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스스로 신앙의 위기를 부추기다!?
교회와 시민사회, 불편함 어긋남 혹은 불화(不和)
"기독교는 스스로가 설 땅을 오염시켜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조세 문제를 봐도 그렇다. 교회는 경제 범죄 행위를 벌일 수 있는 불순한 토양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향린교회 대예배실에서 열린 '대안교회,대안신앙'이란 강좌에 강사로 나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강인철 교수의 강의 내용 중 일부분이다.
(사)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3일 오후 7시∼9시까지 명동 향린교회 대예배실에서 18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실시될 '대안교회, 대안신앙' 강좌의 첫 문을 열었다.
주최측은 "90년대를 지나오면서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이제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닿은 상태다"며 "한국교회가 시민사회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점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새롭게 시도되는 대안의 의의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이 같은 시간을 마련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날 강인철 교수는 '신앙의 위기1- 교회와 시민사회의 불편함 어긋남 혹은 불화(不和)'를 주제로 강의했다.
첫 강연에서 강 교수는 한국 개신교 교회와 시민사회의 변화되고 있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과 공신력의 변화가 초래한 시민 사회와의 갈등 및 대개혁 세력의 조성되는 과정 등을 다뤘다.
강 교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증가하는 반면 사회적 공신력은 감소하는 경우. 이는 최악의 상황(90년대 한국 개신교의 상황)"이라며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으로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증가하나 공신력이 감소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에 대해 강 교수는 "종교의 인적·물적·조직적 자원의 증대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하나 급속한 외형적·물량적 성장에 기인해 사회적 공신력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그는 "종교는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언론, 정치, 경제 등을 총괄한 규모의 경제를 시도했으며 이는 결국 종교의 사회적 공신력을 위협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많은 경우 종교의 공신력의 하락은 '영향력 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을 일종의 '영향력 확대 딜레마'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세 분쟁 사례를 들어 강 교수는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 증대를 위한 시도가 시민 사회내 결코 환영받지 못하며 오히려 불편과 불화의 관계를 조성할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시민사회의 기대에 반하는 면세 혜택의 존속 혹은 확대라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공동선 정치'라기보다 '이익 정치'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위와 같은 종교계의 현황을 미루어 볼 때 개혁의 주체로써의 종교집단이 이제는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거대 종교집단들은 이 개혁의 바람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그는 "종교 개혁의 문제가 자정작용, 즉 교회의 내부가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의 움직임에 순응하며 개혁의 의지를 따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며 "교회 개혁과 관련해 국가 권력이 개입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교회내 개혁 세력의 조직화 및 깨어있는 사회 개혁 세력과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며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교회와 사회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 서로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앙. 행동 불일치-교회성장 걸림돌
국내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기독인들의 모습 중 제일 큰 요인이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꼽았으며 성장둔화의 대안으로 기독인의 온리적 실천 및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투자를 강조했다.
또 국내선교의 문제점은 교회의 대도시밀집과 무분별한 경쟁,소외계층을 향한 관심과 노력의 부족으로 나타났으며 기독교인의 윤리성에 대한 비신자들의 불신,신학이론과 현장목회의 괴리감,목회자의 질적저하 등이 성장둔화의 요인으로 지적됐다.
이같은 사실은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목사)가 예장(합동) 목회자 4백여명을 대상으로 성장둔화요인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3일 집계한 결과로 교회성장과 둔화는 교회지도자인 교역자의 영성과 의식에 달려 있음을 확인시킨 통계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번 설문에서 목회자들이 비신자에 대한 전도횟수를 집계한 결과 30대 이상의 목회자로 3번 이상 전도한 경우는 73%인 반면 20대목회자는 33%가 한번도 전도한 적이 없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또 목회자들이 가정예배를 매일 드리는 경우는 18%였으며 28%의 목회자가
일주일에 한두번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다.건강상의 이유로 최근 3년간 치유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란 질문에는 44%가 3번 이상,13%가 2번 이상,1번 이상이 18%로 집계됐다.아울러 교회의 양적부흥에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중소교회 목회자들의 스트레스가 훨씬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을 막는 요인 중 양육프로그램의 문제의 경우 현장 목회자들의 연구 및 시행의지부족을 꼽았으며 전도의 문제점을 묻는 질문에는 전도전략 및 훈련부족,목회자의 열의부족 등을 지적했다. 또 성장둔화요인으로 물질주의만연과 대중문화의 확산 <>신학교육의 질적 저하 <>전도전략 및 훈련부족 등을 꼽기도 했다.
