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인과응보
신외숙
오후 5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어둑신한 하늘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걷는 행인과 아스팔트 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차량으로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예 불빛조차 사라진 채 철시한 상가들도 많았다. 몇몇 편의점 불빛만이 행인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 거리는 음산한 분위기마저 들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불야성을 이루었을 거리가 캄캄한 도심의 하늘을 떠받친 채 졸고 있었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우르르 차도로 몰려갔다. 염화칼슘에 녹아 흐르는 물이 검게 아스팔트를 물들이며 작은 포물선을 그렸다. 이제 입시철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인터넷 매체는 물론이고 전동차와 버스 안까지 대학을 홍보하는 광고가 범람하고 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대학 이름이 취업률을 앞세워 신입생 유치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공부가 시원찮아도 대학가기가 쉬워진 세상이 되었다. 눈만 낮추면 말이다. 지방 읍내까지 파고든 대학은 전국 취업률을 더 낮추는 결과가 된 건 아닐까.
내가 대학 갈 때만 해도 수도권에 있는 대학이 손에 꼽힐 정도였는데 어느새 엄청난 숫자로 불어 있었다. 그 당시 유명한 공대는 대학 3학년이 되면 각 기업체에서 장학금을 주고 서로 데려 가려고 유치 작전을 벌였었다. 하긴 그때 아날로그 시대이고 지금은 디지털 시대 즉 IT 시대가 아닌가.
자동설비화로 인터넷이 사람의 기능을 몇 배 몇 수천 배로 해내면서 일자리를 앗아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집에 앉아서도 은행 업무를 보고 각종 쇼핑몰을 통해 물건을 구입한다. 뿐인가. 언제부터인가 상가에서는 사진관이 사라지고 재래시장이 대형마트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편리성만 추구할 뿐 더 이상 향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복(福)에 대한 개념도 사라져가는 추세다. 오복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조명(考終命) 외에 다남(多男)이 다복이 하나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가문의 대를 잇고 번창시킨다는 목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은 가정일수록 더했다. 7080세대만 해도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끊기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갖은 수치를 감내해야만 했었다.
요즘은 한 가정에 한 자녀가 보통인 시대가 되어버렸다. 외아들 외딸이 대세인지라 대를 잇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취업 문이 낙타가 바늘 귀 뚫는 것만큼 힘든 세상이라 자녀에게도 똑같은 고생을 시키지 않고 싶은 것이다. 여자도 남자도 취업이 일 순위가 되어 모든 걸 능력 위주로 사고방식조차 변해가고 있다.
능력이 없으면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어 버렸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아예 결혼 자체가 안 되고 자녀를 낳고 살다가도 파산이나 실직이 되면 이혼카드를 서슴없이 꺼내 드는 게 요즘 세대다. 사업이 부도났다고 자살하고, 돈 안 되는 순수 예술은 재벌가나 되어야 꿈 꿀 수 있을 만큼 예술계도 병들어 버렸다.
해마다 터지는 입시 부정은 예술계가 단연 으뜸이지 않은가. 그건 30-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요즘은 예술도 돈 되는 예술을 해야 한다고 거리마다 실용음악 학원이 대세이고 미술도 디자인 계통이 대세인 것이다. 게다가 조기 교육 바람이 불어 닥쳐 그나마 발 붙이기가 더 힘든 실정이 되었다.
눈발은 회오리 바람을 타고서 더 강하게 역 광장을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은 건물들을 색칠하듯 점점 하늘과 땅을 하얗게 덮어 갔다. 사거리 맞은편을 돌아 버스 한 대가 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정확히 내 앞에 선 버스는 승객들의 발걸음을 순식간에 잡아 올렸다. 버스 안은 이미 검은 물 천지였다.
판독기에 버스카드를 대자 멘트가 나왔다.
환승입니다.
다행히 뒤에 자리가 있어 앉았다. 창밖을 보니 눈발이 대지를 집어 삼킬 듯이 내리 쏟아 붓는다. 이 정도면 낭만이 아니라 재앙이라 싶을 정도로 눈발이 거세다. 차창 밖의 거리는 단층들로 주변의 들판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교각 밑을 흐르는 개울물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이곳이 외곽지대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버스가 지날 때마다 상가 이름이 들어온다. 오토바이 수리점, 철물점, 고물상, 닥트 수리점, 미용실, 중국 음식점, 정밀기계. 밀링, 선반. 그러고 보니 여기가 공장 지대였구나. 들판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한다. 눈은 건물과 밭과 개울가를 하얀 색으로 통일하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하얗게 통일하는 것 같다.
