었다. 사나이 가는 길에 범부는(凡夫) 평탄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만 혁명아(革命兒)에게는 그러한 길을 허용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경을 출발한 환도행렬은 사흘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경복궁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목멱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경복궁. 피가 튀고 생명이 갈렸던 곳이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쳐다봤다. 인왕산이다. 한양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태종 이방원에게 그래도 인왕산 아래에서 아들 하나 얻은 것이 뿌듯했다. 이 아들이 훗날 세종대왕이다.
도성에 들어온 태종 이방원은 제일 먼저 종묘를 찾았다. 환도를 조상님께 고하기 위해서다. 종묘 알현을 마친 태종 이방원은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의 집에 들었다. 아직 궁궐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태종 이방원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궁궐 공사가 끝나지도 안았는데 환도를 결행한 것이다.
이튿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공사 현장을 찾아 이궁조성 제조 이직을 불러 치하 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동원된 백성과 군사들을 위로하고 음식과 술을 내려주었다. 10월 19일 이궁이 완공되었다.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정전과 편전이 9칸, 승정원청과 부속실 구실을 하는 행랑이 14칸. 침전을 포함한 내전이 118칸이었다.
천막에 거쳐한 이성계의 의도
이제야 궁 이름을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했다. 궁궐 공사가 한창이던 2월에 찾아와 정전에서 집무를 보는가 하면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환도하여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태종 이방원의 급한 성미를 알 수 있다. 궁 이름과 각종 전각 명칭을 지어놓고 경복궁 공사를 지휘하던 정도전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 지은 궁궐에서 축하연이 베풀어 졌다. 한양시대의 개막이다.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에게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올렸다. 이어 의정부찬성사 권근이 종친과 공신 그리고 육조(六曹)의 관료를 거느리고 헌수하였다. 권근이 화악시(華嶽詩)를 지어 올리고 이에 뒤질세라 하륜이 한강시(漢江詩)를 지어 바쳤다.
"한강물은 예전부터 깊고 넓으며 화악(華嶽)산은 푸르고 푸르도다. 한강은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화산(華山)은 울울(鬱鬱)하여 푸르고 성(盛)하니 우리 임금 오시는 길거리는 아름답고 백성은 즐거워서 노래하도다."
태상왕(太上王)이 마지막으로 개경을 출발했다. 태조 이성계가 임진나루를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태종 이방원은 양주에 나가 태조 이성계를 맞이했다.
"내가 양도에 내왕하느라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었는데 이제부터는 한군데 정해서 살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양도(兩都)란 개경과 한양을 이르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불만이 쌓이거나 부인 신덕왕후가 보고 싶으면 훌쩍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떠났다. 자신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새벽에 떠나고 밤에 들어 왔지만 그래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 송구하다는 얘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는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부자지간의 잠자리였다. 이튿날 태조 이성계의 행차가 노원역에 이르러 하룻밤 묵게 되었다. 행궁도 없고 객사도 없다. 노원 들녘에 막사를 치고 야영했다. 태상왕과 현존 임금이 천막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개경을 떠난 사흘째 되던 날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고 한양에 입성했다. 무안군 방번이 쓰던 집을 태상궁(太上宮)으로 정하고 들기를 권했으나 태조 이성계는 거절했다. 어디로 모실까? 방원은 난감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장막을 치고 기거했다.
창덕궁과 방번의 집으로 들지 않고 천막에 거처하는 태조 이성계의 의도는 '내가 들어가 살 궁실을 새로 지어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첫댓글 힘겹게 쟁취한 왕권이 순탄할 수만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