이 설문을 집계한 교갱협회장 옥한흠목사는 "성장둔화가 외적요인도 있지만 내적요인이 더 크며 특히 목회자 스스로에게 가장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하고 "먼저 목회초년병부터 바른 영성과 윤리성을 갖도록 신학교가 정상화 되어야 하며 신학과 선교,교육,사회 등 제문제에 대해 일관성 있고 실현가능한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교갱협은 성장둔화 대안으로 교회본질회복,나눔과 섬김의 프로그램개발, 목회자 재교육과 영성강화를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독공동체의 의식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이번 설문결과는 최근 교계의 주요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교회성장둔화와 감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마련한 통계였다는 점과 교계 전체의 당면문제를 목회자의 시각에서 조사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진로모색의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앙인의 처소
예쁜 새 한쌍이 한적한 곳, 낮은 나뭇가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마차에 볏짚을 가득 싣고 농부가 그 밑을 지나가면서 다 되어 가는 둥우리를 망가뜨렸습니다.
새들은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하여 그날 오후에는 거의 완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혼 때 농부 한 사람이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지고 그 밑을 지나갔습니다.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새 둥우리가 걸려 무너졌습니다.
새들은 다음 날 또 집을 지었습니다. 낮에 개구장이들이 그 밑을 지나다가 매미채로 새집을 무너뜨렸습니다.
한동안 숲속이 조용한 틈에 새들은 그곳에 둥우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켰습니다. 귀여운 새끼 네 마리가 예쁜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받아 먹는 모습은 평화롭고 행복 했습니다.
이 행복한 가정에 무서운 침입자가 찾아 왔습니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숲속을 지나가다
낮은 곳에 있는 둥우리를 보고 나무에 기어올라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잡아 먹었습니다.
몇 차례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면 낮은 곳에 짓는 것이 위험한 줄 알고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깨닫지 못했기에 엄청난 비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말 못하는 새들만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낮은 곳에 집을 짓고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높은 곳을 보지 못했던 새 둥지가 불행의 온상인 것처럼 땅만을 생각하는 신앙인의 처세는 심판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집은 높은 곳으로 옮겨 지어야 하고 신앙인의 처소는 하나님 보좌 앞이어야 합니다 (창 22:1)
게을러지는 신앙
K라는 집사는 늘 자신의 신앙이 점점 퇴보해간다는 생각을 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신앙인들을 보면 기도원에 간다, 금식한다, 병이 낫는다, 방언을 한다는 등등 신앙의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가는 모습들 뿐인데 K집사는 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신앙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일까?”
그는 늘 자신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고 그 원인을 찾아 개선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계획을 세워 실천해 가노라면 얼마가지 않아 금방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가 결심을 하고 새로운 각오를 가져 본 것도 횟수로 따지면 수없이 많다. 혼자만의 고민으로 고투하고 있는 K집사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핀잔하듯 이 말을 건넨다.
“당신의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게으른게 문제예요.”
게으르다는 한마디에 K집사는 충격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게으름만 피웠던 자신의 신앙생활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 나의 문제는 게으름이야.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 해 주기를 늘 바라면서 살아왔어”
나라 사랑의 뿌리 "신앙"
본문: 누가복음 19장 41-44절
예수님은 전 인류의 구주이시지만 당신이 나시고 자라신 육신의 조국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신 이 울음은 애국의 울음입니다.
