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고고학적 사기 사건들
사진7> 필트다운인 두개골
(출처: chm.bris.ac.uk/webproject
s2002/lhomer/Webpage/
고고학은 기존의 학설과 상충하거나 새로운 증거가 나올 때마다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끊임없이 수정되는 학문이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특성을 악용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역사를 수정하려 했던 자들이 있었다. 고고학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기 사건은 바로 ‘필트다운 사건’이다. 1912년, 영국 필트다운 지방에서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단계로 보이는 두개골과 턱뼈 등이 발굴되었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 이 발굴은 그동안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라 불려왔던 인류 진화과정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동시에 인류의 조상을 발견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학계에선 찬사가 쏟아졌다. 그가 발굴한 인류 화석은 발견 장소명을 따라 ‘필트다운인(Piltdown人)’이라 불려졌다.<사진7>
그러나 1953년, 의문을 품은 학자들이 X선 투시검사법, 불소연대측정법과 같은 여러 첨단 과학기술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검증한 결과, 이 뼈들은 사실 중세 시대 인류의 머리뼈와 오랑우탄의 아래턱뼈, 그리고 침팬지의 송곳니인 것으로 밝혀졌다. 누군가 뼈를 짜맞추어 붙이고 표면에 약을 발라서 오래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조작한 이유는 무엇이며, 왜 전문가들조차 오랫동안 가짜임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유감스럽게도 필트다운 사건의 범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작의 이유로는 영국의 국가주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의 기원에 관한 책 『아담의 조상』에서는 영국이 인류의 요람을 유럽, 정확히는 대영제국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 설명한다.
필트다운인 이전까지 인류의 요람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었다. 330만 년 전부터 380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화석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양의 학자들은 최초의 인간이 문명화되지 않은 무지몽매한 대륙에서 탄생하였다는 사실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트다운인의 발견은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던 서양 학자들의 꺼림칙한 기분을 완전히 해소해 주었으며, 그들의 흑백 논리에 딱 들어맞았던 사건이었다.
이것은 조작의 이유이자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지체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발견물을 믿고 싶어 했다. 필트다운인의 존재는 진화론을 추종하거나 백인 우월주의의 사고를 가진 학자들의 신념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심리학 용어로, 자신의 사전 견해 및 태도와 일치하는 증거를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검증하는 ‘우리편 편향(Myside bias)’이 진실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사실을 거짓에서 구분해내도록 발달돼왔고, 과학적 검증 끝에 이 희대의 사기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조작 사건이다. 1981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한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고작 3만 년 전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후지무라가 땅만 팠다 하면 더 오래된 유물들이 줄줄이 발견되었고, 그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덕분에 일본에 정착한 인류의 역사는 3만 년에서 무려 70만 년으로 급격히 앞당겨졌고,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일본은 자신들이 당시 아시아 최고(最古) 역사를 갖게 되었다고 자랑했고, 그가 찾은 유적지들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성과들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일본의 3대 신문인 마이니치 신문 1면에 후지무라가의 사기 행각이 포착된 증거 사진과 함께 그가 유물을 조작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사진8> 마이니치 신문이 그의 발굴 현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결과, 아무도 없을 때 후지무라 신이치가 어디선가 가져온 유물을 몰래 땅에 파묻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 동영상을 보여주자 후지무라는 그자리에서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조사 결과, 그는 직접 만든 유물을 묻어뒀다 다시 캐내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여왔으며, 20년 동안 무려 162곳의 유적을 날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유적을 조작한 이유도, 발각이 지체된 이유도 필트다운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8년, 한국에서 27만 년 전의 유적이 발굴되자, 후지무라를 포함한 일본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한국보다 짧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이러한 배경 속 후지무라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서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고, 학계는 검증에는 소홀한 채 성급히 찬사만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후지무라 사건은 일본 학계도 공범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까지 소개한 두 사례는 고고학적 사기 사건 중 스케일이 가장 큰 사건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 희대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필트다운인은 발견 이래 4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 진짜로 인정받아 왔으며, 관련 논문이 200여 편에 달했기에 조작이었다는 사실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진실을 받아들였고, 오늘날 ‘필트다운’이라는 단어는 ‘사기 부정 연구’를 조롱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업적에 환호했던 일본도 진실이 드러나자 단호히 대처해 나갔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며 눈물로 사과했지만 학계에서 즉시 퇴출 및 영구 제명당했다. 조사하여 가짜로 판명된 유물들은 국가 사적 지정을 전부 취소했고, 교과서에 실린 내용도 모두 삭제되었다. 출판된 그의 책은 모두 환수조치 되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도 모두 퇴출되었다. 일본의 고인류 역사는 전면 수정되었고, 70만 년이라는 거짓 역사를 다시 3만 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들은 은폐와 합리화보다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실을 바로잡는 길을 택했다. 기실은 그것 외에 정도
