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녀 시인>>
<<김지녀 시인의 양력>>
*1978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고려대 국문과 박사
*2007년《세계의 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제20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시집『시소의 감정』『양들의 사회학』.
<<김지녀 시인의 대표 시>>
1950년대의 책/김지녀
책은 유리문처럼 식어 있다
최첨단의 언어를 지향하고
요령이 아닌 혼이 담긴 시를 요구한
고아가 된 사연과
가난한 어머니들의 새벽을 노래한 시가 부서지기 직전이다
펜슬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혼혈아는 몰래 울고
아버지의 비참을 노래했던 시인이 독한 술을 마셨던 밤은
모서리가 접혀 있다
비참은
참담은
끝나지 않는 서사
초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앵글
최첨단의 언어와
요령이 아닌 혼이 담긴 시가 필요한
오늘의 공기
내일의 노래
오지 않고 있는 아이
밟는 곳마다 깨지는 소리뿐인
안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책의 바깥에 있다
장미와 주먹/김지녀
오늘 밤은 길어서 구부리기에 좋다
끝을 잡아 돌리니까 밤은 잘도 돌아 서른 번째 밤은
주먹이 되어 나를 향해 멈춰 있다
좀 투박하고
비어 있지만 마음에 든다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체온을 조금 나누어 주었을 때
피어난 장미 서른한 번째 밤이 되기 전에
장미, 장미, 장미가 피어서 장미의 얼굴로
서른한 번째 밤은 아름답고
시들어서 고요해
가시가 돋고
그 속에 웅크려 도취해
주먹은 조금 더 커져 있다 오늘 밤은 길어서
촛농이 흐르고
손금이 갈라져
편지를 써야지 피어나는 것들을 잘 기억하도록
병든 담장에 기대어
장미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어주어야지
오늘 밤, 장미는 다시 필 거야
무거움을 버리고
차가운 주먹을 펼 거야 나를 향해, 다시
첫 번째 밤이 길어지고 있다
나의 잠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온다/김지녀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감염된 계절이에요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한 덩어리의 어둠으로 녹아가는 중입니다
크고 검은 고래의 뼈를 생각합니다 아늑한 동굴입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나는 벤젠처럼 냄새가 없어요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지우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꿈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충혈된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
빗속에서도 젖지 않고 메말라가는 곳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뻗어가야 하는 동굴일까요?
닫힌 서랍 속에서
북쪽의 태양이 길어지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태어나고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 릴케, 『말테의 수기』.
모딜리아니의 화첩/김지녀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양들의 사회학/김지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울타리를 칩시다
우리 정원이 다 망가졌어요
창문처럼 입들이 열렸다 닫혔다
교회 십자가 하나 세워도 좋을 법한 초원 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다
눈과 눈 사이가 넓구나
얼굴 옆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귀처럼 달려
양들은 눈이 어둡다
큰 눈은 잘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습니까?
전 그냥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그대로 따라갈게요
양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는 것은 양들의 습성
벼랑인 줄 모르고
와르르 떨어져 죽는 줄 모르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상관없다는 표정
털이 계속 자라니까 신경 쓰여 못 살겠어
일 년에 한 번씩은 온몸의 털을 깎아야죠
그것이 문화인의 자세니까
누가 먼저 할까요?
