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육체(정욕 혹은 혈기로도 번역함)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많은 용법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그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용법을 소개한다. 하나는 사람의 육체로 사용되며, 다른 하나는 육체의 정욕으로 사용된다. 육체로 사용될 때는 물질적인 육신을 말하고, 정욕으로 사용될 때는 정신적인 육신을 말한다. 사람의 육체의 정욕은 대체 무엇인가? 사람의 몸에는 오관이 있다. 이 오관은 각각의 애호가 있다. 눈은 미색(美色)을 좋아하고 촉각은 부드러운 감각을 얻으려 하며 귀는 음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입은 별미를 맛보려 하고 코는 독특한 향기를 맡으려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애호가 있다. 이것들이 바로 육체라고 하는 육신의 정욕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육신
본래 사람은 육체로 태어났다. 즉 정욕으로 났기 때문에 사람은 육이다(요 3:6). 사람이 육이라는 말은 사람 속에 충만한 것이 모두 육체의 정욕과 일들이고 종일 생각하는 것이 악뿐이라는 뜻이다. 사람에게는 육체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가장 좋은 칭호는 바로 살아 있는 정욕 덩어리, 곧 육이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엡 2:3), "본성을 거스른 정욕"(유 7, 원문 참조) 대로 행하며, "육체를 더럽혔다"(유 8), 이것이 너무 더럽기 때문에 유다는 믿는 이들에게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라" (유23)라고 명한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의 육체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롬 8:3). 또한 사람이 육신을 좇아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롬 8:5-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육신의 생각은 육신을 좇음으로 온 것이다. 육신을 좇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기 때문이다(롬8:4). 또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롬 8:13) 것이다. 그들이 육신대로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육신이 되어 속죄제를 이루시고 육신 안에서 죄를 정하셨다. (롬 8:3)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롬 8:12) 산다. 그들이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롬 7:5)기 때문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기 할 수"(롬 8;8) 없는 것이다.
거듭난 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딤전 3:16) 되어 세상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모든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속죄 제물'이 되셨다. 죄인이 그를 대신해 죽으신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다(요 3:16). 일단 그가 믿으면 성령은 그의 영 안에 들어가 그를 거듭나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영 안에 들어가 그와 연합하여 그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한다. 거듭남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아버지가 어떠하고 아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태어난 이 관계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거듭난 믿는 이는 영원히 구원받은 자이다. 비록 그가 실족할지라도 그에게는 여전히 영생이 있다. 이것은 이 생명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이 이미 그의 영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생명이 죽을 때 그의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그의 영생도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지 않는다. 전에 그는 '육신'에 거했지만 이제는 '영'안에 거한다(롬 8:9). 이로써 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요 1;13)요, "위에서 난 자"(요 3:5)이다. 하나님께로 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영과 연합했기 때문이고, 위에서 난 것은 이 생명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이며, 영으로 난 것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그들 안에) 거하시고"(롬 8:9), 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도 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롬 8:10) 된 것이다.
주님을 믿은 후, 비록 믿는 이가 '영으로 난 자' 이고, '영 안에 거하지만' 그는 아직 영적이지 않고 여전히 육신에 속한다.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형제들아(이들은 주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을 사용함)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1)라고 말했다. 비록 그들이 이미 거듭났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고전 3:3),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전 3:4),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고전 3:3)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란 그들이 거듭난 어린아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했지만 진보하지 않고 여전히 영적 생명의 초보에 머물러 있고 오랫동안 자라지 않았다는 뜻이다(히 5:11-14). 이 단계에서 그들은 '연단을 받지 못하므로', '선악을 분별' 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은 정말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육신에 속한 자란 바로 육신의 애호와 정욕의 속박을 받으므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롬 13:14) 한다는 뜻이다.
육체의 일은 무엇인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믿는 이들은 이러한 죄들을 범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도 이런 죄들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육체가 발동하여 오관이 유혹될 때 혼은 이런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혼은 온 존재 중에서 가장 힘 있는 부분에게 순종한다. 갓 구원받은 믿는 이의 육신은 심히 강하기 때문에 혼이 육신에게 복종한다. 그의 인격 안에는 아직 십자가의 능력을 취하는 것에 대해 완전한 이해가 부족하므로 그는 자신의 온 존재를 다르시리 못한다. 사탄이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을 유혹하여 그들의 육신을 격동시킬 때 그들은 죄를 범하고 만다. 위의 죄들 중 하나라도 있는 자는 곧 육신에 속한 자이다.
