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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묵상글 들 ( 부활 제2주일-사랑의 단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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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제2주일-사랑의 단계
부활 제2주일-2009년
그제 탈북자를 만났습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용인즉,
하나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데다
머물 집을 배정받지 못해서
구청 복지관 사무실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데
거처와 먹고 살 일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움받기 위한 말인 줄 알고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는데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혼자 살기에 믿는다고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신부, 수녀는 사기 치거나 사람을 이용해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신부, 수도자를 보면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애라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이 사랑의 단계가 있고
결혼을 하고 자기 새끼들밖에 모르는,
내리사랑의 단계가 있으며
나이를 더 먹어 부모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는,
치사랑의 단계가 있고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도 사랑하는,
형제적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편지에서 요한은 이 면에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로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 사랑의 단계에 올라가야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야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듯
사랑도 하느님 사랑의 높은 단계까지 올라 가야
하느님의 모든 자녀가 눈에 들어오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집부리고
자기 가족밖에 몰라 자기 것을 절대로 내놓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공동 소유로 내놓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같이 소유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같이 받들어
무엇을 하든 한뜻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형제들로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고
서로 옳다고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시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이 원하시고 빌어주시는 평화는
개인의 내적인 평화 뿐 아니라
우리 모두 화목하게 지내는 관계적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 즉
이 무소유와 평화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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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고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부활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평화입니다. 행복의 가장 올바른 정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완전한 자기실현의 결과이며 자기실현은 자기의 부족함을 먼저 깨닫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참된 마음의 평화는 자신을 진지하게 인식해 만나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서 마침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하게 하시는 유일한 존재인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얻을 때 가능합니다.
마음의 평화의 목표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는 언제 어디서 기도할 수 있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마음이 겸손할 때 마음의 평화가 있고 교만이 마음안에 들어오면 평화가 사라지게 되고 무엇보다도 분노와 질투심이 자라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남이 알지 못하도록 나의 잘못과 약점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도 마치 자신이 훌륭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를 지닐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평화를 찾는 길은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안에 이 세상을 초월하는 저 세상의 어떤 것이 들어 있음을 경험합니다. 내가 내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이 바로 나를 생기 있게 하는 그 본질적인 촉진제라는 사실을 느끼고 나면 다른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현대에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살아가는 원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어느 곳에나 빠짐없이 파고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절제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무절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껏 부풀려 올려서 과장을 드러내 보이고 마침내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만하게 되어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싸워 이겨낼 때 우리의 마음안에 평화가 찾아와 자리잡게 됩니다. 카시안은 내적인 평화을 얻기 위해서 9개의 욕망을 극복하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욕망과 싸워서 완전히 없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육적인 욕망이 영혼에 순응하여 참된 마음의 평화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욕망들은 욕구의 영역인 식욕, 성욕, 물욕과 정서의 영역인 슬픔, 분노, 의욕상실 그리고 정신의 영역인 명예욕, 시기심, 교만을 말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욕망의 제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한 하느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하며 성서의 말씀을 창과 방패로 삼아 자신을 유혹하는 세상의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에 대해 함께 나누며 주님께서 친히 평화 주시길 빕니다.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고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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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요한 20, 19-31(부활 2 주일)-자비주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는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처럼,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저희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 늘 더 저희를 믿으시오니,
저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갑니다.
저희를 희망하시는 당신의 희망이 조희에게서 이루어지소서.
저희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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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복음: 요한 20,19-31: 토마의 불신앙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주님의 육체는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 육체이다. 그러나 자기들 눈에 보이는 육체에 확신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잠긴 방으로 들어오신 몸을 만지도록 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영혼은 언제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지 않는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에 불과한 일이 되지 않도록 “직접 보고” 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분의 육체와 거기에 난 상처를 전부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있었다. 여기서 여드렛날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모이는 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토마스는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그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토마스가 스승의 육체에 난 상처를 만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의 불신은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 우리의 믿음은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자기 마음과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신 것은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방법을 부여하였다. 이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와 친교를 이루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라고 한다.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1요한 5,6)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부활팔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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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려고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양쯔강의 삼협이라는 곳을 지났습니다. 그곳을 지나면서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강기슭에 대자 어미 원숭이가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지만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답니다. 병사들이 하도 이상하여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창자가 끊어질 만큼 자식을 잃은 슬픔이 컸던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성경에서는 ‘가엾이 여기다’로 자주 표현됩니다. ‘가엾이 여기다’는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오장육부, 곧 창자 등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애끊는 마음’, ‘단장의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살피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입니다(루카 10,33 참조). 또 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에서,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굶어 죽게 되어 힘없이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한숨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루카 15,20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십니다. ……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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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복음(요한 20,19-31)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공동체에게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첫째 부분(19-23절)은 부활하신 날 아침,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가신다고 하신(요한 20,17) 예수님께서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마르 14,50)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마리아 막달레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데(요한 20,18), 부활하신지 여드레 뒤에 주간 첫날(“주님의 날”: 묵시 1,10) 저녁 때,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찬의 전례를 위해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사도 1,13; 루카 22,12)에 모인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가놓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1코린 15,5)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초자연적 특성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손과 피와 물이 나왔던 옆구리(요한 19,34)를 보여주셨다는데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살아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19)라고 하신 말씀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믿지 못할 일이라서 그런지, 제자들은 한 마디 말도 없고, 주님께서만 “평화가 너희와 함께”(유다인들의 인사)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요한 14,27)를 주시는 것이며, “평화의 군왕”(이사 9,5; 미카 5,4)이시며 승리한 메시아께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뚯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요한 13,20) 성령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자기를 빚으시고 활동하는 영혼을 불어넣으셨으며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분”(지혜 15,11)께서 제자들을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신 것이며(요한 3,3-8),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해주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요한 14,26). 또한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라는 뜻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요한 17,17-18).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3; 1요한 3,2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라고 하셨듯이, 즉시 죄의 용서를 명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지라도(요한 15,18-25) 진리를 실천하며(요한 3,19-21),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지 말고(요한 12,42-43), 거짓의 아비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요한 8,44).