초원은 고요하다
이마는 순하고
양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혼잣말의 계절/김지녀
푸르스름한 혀를 내밀고 너무 많은 말을 했어 너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벌어지고야 마는 꽃잎들, 하나씩 사라지려고 하는 밤의 질문들, 바깥에서 피고 지는 것들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피어나고 있다 빨간 의자가 척추를 세우고 악ㅡ악ㅡ대는 건 내가 붉지 않은 탓, 붉게 피어났다면 나는 좀더 붉었을까? 붉게 피어났다면, 피어났다면, 이런 생각들이 하나둘 이파리 처럼 떨어지고 있다 피어났으므로 지고 있다
이것이 이별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이별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매 순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사람 부러진 나의 기억에 붕대를 감고 앉아 오랫동안 걷지 못하는 사람 어쩌다 나는 네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거니?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묻자, 혀가 납처럼 굳어버린다 여름은 어지러운 것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는 일처럼 하염없는 것 너에게 나에게 또 다시 피어나고 있는 것 그러니 펼쳐진 시간을 다 오므리고 떨어지는 저 꽃잎들처럼 이제는 입을 다물 것
정착/김지녀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섬은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노트에 줄 하나가 그어졌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창문의 테두리 하나를 나는 완성했다
유리컵/김지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네가 옷을 벗고 돌아다녀
왼쪽 엉덩이 아래 멍은 가리기 좋은 위치인데
아래로 퍼지면서 희미해져
숨이 막혔던 그때처럼
믿음이 깨졌을 그때처럼
네 얼굴에선 물고기가 헤엄쳐 다녀
한 마리 아니고 세 마리
열두 마리……
비린 물 냄새가 계속 피어난다
쪼그라든 젖꼭지에서
더 아래 습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네가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녀
우리가 아는 모든 밤에
개처럼 짖지 않지만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묘연해지고 있어
부산(釜山)/김지녀
여행이 길어진 것이라고 하기엔
살림이 많아졌다
눈 내리지 않는 겨울은 가파른 언덕과 더 가파른
골목을 넓혀
끔찍한 순간들을 넘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내가 소설이 되는 것
다시 돌아가리라는 믿음은 꼭지가 상해서 버렸다
해가 질 때까지
지하실에 내려놓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다소 아름다워 보인다
소수점 아래 숫자를 반올림당한 기분으로
나는 머물고 있다
제라늄/김지녀
내 안에 아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루에 몇 리터씩 물을 마시고
햇볕을 쬐고 있어도
이름 모를 떡잎 하나 나오지 않는 화분처럼
나는 반복을 잊어간다
이것이 내가 앓고 있는 병이다
추위가 물러가고 있다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
창밖의 사람들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약물을 건넨다
세상이 아랍어처럼 어지럽기 때문이다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에선
한 달도 더 된 냄새가 난다
쉽게 취하는 버릇이 오래되었지만
이 버릇은 흔해서 사적이지 않다
나는 일으켜 세워도 쓰러지는 줄기처럼
자고 일어나도 힘이 없다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말라가는
저 붉은 꽃처럼 악착같은 일관성이 없다
립스틱을 바른다
씨앗처럼 무엇인가를 터트리려는 입술이 붉게 열린다
눈은 곧 녹겠지만
생애를 적어내기엔 흰 종이가 너무 넓다
폭이 좁고 옆으로 긴 형식/김지녀
망설이는 것만으로
우리는 옆이 길어집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옆이 전개될 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점선들로 분할되곤 했습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녀에게
전화를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우산 아래서 옆이 다 젖도록 어둠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먼 곳을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옆의 옆이 낯설어졌어요
자를 대고 칼로 긋듯 그날을 반듯하게 자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잘 접혔을 겁니다
한 번은 옆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거절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발등을 바라보며 망설이더군요
옆과 옆 사이의 어깨가 그 어떤 테두리보다 넓어서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더 넓고 따뜻한 옆을 차지하려고 우리는 분주했고
옆에 얼마나 크고 넓은 폭포가 있는지
절벽과 진창이 있는지
가닿지 못하고
우리의 옆은 배경이 없는 화면처럼 점차 장편이 되어갔습니다
오후처럼요, 이웃의 그림자가 다음 페이지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때도
바닥에 남겨진 흙자국들을 지우며
우리는 옆이 모르는 비밀 하나쯤은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망설이다가
우리는 옆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많은 내용을 담은 것처럼 우리의 옆에 정원과 연못을 가꾸고 있습니다
비겁함을 쉽게 접기 위함입니다
지나간 사건들을 돌돌 말아 놓고 오래 살기 위함입니다
과오일기/김지녀
아름다운 우리말을 하나도 쓰지 않고
시를 썼다
맴도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잘하는 내가
부사와 형용사를 이용해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허리에 살이 쪘다
너를 위한다는 이유로 한
말 한마디가
너를 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한한 어제였다
오늘은 한 장에 그쳤다
뜻 모를 노래 하나가 입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식목(植木)/김지녀
말줄임표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삽화가 내 삶의 여러 페이지에 그려진 이후로
나도 잘 열어 보지 않는 일기를 적습니다
두꺼워진 삶이 욱신거리거나 달아오를 때는
얼음을 입안 가득 넣고
아작 아그작 씹어 먹습니다
한 대 시원하게 맞아 얻어터진 것처럼 얼얼하게 입속이 마비되는
하루가 유난히 긴 날,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떤 모양의 이파리를 틔울까
크레파스로는 칠할 수 없는 꽃이 피면 어쩌지?