육신에 속한 믿는 이들은 너무나도 가련하다. 대부분 그들은 나름대로 뜻을 세워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육신 안에 어떤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육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한다. 정말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17)가 행한 것이기 때문에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라고 말한 것이다. 육체가 발동하면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까지 어떤 큰 능력이 사람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경우에는 정욕이 아닌 단지 육신의 어떤 필요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발동은 통제할 길이 없다.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바로 이러했다. 주 예수님께서 팔리시던 날 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지만 그들의 눈꺼풀은 계속 내려앉아 잠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한시라도 깨어 있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였기 때문이었다(마 26:41, 원문 참조). 영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육신을 다스릴 수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육신의 지배를 받아 주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었고 눈이 감겨져 잠들었다. 육신에 속한 믿는 이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육신에 속한 행위에 있어서의 여러 방면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그들에게 나타난 육신은 분쟁과 음란 등의 일들이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육신은 자기 몸을 쳐서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이 나타난 결과는 다르지만 육신에 속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똑같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기록한 씨름은 육신에 속한 믿는 이의 체험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18-25).
육신에서 벗어남
육신에서 벗어나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바로 십자가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육신을 좇을 필요가 없으며 육신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므로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의 죄들을 범할 수도 있다(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거듭난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평상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 육신의 일이지만 거듭난 사람의 생각은 일시적인 유혹으로 잠시 실족할 수 있어도 항상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가 더 깊이 십자가를 의지한다면 그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려 우리 죄를 담당 하사 속죄제가 되실 뿐만 아니라 더욱 "육신에 죄를 정 하사" 그분과 연합한 우리들에게 육신의 죄를 섬기지 않게 하신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은 속죄제가 될 수 있으시다(이것은 대신 죽음이다). 그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기 때문에 육신에 죄를 정하실 수 있다(이것은 함께 죽음이다). 그분의 육신이 죽을 때 그분은 그분의 육신 안에서 죄를 함께 못 박으셨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죄의 형벌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와 더불어 죄인도 그분과 함께 못 박으셨다. 그분께서 죽으셨을 때 그들도 그분과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은 마땅히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의 도를 배워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을 믿는 사람은 거듭난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육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말했다. 육체는 반드시 못 박혀야 한다. 육체는 결코 씻거나 가르침으로 개선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육체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은 이것저것 사랑하는 데 힘 있고 강하다. 육체의 욕심은 많은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즐겁게 하지 않으면 큰 문제를 일으킨다. 육체의 정과 욕심이 일단 발동하면 19절부터 21절까지에 기록된 죄들로 나타난다. 죄를 제거하려면 죄의 근본을 제거해야 한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알았다면 마땅히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더 이상 육신의 속박을 받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영적인 믿는 이가 될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1절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라고 말한다. 이 할례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그것이며 침례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그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본래 우리는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고 더욱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골 2:13).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우리를 육체의 정욕에서 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규례를 지키기만 하면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규례들은)은 … 지혜 있는 모양이 있게 할 뿐이고" (거짓된 것임), "자의적 숭배" (사람의 규정일 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이며, "자의적 겸손" (헛된 겸손)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오락에 있어서 몸을 학대하면 육체의 정욕이 발동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함)임을 모른다. 또한 그들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음"을 모른다(골 2:23).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골 2:12)이다. 사람이 육신인 것은 육신으로 났기 때문이다(요 3:6). 사람은 출생으로 유전된 육신을 얻었기 때문에 이 육신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출생과 정반대의 방법을 의지해야 한다. 출생의 반대는 죽음이다. 사람이 출생으로 육신을 얻었으므로 오직 죽음으로만 육신을 잃을 수 있다. 사람이 출생으로 물질적인 육신을 얻었듯이 죽음으로써 물질적인 몸을 상실할 수 있다. 정신적인 율신도 출생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역시 죽음을 통해서만 이 정신적인 육신을 벗을 수 있다.
