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군중 속에서 홀로 서는 신앙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앞의 기사에서 말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복음만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잘 받아들여지고 고맙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오직 믿음과 수용만을 요구하는 값싼 은혜와 칭의에 대한 편안한 진리를 선포하기를 주저할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복음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열매와 착한 행실을 요구하는 측면인데, 이것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이 성화는 순종과 모든 삶 가운데 그리스도와 같은 행실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성화가 행함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기에,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한 측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복음을 진리 그대로 꾸미지 않고 설교하면 조소와 거부 반응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곧바르게 설교하기를 겁내는 목사들이 있지 않는가? 그 목사들은 다른 충실한 주의 파수꾼들이 이러한 설교를 함으로써 율법주의적이고 정죄적이라는 공격을 당하는 것을 보고 위축되지 않았는가? 당신 자신의 관찰에 근거해서 이러한 질문에 당신은 답할 수 있으리라. 선지자 요나의 예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극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요나에게 할당된 임무는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갖 색깔의 종류의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들 앞에 서서 예수님께서 하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는 최후 통첩을 전하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대변자인 한 목사로서 나는 말할 때, 마약하는 이들과 술 중독자들과 매춘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죄지음을 당장 중단하라는 요구를 완화시키고 싶은 유혹을 아주 심하게 받을 때가 많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 그들로 하여금 마음 편안하게 해주고 싶고,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생활 방식을 즉시 바꾸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낙담시키고 싶지 않아진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육적인 본성을 계속 조금만이라도 용납하여 그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는 종교로 만들고자 노력하기 쉽다.
두 가지 선택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정도로든 계속 죄를 범하는 것을 승인하는 참된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우리가 짓는 죄의 양만을 줄이면 된다는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 용서하고 개심시키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짓는 죄까지 덮어 주실 수 있는가?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 5:17).
만일 죄지음에 대해 이 성경 귀절이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로마서 8:13에 나와 있는 바울의 말을 더 상고해 보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 중 한가지만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둘 다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육신대로 살든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음” 이 자명하고, 이 두가지 세력사이에 권위의 공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용납하든지 해야 한다. 그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다수를 따르는 경향에 대해 내린 우리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역사 중 다수의 무리가 통상적으로 그릇된 쪽에 서 있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해서 경고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향도 보았다. 우리는 또한 이 다수의 무리에게 그들이 얼마나 잘못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려해 보았다. 이러한 사실들을 돌아볼 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읽게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생각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높임을 받는 위험
위에 인용한 누가 복음의 마지막 귀절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를 위한 매우 귀중한 원리를 담고 있다. 예수님 당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 지던 규례라는 명목으로 불의한 행습들을 뻔뻔스럽게 정당화하려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거의 모든 쟁점들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서 빗나간 쪽에 있음을 예수님은 명백히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을 그분은 이미 선언하셨는데, 이들의 견해와 관례들이 결국 멸망당하고마는 오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가는 소수의 무리와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적인 견해에 집착해 있는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가!
하지만 인간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원리들을 우리가 고찰해 볼 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의복, 음식물, 유흥 혹은 교육 표준들을 볼 때, 이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이상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위에 있는 이방나라들과 같이 될 수 없음에 짜증을 내곤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보다 훌륭하고 높은 표준을 주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성경 전반을 통해 기술되어 있는, 세상으로부터 분리함으로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거의 금욕주의적인 교리에 대해 경악감을 표시해 왔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고대 백성들로 하여금 주위에 있는 이교도 민족들과 섞이고 결혼하는 것을 금하셨는가? 신약의 기자들 역시 영적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이라고 불리는 체계로부터 분리하여 거기서 나오라고 반복하여 명하고 있으며, 이렇게 나온 무리들은 “세상”과 반대된 “교회”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원래 희랍어는 “밖으로” 라는 의미의 “ek” 와 “부른다” 라는 의미의 “kalleo” 가 합쳐진 “eklesia” 인데, 이 단어는 “밖으로 불려내어 진 사람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이 넓은 길에 있는 다수의 무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시는가? 그리고 왜 다수의 무리가 멸망 당함을 선택하는가? 도대체 마귀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다수의 군중으로 하여금 자기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끌어 모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바로 다수로부터 분리해 나오라고 외쳐온 복음 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지속적인 부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줄 것이다.