꽃말을 붙일까 말까
나무를 심은 날엔 밤새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몸통만 남은 불행에 사로잡혀 계속 뒤척이다
이불 속에서 자꾸 들춰지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엄마, 를 불렀습니다
엄마,
엄마,
매일 기다리며 나무를 심었어요
편지도 쓰고 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얼굴도 그리고요
더 많은 단어들이 잎사귀처럼 달려 엄마에게 할 이야기가 많아졌어요
손가락이 자라나 봉숭아꽃을 따고 꽃물 든 손으로
양치질을 하면서 기다렸어요
나무가 자라고 있어요
아이가 맨 처음 엄마,
소리를 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면서 날 보고 엄마, 불렀을 때
나무처럼 나는 서 있었습니다
나무 두 그루가 마주선 삽화를 그려 넣고
모서리 부분을 접어 놓았습니다
한 글자도 적지 못했지만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 삶이니까요,
나무 옆에서
침묵이 얼마나 큰 뿌리인가 생각했습니다
새순처럼 새날이 돋아납니다
아이를 만나면 나무 두 그루에 같이 색을 칠할 겁니다
나무그늘이 커지고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언젠가 들춰질 나의 일기장이 조금 더 두꺼워졌습니다
시소의 감정/김지녀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 브레히트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우리가 일제히 언니, 하고 불렀을 때
비인칭 주어처럼
길어서 다 부를 수 없는 이름처럼
언니는 해석될 필요 없이 거기에 앉아 있다
등을 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탕! 탕! 날아가는 날들을 향해
돌을 던진다
언니의 하늘은 올리브색에 가깝다
오래됐군, 페인트 벗겨진 하늘을 팔레트 나이프로 긁어낸다
가루가 되어 쌓이는 오늘의 날씨
조금씩 갈라진 감정의 흰 뼈들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인 저녁 쪽으로
우리는 두껍게 하늘을 덧칠한다
차가운 동상(銅像)으로 언니를 기념한다
언니는 과묵하고 무심하고 작기도 한데
모랫바닥을 글자들로 구겨 놓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는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1846년 살롱의 저녁/김지녀
1846년 살롱에서, 비어 있음에 대해 토론하는
두 사람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고 있는 사람과
말을 더듬는 사람과
글자로 가득한 종이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문을 만들어
열고
닫고
두 사람
둘이 아닌 사람
비어 가는 살롱과
살롱,
비어 있음을 잘 알고
비어 있기를 원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두 사람만 허락하고
둘이 아닌 사람을 경멸한
액자와 믿음과 귀의 필요를 계단에 앉아 이야기하고
계단이 되는
계단의 영향 아래서
등이 굽고 있는 시간과
눈이 멀고 있는 벽과
성을 짓고 부숴버리는 일에 몰두해 있는
두 사람
슬슬 허기가 지고
벌레가 기어가는 속도보다 느리게
술잔이 비어가는
살롱에서
여주인의 치마 아래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진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열고
닫고
고집이 센
1846년의 기나긴 저녁
밥을 주세요/김지녀
이 질문에 밥을 주세요 페달이 멈추었어요 새가 울지 않았어요 오후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5시 11분엔 밥이 필요해
요 천둥이 치는 날엔 다음을 기다려요 소리의 다음, 너의 다음, 하늘의 다음, 다음의 다음, 을 기다려요 기다리며 나
는 번쩍거려요 우산에 밥을 주세요 보리 현미 콩 수수가 섞이지 않은 하얀 밥을 주세요 용마랜드의 회전목마에 밥을
주어야 해요 서로의 멱살을 잡는 사람들에게 갓 태어난 아기에게 리어카를 몰고 도로를 횡단하는 저 할아버지에게
추억을 주세요 창백한 우리의 영혼에 호호 따뜻한 입김이 불어오게 해주세요 침묵을 깨워주세요 도마뱀꼬리처럼 잘
려도 다시 돋는 우리의 수다를 잠재워주세요 밥은 다 할 수 있어요 주먹처럼 만들어 던져주세요 높은 담장과 담장
사이로 던져주세요 따끈따끈 하얀 밥풀이 흩날리는 세상을 다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밥을 주세요 어둡고 추운 서로
의 입속에 한 숟가락의 불이 되도록 페달을 돌려주세요
일광욕/김지녀
이불속에서 마음이 나빠진다
속사정이라는 거
끝까지 말하기 싫은 가족사 같은 거
너 왜 그랬니? 왜 그랬어?