버스가 지하도로 들어선다. 짙은 어둠이 잠시 몰려왔다가 지나간다. 버스는 다시 지상으로 나오면서 이번에는 밝은 상가의 빛을 받고 있다. 네온사인은 상가와 음식점 간판을 교대로 비추면서 관악산 자락과 함께 공원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관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온통 주변을 하얗게 색칠하는 눈발과 함께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눈은 누가 뭐래도 겨울의 대명사다. 눈이 없는 겨울은 낭만을 빼앗긴 예술과 같다.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서 네온사인과 함께 음악을 내보내는 카페 불빛이 보인다.
7080 카페.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드밀며 웃는다. 중년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 또 하나의 단어가 7080이다. 군사정권의 힘든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낸 주역들이 작금(昨今)에 이르러 온갖 희생의 대명사가 되어 사회에서 가정에서 퇴출 위기를 만나고 있다. 극도의 이기주의는 희생양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하다.
이용가치에 따라 폐기처분하는 건 물건이나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베이비 붐 세대는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다. 이제 차후의 세대들은 더 이상 희생도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버림당하는 세대가 바로 베이비 붐 세대인 것처럼.
나무 계단을 올라 2층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기가 확 끼쳐져 들어왔다. 나무 탁자 옆에 푹신한 소파가 샹들리에와 함께 안온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은 눈 덮인 바깥 풍경을 슬라이드처럼 비추고 있다. 개울물과 상가를 비추는 네온과 초록을 덮고 하얗게 옷을 입힌 눈발까지.
눈은 온 천지를 하얗게 덮으면서 옛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다. 스피커에서 7080 노래가 나왔다. 심수봉의 애절한 목소리가 옛 향수를 가슴을 저미듯 노래했다.
희미한 색빛 저 하늘 아래 달려가는 그림자
초라한 모습 보이지 않게 태양아 떠오르지 마라
세상에 다치고 사는 몸이 사랑도 멀리 두고
나의 종착역은 어디 있나 쉴 곳 없는 내 신세
어디로 어디로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이 밤도 나 홀로 내 사랑만 그리워하네
이젠 나도 영락없는 중년이구나. 이렇게 흘러간 옛 노래를 좋아하는 걸 보면.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이 나왔다.
I could build a mansion that is higher than the trees
I could have all the gifts I want and never ask please
I could fly to Paris it's at my beck and call
Why do I live my life alone with nothing at all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When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I can be the singer or the clown in any role
I can call up someone to take me to the moon
I can put my makeup on and drive the man insane
I can go the bed alone and never know his name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dream come true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감미로운 음률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후회를 연발하고 있다. 마음 속에 눈물이 흐른다. 눈 한번 깜빡이고 났더니 30년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과거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거에 연연하며 추억의 그림자를 떠안고 살아간다. 감상(感想)의 늪에는 나이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앞에 와 섰다. 검은색 바지 위로 검은색 부츠가 내 시야를 가린다. 동시에 30년 전 세월이 내 앞에 딱 멈춰져 있는 게 보였다. 숨막힐 듯한 긴장이 내 영혼을 집중시키며 소설적 상상력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송양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그녀 역시 내 얼굴에서 30년의 세월을 찾고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공감대가 흐른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많이 변했구나.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살핀다.
“눈이 많이 오네, 오는데 힘들지 않았니?”
“응, 조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게 몇 년 만이지? 참 세월 빠르다. 그치?”
“응 그래 벌써 30년 세월이 흘렀구나. 창밖 좀 봐, 눈이 엄청 많이 내린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생각 나니? 눈만 오면 창경궁 돌담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었지.”
“그래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우선 차부터 시키자, 뭐 마실래?”
“커피. 넌?”
“난 율무차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녀는 차림표를 들여다보더니 기겁할 듯 놀란 표정이다.
“왜 그래?”
“너무 비싸서.” “괜찮아, 내가 살게 그보다 옛날에 비해 살이 많이 찐 것 같다.”
“응 중년이잖아, 내 친구들도 젊었을 때 칼날같이 날씬했던 애들도 지금은 모두 배불뚝이로 변했어, 먹는데 비해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게 다 살로 가나봐.”
“응 나도 젊었을 땐 45킬로이더니 지금은 거의 50킬로에 가까워.”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애들은?”
“응 애들이라니?”
“애들 시집 장가는 다 보냈느냐고?”
“아 아직.”