민감성의 둔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사악한 마귀의 올무에 넘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교에 관한 마귀의 책략은 바로,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점차적으로 우리가 순응된다는 인정된 심리 법칙에 근거하여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생활방식과 말들을 보고 듣는 것이 가져오는 무의식적인 영향은 처음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들을 우리가 점차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출의 꼴 짓는 영향은 우리의 비축된 도덕력을 무너뜨리고 결국 죄에 대해 융화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총체적인 책략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것이 누룩이 빵 속에서 발효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무감각 중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조작 당하고 있음을 한 순간도 감지하지 못한다. 위험신호의 경보가 울리지 않는 가운데, 양심은 죄에 대해 용인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굴절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인간의 영적인 “위치석”이 변질되어 왔다. 성서적인 원칙에서 떠나 다수 의견에 의존하게 되는 점차적인 전환은 서서히 변하는 변화의 완만함으로 인해 아주 미미한 정도의 영적 저항만을 받으며 달성된 것이다.
많은 연구 조사들은 도덕적 민감성을 둔화시키는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아래 우리의 도덕적 표준들이 낮아져 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신성하지 않은 것들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우리가 결코 신성해 질 수 없다. 생각을 계속적으로 가증한 것들에 노출시키면 그 결과를 필히 감수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육적인 것들로부터 분리하도록 촉구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 타락케 하는 말과 음악들을 듣고 미혹하는 죄스러운 장면들을 보고자 하는 건방진 선택들을 고의적으로 계속 한다면, 기도나 성경공부조차도 우리를 그 결과로부터 계속 지켜줄 수 없는 것이다.
느낌을 따르는 잘못된 생각
이 새우의 실험이 보여주는 교훈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중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결함이 있는 위치석이 불러오는 두 번째의 위험한 결과에 대해서 한번 고찰해 보자. 이 새우들은 그들의 위치석에 작용하는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 인해 생성된 그들의 느낌을 신뢰했다. 하지만 새우들의 머리 위에 놓인 위치석이 변질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이러한 그들의 느낌은 정확하지 못했으며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느낌을 따르는 것이 군중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안전하지 않다. 새우가 자석이 끌어당기는 힘을 확실히 느꼈지만, 그것은 새우로 하여금 틀리게 행동하게 했고 바보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 모두를 그와 똑같은 상태로 몰고 가기를 즐겨 한다. 그는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어떤 다른 “위치석”을 믿도록 유도해서 이 새우들과 똑같은 지경에 처하도록 했다. 매혹적이고 현란한 이 세상의 강력한 자석을 이용해서 사단은 그 어떤 쾌락적이고 현혹적인 느낌들을 창출했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만적인 안전감을 주는 올가미에 빠져있으며, 그 속에서 터무니없는 자만심과 안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최면에 걸려 자신들의 주관보다는 그 어떤 다른 존재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이다.
세상의 대부분이 정말 사단의 최면력에 의해 유도된 최면 상태 아래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심리 조작 전문가들은 그들을 상대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최면적인 상태를 유도하는 수완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피실험자를 최면 상태에 놓기 위해서는 항상 그 어떤 접촉점이 이용되는데, 피실험자의 주의가 들리는 말과 더불어 빛이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물체로 집중되어야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적인 주의 집중의 과정 없이는 아무도 최면술사의 지배 아래로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사단도 인간을 자기의 지배 아래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주의 집중을 인간으로부터 획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단은 한 접촉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절제하지 못하는 단점이거나, 육적인 것에 끌리는 성향,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유혹에 약한 부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단의 책략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도는 그의 주의를 끄는 매체들을 애초에 보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척도가 됨
감정이 진리를 분별하는 척도가 될 때, 인간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과 다른 이견들에 대해 아주 비이성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고 다른 모든 이들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의문의 여지없이 확신하곤 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가져다 주는 편안한 안전감속에서, 그들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리에 기반을 둔 모든 논리와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과 심리상태가 그리스도인에게 해로운 것인가? 그렇다. 분별있게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사단은 이러한 심리상태를 이용하고 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한 조그만 밀실에 당신이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기름을 태워 난방하는 난로가 그 방 속의 산소를 얼마 동안 소비해 오고 있었다면, 당신은 점차적으로 나른해져서 당신의 두뇌가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앉아 있는 의자로부터 일어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의자에서 일어나 방의 창이나 문을 열고 싶은 의도는 더욱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는 당신의 이러한 느낌이 바로, 일어나서 방을 환기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결코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알려주는 위험 신호인 것이다.
혹시 당신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은, 아니면 성경 말씀을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는가? 물론 그런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느낌에 굴복해야 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산소가 우리의 몸에 필요한 생기인 것 처럼 기도는 영혼에 필수적인 생기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기분이 바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 의지를 독촉하여 속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신호임에 틀림 없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골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렇게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신령한 소망이 우리 마음속에 점차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곧 기도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우리의 한 특권으로 재확인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단이 사용하는 접촉점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가 놓은 감정의 올가미인 최면적 마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주 심각한 영적 위험에 우리는 놓여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인간은 능동적인 행함의 주체가 아니면 주위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게 되는 조건 반사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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