1. 진실하게 살아야
오늘 우리는 3.1절 제79주년 기념일을 보내면서 주님의 애국심을 닮아 우리도 애국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다짐해야겠습니다. 당시 일본 탄압자들은 교회 성도들에게 심한 박해를 했습니다. 제암리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교회 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절대권능을 의지하는 신앙과 숭고한 3.1 정신으로 애국심을 발휘하여 나라를 지켜나가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겠습니까?
첫째,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은 못해도 나라에 손해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애국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나라에 손해되는 일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진실되이 살아가는 것도 애국입니다. 전 국민이 진실한 삶을 살아가며 범죄하지 아니하면 틀림없이 그 백성은 잘사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잠언14:34)
2. 민족 복음화의 길
둘째, 민족을 복음화시키는 일입니다. 로마서 9장에 기록된 바울의 간절한 소원 한 가지는 골육의 친척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내 동족을 예수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애국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북의 공산주의 무신론사상을 대응할 정신력은 신앙에서 오는 정신력임을 믿습니다. 민족정신 민족정신 하지만 인간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정신력은 약하고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정신이라야 강하고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 전체가 복음화 되어 신앙으로만 무장이 된다면 공산사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 된지 1세기만에 1천 2백만 성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성도들이 복음화 운동을 계속 전개하여 단결만 한다면 전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사명
셋째,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3.1 정신은 신앙정신이라고 할 만큼 애국심과 신앙심이 결합된 정신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17명이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앙에 뿌리내린 애국심은 나라를 더욱 강건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심과 애국심을 합한 정신이야말로 큰 국방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언 21장에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의 능력이 함께 하시느냐 안 하시느냐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할 만하고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면 지켜 주실 것입니다. 3.1절 79주년 기념일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신앙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생각해 봅시다.
신앙의 터전
영국 런던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에는 와츠의 유명한 한 화폭이 있다.
수건으로 눈을 가린 한 젊은 여자가 지구 위에 앉아 비파를 타는데 자세히 보면 비파의 줄은 다 끊어졌고 오직 한 줄만 남은 그 줄을 열심히 타며 그 여인은 그 한 줄에서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 한 줄은 소망의 줄이다. 실로 의미심장한 그림이다.
인간의 삶의 줄들이 때로는 끊어질 수가 있다. 건강, 재산, 사업의 실패 등 필요한 삶의 줄이 모두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인간은 살 수 있다.
어떠한 역경이 부딪칠 때에도 이 소망의 줄만 굳게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인간은 결국 모든 난관 을 이겨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망은 실로 귀하다. 그런데 이 소망은 깊은 영적 뿌리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우주의 배후에는 정의와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하신다는 굳은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 없이 민족적 암흑기에 있어서 어떻게 갱생의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의 견해와 같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단순히 큰 바다의 물방울 같이 본다고 하면 인간은 그 육신이 죽을 때에 모든 소망은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육신뿐만 아니고 불멸의 영혼의 존재를 믿는 깊은 신앙의 터전 위에서만 영원한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믿는 자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지적한다.
가장 성숙한 신앙이란
본문 : 베드로전서 2:19∼21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성경에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지만 또한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도 있습니다. 신앙도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고(엡 4:14) 장성한 어른의 신앙이 있습니다(엡 4:13).신앙이 가장 성숙한 성도란 어떠한 사람을 말할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성숙한 성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성도입니다.
성경에서 고난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베드로전서입니다.17회 정도 나옵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는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어려움과 환난을 당해도 주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돼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애매한 고난도 참을 수 있는 성도입니다(벧전 2:19).
