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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게시판 스크랩 거제도 청마문학관 ... !
일주 추천 0 조회 137 12.11.03 09:4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 청마 유치원선생 문학관 ... !

 

가을이다. 가을이면 높은 가을하늘과 단풍이 ... 코스모스와 국화가 생각나고 ... 또 옛날 중.고시절에 배웠던 문인들의 시나 글이 많이 생각난다. 한국 문단에서 생명파 시인이자 교육자로 알려져 있는 청마 유치원선생의 거제 문학관을 찾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이제 코스모스도 하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을이다. 가을은 천고마비 (天高馬肥) 의 계절이 아닌가 ... ???

 

현재 청마문학관은 두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 곳은 경남 거제도 둔덕면에 위치하고 있고 또 한 곳은 경남 통영시 정량동에 위치하고 있다. 통영과 거제에 각각 청마의 연 (緣) 이 있어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는 것 같은데 ... 생가 (生家) 가 두 곳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마 한 곳이 생가인 것 같고 ... 또 다른 한 곳은 청마선생이 유년시절을 지낸 곳이 아닌가 싶다.

 

나와 개인적인 친분을 따져본다면 ... 고등학교 대선배이시기도 하다. 현재 모교에는 역사관이 있어서 청마 유치환선배님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교가를 작사하신 분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선배님 중의 한분이시다.

 

 

 

 

■ 청마 (靑馬) 유치환 (柳致環) ... !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靑馬) 유치환 (柳致環) 은 1908년 7월 14일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 507-5번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에서 아버지 유준수 (焌秀, 약사) 와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마 선생은 11세까지 한학을 배웠으며 1922년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야마 중학 (豊山中學) 에 입학, 유학생활을 시작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귀국하게 되었고 1926년에 귀국해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1927년) 중퇴했으며 그 후,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시 (詩) "정적 (靜寂)" 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후, 1937년 당시 시단을 풍미했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해 형 (兄) 유치진 (致眞, 극작가) 과 함께 동인지 "생리 (生理)" 를 발간하는 등 문학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 발간과 더불어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 (煙首縣) 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 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중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1967년 부산남여상 교장재임시 부산 좌천종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선산인 둔덕면 방하리로 이장하였으며,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2008년 고향 통영에서는 그를 기리는 청마탄생 100주년기념축제와 함께 청지사 (지금의 통영예술의 향기) 의 시민 모금 운동으로 통영 중앙우체국 (별칭 청마우체국) 앞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그가 타계 한지 45년이 흘렸지만, 이날 그의 열정만은 아직도 후학들의 가슴에서 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청마선생은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이다.


 

■ 문학세계 ... !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 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청마선생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 (조선문단, 1936. 1)" 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 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로 시작되는 "행복" 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 (1939)" 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 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 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며, 둘째는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 (1951)" 에 실린 종군시 (從軍詩) 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 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 와 "일월" 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인 "바위" 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 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청마의 시집으로는 "울릉도 (1947)", "예루살렘의 닭, (1953)", "청마시집 (1954)",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960)", "미류나무와 남풍 (1964)"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수상경력으로는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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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1.03 19:39

    첫댓글 청마 유치환선생님의 일생을 한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1.04 23:37

    잘 봤습니다. 감사~

  • 12.11.23 21:39

    네~저도 여기 가봤어요~여기 저기서 사진도 찍고 청마유치환선생님의 일생을 느끼며 보고 듣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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