둘째 부분(24-2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찾아오셨을 때 10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엉뚱한 토마스(요한 11,16; 14,4-5)의 이야기입니다. 토마스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다.”라는 동료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활하신 분을 직접 뵙고 못 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는 것과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또 다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십니다. 부활하신 분을 뵙고서야 “주님”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께 대한 불신을 지적하신 것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증언에 대한 신뢰심을 키울 것을 강조하십니다(요한 17,20). 비록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보지 않고 믿는 이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위로해주십니다.
셋째 부분(30-31절)은 요한복음의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분을 믿지 않았던 유다인들의 불신(요한 12,37)을 강조하면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성경을 기록했음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 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요한 7,31)고 했습니다. 그 많은 표징보다 더 확실한 표징, 즉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정도의 표징 이외에도 많은 표징이 있었으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사도 4,32-35)는 초기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데 있어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늘 꿈꾸던 이상적인 친교의 공동체(신명 15,1-11),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여들어 이룬(요한 12,32)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감동한 이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룬 형제애(사도 2,43-45)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이 땅과 집을 팔아서 받은 돈을 공동으로 소유했다고 하는데, 땅과 집을 팔은 돈만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종말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겪게 될 박해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사도 4,32-5,11).
제2독서(1요한 5,1-6)는 믿음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는 분은 사랑이신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의 사랑이신 성령을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들인 이웃도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를 닮게 하고, 늘 함께 있도록 하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게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을 지키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꾸로 생각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반드시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믿음이 있다면 사랑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 역시 세상을 이겨낸 사람이며, 끊임없이 세상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이겨내셨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역시 믿음과 사랑의 승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고 하셨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쁨에 젖은 공동체는 그분께서 주신 평화의 선물과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기쁨의 공동체, 주님과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단순하게 한 개인의 사건만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믿음에 대한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엉뚱했던 토마스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볼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성령이시고, 보이는 죽음보다 훨씬 강한 승리, 즉 보이지 않는 사랑이십니다(아가 8,6).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8-9)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로 가능한 것입니다(부활2주일은 자비주일).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쓸모없는 돌이라고 내버렸던 예수님을 놀랍게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으므로 우리는 자비하신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편 11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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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신앙입니다. 불교, 유교는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진리를 찾으라고 합니다. 이를 자연종교라고 합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 욕구를 만족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계시종교입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계시종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계시는 3가지 차원으로 드러납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 양심을 통해서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고, 옳고 그름을 알고, 겸손함을 알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합니다.
두 번째는 예언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을 주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유를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만, 자유를 통해서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져 고통과 슬픔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시면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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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예수님 사랑, 공동체 사랑, 주님의 전사 -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도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 모두 자비로운 되라는 것입니다.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평생공부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참 절박한 물음이요 제 고뇌의 산물입니다. 답답할 때는 이렇게 묻고 말씀에서 간절히 답을 찾아 봅니다. 요즘 나라 사정이 참 어렵습니다. 말그대로 내우외환입니다. 사실 늘 그래왔습니다. 정말 밖의 적이 아니라 안의 적이 문제입니다. 나라든 공동체든 개인이든 거의 대부분 밖의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안의 분열이나 부패로 망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수녀님이 무심코 던진 화두같은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램일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우선 내가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참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말입니다. 정말 요즘같은 어지럽고 빠르게 변하는 혼란한 세상에서는 참 사람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세속에 오염 중독 변질되어 괴물이, 폐인이, 광인이 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물음은 “어떻게 참사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평생공부요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한다면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알아가는 공부요 더불어 예수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면서 참 내가 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 되고 중심이자 의미가 되는 분입니다. 영원한 참 사람의 모델이 바로 이런 예수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벽은, 닫힌 문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 마음의 벽은 활짝 열린 문으로 바뀌며 참 좋은 선물인 평화가, 그리고 기쁨이 선사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토마스는 감격에 넘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을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토마스는 보고 믿었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더 나아가 하느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례성사의 물과 성체성사의 피로 이미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된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하여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살게 하며,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聖化시킵니다.