애매한 고난이란 고난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또는 고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고후 12:7). 그러나 욥의 고난은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이 때가 신앙의 성숙에 대하여 자신을 점검할 때입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욥 1:12)
성숙한 성도는 고난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지 않고 내 책임으로 얼른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셋째, 이웃의 아픔을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이것이 본문입니다.“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였듯이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야 합니다.중보기도가 이런 것입니다.이런 사람이 가장 성숙한 성도입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정근모 호서대총장은 간증합니다.그는 아들 진우의 신장염으로 인하여 늘 고통을 받아왔습니다.나중에 자신의 신장을 아들에게 이식했습니다.그 후에도 아들의 계속되는 병고와 함께 싸웠습니다.
1982년 3월 어느 주일날 워싱턴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중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네 아들에게 감사해 본 일이 있느냐” 이 때 그는 사람들이 옆에 있음도 개의치 않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들의 아픔은 곧 자신의 문제였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가장 성숙한 성도는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모세는 신앙성숙의 가장 큰 모델입니다. 우리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다짐한다면 이런 선배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2000년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에 비하여 너무 안락한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어린아이 신앙은 아닌가요?
* 기도: 주님, 고난도 이기고 이웃의 아픔을 짊어지고 대신 기도할 만큼 성숙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보이는 신앙
다음의 실화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생전에 있었던 실화이다. 어느 주일에 왕과 그의 왕족들이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왕실 설교자인 프넬론 대주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목사님은 `저는 폐하께서 오늘 이곳에 오시지 않을거라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지 아니면 단지 폐하께 아첨하러 오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관대작들이 참석하는 모임에 가 볼 기회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대화하며 성도의 교제를 즐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자 교회에 출석하기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교회에 출석한다.
그들이 왕족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나간다고 말할 수 없지만, 교회에 나오는 그들의 동기가 헛되고 이기적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 출석이 그들의 사업에 또는 사회적인 신분을 향상시키는 데 좋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단지 의무감에서 나간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행동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
1. 구원받지 못 했기 때문에
단지 교회 생활에 익숙할 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내적,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야 한다.
2. 신앙의 성장 과정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 훈련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주일 한번 나가서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 아이는 태어나지만 또한 커야
한다.
3. 하나님말씀에 대한 어떤 불 순종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큰 문제가 가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 섭섭, 염려, 근심이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런 것을 버려야 한다.(벧전2:1,2)
부담없는 신앙생활
한 교회에 다른 교회에서 전입해 온 교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자매는 어느 날부터 교회를 결석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름도 뚜렷이 없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단체에서는 가르치기를, 한 번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할 필요가 없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 생활을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할 필요가 없으며 기성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구약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므로 그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영혼이 구원받았으므로 육체는 아무렇게 다루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마음에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교회를 나간다는 것이다.
순교신앙
옛날 로마에 도미티안 황제 때에 핍박을 심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다.
주로 화형을 해서 죽이는데, 그 중 순교자 한 분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을 때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죽었다.
그런데, 사실로 그를 죽이는 자들이 그토록 훌륭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하고 존경하며 부러워했다 고 한다.
이런 역사들이 쌓여서 후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이 주었던 그 감화가 대 로마 제국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신앙의 절개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자 미국의 좋은 관리의 자리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사양하고 목사의 길을 택하여 갔다.
루이스 감독이 그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는가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었었을때에 중국의 내륙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동리에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마적떼 같은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절간으로 왔습니다. 위협하는 군인들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준다는
신앙과 고독
고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고독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고독이라고 칭하자. 소득적 고독이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비웃을 때에 마음에 일어나 적극적 고독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하여서 우리 스스로가 즐겨 맛보는 고독이다. 사람의 물결이 어지럽게 춤추고 있을 때에 우리는 흔히 자기를 잊고 무리들의 놀이에 싸여 지나갈 때가 많다. 혹 우리는 여러 사람의 박수와 찬사를 받으려고 어릿광대의 노릇을 예사로 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좁다.