뭐라고 소리를 지르든
끝까지 답하지 않는 마음은
아파트 복도에 널린 이불들 같다
한 번도 널어 말린 적이 없는 방에서
퀴퀴한 옷들
착착 접힌 이불들, 그 속에서
나는
다 털린 기분이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내가 나에게 물어도 답이 없는 일들이 있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린
하룻밤 같은 거
설거지하다 놓친 접시 같은 거
아무리 조심해도 일들은 벌어지고
다른 사람의 입술에서 입술로 포개지고
햇빛이 좋은 날엔
더 많은 사건과
더 많은 이유들
여기저기 널린 이불을 보면
옷을 벗고 베란다에 눕는다
답하지 않아도
답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바짝 마르는 기분 때문에
이불속에서 마음은 그늘을 찾는다
팔레트 속/김지녀
각자의 허기를 달래줄 국경이 됩시다
당근과 사과가 섞인 주스를 마시고
소주와 맥주가 섞인 술을 마시고
국적이 불분명한 얼굴로
태양을 그렸는데 달이 되고
산을 그렸는데 울타리가 되는
눈썹과 눈동자와 코를 그려 넣을 수 있는 계란만큼
훌륭한 얼굴은 없습니다
한쪽 귀는 절벽 다른 쪽은 바위
입술은 그리지 맙시다
입술이 열리면
말과 생각이 변하기 쉬우니까
배가 고파도 열리지 못하는 입술들이 있으니까
노란색 바나나는 더 노랗게
한쪽 눈은 파랑, 다른 쪽은 노랑
콧구멍은 갈색
머리는 초록색
무엇을 색칠하든
입술은 그리지 맙시다
이 지구에서 옷 속의 몸은 의외로 얇고
국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열렬한 사랑이 찾아옵니다
국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작은 칸과 칸 사이를 흘러넘친 이 색깔을 무슨 색깔로 불러야 합니까?
누군가 내 창문을 다 먹어버렸다*/김지녀
맴돌기만 하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단어 같은 거야
같이 생각해줄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계속 던지는 있잖아 그거,
포도 한 송이
당신이 먹고 있는 포도알 속에 나의 창문이 있다
당신 손톱 밑에 물든 먹자주색이
나의 창문을 뺀 나머지다
한 개씩,
껍질로 남은 것들은 퉤, 뱉어진 나의 테두리
속없이
나는 다 말했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기분으로
차분하게
억울했지만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알았으므로
열었다 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랫동안 열지 않으면
잘 열리지 않아
창문을 잃게 된다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척 입 다문
당신은 창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은 책을 쓴다
새로울 것 없지만
새로운 애인
새로운 연필
새로운 포도알을 따서 정말 새로운 것처럼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아파트 10년 하자보수 관계로
아파트 외벽 크랙 및 페인트 공사를 진행합니다
입주민들께서는 되도록 창문을 열지마시고
갑자기 놀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포도의 계절에
당신과 나는 갑자기 헤어졌다
알고 있다
당신은 배가 부르다
당신이 다 먹은 포도알 속에 나의 창문이 있다
단어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 있잖아,
그거,
책이 배달됐다
열리지 않았다
* 훈데르트 바서 그림의 제목.
짧게/김지녀
행갈이를 자주 하는 습관 때문에
이번에도
짧은 시는 실패했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엄마의 푸념은 감정만 내세운 시행처럼
절제가 필요했다
제발,
엄마의 반복엔 리듬이 없다
엄마를 닮아가는 나를 보고 있으면
행갈이를 하고 싶어진다
분절된 곳에서
신선한 공기가 불어올 것 같았기 때문에
집을 나간다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세 번 적으면 차분해졌다
그러나 차분함만으론 부족하다
엄마가 나를 낳고
내가 아이를 낳고
수직적인 가계도 속에서
엄마는 영원할 것이다
짧게,
엄마를 부르면
다 말하지 않아도 여백이 생긴다
검은 봉지/김지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검은 봉지에 들어있는 게 고기인지
오징어인지 냉동실에 넣어둔 지 오래여서가 아닙니다
검다는 이유로
검은 봉지는 대단한 사건이 됩니다
사라진 사람의 머리통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늘한 밤의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꼭 묶어 놓으면
입을 틀어막은 손처럼 단호합니다
최고의 알리바이가 됩니다
사람들은 쉽게 잊습니다
그리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검은 봉지는 앞도 뒤도
안과 바깥도 없습니다
뒤집기 좋습니다
냉동실에 검은 봉지가 쌓여갑니다
무수한 사건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숨죽이고 있는
검은 봉지를 열면
딱딱해진 악령들이 쏟아질 것 같은 날입니다
큰 파란 바람의 저녁/김지녀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으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 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 제1회 세계의문학 당선작
크래커/김지녀