둘째,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구체적으로 내 몸담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체를,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의 몸이고 형제자매들은 그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이요 신원의식도 정체성도 잃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품같은 배경의 공동체에 감사해야 하고 이런 공동체 건설에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무아無我의 집’을 에워싸고 있는 품같은 배경의 태령산 기슭,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생각난 글입니다.
“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크고 깊고 고요한 배경의 품, 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며, 단번에 완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합력하여 완성을 향해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순례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 가득한 이상적 유토피아의 선물 공동체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 공동체인지 그대로 인용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말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공동체, 아가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여기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존재가 공산주의입니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자발적 사랑의 유토피아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사도행전 공동체입니다. 그대로 무상복지, 보편복지가 실현된 모습이요, 국가공동체가, 인류공동체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늘나라 유토피아 공동체는 세상에 닫힌 폐쇠적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린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세상의 누룩같은 공동체입니다.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사막에 활짝 열린 이상적인 유토피아 하늘나라 수도공동체를 염원하며 쓴 고백의 글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셋째, 주님의 전사(戰士)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그대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자도생의 전쟁터입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의 끊임없는 전쟁상태입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주고 받는 언행은 얼마나 험악하고 분노와 증오에 차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기도의 전사, 말씀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우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전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와 훈련에 전념해야 합니다. 사실 내적 부패와 분열로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결코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음 말씀대로 세상에 주님의 전사로, 일꾼으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신 후 당신 평화의 전사, 성령의 전사, 용서의 전사로 세상 삶의 제자리로 파견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은 분명해졌습니다.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결같이, 항구히, 열렬히 1.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3.주님의 전사戰士로, 용사勇士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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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8년 4월 8일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일주일 동안 부활 팔부 축일 미사의 복음은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주제였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어떻게 여인들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데 정작 가장 이해를 잘 할 것 같았던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주님 부활 후의 마리아와 토마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과 함께 주어지는 큰 주제입니다.
주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마리아는 무덤에서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슬퍼서 울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라고 했을 때 부활의 기쁨보다는 ‘그럴 리가 있겠어?’하는 의심과 함께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5)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시체에서 떠나지 못하고 토마는 주님의 상처에 난 못 자국을 떠나지 못합니다.
스승께서는 이미 부활하셨는데도 그 둘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을 뵈러 왔을 때도 주님이 ‘어떤 분인신가?’가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고향이 ‘어디인가?’ 주님께서 ‘어디에 묵으시는가?’ 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정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토마도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 정답게 토마를 바라보시며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울고 있는 마리아를 바라보시며 ‘마리아야’(요한 20,16)하고 부르신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의 출신고향,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숙소? 아니면 주님의 무덤, 주님 상처의 못자국과 옆구리 상처? 아니지요.
우리는 예수님과 관련 있는 것에서 서성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힘드네요.
이론은 쉬운데 우리의 삶을 둘러보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부활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마리아라는 여인과 토마스 제자에게 주님께서는 바라보시며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사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핵심인 것입니다.
초대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2-33)
이렇게 교우들은 서로 나눔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저자도 부활을 향한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1요한 5,5-6)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수난과 죽음이 있었다.’
주님 부활이 제자들과 함께 했던 이들에게 늦게서야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특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오로 말씀대로 미래의 언젠가는 부활의 주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그렇지요, 이 세상 베일이 사라지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주님 부활과 함께 누릴 수 있겠지요.
그래도 불확실한 세상에 있는 우리는 완전한 부활이 아니겠지만 항상 주님을
굳게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는 희망이며 믿음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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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신학생 때까지 저 자신을 올빼미형 인간이라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면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고, 아침에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면서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형 인간은 절대로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신부가 된 후, 어느 교육에 참석해서 새벽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소중함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자명종 시계 몇 개를 머리맡에 두고서 억지로라도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현재, 아무리 전날에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5시 전에는 일어납니다. 20년 이상을 이렇게 변함없이 살았기에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지금껏 우리가 꾸준히 해왔던 어떤 행동에는 습관이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듀크 대학교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 행동 중 40%는 의사결정이 아니라 습관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좋은 습관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담배를 몇십 년 동안 펴오셨다는 분이 어느 날 보니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 몇 달 동안 계속해서 피우지 않다 보니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려야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된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잘못된 습관으로 주님과 가까워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잘못된 습관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했습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믿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는 부활의 표징을 미리 보여주셨고, 공생활 중에 당신의 부활을 자주 언급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다.”라는 단정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토마스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상황은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닐까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몸과 마음을 느끼면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나의 좋은 습관이 되어서 더욱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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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외롭게 살지, 둘이 괴롭게 살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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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어떤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머니의 눈높이가 너무 높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어 가끔 선을 보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반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안 좋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인물이 별로다….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시는데, 도저히 어머니의 마음을 채울만한 자신의 아내는 세상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전에 이런 말씀을 제게 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욕심 없어요. 그냥 보통 사람이면 돼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좋아하기만 하면 되지요.”
