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⑭학교-순수하기에는 버거운 현실
햇살 가득한 교정에 정답은 너무 근엄해
학교란 교사와 학생이 지식과 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당연히 가르치는 쪽은 교사고, 배우는 쪽은 학생이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커다란 학교에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명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교사 노릇을 할 수도 있고, 교사가 학생처럼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생전에 별다른 벼슬이 없었던 고인을 `학생'이라 높여 부른 것은 끝없는 배움의 과정으로서 삶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학교로 범위를 국한시켜 얘기해 보자. 이상적으로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가르침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곳이다. 그럴 때 교육은 학생이건 교사건 개인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사회 전체의 수준을 고양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런 이상적인 학교의 모습은 도종환의 시 <어릴 때 내 꿈은>의 앞부분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그러나 또 다른 교사 시인 정희성의 시 <학교 가는 길>에서도 보다시피, 학교란 그렇게 조화롭고 순수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지요/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버린/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정희성 <학교 가는 길>)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규정한 것은 루이 알튀세르였다. 학교가, 국가로 대표되는 기존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재생산한다는 점에서였다. 그럴 때 정답이란 객관적 진실이기보다는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답이기 십상이다. 인용된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인 학생은 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거니와, 학교가 강요하는 정답이란 무반성적인 수용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역시 교사 시인인 김진경이 <교과서 속에서>라는 시에서 “가르친다는 것은/싸우는 것이다/배운다는 것은/싸우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교사와 학생 양쪽 모두의 주체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가? 공지영의 중편 <광기의 역사>는 초등학교 입학에서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12년을 그토록 부정적인 제목 속에 요약하고 있다. 일기장 속의 비밀 이야기를 만천하에 까발려 버린 담임선생님,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키 때문에 무릎 위로 올라간 교복 치마 길이를 시비 삼는 훈육주임, 독일어 가사를 외워 부르지 못한다고 출석부를 세워 머리를 때리는 음악선생님, 80년 서울의 봄에 편승해 교내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들을 향해 “이 저주받을 것들, 악마의 자식들”이라 막말을 퍼부은 교장선생님 등이 버티고 있는 곳이 <광기의 역사>의 학교였다.
김종광의 단편 <분필 교향곡>은 사소하기 그지없는 실수가 어처구니없는 폭력과 광기로 확대되는 `학교라는 특수상황'에 대한 신랄한 고발로 읽힌다. 수업 시작 직전 장난 삼아 분필을 던진 `범인'을 찾아내려는 체육교사의 의지는 한 시간 내내 교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공지영과 김종광의 소설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학교를 둘러싼 문제가 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교사와 학생 모두를 괴롭히는 진짜 큰 `적'이 있다는 것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의 문제의식이었다. 전교조의 출범과 합법화 투쟁은 그 자체가 사회적 사건이자 감동적인 드라마여서 수많은 시와 소설을 낳았다. 물론 그 가운데는 그 자신 해직교사인 문인들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비록 당사자는 아니지만 양귀자의 단편 <슬픔도 힘이 된다>와 김인숙의 중편 <당신>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을 주인공 삼아 이 사태의 교육적, 사회적 의미를 천착한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전교조 지부장 한 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전교조 출범의 당위성을 부각시킨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주로 등장하는 만큼 소설은 단순명료하다. 전교조는 선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악이다. 동료들을 배신하고 탈퇴했던 유 선생조차 지부 현판식에 남몰래 나타날 정도로 주인공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갈등은 없거나 사소한 셈이다. 잠재적인 갈등과 회의는 `슬픔의 힘'으로 넉넉히 감싸이게 된다. 반면, <당신>에서 작가는 해직교사 부인의 시점을 동원해 전교조 해직사태의 복합적인 층위―특히 해직 당사자와 배우자 또는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두루 포착하고자 한다. 이 경우에, 소설이 끝나도록 명확히 매듭지어지는 것은 없지만 사태의 진상은 오히려 더 적실하게 다가온다.