“저런 결혼을 늦게 한 모양이구나.”
“그 그게 아니고.”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면 한 시름 놓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라.”
양희는 뭔가 사연이 많은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일찍 철이 들더니 가정주부 역할 하느라 고생이 심한 눈치다. 그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알바생이 찻잔을 놓고 돌아 섰다.
“저 남자애 참 잘 생겼네, 꼭 내 남편 젊었을 때 모습 보는 것 같네.”
그녀는 심상한 웃음을 짓는다.
“자경아 우리 그때 종로 2가 YMCA에서 헤어졌을 때가 몇 살 때였더라.”
“스물다섯 살 때였지 아마.”
“그래 꼭 삼십 년 됐구나. 그때 우리 둘 다 미혼이었는데 넌 언제 결혼한 거야?”
그녀는 내가 결혼한 것처럼 아예 기정사실화 하여 말한다. 나는 차마 평생을 미혼으로 지냈다는 말을 못한다. 이때 왜 자존심이란 단어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뭐하는 분이셔?”
내 질문에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평생 속만 썩이고 죽을 고생시키더니 지난달 하늘나라 갔어.”
“뭐라구?”
나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 말이 없다.
“너는? 너희 남편은 뭐하시는 분이시니?”
“그 그게 있지 그러니까.”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이혼했니?”
나는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다. 이혼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 앞에 난 또다시 할 말을 잊는다.
“괜찮아 요즘 세상에 이혼이 뭐 대수라고, 능력 있으면 평생 싱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더라. 자식 있으면 뭘해? 애물단지 끼고 살면서 평생 속이나 썩지. 안 그래?”
“응 그 그렇지 뭐.”
“그런데 넌 아까부터 무슨 대답이 그러니?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고 뭐 불편한 거 있니?”
“아 아니.”
“그럼 어디 아프니?”
“응, 조금 나 사실은 작년에 암 수술 받았어.”
“뭐? 암?”
그녀는 놀라는 눈치더니 다시 표정을 고쳐 잡는다. “요즘 세상 그까짓 암 별거 아니다더라, 너답지 않게 꽤 놀란 모양이구나, 남편께서 걱정 많이 하셨겠다.”
그녀는 말하다 말고 아차 싶었는지 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만다.
“미 미안해.”
“뭐가?”
“그 그냥.”
양희는 나를 이제는 이혼녀 취급하며 말을 아끼는 눈치다.
“그런데 이렇게 먼 데까지 와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뭐야?”
“이유는 뭐, 30년 세월 동안 어떻게 지냈나 항상 궁금했지.”
“그런데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안 건데?”
“양희야 너 우리 학교 다닐 때 경자 생각나니?”
“응 걔 신학생과 결혼했다던?” “응 경자가 니 소식을 가르쳐 주더라.”
“뭐라구 경자가? 걔가 내 소식을 어떻게 알고.”
“그건 잘 모르겠고 요즘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다면서.”
“그래도 그렇지 이상하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넓으면서도 좁은 게 세상이니까.”
양희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관악산 좀 봐, 하얗게 눈이 쌓이니까 설경 한번 끝내준다.”
지난달에 남편상을 치른 과부답지 않게 그녀는 너무도 씩씩하고 활달하다.
“그래 사는 건 괜찮아?”
경제 문제에 이르자 그녀는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사실은 나 일 다녀.”
들릴 듯 말듯 잦아드는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래 다행이구나. 열심히 살아야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넌 요즘 뭐하고 지내? 가정 경제는 좋은 편이니?”
가정주부들은 누가 뭐래도 항상 돈 문제에 먼저 집착한다.
“난 양희 너가 참 부럽다.”
“뭐? 내가 부럽다구? 뭐가 부러운데, 참 내 기가 막혀서.”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에 앞서 아예 화가 난 듯하다. 그런데 왜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양희가 부럽다니.
“가족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제서야 양희는 표정을 가다듬는다.
“애들은 아이 아빠가 키우는 거니?”
그녀는 나를 아이 빼앗긴 채 혼자 살아가는 이혼녀 취급하며 말한다. 얼굴에 안쓰럽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묘하게 빠져 나가면서 말한다.
“돈 문제보다 건강이 더 먼저가 아닐까?”
“아참 아까 암 수술 받았다고 그랬지, 많이 심각한 거니?”
“상황에 따라선……….”
나는 이 부분에 소설을 쓰고 만다. 왜 그랬을까.