정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통 사람의 기준이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욕심이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만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보통이라고 내세운 조건은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자기 기준이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기준은 내게만 너그럽고 남에게만 엄격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기준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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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키엣대주교님. 성령의 두드림
숨은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성령과 용서…세상의 물질과 욕망의 노예가 된 나약한 인간의 영혼은 점점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어둠 속의 영혼에 자유와 해방의 구세주이신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용서는 성령의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자신과 타인을 용서한 사람만이 진정한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맞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폴 클로델은 성령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느 폭풍우 치는 외롭고 쓸쓸한 밤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아니라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저 아래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잊혀진 낡은 문을 누군가 두드리고 있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그분께서 오셨을까? 한번만 두드리고 가실수도 있기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낡고 닫혀있는 문을 열러가는데 너무 오래 닫아놓고 잊혀진 문이라 열쇠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부끄럽습니다. 어떻게해야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열쇠구멍에 기름칠을 하는데 바로 그때 바람과 함께 무형의 그분께서 들어오셨다. 그런데 불안하고 두렵다.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나의 어둠 속까지 보시는 성령의 주님, 제발 저의 마음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두렵습니다.
그동안 알지못했습니다. 당신께서 수도 없이 많이 나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알지 못했다는 것을요. 그럼에도 당신께서는 내가 잘 들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시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심지어는 꽉 닫힌 문을 밀고 들어오시려 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옆에 계시기 위해서.
"오, 하느님,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께서 세게 두드리시면 당신과 저희 마음도 아프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낡은 문은 바람조차 들어올수 없게 꽉 닫아버려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진실을 가리는 문은 자신과 타인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로막고 권력과 명예의 욕망에 갇히게 합니다. 문 뒤에 원망과 분노, 탐욕과 불공정의 재산들이 차곡 차곡쌓이고 있습니다. 이제 문이 넘어질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그 무게를 버티느라 문도 지쳐가고 있습니다.
오늘, 성령께서 그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기가 두렵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나의 어두운 진실을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워마십시오.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여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성령께서는 감춰둔 어둠을 밝혀주시고 건강하고 정의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을 환기시켜주실 것입니다. 영혼을 옭아매던 사슬을 끊어주시어 온전한 자유와 가치를 주실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은 더욱 더 발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 안에서 나와 타인을 진실로 용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령께서 나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2. 꼭 닫은 문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3. 닫힌 문을 활짝열어 성령을 맞이합시다. 그리고 나와 이웃을 진실로 용서하는 삶을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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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정직한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벌거숭이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주님을 잃고 너무 힘들고 절망스러운 상태인데 무슨 소리 하는 것이냐? 하는 하소연이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 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내 안에 갇혀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들에 앞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 합니다. 어째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 합리적인 의심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믿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더 큰 은혜가 다가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완성을 이루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눈높이로 다가오셔서 당신 손에 맞는 도구로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말은 잘 못하거나 얼굴은 못 생겼는데 말은 잘하면‘천만다행’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는데 말도 잘 못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 베스트 거짓말
1. 자리 양보 받은 어르신 ; 에구…괜찮은데.. ; 양보 안 하면 속으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2. 정치인 ;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3. 옷가게 ;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맞춤옷 같아요. 얼굴이 뭔 상관있어 매상만 올리면 되지!
4. 음주운전자 ; 딱 한잔 밖에 안 마셨어요. 잔의 크기가 문제지….
5. 친구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조금 있으면 온 동네 다
소문나요!
*** 정직합시다.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에게!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2주일에 폴란드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외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를 보면 자비의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 때에 방에 있었는데,
그때 흰옷을 입으신 주님을 보았다.
한 손은 가슴에 얹으셨고
한 손은 축복하시려는 듯이 들고 계셨다.
가슴에는 두 줄기의 빛이 뿜어 나왔는데
하나는 붉은 빛이었고 하나는 엷은 빛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님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은 두려움에 떨렸지만 큰 기쁨에 넘쳤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네가 본대로 성화를 그려라.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 의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넣어라.
나는 이 성화가 먼저 네가 있는 성당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공경 받기를 바란다...
나는 이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을 멸망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지금 이 상에서부터, 특히 임종 때에 적에게 승리하도록 약속하겠다. 나는 이 성화를 내 영광으로서 지킬 것이다.”
영적 지도신부의 요청에 의하여,
파우스티나 수녀는 주님께 성화에 나타난 빛의 의미를 물었다.
다음은 파우스티나가 들은 대답이었다.