수백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하고
폭파전문가들은 콘크리트 벽에 뚫릴 구멍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폭파 직전의 건물을 보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도 적당하다
크래커는 바삭바삭 잘도 부서진다
건물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서 있다
이미 깊고 큰 구멍의 뼈를 가지고
천천히 무너졌을 시간이 늙은 코끼리처럼
도시 한복판에 머물러 있다
까맣고 흰 얼굴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여러 번 크고 작은 눈빛이 오고 간다
벌컥벌컥 물 한 컵을 마시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어버린
벽과 창문과 바닥이
하늘 높이 솟았다 가볍게 흩어진다
방바닥에는 크래커 부스러기들이 잔뜩
떨어져 있다
저 먼지구름은 이제 곧 이곳을 통과할 것이고
지퍼의 구조/김지녀
뜨거운 계단들이 열리고 있다
나의 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진흙처럼
계단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잡아당겨 놓았다
나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생각하는 자세로 오해받기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어떠한 생각도 자세도 없다
움직일수록 계단들은 더 깊게 열린다
이것은 극단에 가깝지만
위에서 아래로
나를 힘껏 잡아당긴 것은 Y의 말대로, 나이다
그러고 보니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 또한 나이다
이쪽과 저쪽이 잘 맞물려 서 있는 자세에 대하여
틀어진 이를 가지런히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힘껏 당겨도 닫히지 않는 계단 앞에서
나는 기울어져 조용히 멈춰 있다
오랫동안/김지녀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 나무는 초록의 긴장을 풀어놓아 저 그늘
은 내 얼굴을 물들이지 나를 보고도 울지 않는 소의 커다란 눈 이
건 이미 누군가 써놓은 권태의 기록
하마가 하품을 하는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저녁을 데리고 와 돌
아눕는 지구의 뒷모습 이 순간 육중한 몸을 움직여 천천히 물속으
로 사라지는 하마의 걸음걸이는 아름다운 형식
자그마한 여자가 제 키보다 긴 머리카락을 빗을 때 검은 폭포수
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 여자의 손끝에서 돌돌 말려 버려지는 시
간의 길이와 색(色)
나는 벽 앞에서 공을 받아치며 공을 따라 달려가네 가깝거나 멀
게 펄럭이는 마음 사이로, 벌써 열흘째 비는 창문에서 흘러내리고
잃어버린 천장/김지녀
너는 나를 습득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곤
그리워했다, 그때마다 나는 흑판처럼 어두워졌다
입을 틀어막고 공손해졌다
너는 오늘 천장, 이라고 적는다
천장을 보세요 굳은살을 만지는 것처럼 딱딱한 바닥이 펼쳐져 있어요
거기에 손을 대보면 아주 고요한 안개의 깊이가 느껴져요 쓰다듬을 땐,
손바닥에 어떤 그늘이 축축하게 묻어나는데 그 그늘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죽은 이름들을 만나 인사를 했어요
천장을 걷는 사람들에게 몽실몽실 피어난 곰팡이가 나에게로 날아와 번지고 철자 하나 잘못 쓰인 글자차럼
나는 쓱쓱 지워지고 받침 없이 끝이 없이 펼쳐지고
그러나 천장은 말더듬이의 발음처럼 시작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리듬이 끊긴 계절과 어떤 의지도 없는 새벽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밤
나는 자음 하나를 잃고
모음과 그림자를 잃고
갑남을녀 사이에서 갑이어도 을이어도 슬프지 않았다
비과거 시제時制를 잊어버리고부터
나는 너의 얼룩진 지하실의 벽이고
어둠에 발을 담그고 굳어버린 바닥이었다
작은 전구 하나 달지 못하고
나의 천장은 유실되었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올려다볼 천장이 없다는 것
너는 어쩌면 내게 바닥, 이라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김지녀
수백 개의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나
끊어진 철로처럼 누워
나는 불안한 진동을 감지하는 바닥인가
이 순간 나는 유신론자 아니 유물론자 아니 아무 것도 아니
다만 닥닥 부딪치는 이빨을 소유한 자
그러나 나의 떨림에도 근원은 있다
차가운 내 살 속에도 자갈과 모래처럼, 또 나뭇잎처럼 켜켜이 쌓인 사람들이 있다
지붕 없이 이빨도 없이 새들은 벌써 이곳을 떠나고
뒤틀려 열리지 않는 문짝 속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는 휘어져버린 시간
당신의 밤은 무사한가
오늘은 기차처럼 몸을 떨고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모든 사물이 제자리로 가기 위해 흔들린다,는 생각
숨쉴 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바닥
나무뿌리 같은 혈관들이 살갗으로 불거져 나오고 있다
나를 떠난 것과 나에게 떠밀려 온 것
사이에서, 나는 뜨거워졌다
온몸에서 문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