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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상지대 ` 김문기와의 싸움 41년` 한겨레 3면
" 20여년 전에 네가 북을 참 잘 쳤는데... 여전히 이러고 있구나."
머리 희끗한 영문과 장재화 교수가 식판에 담긴 밥을 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1988년 영문과에 들어온 제자 이주엽씨는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곧잘 북을 쳤다. 잇따른 부정입학, 돈과 맞바꾼 교수 채용, 부당해고와 징계 등으로 인해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사상범으로 조작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요구, 이주엽씨는 1996년 졸업때까지 제대로 수업이 진행된 학기를 경험한 적이 없다. 학생들은 연일 김문기 이사장 퇴진을 요구했다. 1993년 3월 김문기 이사장이 부정입학 혐의 등으로 구속되면서 퇴진했다.
당시 민주자유당 3선 의원이던 김문기의 구속은 세간의 화제였다.
이씨는 상지대 졸업 뒤 교직원으로 채용됐다. 2014년 8월 김문기가 거짓말처럼 21년 만에 귀환했다. 이번엔 이사장이 아니라 총장이었다. 학교는 내분에 휩싸였다. 김문기의 귀환으로 학교엔 칼바람이 불었다. 김문기를 반대하는 교수. 직원. 학생들은 파면 . 해임. 무기정학 처리 됐다. 이주엽씨도 해임 됐다. 잘리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죽여야 하는 시대로 회귀했다.
지난 5일 교직원 식당에서 식판을 두고 마주앉은 교수와 제자의 머리에 흰머리가 올라와 있다.
정 교수도 20여년 전 그때처럼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불꺼진 복도마다 수업거부 라는 문구가 빼곡히 붙었다. 상지대는 9월15일 부터 수업이 열리지 않는다 복도에는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빼버린 책상과 의자로 가득찼다. 수업거부를 알리는 하얀 종이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복도는 어둡고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20여년 전의 이주엽이 전공서적을 버리고 북을 들었듯, 이날 학생들도 낮 12시가 되자 강의실이 아닌 해방뜰 로 불리는 교정에 모여 들었다. 해직된 이주엽이 수업을 거부하는 후배들 앞에 섰다. " 우리 용기를 잃지 맙시다."
논란에 휩싸인 김문기는 취임1년을 채우지 못하고 7월9일 해임됐다.
교육부는 지난3월 상지대 종합감사 결과를 통보하고 교육용 기본재산에 대한 부당한 관리,계약직원의 부당한 특별채용 등을 이유로 이사회에 김 전 총장 해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학 정문 앞에 자리한 총동창회 건물에 그가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김문기가 나타나는 저녁이나 밤이 되면 학교의 주요 보직 교수나 교직원들이 하나둘 총동창회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 5일 밤, 총동창회 건물에 불이 켜졌다. 여자 1명, 남자2명이 건물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아 김문기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양복입은 남자가 명함을 달라고 해서 내밀어도 자신에 대한 소개는 비밀에 부쳤다. 교직원인지, 교수인지, 이름을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 이름도 , 명함도 없다. 총동창회 사무실에서 일한다 " 고만 했다. " 우리도 만나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만나지 못할 거요." 양복입은 남자가 말했다. "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더 안 좋은 일을 당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더 안 좋은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때는 김문기를 잘 알지 못했다.
수업이 사라진 학교
" 이 사회를 거쳐 정당하게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정식 선임되고서도 논란의 중심에서 비켜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 출석을 요구받았고 총장 사퇴를 강요받았습니다." (지난해 3월 발간된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77쪽)
08학번 법률행정학과 윤명식씨가 고등학교 시절 상상하던 대학 생활은 이런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여자친구를 사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윤씨의 입학을 전후해 학교는 혼란에 휩싸여갔다. 2007년 대법원은 분규 사학에서 임시이사의 정이사 파견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 종전이사 ( 교육부의 임시이사파견 전 마지막 이사로 통상적으로는 사학설립자) 는 보통 학교법인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임무와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자라 할 수 있다" 며 "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학교 법인 자체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1993년 김문기가 물러나고 10년간 교육부의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던 상지대는 2003년 부터 임시이사들이 정이사를 선임해 정이사 체제가 구축됐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이 상지대에서는 다르게 작용했다. 김문기의 복귀가 본격화 되면서 학교는 혼란에 빠졌다. 윤씨는 대법원이 말한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와 사학의 정체성 자주성 강화는 체감하지 못했다.