“두 빛줄기는 피와 물을 상징한다.
빛이 엷은 빛줄기는 영혼을 의롭게 하는 물을 가리키고,
붉은 빛줄기는 영혼의 생명인 피를 가리킨다...
이 두 빛줄기는 십자가에서 창으로 내 심장을 열었을 때,
내 깊은 자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이 빛줄기는 영혼들을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이 보호 속에 사는 사람은 해복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정의로운 손길도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후에 로마 군사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흘러나온 “피와 물”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로부터 깊은 자비가 흘러 나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진리를 하느님 자비의 사도’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폴란드) 수녀께 밝히시고 그분 성심에서 분출된 빛줄기가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영혼들을 보호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자비심 축일을 제정하여 모든 영혼들,
특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피난처와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이날 나의 깊은 자비심의 심연이 열린다. 나의 자비심의 샘으로 가까이 오는 영혼들에게 은총의 바다를 쏟아주겠다”고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반열에 올리고 예수부활대축일 다음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이로써 기아와 빈곤과 분쟁과 폭력에 시달리는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 한없는 그분의 ‘자비’뿐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많은 환시와 예언, 그 외에 영적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녀가 체험한 가장 강렬한 환시는 1931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이 환시에서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심 근처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내밀어 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예수 성심에서는 붉은 색과 흰 색의 두 갈래 빛이 나왔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 신심의 이름은 ‘하느님 자비’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체험을 기념하고 아울러 그 그림을 보고 공경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여러 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영적인 지도와 기도의 은총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성녀 파우스티나가 직접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으며, 그 일기는 오늘날 “내 영혼 속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in My Sou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에 기록된 성녀의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둘째, 특히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심 실천을 통해,
온 세상과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 자비의 사도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심 운동의 목표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폐결핵을 비롯한 수많은 고통들을,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던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는 크라쿠프(Krakow)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의 시신은 크라쿠프 라기에프니키(Krakow-Lagiewniki)의 하느님의 자비 묘지(Shrine of Divine Mercy)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일 새 천년기에 처음으로 시성되었다.-가톨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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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토마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서 숨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평화가 하나도 없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박해 받는 것도 두려워했고, 죽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참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곧 평화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4-25).”
다른 제자들은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뵈었다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가 한 말은,
“당신들이 본 것을 ‘나도’ 그대로 보고 싶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토마스 사도가 한 말은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해석할 사람도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을(26절-27절) 생각하면,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믿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일은,
토마스 사도의 간절한 희망에 응답해 주신 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6-29).”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안 믿는(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했을 때, 표징을 보여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예수님의 말씀은,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표징을 보여 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서 믿는 일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표징이나 기적을 보아도 안 믿고,
믿고 싶어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표징과 상관없이 믿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일은, 토마스 사도가 간절하게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인데,
“증거가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다음에만’ 믿으려고 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 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데,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말을 한 것은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
(이 신앙은 요한복음서의 주제이고, 우리 교회의 기본 교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어떻게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즉흥적인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최초의 인물로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못 믿고 있다가
직접 본 다음에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신앙인들은 모두,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의 교회는 증언에서 증언으로,
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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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 주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태초에 하느님에게서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명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이 앙심이나 복수심, 미움이나 증오에서 그 사명을 시작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고 제자들의 생명마저 위협하는 무리들에 대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원망, 적대감을 갖지 않도록 그들 마음에 사랑의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둠의 세력의 하수인이 된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까지 품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러 오신 게 아니시지요. 그분은 사랑에 사랑을 더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이 드러내 보여 주신 사랑의 상처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용서 또한 마찬가지로 주님의 증거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하필 예수님이 오셨던 자리에 부재했던 토마스는 예수님을 만나 들떠 있던 동료들에게 '그분 상처를 확인하고야 믿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지요.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수고로이 다시 나타나시길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기싸움이 아니라 포용이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러한 분을 어찌 믿지 않겠으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의 고백은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모든 이의 고백입니다. 사랑의 상처와 용서, 자비야말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돌보며 가진 바를 나누고 함께 살아갑니다. 누구도 가진 게 넘쳐 사치와 향락으로 제 영혼을 좀먹지 않고, 누구도 가진 게 없어 굶주리거나 움츠리지 않는 세상, 어쩌면 하느님의 숨을 받은 이들이 보여 주는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일 겁니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
모두가 하느님 숨을 받은 그분 모상성을 살아가면 모두가 은총을 누리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며, 모두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피터 모린)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념이나 시스템에 의존할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가능한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 자녀인 우리 형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로울 때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이신 당신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형제들이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나눔과 기꺼운 희사로써 형제가 지고 있는 물질적 부채를 덜어 주고, 용서로써 마음의 부채 또한 가볍게 해 그를 풀어 줍니다. 그로써 우리도 하느님께 지고 있는 영혼의 빚을 탕감받지요. 꼭 그걸 바라고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지만, 하느님은 기억하십니다. 당신의 또 다른 자녀에게 베푼 형제적 사랑을 그분은 결코 잊으실 수 없습니다. 이 구체적 자비와 사랑은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 은총의 호환으로 "모두가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우리 삶에서 베풀어 주신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용서와 자비, 사랑이 절실한 형제들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 손 내미는 은총의 전파자가 되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 안에 충만한 사랑과 자비를 보고, 우리의 형제들이 주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데 그만한 것은 없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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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스는 자기 눈으로 직접보고,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8)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가지의 표지들이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너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되는 사람입니다.