“저런. 그렇지만 실망하진 마, 요즘은 약도 좋은 게 많이 나왔대, 내가 일하는 식당 사장님도 암 수술 크게 받았는데 지금은 멀쩡하다나봐, 내가 자세히 물어보고 나서 너한테 말해줄게,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
그녀의 마음씨는 30년 세월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고시절 그녀와 내가 같이 붙어 다닐 때마다 친구들은 말했었다. 저기 바늘과 실 간다.
“요즘도 글 쓰니? 너 학교 다닐 때 문학소녀였잖아, 소설 쓴다고 한참 그랬었잖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 사실은 소설가야. 그러나 말은 목 안까지 넘어 왔다가 도로 사라진다. 그랬다간 그녀는 당장 스마트폰으로 내 이름을 검색해 보고 나서 한마디 할 것이다.
“와! 진짜네, 이게 진짜 니가 다 쓴 책이니?”
나는 결단코 신상정보를 밝히고 싶지 않다.
“그게 언젯적 얘긴데, 옛날에 문학소녀 아니었던 사람도 있었나.”
“자경아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사니? 돈벌이는 잘 하고?”
그녀는 여전히 돈 문제에 관심이 많다. 학교 다닐 때는 정치와 부모공양에 관심이 많아 자타가 인정하는 효녀였었는데. 가난한 집안 4남매의 장녀에다 몸은 늘 병고에 치이면서 공부는 간신히 중위권을 맴돌았던 나는 항상 미래에 집착하는 이상주의자였다. 현실은 늘 아랑곳없고 제 주제는 모르고 눈만 다락같이 높았었다.
대학은커녕 밥벌이나 하라는 집안의 요구에 나는 한사코 대학을 고집했다. 당시 내 실력으로 서울은커녕 지방 대학도 가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미래를 위해 죽어도 대학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반드시 소설가가 될 것임으로. 나와 성적이 별반 차이가 없는 양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보다 더 눈이 높았다. 나는 어떡하든 대학 배지 다는 게 소원인 반면 양희는 서울에 있는 유명대학을 원했다. 반에서 1, 2등해도 가기 힘든 대학을. 그건 그녀의 바람이자 일류대학을 나온 오빠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라면 그녀는 그래도 살만한 집안 7남매의 막내였다.
맨 큰 오빠가 양희보다 22살 많았다. 큰 조카가 양희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큰 오빠는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당시 양희와 나는 17살이었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환갑이 지나 있었다. 내 부모는 이제 겨우 40살인데. 그것을 두고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양희는 서울에 있는 오빠 집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바로 위의 언니는 여상을 졸업하고 나서 같은 직장에 다니는 남자와 연애결혼 했는데 인물이 좋았다. 반면 양희는 사각진 얼굴에다 몸집도 퉁퉁하고 인물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 비해 내 인물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못 먹어 빼빼 마른 체형에 뼈가 휜데다 얼굴은 버짐이 피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양희는 사랑받지 못한 상처에다 피해의식까지 가중된 나에 비해 성격이 좋았다. 집안의 막내로 사랑받고 자랐고 경제적으로도 나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고 마음도 넉넉하고 인심도 후한 편이었다. 늘 쫓기듯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나는 그녀 이외에 달리 친구가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긋는 듯했으나 나는 그녀를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번도 이치에 어긋나거나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끔찍한 효녀였다. 어느날 양희가 내게 슬픈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 병원에 가시려고 시골서 올라 오셨는데 오빠들 중 아무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사람이 없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말했다. 아둔하고 속 좁은 나는 그 말뜻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돈이 있으면 그냥 병원이 가면 될 일이지 꼭 자식들 하고 같이 가야만 하나.
“아버진 평생 자식들 위해 농사지으며 희생하셨는데 오빠들은 모두 제 살길 바쁘고 엄만 엄마대로 아파 꼼짝 못하시니 내가 힘들어 미치겠어.”
그러다 어떨 땐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부모님이래도 노인이 돼 기력이 떨어지면 하늘나라 갈 생각을 해야지.”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니? 어떡하든 부모님 살릴 생각을 해야지.”
“너는 부모님이 젊으시니까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거야, 너도 나중에 알게 돼.”
그녀는 동갑인 나에 비해 일찍 철이 들어 아는 것도 많고 예의범절도 밝았다. 나는 모든게 내 위주였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지난주에 시골서 아버지가 올라 오셨어, 막내인 내가 안쓰러운지 계속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야, 아가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빠라고 불러라, 넌 막내니까 괜찮아, 아가 한번 아빠라고 불러봐라.”