김문기의 측근4명이 2010년 전체 이사의 절반을 구성했다.
이사회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김문기 복귀를 바라는 이사들과 교육부가 파견한 이사들의 의견 차이로 미결재 서류가 늘어나 학교 행정은 천천히 마비됐다. 윤씨가 학교에 입학해 매일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나이트클럽 홍보 차량처럼 생긴 탑차였다. 알지도 못했던 이름 김문기를 지지한다는 홍보 차량이 매일 학교를 돌아다녔다.
김문기가 2014년 8월14일 총장으로 돌아왔다.
김문기 총장 복귀 1년간 윤씨가 본 것은 새로운 정권이 과거 정권을 급격히 청산하다 낳은 부작용이었다. 김문기는 친인척을 대거 기용 했다. 전관 22조의 2항에 상근 임원직을 신설하여 장남 김성남을 상임이사에 문중 인사인 강릉 김씨 원주 종친회장 김길래를 이사에 먼 친척 최선용과 김일남을 이사에 앉혔다. 김문기 복귀 운동에 앞장서라고 2008년 김명식 총학생회장을 회유한 남아무개씨는 총무부장 또 다른 측근 조아무개씨는 학생지원부 과장에 임명됐다. 그동안 김문기 복귀 반대운동을 벌인 방정균 한의대교수 등 4명은 파면, 이주엽 등 교직원 3명이 해임됐다. 추가적으로 교수 7명에 대한 징계절차도 진행됐다. 소명 절차도 진행되지 않았고 징계 사유도 학내 구성원들이 보기에 납득하기 힘들 만한 것이었다.
학교 행정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3년 마다치러지는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선 올해 ` D-` (디마이너스) 를 받았다.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7월 파면된 방정균 교수는 " 대학구조개혁 평가를 하기 전에 교육부가 평가 지표를 미리 학교에 알려준다. 평가 지표를 보면, 학생들의 취업 지원과 장학금 등 교육 서비스에 관련된 사항에 점수가 높기 때문에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교육지원프로그램 예산은 2014년 5억693만원에서 2015년 9376만원으로 축소하는 등 전혀 대비가 없었다" 고 지적했다.
한의대 학생들도 모두 수업거부를 진행중이다.
결석률이 수업일수의 4분의1을 넘기면 한의대 학생들은 유급이다. 한의대 12학번 김세중 학생은 " 유급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이유는 이대로 가다간 학교도 한의대도 망할 것 같은 위기 때문이다. 2017년 한의대 인증평가를 받기 위해선 기초교수 1명, 임상교수 8명을 채워야 하는데 아직도 충원이 안 된다. 지난2월에는 겸임교수를 일방적으로 처우가 열악한 외래교수로 바꾸어 몇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2주간 수업 손실이 생겼고, 이제는 안 좋은 직장이라고 인식되어 지원도 안 하는 형편이다. 한방병원 분원을 지어야 인증평가를 통과할 수 있는데 인테리어 공사비를 제때 주지 않아 오래도록 공사가 멈췄다" 고 말했다.
학교 로고는 1974~93년 김문기 이사장 시절의 것으로 모두 교체 됐다.
학교 곳곳에 ` 상지대 설립자` 라며 김문기 사진이 걸렸다. 그러나 상지학원 정관을 보면 설립자는 김문기가 아니라 고 원홍묵씨다. 지난해 11월 25일 정관상 설립자를 원홍묵 에서 김문기로 바꾸려다 교육부의 행정 지도로 정관 개정 취소 및 환원이 됐다. 김문기가 구속되던 1993년 이전까지 학생들의 집회 공간이던 ` 해방뜰` 에 화단이 생겼다. 설립자인 원홍묵 흉상은 2012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철거 됐다. 원홍묵의 아들인 원지영씨가 " 선친은 상지대와 관련이 없으니 흉상을 돌려달라" 는 내용증명을 상지대에 보낸 것이다.