'옛사람'은 바로 육신이다. 그리고 죄는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육신의 주 원동력이 된다(롬 7:17). 성경에서 단수의 죄는 언제나 원죄나 죄의 본성으로 해석된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라고 말하고, 10절은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뿌리이고 '범죄'는 '죄'가 행한 것들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옛사람은 못 박혀야 하고 죄는 제해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옛사람을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사실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자들"(롬 6:3, 원문 참조)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죄인의 십자가이며, 그분의 십자가는 죄인의 십자가가 되었다. 옛 아담 이후 인류는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여 사탄인 뱀의 독소로 충만하다. 하나님께서 다시 고치거나 개조하고 개선할 수도 없는 인류가 되었다. 그분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바로 이 옛 인류를 못 박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주님의 일은 이미 주 예수님에 의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못 박을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이것을 참으로 여기면 된다. 믿음 외에 옛사람을 못 박을 다른 방법이 없다. 믿는 이는 마땅히 실제적으로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취하고 체험 가운데 이것을 적용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에게, "주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지 않았는가?" 나 자신이 죽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을 믿는다면 믿음을 사용하여 속에서부터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뿐 이 나라 '내'가 믿는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가 모든 죄에 대해 죽었는가" 내 생활의 자질구레한 모든 죄에 대해 죽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믿음의 필요성은 또한 이런 데 있다. 당신이 모든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믿음을 사용하여 '모든 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죄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함께 죽었고 모든 죄에 대해서도 죽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믿고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매번 육신이 발동할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적용하여 그것을 죽여야 한다. 실례를 하나 들겠다. 본래 미국의 백인들은 많은 흑인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전쟁 후에 그들을 해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지방의 지주들에게 노예를 해방하라는 선언이 전해졌지만, 그들은 흑인 노예를 그들의 재산처럼 여겼기 때문에 그 선언을 전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선언을 전해 주면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얻게 되고 지주들은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흑인 노예가 이 선언을 알게 되자 그는 자기 주인을 떠나 자유롭게 되었다. 그 후 그가 이 선언을 다른 노예들에게 전해 주었을 때 그의 말을 믿었던 노예들도 모두 자기 주인을 떠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본래 인간은 모두 죄의 노예였다. 다행히 주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미 자유인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믿는 사람, 곧 이 승리의 선언을 의지한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는 '죄를 섬길 필요가 없다.' 법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체험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흑인 노예가 개인적으로 그 선언을 믿어야 자유로울 수 있듯이 우리도 개인적으로 믿고 낱낱의 사실을 믿어야만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일이 발생할 때마다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적용하여 그것을 죽여야 한다. 모든 일을 이렇게 할 때 곧 승리의 체험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다'는 믿음의 행위이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여김'은 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눈으로 자기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보려 한다면 아마 일생토록 보지 못할 것이다. '여김'은 또한 느낌이 아니다. 만일 지각을 사용하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느끼려고 한다면 종신토록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김'은 믿음이고 한순간이면 즉시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 수 있다. 자신이 죄에 대하여 미이 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을 만지거나 느끼려고 하지 말고 보랴고 하지도 말고 다만 믿으라. 당신이 여기는 것을 '참된 것'과 사실로 믿어야 한다. 순간순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긴다면 죄는 정말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한 면에서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하고, 다른 한 면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고 사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죽을 때 죄는 그 권능을 잃게 되며 살 때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듯이 나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셨듯이 나도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긴다. 이 구절은 당신이 자신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라는 말이다. 죄와 모든 육체의 일들에 대하여 산 자이다. 그러나 만일 믿는 이가 자신을 단지 한 번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생명의 힘이 없게 되고 심히 연약하게 된다. 육신에 시험이 임할 때 그의 영 안에 생명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실패한다. 만일 그가 주님과 함께 부활한 위치에 서 있다면 그의 영에는 부활 생명이 충만하게 된다. 그때에는 비록 그리스도안의 생활에서 그에게 시험이 닥칠지라도 그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롬 8:13).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 후에도 자자 육신의 위치에 떨어져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하게 된다.
믿는 이는 한 번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 후에도 자주 주님과 함께 죽은 위치에 서서 주와 연합된 영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행실을 죽여야만이(롬 8:13) 점점 진보하여 성령을 좇아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비록 믿는 이들이 현재 아직 몸을 벗지 못하고 육체 가운데 행하나(고후 10:3), 육체대로 행하지 않을 수 있다. 비록 그가 '육체 가운데'(갈 2:20) 살더라도 육체대로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몸 안에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행위는 '육체대로 행하지 않고' 육체의 정과 욕심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오직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롬 8:4). 주님께서(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처럼 믿는 이들은 죄의 몸이(체험적으로 ) 멸하기까지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운행하시게 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 이후로 믿는 이들이 더 이상 육체의 정욕을 순종하지 않고 육체대로 행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주 "죄로 …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롬 6:12) 태도를 취하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면 육체가 발을 둘 여지가 전혀 없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갈 5:16) 되는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은 육체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러한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는 것이다. 때때로 불행하게 육체에 의해 자신이 더럽혀졌다면 그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고후 7:1) 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