인기와 타협의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가끔 인간을 바로 보기 위하여 인간의 거리를 떠나려고 한다. 힘있게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겁게 서 보려는 것이다. 고독의 덕, 나는 무섭게 고독하였던 예수를 배우고 싶다
신앙의 ABC
어느 목사님 두 분이 심각한 문제 투성이의 교회에 각각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아주 놀라운 승리를 했고 한 분은 거기에서 주저 앉고 말았읍니다. 두 분의 목회 방법이 아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분은 굉장히 똑똑한 분이라 교회에 부임한 그날부터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의 잘잘못을 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자기의 언변 과 지식으로 따져서, 철저하게 사건 규명을 했습니다. 그 사건이 분명하게 규명되자 아무도 목사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조리있는 말씨와 논리가 분명한 그의 지혜를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때는 그 교회의 교인들이 다 떠나버리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또 다른 한 분은 시끄러운 문제들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었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느헤미아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모든 문제희 해결자이신 그분께 나아가 모든 문제를 쏟아 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이야기하십시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읍니다. `무릎으로 인생의 싸움을 싸우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ABC를 모르는 사람이다.`
베드로의 신앙의 계단
베드로의 예수신앙의 첫 계단은 지적사색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여 행동과 생활로 생의 전체를 걸고 따름으로 출발한 것이다. 예수와 생사를 같이 하는 실천적 참여야말로 모든 크리스챤의 출발점이어야 하겠다.
그 다음 계단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의 계단이었다. 이 고백을 해버린 사람은 다시는 예수 없는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세번째 계단은 부활사건을 본 베드로가 흥분도 기대도 가시고 갈릴리호수, 옛날 고기잡이 생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그 창백한 신앙의 늪에 주님이 찾아가 만났을 때 세번 반복한 사랑의 고백에서 다시 만나진 예수 관계였다. 네 번째 계단은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완성된 배에 시동이 처음 걸린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때부터 베드로는 죽고 예수가 성령으로 베드로 안에서 사도행전의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바버라 린트쿼스트의 신앙 간증
성 구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7)
미국 올림픽 3종 경기(트라이애슬론)의 여성 대표 선수인 바버라 린드퀴스트는 '하나님과 함께 헤엄치고, 사이클에 올라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과 함께 달리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현재 세계 9위에 올라 있는 그녀는 "호주는 3종 경기 훈련에 있어 최적의 환경을 갖고 있다."며 최고에 다다르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종 경기가 린드퀴스트의 신앙 고백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기독교 잡지 「빅토리」 최근호에 따르면 고교 시절 신앙 모임 안에서 성장해 온 그녀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이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다. "가장 힘든 부분은 마지막 코스인 달리기"라는 린드퀴스트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이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린드퀴스트는 1년에 성경을 한 번씩 통독해 왔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4시 반에 구약을 읽고 훈련을 마치고 잠들기 전 신약을 읽는다. 진지한 기독인으로서 무엇보다 이것을 우선순위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의 첫째 우선순위는 예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악에서 핀 신앙의 싹
일본에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습니다. 그는 창녀들에게 전도를 하고 빈민굴에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의 친구가 그를 찾아가 보니까 너무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정뱅이가 와서 돈을 내라고 강요를 하면 순순히 그는 돈을 줍니다. 다음에 그 친구가 다시 방문했는데 그 주정뱅이는 길바닥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그 주정뱅이에게 준 돈으로 주정뱅이는 술을 먹고 도박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돈을 주는가?" "물론 알고 있네." "이것이 처음인가?" "아니 몇십 번 주었지."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가가와 도요히꼬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좀 더 참아 보세." 그 다음 저녁 예배를 드릴 때 보니까 전부 창녀들입니다.