“아버지 그것도 어릴 때 이야기지 제가 스무 살이 다 됐는데 이제 와서 아빠라고 하면 더 이상하잖아요, 어색해서 안 돼요.”
“어색할 게 뭐 있냐, 그냥 하면 되지 아가 한번 아빠라고 해봐라.”
그래도 그녀는 끝내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경어를 전혀 쓰지 않는 나에 비해 양희는 꼬박 꼬박 경어를 사용했는데 그래서 더 어른들 공대에도 깍듯했다. 양희의 어머니는 그때 위암 투병 중이었는데 아마 위중했던 것 같다. 막내딸이 고등학교 졸업하기 직전 생을 마친 어머니는 시골서 장사(葬事) 지냈는데 온 일기친척이 다 모였다.
장사 지내는 내내 막내딸에 대한 배려가 끔찍했던 모양이다. 당시로선 철저하게 금기시 되었던 이성교제까지 거론하며 막내딸의 상처를 무마하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막내딸의 결혼을 서두르라는 재촉도 이어졌다. 그녀는 형편에 따라 오빠들 집을 오가며 살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서가식 동가숙으로 표현할 때도 많았다.
어쨌거나 나는 사랑받는 그녀의 처지가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군대 간 막내오빠와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절친했다. 무관심의 사각지대에 살던 나는 모든 게 고통의 연속이었다. 병든 몸은 늘 죽음의 시기만을 카운트다운 했고 마음은 우울증과 열등감으로 혼절할 지경이었다.
“양희야 나는 말이지 이 다음에 소설가가 될 거야, 왜냐하면 난 난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소설 써서 어떻게 밥이나 먹고 살겠니? 소설보다 전공을 잘 선택해서 돈도 벌고 소설도 쓰면 어떨까.”
말은 그럴 듯했지만 사실은 내 아둔한 두뇌를 꾸짖고 야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었고 어려움 없이 평탄한 삶을 산 탓인지 다른 사람의 상처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돈 한푼이 없어 벼랑 끝 같은 고통을 호소해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사랑과 배려없이 자란 내 처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꿈과 환상에 매달렸다.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미래에 집착했다. 허무맹랑한 공상과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었고 나를 괴롭히는 주변 인물들을 향한 복수를 소설로 대신하기도 했다. 삶은 내게 고문보다 더한 수치를 안겨주었고 나는 수십 번도 더 죽음의 언저리를 넘보다 가까스로 벗어났다.
양희는 생활은 힘들어도 사랑받기에 모든 걸 넉넉히 이기고 항상 긍정적이었다. 나는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긍정적이 될 수 없었다. 지옥과 같은 상황의 되풀이 속에서 긍정적이 되라는 건 억지 춘향이 노릇하라는 것과 똑같았다. 현실은 지옥 같은데 미래는 화려한 성공만을 꿈꾸니까 자기 기만과 같은 일들이 자꾸 벌어졌다.
바로 현실 부정이었다. 혼란한 정신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 입시를 앞두고 상위권에 진입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입시 결과는 줄줄이 낙방이었다. 그런대도 가족은 다행이라는 듯 안심을 했다. 대학 등록금을 대주지 않아도 되니저절로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었다.
경리를 하던 공장에 들어가 재봉틀을 밟던 돈이나 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나 하라고 매알겉이 지청구를 주었다. 처음부터 내 대학입시에 반대했던 가족들에게는 천만다행인 모양이었다. 세상에 내게는 우군은 없고 모두 적군만 있는 거 같았다. 화가 난 나는 경기도에 있는 모 대학에 응모해 마침내 합격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 악담을 하고 난리를 칠 줄 았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마 입학금 때문에 저러는구나 싶었는데 다음날 은행에 갔다 온 아버지가 돈 봉투를 내놓았다. 그렇게 입학금은 대출을 받아 해결했고 나는 처음으로 나를 인정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입시를 앞두고 가족들 마음속에 있는 명암을 한꺼번에 본 것이다.
양희는 서울은 물론 지방대학까지 모두 떨어졌다. 실력도 안 되는데 높은 대학만 지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입시를 앞두고 올케들은 엄청난 반대를 했었다고 한다. 양희의 오빠 대학 등록금 대는 것만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시누이 등록금까지 대라는 건 무리라고 끝까지 우긴 것이다.
그런데도 양희는 끝까지 간호대학까지 응모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양희의 실력으로 간호대학이라니 어림도 없었다. 입시에 실패하자 올케들은 그녀에게 취직할 것을 권면했다. 돈이나 벌어서 시집 갈 밑천이나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혹시 재수라도 할까봐 오빠들을 시켜서 직장까지 알선했다.