부활 제2주일인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자비의 해에 반포한
'자비의 얼굴'이라는 칙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1항)
"우리는 언제나 자비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2항)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어떠한 죄보다도 더 크므로 그 누구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3항)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6항)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13항)
"모든 고해 사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이 신자들을 대해야 합니다."(17항)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21항)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들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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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
당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는데, 또 제자들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러 다닌다면 이는 분명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다녔다면 이는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음을 보여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없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용서해주는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한 것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하나가 되어 여드레 뒤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된 이후로는 따로 그러한 권한을 받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과 자비를 베풂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황송함과 기쁨에 놓아주고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그 용서하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발견합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이러한 용서의 모범은 수없이 많지만 개신교 한 집사님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 교회 이모 집사님은 직장 전도훈련(BBS)을 열심히 합니다.
그 BBS 동료인 A라고 하는 어느 집사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A집사님은 어느 날 직장 회식 자리에서, 자꾸 권하는 술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계속 거절하다
급기야 화가 난 직장 상급자에게 뺨을 맞게 되었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연배도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분하겠습니까?
집에 와 며칠 동안 회사도 무단결근하며, 분을 삭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려고 결심하고, 사표를 내기 전
산으로 올라가 기도드렸답니다.
뺨 맞은 서러운 생각, 분한 마음, 막상 직장을 그만두려니 막막한 두려움 등으로 간절히 하느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 뜻밖의 음성을 들으셨답니다.
‘너는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으로 그렇게 분해하고 억울해하느냐?
나는 모든 이에게 멸시 천대와 고난을 받았고,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저주와 욕설, 살을 찢는 채찍으로 맞으시면서, 아무런 자존심도, 혈기도, 변명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길을 오르셨던 우리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조롱하던 그 무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아닙니까?
뺨 한 대 맞은 것을 어찌 고난이라고 분해하고, 직장까지 그만두려 했을까?
A집사님은 그 신비한 음성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눈물로 회개하셨답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다음날 직장으로 출근하였습니다.
며칠 간의 무단결근 후 출근한 회사에서는 그 며칠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뺨을 때린 상급자가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징계를 받을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상급자가 회사에서 처리했던 여러 일이 문제가 되었고, 그중에 A집사님의 뺨을 때린 사건도 있었던 것입니다.
A집사님은 자신의 뺨을 때린 그분을 두둔하며, 그분의 구명을 위해 힘썼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A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도우니 결국 회사에서 내리려던 징계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그 상급자는 A집사님의 ‘이해하지 못할’ 관용과 사랑에 감동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지금은 직장 선교회의 한 지부의 leader(지도자)가 되어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술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바로 그 사람이 말입니다.
[출처: ‘뺨 맞고 용서하신 집사님’, 다음 카페, ‘주님 오실 때까지’]
비록 개신교 신자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현실과 매우 밀접하여 예화로 선택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크고 작은 용서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상처에서 나오는 성령을 주시며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십니다.
그 용서의 힘이 전교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에 미움을 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직접 우리 안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내가 너를 용서하기 위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참아주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나에게 그만큼 고통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힘이 모이면 교회에 더 많은 신자가 모이는 선교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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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일]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장 28절)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혹은 두세번 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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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강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하느님조차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상처는
간절한
사랑이다.
간절함이
간절함을
치유한다.
상처가
사랑이 된다.
하느님
사랑이
닿는 곳은
우리의
상처이다.
하느님 사랑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십자가의
상처를
만나는
은총의
부활이다.
십자가의
상처가
우리의
길이 된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못자국의
상처에서
주님 사랑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상처에서
가슴 뛰는
고백을 다시
만난다.
상처를
들여다볼
용기를 청한다.
십자가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못된 상처가
아니라
고마운 상처가
된다.
십자가의
간절한
사랑의 상처가
참으로 많은
이들을
변화시킨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길이 열린다.