그 창녀들은 예배를 보다가도 주정뱅이가 와서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있었구나. 같이 가자."고 하면 예배를 드리다가도 나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와서 잔뜩 토해서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이런 것이 예배이고 선교이냐? 이런 상환 속에서 전도하느냐? 뭔가 네가 잘못되었고 위선자가 아니냐?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을 선교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가가와 도요히꼬는 말하기를 "자네도 알지 못하네. 저들이 나를 열 번 속여 먹고 혹시 내가 저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 그 이후에도 사랑은 끝까지 관통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악에 의해 심장에 상처가 나고 찔려 죽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 이후에 사람들 속에 작은 사랑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 그 친구는 그의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가와 도요히꼬가 죽은 후 그가 지나갔던 곳에는 작은 신앙의 싹들이 태어나고 크리스챤들이 이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다 불타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완전히 관통해 버렸을 때, 철저하게 죽임을 당해 버렸을 때, 짓밟혀 버렸을 때, 알고 속아 주었을 때 잉여(剩餘)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
외신이 전하는 한 작은 교회의 모습이 있다. 1978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소련의 크리스챤 7명이 저지를 무릅쓰고 뛰어 들었다.
이들을 길거리에 내 보내기에는 인권을 말하는 미국 양심에 저해되고, 서방으로 이주시키자니 소련과 묘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 불청객들은 그동안 미국 대사관의 지하실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굳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생명의 투쟁이다. 이들의 신앙은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신비를 증언한다. 그것은 탄압과 박해가 신앙을 죽일 수 없다는 산 증인이다.
바로 이 교회가 처음 교회의 신앙의 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인 것이다.
진화론은 신앙성장 걸림돌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이 하나의 과학으로써 신앙에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진화론은 현대과학 문명사회에서 복음사역에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이다.왜냐하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세도 없고 인간이 영적인 존재도 아닌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기물에서 우연한 충돌에 의해 유기물이 생겨나고 여기서 최초의 한 생명체에서 진화되어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결국 인간은 그 기원에 있어서 다른 동물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무생물에서부터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다.
이런 인간속에 무슨 도덕과 영원한 세계가 있겠는가.이러한 진화론적 교육을 강요당한 지성인들에게 창조가 하나의 전설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철저한 유물론적 사고로 세뇌된 이들에게 영적인 세계란 허황된 꿈과 같은 얘기일 뿐이며,이러한 영원한 세계를 갈망할 필요도 없게 된다.하나님의 독생자도 예수그리스도도 별 의미 없게 되고 만다.
또한 이러한 철저한 유물론적 사고에 근거한 진화론적 사고는 인간의 도덕관념을 흐리게 한다.궁극적으로 인간은 동물과 같은 조상에서 진화된 존재에 불과하며 동물과 같은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상태라고까지 미화하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옷입기를 거부하는 나체주의자와 현재의 가정제도를 부인하는 동성연애자들이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진화론은 이미 신앙을 소유한 기독인에게도 신앙성장에 큰 장애물이 되고있다.믿음으로 신앙이 시작된 후에도 이 문제가 분명히 해결되지 않으면 늘 방황하기 쉽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시절에 교회를 떠나는지 모른다.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의 강권에 못이겨 교회를 나가고 자연히 창조에 관해 들어왔지만 학교교육을 통해선 진화론만이 과학적 정설로 꾸준히 강요되면서 자연스럽게 진화론으로 세뇌되어 왔기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가면 한꺼번에 밀려오는 너무 많은 자유속에 부모님과 교회에 의해 강요되어 온,비과학적이라고 여겨온 창조론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아니겠는가.그러므로 청소년 때부터 신앙과 함께 진화론의 비과학성과 창조론의 과학성을 가르침으로 성경은 현대과학과 모순된다는 잘못된 학교 교육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일단 이렇게 기본적인 것에 확신이 생기면 그 후에 새로운 이론과 반론이 엄습해 와도 스스로 방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이웅상 명지대 교목실장 겸 생명과학과 교수〉
신앙의 승리
모 회사의 젊은 생산과장 한 분을 내가 안다. 그는 근래에 와서 자기 회사 제품이 규격 미달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되고 있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도저히 그대로 묵인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업도 신앙적으로 일치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끝에 그가 나를 찾아 왔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규격 미달품을 완전한 물건이라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 운영자에게 그 사실을 진언하면 분명히 자기는 파면되고 말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며칠 후, 그는 용기를 내어서 회사 지배인에게 더 이상 그 상품을 제조판매하 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앙 양심에 위배되기 때문에 시정되지 않는 한 자기는 더 이상 생산과장의 직을 계속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파면될 줄 알고 며칠동안 출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웁게도 그 상품의 생산을 중단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양심적인 결단력이 회사 중역들에게 인정되어 파면 대신 도리어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그의 신앙은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반드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결과는 반드시 신앙인에게 현실적으로 유리하게만 된다는 보증은 없다. 반드시 현실적으로 유리한 결과 뿐이라면 신앙이란 필요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지 못할 미래이기에 신앙인은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 부흥의 선행 조건
1. 겸손이다.