원홍묵 설립자 흉상은 김문기가 학교를 떠나 있던 2008년 3월19일 교정에 설치됐다. 그러나 원지영씨의 내용증명은 불과 1년 전의 기자회견 내용을 뒤집은 것이었다. 교수 와 학생들이 김문기의 복귀를 막기 위해 2007년 5월28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원씨는 " 선친이 품은 건학정신을 잘 이어가고 있는 상지학원이 현명한 정이사들에 의해 발전하길 바란다 사학비리의대명사인 김문기씨의손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고 강조한 바 있다. 원씨의 입장 변경을 두고 이상한 추측들이 나돌았다.
08학번 윤명식의 기억
분규 사학에서 학생들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갈등과 학내 정치에 노출된다.
김문기의 측근과 비측근 교수가 누군지 누가 김문기 복귀를 위해 뛰는지 학ㄴ내 구서어우원들이 둘로 쪼개진 상황ㅇ에 직면한다. 학생들의 선택은 두가지 정도로 나뉜다. 학내 갈등에 애써 무관심한 채 4년을 채우고 졸업하거나 갈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김문기가 돌아온 지난해 윤명식은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윤씨는 김문기 퇴진 운동을 벌였고 총학생회 간부 4명은 학교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지난해12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5월 윤씨가 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무기정학 취소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 작년 9월인지 10월인지 학교에 오니 김문기 반대 농성장 천막이 다 부서졌어요. 직원들이 부순 거죠, 부총장이 지나가길래 ` 왜부수었냐 `고 항의를 했어요 그러자 저보고 ` 개새끼` 하고 해서 화가 나 따졌습니다. 빰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9월 말에 학생회 차원에서 `인성교육` 거부를 결정했고 이를 알리려 총장실을 찾아갔습니다. 김문기 총장이 있다고 해서 본관2층 회의실에 가는데 갑자기 회의실 방문이 열리더니 최아무개 인문사학과학 대학장이 제 뺨을 때렸어요. 저희과 교수님이셨죠. 최 교수가 20만원을 인문사회과학대 교학부장에게 맡겼다고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한겨레 3면
한겨레 4면에 이어짐
받질않자 제 어머니에게 찾아가 또 20만원을 내밀더랍니다.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어요."
김문기를 반대하는 총학생회는 늘 압력 또는 회유를 받아야 했다.
김문기 복귀 운동을 하라는 협박을 받은 총학생회 간부가 양심선언을 한 뒤 일신상의 안전을 이유로 숙박시설을 전전하기도 했따. 2008년 7월15일 김명식 총학생회장이 김문기 측근 ㄴ 씨로 부터 매수와 협박을 받았다며 녹취록을 공개했다. " 나랑 장난하냐? 너희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근데 지금과 같이 이런 형태로 가면 설립자님(김문기) 복귀하시고 교수들 고소 고발 할때 너네 같이 넣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총학생회 다시 뽑아도 돼 , 내가 너희랑 같이 살자고 얼마나 너희들에게 얘기를 했어." 녹취록에서 이 발언을 한 측근 ㄴ 씨는 지난해 김문기가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 함녀서 총무부장으로 채용됐다.
88학번 방정균 교수의 기억
" 혹자는 말합니다 여생 말년을 조용히 살지 왜 풍파를 일으키는가. 이젠 힘들만도 하지 않은가. 또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솟아나오는가. 놀라다." ( 자서전 상지정신 82쪽)
한의대 1기생으로 88학번인 방정균 교수는 지난해 7월9일 파명됐다.
