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의미론적 조작으로
인간의 결함이나 불운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기려는 시도들에 대해 공감할 수는 있지만,
거짓인 그 그늘은 바로 왜곡이다.
1960년대에, '해체주의'의 궤변은 정신과의사 토머스사츠의 저작과 같은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예시되었는데,
사츠는 자신이 쓴 책에서 '정신 질환'으로 지칭되는 의학적 상태를 '신화'로 부름으로써
그것을 믿지 못할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의미론적으로 하나의 용어는 그것의 의미로 정의된 것(즉, 레스 인테르나)만을 의미할 뿐이지만,
해체주의가 재정의를 하는 가운데 간과한 것은
어떤 용어는 검증 가능한 사실들(레스 엑스테르나)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정신 질환이 단지 의미론적 '신화'일 뿐인 척하는 것은 재앙이었다.
임상에서 정신분열증, 우울증, ADD(주의력 결핍장애), ADHD,조증 간질, 혹은 순환형 양극성 장애라는 이름바 '신화'들은
정신약물 치료를 통해 급속히 사라진다. 투약을 중단하면 증상은 재발된다.
역사상 모든 문화에서 존재해온 임상적 상태가 단지 '신화'일 뿐이라면 ,
그런 증상들은 투약으로 인해 나타나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ADHA는 아이가 만 3세 이전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과 관계있다.
텔레비전 시청은 회로의 뉴런 연결과정을 저해하는 것 외에도 유전적 손상을 일으킨다.)
해체주의는 확증 가능한 레스 엑스테르나는 물론 경험적 실상(즉, 역사,, 유대인 대학살 등)을 부정하고,
그럼으로써 우회적으로 그 자체의 전제를 부정(변증법적, 즉 수준들을 뒤섞는 오류)한다는 점에서 본래 허무주의적이다.
의미는 구조와 정의에서 도출되며, 그러한 것 없이는 사회는 퇴화하고 무정형적으로 되고,
삶은 무의미한 관능의 추구가 된다.
지적, 도덕적, 혹은 윤리적 구조와 규율이 없는 사회는
해체주의적 상대주의의 약속이 암시하는 대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 내정 혼란, 행동적 유치증으로의 타락을 통해 붕괴한다.
해체론 전체가 '~척하는' 아이들의 놀이다.
해체론의 부조리함은 《이코노미스트》 같은 안정된 간행물에 그것을 적용하려는 미숙한 시도들을 통해 예시되는데,
《이코노미스트》에선 그러한 시도를
'자본주의적 성차별주의자 돼지들(CapitalisticSexist Pigs)'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풍자한 바 있다 (2004년,12월18일자)
일정한 인간 조건들이 무지한 이들로 인해 오명을 덮어쓰고 있다.
치료법은 그러한 조건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언어적 구조물에 불과한 척하기보다는
무지한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 ~ 척 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더 이상 구별되거나 명명되지 않으면
그냥 사라질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이 병원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감옥에 들어가거나, 약을 먹고 자살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대안적 생활양식'이라는 꼬리표로 바꿔 단다고 해서 그러한 인간 조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요즘의 정치적 완곡어법은, 투사된 자기애인 왜곡된 지각(즉 '민감한')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실상을 부정한다.
한계나 장애는 교육과 향상의 초점이 될 필요가 있는데,
교육과 향상은 , 단순한 신경성 장애는 아이가 '미래에서 나온 앞선 존재'임을 가리킨다는 등의
동화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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