(正道)는 없다. 드러난 진실 앞에 거짓이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계에서 거짓말로 한 번 잃어버린 믿음은 다시 찾기 힘들다. 처음의 거짓말 위에 쌓인 후속 연구들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하고도 다른 자세를 취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4대 교부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기보다는 한쪽에 서서 우리의 입장을 더욱 견고히 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성급하게 계속 탐구를 진행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추락하고 말 것이다.”라고 조언했다.<사진9>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기도 했다. “(라틴어)Plerumque … etiam non christianus ita noverit, ut certissima ratione vel experientia teneat. Turpe est autem nimis et perniciosum ac maxime cavendum, ut christianum de his rebus quasi secundum christianas Litteras loquentem, ita delirare audiat, ut, quemadmodum dicitur, toto coelo errare conspiciens, risum tenere vix possit. Et non tam molestum est, quod errans homo deridetur, sed quod auctores nostri ab eis qui foris sunt, talia sensisse creduntur, et cum magno eorum exitio de quorum salute satagimus, tamquam indocti reprehenduntur atque respuuntur. Cum enim quemquam de numero Christianorum in ea re quam optime norunt, errare comprehenderint, et vanam sententiam suam de nostris Libris asserere; quo pacto illis Libris credituri sunt, de resurrectione mortuorum, et de spe vitae aeternae, regnoque coelorum, quando de his rebus quas iam experiri, vel indubitatis numeris percipere potuerunt, fallaciter putaverint esse conscriptos?
(국문) 대개의 경우, …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비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 아우구스티누스著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中
그러나 그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지구와 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과학적 사실들이 널리 알려진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학자들은 성경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증명하겠다며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성서 고고학이라 명명했다. 열의에 찬 그들은 고고학적으로 실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다. 그러나 그 성과는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존폐를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게 된다. 분명히 고고학적 가치는 높으나 성서에 반하는 명백한 증거들이 계속 발굴되니, 고고학계에서는 근동 고고학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용어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학자이기 이전 신자(信者)인 사람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타나크(=구약성경)의 역사를 곧 자신들의 역사라 여긴다. 때문에 성서 고고학은 유대인 역사의 실체를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현생 인류(진화론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당도한 것은 17만 7천 년 전이다. 이스라엘에서 17만 7천 년 전 인류의 화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강동구의 역사가 우리나라 건국 신화보다 1700년 앞섰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의 건국 신화보다 17만 년 앞서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과학적 실증이 있는 역사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성경을 따르는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 역사학 교수 슐로모 산드는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나의 동료들 가운데, 과거에 대한 틀에 박힌 거짓말들을 폭로하는 이 위험한 교육적 임무의 수행을 의무로 느끼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이 책을 쓰지 않고는 이스라엘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학자적 양심에 따라 유대인의 진실한 역사를 담은 『만들어진 유대인』이란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은 성공하여 전 세계 24개국으로 번역되며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취를 부정하는 역사학자는 나오지 않았고, 그 사실은 놀랍지 않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무신론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과학은 종교를 허물어뜨리고 지적인 사람이 신을 거부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7세기 지동설을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각은 달랐다.<사진10> 그는 ‘참된 과학과 참된 신앙은 둘 다 같은 저자, 즉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할 수 밖에 없다는 명확한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중심이던 중세 시대, 교회의 주장에 반하는 학설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종교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과학을 알려주는 것이 교황과 교회를 오류로부터 구하는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가톨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주장 철회를 강요당했고, 죽을 때까지 집에서만 지내야하는 종신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그의 모든 저서는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과학은 ‘검증의 학문’이라고 한다. 의문을 갖고, 가설을 세운 후 실험하여 검증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되는 오류를 수정해가며 점점 더 진실에 가까운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허물어뜨리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거짓일 뿐이다.
https://theweekly.co.kr/?p=74287
첫댓글 잘 봤습니다~
역사를 속이려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