나는 대학생이고 그녀는 직장인인 처지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만나고 정(情)을 쌓았다. 하지만 알지 못하게 질투와 시샘도 쌓여갔다. 그녀는 내가 다니는 학교를 심하게 폄훼(貶毁)했고 그럴수록 나 역시 그녀의 학벌을 마음속으로 조롱했다. 나는 전공을 잘못 택한 탓에 그 흔한 알바 한번 못하고 공부에 매달려 간신히 학점을 따 졸업했다.
자격증도 간신히 취득했다. 대학 4년 동안 내 가족은 등록금 마련하느라 피나는 고생을 했다. 아버지는 수없이 공사장을 전전했고 엄마는 부업하느라 손에 일거리가 떠날 날이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도 더욱 이기적이 되어 갔다. 내 꿈을 위해선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들은 각자 알아서 공부했고 몸이 건강해 알바하면서 대학을 마쳤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취직하는데 목숨 걸다시피 해 한번도 백수 신세를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로 소설을 포기했다. 그렇게 20대 중반을 지나며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쯤 양희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가족들의 관심과 성원 아래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선을 보았다. 성격이 까다롭고 냉정하고 독선적인 나에 비해 양희는 긍정적이고 너그러웠다. 희생도 감수할만큼 적극적이었고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간 직장생활 하면서 벌어 놓은 자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겐 7남매라는 가족 후원군이 있었다.
“나는 별 걱정 안 해, 한 집에 한가지씩 맡기면 돼, 큰 오빠한테는 냉장고 둘째 오빠한테는 세탁기, 셋째 오빠한테는 장롱과 화장대 세트. 넷째 오빠한테는 혼수일체를 맡기면 되고 언니한테는 텔레비전과 가전제품을 맡기고 막내 오빠는 미국에 가 있는데 현찰로 달라고 할 테야.”
나는 속으로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맞선을 보는 족족 퇴짜를 맞거나 성사가 되지 않았다. 하나같이 못나고 부족한 놈들이 인물타령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양희는 남자의 집안과 재산을 따지며 마치 제가 퇴짜 놓은 것처럼 말했다. 신랑만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데도 정작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내 집안은 내 결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벌어놓은 돈도 없었고 동생들도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인데 내가 결혼한다면 당장 혼수해줄 돈도 없었다. 거기에다 나는 엄마를 닮아 어찌나 까다로운지 중매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해만 넘기면 양희도 나도 이십대 후반으로 넘어서는 겨울날이었다. 그날도 양희와 장래 이야기를 하는데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행복한 가정을 인생의 성공으로 꿈꾸는 양희와 소설가가 되는 게 평생 숙원인 나와는 처음부터 가치관이 맞지 않았다. 양희는 집안이 좋고 재산이 있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며 나에게 꿈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날 나에게 얼마나 빈정대고 야유를 퍼붓는지 그동안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 위선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주된 요지는 소설이 밥 먹여 주냐 능력 있는 남편 만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헛된 꿈꾸느라 세월 낭비하지 말고 일찌감치 정신 차리라는 것이었다.
그날 대판 싸우고 돌아선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이 싹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 말고 딱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 만났는데 이번에도 저번처럼 또다시 대판 싸우고 말았다. 화가 난 나는 지방 공무원 특채로 가는데 서명하고 말았다.
가기 전 종로 2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양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날 YMCA에서 강의가 있었는지 양희가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하며 서 있었다. 잠시 눈길이 마주쳤는데 나는 그만 버스에 올라타고 말았다. 그게 그녀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30년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가 헤어지기 전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너 그렇게 까다롭게 굴다간 평생 면사포 못 써. 사람이 대충 대충 할 줄도 알고 허물도 덮어주고 그래야지, 어떻게 완벽한 걸 기대하니? 백날 기다려 봐라 그런 남자 나타나나.
참다못한 나도 한마디 했다.
그래, 가문 좋고 재산 쌓아놓은 남자가 퍽이나 너 같은 걸 좋아하겠다. 길에 나가봐라, 너보다 잘 빠지고 인물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넌 뭐 잘난 줄 아냐?
우린 그런 식으로 서로 물고 찢으며 싸웠던 것 같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우리 가정에는 많은 아픔이 있었다. 지병을 앓던 엄마가 하늘나라로 갔고 동생들은 인물이 좋고 능력도 많은데 이상하게 결혼이 안 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가족들에겐 이상하게 만남의 축복이 없었다.