공동체는
서로의
간절한
상처를
싸매주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상처에서
치유가
상처에서
부활은
더욱 뜨겁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사랑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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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하느님 자비주일에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며....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자비주일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부활 제2주일에 제정하시어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함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 외아들의 생명을 제물로 잡아서 그 희생의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549항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불행을 없애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천명합니다. 또한 651항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확인해 주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위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가톨릭 교리는 표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맞는 부활주일에 부활과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것도 의미 있게 주일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자비의 히브리어 원어적인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생명을 보호하고 아끼는 마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한자를 파자로 풀이해본다면 흑암과 같은 허물을 가진 마음을 꾸짖는 마음과 찢어지는 아픈 마음을 가리켜 자비라고 합니다. 배속에 한 생명을 품는 과정을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열 달을 품으시면서 혹여나 생명이 어찌 될까 봐 노심초사하시며 품으시고 산고라는 고통까지 감내를 하시면서까지 품어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산고와 함께 따라오는 게 있습니다. 피흘림입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성경에도 나옵니다. 또한 우리가 보는 창세기에 나오는 화와도 주석상의 의미도 생명입니다.
화와의 범죄로 인해 출산이라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화와인 성모님을 선택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실 어머니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에페 1,4) 어머니께서는 두 번의 산고를 치르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셨을 때인 육신의 산고와 또 한 번은 마음의 산고인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부활을 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수반되는 극도의 고통이라고 봅니다.
어찌 보면 성모님도 또한 피해 아닌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거라는 놀라운 일을 감당하시면서까지 그것도 모자라 그렇게 얻은 아들을 십자가상에서 죽게 되는 것을 두눈으로 보시면서 아들을 가슴을 묻는 단장의 고통을 느끼시게 해 드린 데에는 우리의 죄도 한몫한 게 사실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의 역사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말하면 피눈물 나는 눈물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이와 같은 마음을 하느님께서도 똑같이 느끼셨을 겁니다. 하느님 아버지 속에 예수님이 거하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한몸이라 아들이 살아간 그 삶의 궤적을 따라 성부 하느님의 마음도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셨다는 것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모님 이 세 분이 겪으신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해 얼마든지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슴 찢어지는 단장의 고통과 같은 사랑인, 자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 분이 그 모든 어려움도 어머니의 산고와 같은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의 자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될 운명의 처지에 놓인 가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걸 구제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야말로 그건 천하에 배은망덕한 사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최상의 효도는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게 가장 기뻐하실 효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 복음과 맞추어서 묵상해본다면, 예수님과 함께하는 ‘평화와 함께’, 예수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거룩한 영인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남을 용서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입으로 맹세를 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된 이상 이 약속은 영원히 철회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사람과 한 약속은 어길 수 있어도 하느님과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약한 인간이라 흔들릴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고, 지키려는 중심만은 육비에 새겨서 그 은혜를 잊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소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말처럼 쉬운 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언제까지나 거듭 되풀이 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한걸음 한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뎌서 언젠가는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 올 수 있기를 학수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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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해 주심
⒈ 부활 제2주일인 오늘로써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합니다.
팔일 동안이나 경축해야 할 만큼 부활은 일년 중 가장 큰 축일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날인 오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니는 의미를 하느님의 자비로 조명합니다.
사실 예수 부활은 그분의 신비스러운 탄생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고도 참혹했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 귀하디 귀한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⒉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자신들 앞에 나타나시고 나서야 그분이 확실히 살아나셨음을
믿게 된 제자들은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당부하신 양성 취지대로 사도로 거듭 났습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예전의 불신과 의심, 비겁함과 소심함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
거룩한 깨달음과 슬기로운 언변으로 세상에 나섰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요 바오로의 제자인 루카는 예수님께서 직접 양성하신
직제자들이 이토록 놀라운 변화를 보인 모습을 두고 이러한 표현으로 증언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
⒊ 예수 부활의 은총은 사도들의 변화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평소 제자들의 언행을 잘 알고 있던 유다인들은 이 늦깎이 제자들이
보여준 놀라운 변화를 보고서는 자신들도 달라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즉,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할 정도로 변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공동 소유라는 놀라운 생활양식은 믿는 이들 안에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믿는 이들 바깥에 있던 가난한 이들과도 나누는 더 놀라운 행동양식으로까지 진화되었습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기 때문에”(사도 4,34-35), 나눌 마음과 나눌 돈은 충분했습니다.
⒋ 바로 이렇듯이, 예수 부활의 은총이 사도들의 변화를 거쳐 신자들의
공동체화에 이르는 놀라운 과정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방하려던 시도가 교회 역사상 여러 번 있었습니다.
광적일 만큼 열심했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는 않는,
자신들만의 폐쇄적 재산공유 집단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반사회적인 이단의 무리가 되기도 했고,
병적으로 이 모습을 흉내내고자 했던 자들은 말 그대로 공유주의자(共有主義者)가 되어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유혈혁명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에 관한
또 다른 보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이 신자들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할 정도로(사도 2,42) 성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발성과 개방적 나눔으로 건실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해 준 힘은 성령께서 내려 오셨고, 함께 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집전해 주는 성사를 배령함으로써
영적 기운을 충만히 받았으며 그리고 자신들도 성숙한 지향으로 바친 기도였던 것입니다.