학생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죤 모트는 말하기를 `겸손은 부단히유짜디되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것으로 임의로 취급할 수 있다
는 것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명은 타자에 속한 것이데 생명의 소유주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그리스도께 드리고 토오회하여 마음과정신을 낮춤으로 자신들을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자들은 마음과 영혼의 소성함을 입게 될 것이다.(사 57:15)
2. 기도이다.
쉘든 고든(Sheldon D. Gord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말은 기도에대해서 `말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들이 기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 하고자 하는 자들은 시간을 내서기도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바로 이들이 하나님을위해 최상의 것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혼들을 구하고 문제들을 해결하며 교회를 일깨우고 세상을 좀 더 오래 향기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에 대치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3. 영적인 갈망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얼굴의 구해야 한다. 게속해서 하나님의임재를 추구하는 자들만이 영적으로 이 세대를 일깨워 분발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사역자들이 될 것이다.
4. 고백과 회개이다
본문(대하7:14)은 우리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담대히 촉구한다.
우리는 오직 죄의 심각성, 사악함과 비열함에 대해 개인적으로 집단적이며 국가적으로 슬퍼 괴로워하게 될 때만이 신앙부흥을 체험하는 자들 될 수 있을 것이다.
분투하는 신앙
캐나다 동부의 도시 토론토에 수족관을 차릴 때의 일이다. 그 수족관에는 서부해안의 어류도 있어야 했으므로 서부의 도시 뱅쿠버에서 서해안의 어류들을 기차로 수송하기로 했다. 큰 철통에 산소공급 장치며 바다의 해수교환 시설을 면밀히 다 하여서 수송하는데도 일주일 후 목적지에 도착해 보면 많은 어류들이 죽어 있었다. 어류학자들은 많은 것을 검토한 후 몇 번을 시도했으나 큰 진전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번은 그 어항에 큼직한 문어를 한 마리 넣었다. 어항 속에서 이 문어는 가만히 있지 않고 슬금슬금 가서 어류들이 잠들만 하면 발로 건드려 깜짝 놀란 어류들은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느라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일주일 후 목적지까지 한 마리의 고기도 죽지 않고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실은 바다에서 큰 고기한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던 고기들이 아늑한 어항에 들어오니 만사가 다 편안해져서 안심하고 잠들다보니 결국 죽어버린다. 쉬지않고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활동하지 않고 잠만 자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문어를 넣어 계속 괴롭혀서라도 잠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핍박 속에 성장하고 순교의 피를 흘린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당신의 신앙의 깊이는?
어느 저녁 무렵, 한 노인과 그의 손자가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령, 계절은 왜 바뀌며, 여자들은 왜 지렁이를 싫어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마침내 손자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나요?" 그 노인은 잔잔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얘야, 나는 이제 점점 하나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우리의 하루 하루가 바로 이 노인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로보며,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천국 생활을 준비한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전진하는 신앙
본문: 히 12:1-3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떠나게 될 때 다른 한 선교사가 찾아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이 리빙스턴이 대답하기를 "앞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아무 데로 가도 좋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전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앞뒤만 재다가 해가 지는 그러한 인생이 결코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진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전진하고 발전되는 것이 있어야지, 예수를 믿은지 일년이 지나가고 이년이 지나가고 아니 평생을 믿어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상태라고 하면 그는 필경 생명이 없는 신자가 아니면 신앙에 깊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제일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의 신앙 상태가 자꾸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는 마치 병들어 자라지 못하는 자식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전진이 있어져야 정상적인 신앙인인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앙
인도의 어느 선교사가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힌두교(Hinduism)를 믿던 소녀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이 선교사는 그 하염없이 흐느끼는 소녀를 붙들고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소녀의 대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토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하면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감격과 처음에 믿던 신앙의 열과 체험이 마비되었을까 하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체험을 안타까워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폐기물은 없는가 ?