최시한의 연작장편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전교조 소속 교사 `왜냐 선생'의 해직과 자신의 개인적인 사연이 겹쳐 학교를 떠나 방황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반성문을 쓰는 시간> 등 다섯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억압적인 교육현실과 전교조의 참교육 이념은 정면으로 맞부닥친다. 이에 반해 전교조 합법화 이후에 발표된 김향숙의 장편 <서서 잠드는 아이들>에서는 입시경쟁과 가치관 상실, 00교제 따위로 멍든 아이들의 암담한 현실과 안쓰러운 희망에 초점을 맞춘다.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의 아픔과 불굴의 의지는 그 자신 해직 교사였던 도종환의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에 절절하게 담겨졌다.
학교와 교실은 흔히 사회 전체의 알레고리로서 동원되기도 한다. 교실을 한 사회의 축도로 보고, 그 안에서 권력의 작동과 몰락 과정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그러하다. <우상의 눈물>에서 반 아이들 위에 군림하던 `두목' 최기표는 영악한 반장 임형우와 담임교사의 교묘한 계략에 의해 일순간에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우를 위하여>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는 힘으로 반장 자리를 차지한 아이와 그에 맞서는 아이(들), 그리고 그를 후원하는 교사가 등장해 권력의 횡포와 그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딸림상자 참조)
한편, 성석제의 단편 <첫사랑>은 중학교 남학생들 사이의 사랑의 눈뜸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린 이색적인 작품이다. 계집애처럼 생긴 `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깡패 `너'가 “사람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며 안타까워할 때, 그리고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한번 안아보자”는 `너'의 부탁을 `나'가 처음으로 선선히 받아줄 때, 그 사랑은 `첫사랑'에 걸맞은 순수와 고귀성을 획득한다. 글 최재봉 기자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들의 진짜 영웅은?
황석영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와 이문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1972년에 발표된 단편 <아우를 위하여>는 “겨울에 거지 하나가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작품이다. 소설은 입대한 아우에게, 국민학교 시절의 회고담을 들려줌으로써 “진보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형의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열한 살짜리 주인공 수남의 반에 열다섯 살짜리 영래가 새로 들어오면서 힘으로 반장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 가르치는 데에는 뜻이 없고 부업 때문에 밖으로만 나도는 담임 선생님은 은근히 영래가 반을 휘어잡는 것을 달가워한다. 그러나 영래의 횡포가 우심해지고, 처음에는 그를 따르던 아이들조차 점차 그에게서 멀어질 무렵, 사범학교 졸업반인 교생 선생님이 부임해 온다. “한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럿이서 고쳐줘야 해요.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수남이와 반 아이들은 힘을 합해 폭군 영래를 몰아내기에 이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의 두 주인공 한병태와 엄석대는 각각 <아우를 위하여>의 수남과 영래에 정확히 대응한다. 철저한 독재자인 반장 엄석대의 배후에는 그의 `효율적인 통치'에서 득을 보는 담임 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새로 담임을 맡게 된 교사는 엄석대 식의 강압적인 반 운영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결국 전교 1등의 성적까지 조작하는 엄석대의 음모를 발각해낸 교사에게 매를 맞고 엄석대는 학교를 떠난다.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들의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엄석대와 그의 공모자들에게 매를 때리면서 교사가 한 말에서는 앞서 인용한 수남이네 교생 선생님의 말이 겹쳐 들린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교생 선생님의 격려를 받은 아이들이 스스로 폭군을 몰아낸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교사가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점뿐이다. 두 작품 모두 정치적 알레고리로서의 색채가 뚜렷한데, <아우를 위하여>가 폭군에 맞서는 민중 쪽의 대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석대가 몰락한 뒤 반 아이들이 보인 행태를 통해 그들의 우중(愚衆)적 면모를 표나게 드러내고 있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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