⒌ 이렇듯 성령과 성사 그리고 기도로 공동체를 이룩한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범과,
이에 대한 역사적 시행착오들을 거쳐,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자비를 현대에 일깨워준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불린 폴란드의 파우스티나 수녀와 이를 알아보고 시복시성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2천 년이 흐르면서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이 갈수록 약화되어 가던 중에
파우스티나 수녀는 환시를 통해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했고 그분의 강생과 수난 그리고 부활에 담긴
하느님 자비의 뜻을 믿고 그분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임을
세상에 알리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적은 일기 ‘나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그 수녀의 사후에 교회 안에 알려지면서 자비 신심이 퍼지기 시작했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시성함으로써 그 신심을 공식화시켰습니다.
⒍ 토마스 사도는 창과 못에 찔린 상처 자국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었지만, 요한 사도는 그분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이 증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곧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상(像),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의 모습과 여정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⒐ 이 글을 소개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죄악의 소굴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벌하지 않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던 하느님의 자비가 떠올랐습니다.
그 먼먼 옛날에 잘 나가던 고조선, 고구려가 왜 망했는지, 그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던 고려는
또 왜 조선에 망했는지, 더군다나 조선은 왜 일본에게 망했는지가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누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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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 제2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2,42-47)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전념하였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 (proskarteruntes)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는 '힘입게 집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완료 과거 동사 '에산'(esan)과 서로 관련되어 쓰여서 계속하여 힘썼음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는 뜻이다.
원문에서 '에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esan de proskarteruntes)가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제일 앞에 쓰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기도하는 일' 네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 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에 해당하는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te didache ton apostollon; to the teaching of the apostles)에서 '사도들'은 복수형이고,'가르침'(디다케)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열두 사도 모두가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 그분의 생애와 구원 사업, 즉 복음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내용(마태28,20)과 예수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한다 (사도3,15; 4,10; 1코린15,1~4).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1테살4,1.2)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이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고 교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원문은 '카이 테 코이노니아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kai te koinonia te kllasei tu artu)인데, 초대 교회의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도들의 친교'(to the communal life)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친교'는 정신적인 친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친교이기도 하다.
'친교'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는 신약 성경에서 '사귀다'(2코린6,14)로 번역되거나 '헌금'의 의미로 '동정하다','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다'(로마15,26)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성도들은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빵을 떼어 나누고'
그 다음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찬'이다.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고'에 해당하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fractio panis; to the breaking of bread)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아가페 형식의 기본적인 식사를 하고, 그 다음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의 의식을 하였다.
먼저 아가페 형식의 식사를 한 것은 공동체의 형제들 가운데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라는 표현은 성찬의 전례의식, 곧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마태26,26; 마르코14,22; 루카22,19; 1코린11,23.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 즉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기도하는 일에'
원문은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kai tais proseuchais; and to the prayers)인데,초대 교회의 네번째 특징은 '기도'였다.
초대 교회가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에 따라(마태7,7; 26,41; 루카18,1; 요한16,24)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데서 잘 보여준다(사도4,24; 12,5.12; 21,5).
부활 제2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평화는 사람의 열심히 아닌 하늘의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20,19-23)
19ㄱ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미사를 못 드린다고, 성체를 못 모신다고 불안해하는 이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 그 말씀이 내안에 계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영이 내안에 사시는데 왜? 내 종교행위에 의존하려 하는지~ 그 모든 행위의 실체가 말씀입니다.
(요한1,1.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말씀 안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타의 사랑, 그 사랑의 빛, 그 영광을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내 죄를 대속하신 사랑,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하느님 약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그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은 모른체 기념일, 축일 등 각종 행사로, 그 섬김의 행위로 바쁘기만 했기에~ 그 행위를 못하니 불안한 겁니다.
나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생활은 하면서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그 모든 약속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그 약속의 말씀은 모르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19ㄴ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주시는~ 용서, 자유, 그 쉼, 그 안식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신 일입니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 두 손과 옆구리의 피로 받은 용서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겨주신 피 입니다.
(히브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신 죽음이라는 것을 믿었을 때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묵시7,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늘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늘의 평화를 전하는 것,(주는 것)~ 예수님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처럼 핍박이 따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실상은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진리로 의지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의 신앙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 그 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마음속 두려움을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믿는 것이 아닌 믿는 척하는 신앙을 사는 겁니다.(내가 그랬습니다.)
(1코린1,21-23)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으로 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성령의 이끄심으로요~~ 내가 먼저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으로 용서받았음을 믿었을 때,~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게 됩니다. 물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요~~~
십자가의 대속, 그 용서를 전하지 않으면 다른 이의 죄가 그대로 남게 됩니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성령의 법, 그 십자가의 복음을 의지하여 하늘의 안식, 그 평화를 사는 것입니다.
(이사54,10)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로마14,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 섬김의 종교행위로는 찾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구원의 약속을 찾았을 때 누리는 평화입니다.
아멘.-^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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