우연이라도 단 한번의 행운도 따라주지 않았고 걸핏하면 악재가 끼어들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사람이 노력한다고 복을 받는 게 아니라 복은 권능자가 주어야만 하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악재에 치이고 직장에 매달리면서 세월이 간단하게 흘러가던 가던 어느날 나는 꿈을 꾸었다. 그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賞)을 받는 것이었다.
무슨 상인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으로 보아 괜찮은 상임에는 틀림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신문 시사 내용을 본 딴 글을 쓰거나 간단한 에세이를 썼다. 그동안 공직 생활 하느라 축적된 노하우도 십분 활용했다.
그렇게 필력을 쌓으면서 소설을 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옛날의 기억 하나를 떠올려 소설로 꾸며 쓴 글이 있었다. 기승전결을 제법 갖춘 글이라 생각돼 우연히 투고했는데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당선이 되었다. 드디어 필생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렇게 꿈을 이루고 등단 작가가 된 것까진 좋았는데 느닷없이 백수가 되었다.
정리해고 일순위가 되어 밀려 난 것이다. 공직사회에도 해고바람이 밀어 닥쳤는데 그 일순위 희생자가 내가 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근무하던 부서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도 걱정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내 꿈을 펼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맞선이라는 행태를 수없이 겪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맞선현장을 누빈 것은 소설 소재감을 찾을 겸 현실 감각을 익힐 겸 겸사겸사였다. 30대 중반에서 시작된 맞선 행렬은 40대 중반쯤에 이르러 중단됐다. 그동안 나는 맞선을 통해 소설 소재감을 무진장 건져내면서 느낀 사실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악하고 교만하다. 그 근저에는 이기심이 독소처럼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사랑을 외치는 인간일수록 남을 이용가치로 알고 깔고 뭉개려고 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하나같이 사랑받기 위해 목숨을 건다. 살을 빼고 화장품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그런가하면 못나고 무능한 남자일수록 여자에게 미모와 능력을 원한다.
갖은 사탕발림으로 여자의 혼을 빼내고는 사랑이라고 적당히 둘러대고 끝없이 희생을 강요한다. 그렇게 어떤 여자는 평생을 백수건달로 놀고먹는 남편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런데 희한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 많은 만남 속에서 한번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보지 못한 걸까.
사람들이 내게 맞선 상대로 내미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학력 낮고 무능력한 사람들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대학을 나왔는데 나보다 학력 낮은 남자를 들이미는 것이다. 그것도어쩌다 한두번이지. 나중에는 누군가 중매하겠다고 하면 내가 먼저 말했다.
그 남자 나보다 학력 낮은 사람 맞지요?
인간 관계에 악마가 존재했던 걸까.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렇지. 실망감은 분노가 되고 원한이 되어 가슴속에 쌓여갔다. 나는 그 모든 분풀이를 소설에다 풀었고 어느날 글을 쓰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복의 근원은 신(神)에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에 나가 신을 향해 따지고 항변했다.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무오의 진리, 전능주 창조주시라면서요?
아무리 따져도 신은 묵묵무답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당에 나가 신부(神父)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신부는 내게 성경을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다 나는 어느날 은혜(恩惠)라는 단어를 깨달았다. 값없이 주시는 신의 선물이 은혜라는 것이었다. 맞선 행렬을 끝내고 나자 글의 소재가 말라갔다.
그래서 나는 툭하면 여행을 떠나고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거나 그도 아니면 교회에 나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소설 소재감을 찾았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서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써대기 시작했다. 세상은 문학사망 시대라고 떠들어 댔지만 내 책은 재고도 없이 잘 팔려 나갔다.
돈 문제도 술술 잘 풀렸다. 툭하면 병원 신세지기 바빴던 육신도 건강체질로 바뀌었다. 남들은 건강했던 사람도 중년이 되면 병원 신세지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정반대였다. 어느날 나는 강대상에서 중요한 소식을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꿈이 미래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꿈은 장래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은혜이며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어느날 내게 지인(知人)이 다가와 말했다.
한량이 따로 없군, 복이 터져서 소설이나 쓰고 앉아 있으니. 밥은 제대로 먹고 사쇼?
그럼 내가 굶고 사는 줄 알았냐? 나는 한마디 쏘아부치려다 참았다. 한번은 자고 일어났는데 전화가 왔다. 문학상 후보로 결정되었으니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꿈꾼 지가 언젠데 벌써? 내 이름은 인터넷 검색코너에 대고 치면 담박 뜬다.