학교가 내세운 이유는 학생지원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학생 지도비 70만원을 부당 사용한 것 등이다. 그러나 소명 절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방 교수가 입학한 1988년 당시 상지대는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 등록금 납입 전에 보통 장학금을 주잖아요.. 그런데 우리 학교만 학기 말에 줘요. 이자 수익을 좀 더 내기 위해서. 실습이 이뤄져야 하는데 받은 실습이 없어요. 의대는 예과2학년부터 해부학 조직학 실습이 있어야 하는 데 카데바( 해부실습용 시신) 도 현미경도 없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봐야 하는데 없어요. 교양서적도 없어요. 나중에 언론 보도를 통해 봤는데 헌책을 무게 단위로 마구 사다가 꽂아놌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식당은 먹지 못할 정도였어요 김문기 의 친인척인 김아무개가 운영한 식당이었는데 지푸라기가 나오기도 했고 총학생회가 자치 식당을 만든다고 텐트를 세워놓으면 교직원들을 시켜서 부수었습니다."
학교는 김문기의 친인척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 사촌 동생인지 육촌인지 김아무개씨가 교무과장을 맡으며 모든 걸 좌우했습니다.
교무과장이 ` 전체 교수회의열어` 하면 열렸습니다. 경리도 실권자였고요, 김문기 사위가 교수를 때린 적도 있습니다. 김대식 교수협의회 대표가 학내 민주화투쟁을 열심히 했는데 시내에서 김문기 사위가 주먹으로 때려 코뼈를 주저앉혔어요 결국 고소는 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6년 10월 전두환 정부 치하의 엄혹하던 시절 학내 비리를 규탄하던 120여명의 학생이 북한 추종자로 조작된 이른바 용공조작 사건이 벌어졌다. 의문의 사건에 학생들의 분노가 더해져 매년10월마다 용공조작사건을 규명하라는 외침이 학교에 울려 퍼졌다. 사건의 발단은 1986년 7월26일 (경향신문) 사회면 기사였다. " 지난해 말 실시된 문 교부 감사 자료에 따르면 사립대인 강원도 ㅇ시 ㅅ대의 경우 지난3월20개 학과 전임 및 시간강사를 채용하면서 행정학과 시간 강사를 지원한 신모(30)씨 등3명에게 1000만원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2명은 1000만원을 내고 시간 강사에 채용됐으나 신씨는 이를 거절해 채용에서 제외됐다.( 줄임) ㅅ대는 지난해 문교부에서 시간강사 채용률이 전체 교수진의 45%가 넘어 감사에서 지적받자 일부 시간강사를 전임으로 대체하고 빈자리 시간강사를 채용하면서 이 같은 거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은 1986년 9월부터 약40일간 총장실을 점거하고 `교수프리미엄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경제학과 박정원 교수가 그해 10월14일을 떠올렸다. " 학생들이 점거 농성중인 대학에서 교수들보고 집에 가지말고 연구실에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다시 대기하라기에 삼삼오오 모여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학생들이 농성중인 총장실 1층 바닥에 종이 뭉텅이가 뿌려진 걸 수거 했다고 ` 가자~ 북의 낙원으로` ` 전두환은 김일성 수령님과 타협하여 즉각 통일하라` 고 쓰인 종이였어요. 학생들이 2층에서 농성중인데 1층에 발견된 것이니 학생들이 유인물의 범인이라고 경찰이 와서 학생 120여명이 다 잡혀갔어요. 조사를 받는데 혐의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풀려났어요. 당시( 동아일보)에서 그 유인물이 교무처 복사기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까지 보도 되고 끝난 겁니다."
용공조작 사건은 한 교직원의 뒤늦은 양심고백으로 의문이 풀렸다.
경영학과 89학번 홍석진씨는 끊임없이 용공조작 사건을 파헤쳤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건 기록을 갖고 있다는 한 동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홍석진씨는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동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문이 상지대에 퍼지면서 곧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압박감을 받은 탓인지 교직원 김아무개씨가 1986년 북한 관련 유인물을 작성하고 뿌렸다는 양심선언을 한다... 중략
원주 박유리 기자 / 10월17일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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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 2014년8월14일 총장으로 돌아왔다...
김문기를 반대하는 교수. 직원. 학생들은 파면 . 해임. 무기정학
집회장소 해방뜰에 화단이 만들어지고..
상지대 설립자 원홍묵 흉상 철거..김문기 설립자변경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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