이것도 꿈의 결과인가.
내가 소설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 귓가에 대고 별별 소리를 다 했다. 99 퍼센트 이상 부정적이고 악담에 가까운 소리였다. 소설을 써내려가던 어느날 양희가 생각났다. 속에서 참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이제라도 사죄하고 싶었다. 질투라고 하지만 그녀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남의 처지를 비웃고 조롱한 건 악마의 처사와도 같다.
그때 내 안의 악마가 속삭였다면 이제라도 사죄해야 한다. 인터넷을 뒤적였지만 양희에 대한 연락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순간 내안에 기지가 떠올랐다. 그녀와 친했던 홍경자가 생각났다. 인터넷 검색에 홍경자를 입력했더니 그녀의 남편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미국에 갔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는데 그가 목회자로 변신했다는 것이었다.
기사는 짧은 간증 내용이었는데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은혜로운 단어들로 채워 있었다. 나는 그녀가 속한 단체에 전화해 당장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양희에 대한 연락처도 알아냈다.
“나 그동안 미국 가서 생활하느라 잘 몰라, 내가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거기한테 물어봐.”
그 전화번호는 양희의 올케였다. 경자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이라 했다. 다른 소식은 묻지 않았다. 양희와 고등학교 동창인데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했다고 했더니 흔쾌히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 말 몇 마디 하는데도 얼마나 가슴이 쿵쾅 거렸는지 모른다.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창밖에는 아직도 눈발이 거세게 날리고 있었다. 양희는 마치 인생에 달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내 처지에 대해 숨긴 것에 약간의 가책이 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지 하고 말았다. 사실 암 수술했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양희를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소설을 써대고 있던 것이었다.
“자경아, 너 상조보험이라고 들어봤니?”
“응 들어 본 것 같은데 왜?”
“응, 우리 나이면 이제 죽음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애, 내가 사실은 상조회사 보험 영업도 하는데 하나 들어줄 수 있니? 한달에 삼만육천원만 내면 돼, 백번 내는데 들어놓으면 좋을 거야, 사람이 막상 죽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잖니, 그때 상조회사에서 나가서 모든 장례절차를 대신해 주는 거야.”
“그럼 삼백육십만 원이네, 그렇게 싸?”
“그래, 전국에 체인망을 갖고 있어서 그런 거야.”
“한번에 삼만육천 원이면 괜찮네, 내가 하나 들어줄게, 동생들한테도 말해서 들어주라고 할게.”
“자경아 너무 고맙다 오늘 너 만나길 정말 잘한 것 같애.”
“뭘 그런 걸 가지고. 양희야 저기 건너편에 음식점이 있는데 청국장을 아주 잘해, 내가 저녁 살게 같이 가자.”
“아니 아니 내가 사야지.”
“아니 내가 그 정도는 살 능력이 있어, 나는 자유거든.”
“자유? 자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어서 나가자.”
양희와 함께 7080 카페를 나서는데 눈발이 우리들의 어깨에 사정없이 날아와 앉았다. 개울물은 눈과 함께 하얗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음마저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나는 지난 세월동안 양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음식점에서 청국장과 파전을 사주면서 덕담 몇 마디 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앞으로 자주 만나자, 가끔 내 시상식에도 찾아와 주고.” “시상식이라니? 아이들한테 무슨 좋은 일 있는 거니?”
“응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또 만나자, 눈길에 길조심 하고.”
이제 예술공원은 관악산과 함께 거리와 건물 아스팔트가 모두 눈 천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발 속에 반달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경자로부터 양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양희가 평생을 제 오빠 집에 얹혀살다가 이제 독립을 하려고 하는데 힘든가봐, 요즘 보험 세일하고 있다고 하니까 니가 좀 도와 줘라.”
“오빠 집에 얹혀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달에 남편 죽고 아들 딸 잘 던
“그거 걔가 꾸며낸 거짓말이야, 남편은 무슨……… 여적 시집 한번도 못 간 싱글이다.”
“뭐야?"
“앞으로 너희 싱글들끼리 잘들 지내보셔, 그럼 난 이만 전화 끊는다.”
전화를 끊는데 손목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그날 예술공원에서 양희를 만났던 일이 꼭 소설을 썼던 것만 같다.
끝
첫댓글 신작가님의 인생은 다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소설같은 삶이 아닌 동화같은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백마탄중년의 왕자님도 만나시고 웃음꽃 만발한 가정도 꾸미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