최근의 두산에서의 페놀 방출 사태
생기게 되는 페기물 / 당연히 생기며/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어떻게 어디다가 처리 하느냐가 문제 /
신앙에도 남아 있는 폐기물 / 이것이 남아 있을 때에 내 신앙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었인가 ? 그런 것이 내게 있다면 어떻게 처리를 할 것인가 ?
성경예) 요셉의 고백 (창45:1-15)
탕자의 용서받음 / 탕자 형의 담겨있는 폐기물 (눅15 11- 야곱과 에서의 만남(창33:1-17
에베소서4:30-5:3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말라- 악독노함 분노 분냄 등)
1. 내 속에 버려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무엇을 버려야 하나?(1-5)(31절)
가. 악독 쓰다는 말(bitterness)이다.
섭섭해 하는 마음, 기분이 상해 있는 마음이다.
예) 빌린 사람은 쉽게 잊지만 빌려 준 사람은 잘 잊지 못해/ 그러다가 섭섭한게 생기기 시작 살다보면 오해란 것은 생기기 시작 예) 목사님이 섭섭하고 권사님이 섭섭하고 집사님이 섭섭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존심, 멸시당함, 배반감을 당할 때가 있다.
?? 그러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떻게 하란 말인가 ?
억울한 일을 완전히 해결해서 후련한 경우가 별로 없다.( 서로의 이해는 항상 오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30])는 것은 슬프게 한다.섭서하게 한다/ 불편하게 한다는 뜻 그러니 속히 버려야 한다.
예) 어느 성도의 신앙 장애/ 알고 보니 어머니 계모에 대한 상처가 남아
나. 노함
분노의 감정이 부글 부글 끓고 있다는 것, 그러나 아직 터져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그저 속이 끓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위에서 산이 자꾸 나온다. 이런 분노의
감정은 계속하다보면 병들기 쉽다.
그러다 보면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이 불편하게 된다.
이것은 눈덩이 처럼 부풀어 오르다
다. 분냄
화가 터져 나오는 것
그러나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한다.
저질러놓고 후회하는게 바로 여기이다.
예) 가인의 경우
라. 떠드는것
떠든다는 것은 `두사람이 칼을 뽑아 쨍그렁거리며 칼을 부딪히는 소리이다`
남을 내 혀의 칼로 난도질하는것이다.`
예) 들어가니 모두들 와하고 웃어- ` 왜 웃으십니까?`
비판하는것(훼방은 비난하는 것)
남을 자꾸 입에 오르 내리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의 결과는 자기를 못 보게 한다.
마. 훼방하는것
떠드는 것이 비판하는 것이라면 훼방은 비난하는 것이다.
영어의 훼방이라는 slander는 야수들에게 쓰는 단어이다. 즉 양이
도망가는데 사자가 뒤로 따라와 서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짓이다.
성경:벧전 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두루 다니며 혀의 칼로 휘두르는 것은 누구의 짓 ?
예) 어떤 교인은 자기도 모르게 목회자에게 와서 남의 흉을 보는데 (이것은 걱정해주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 같아도 옳은 성도(거룩한 무리)의자세는 아니다.
** 이렇나 악독, 노함, 분냄, 떠듬, 훼방의 특징의 잘 드러나지 않고 잘 감출 수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간과하기 쉽고 마귀가 잘 이용한다.
예) 목사도 분노 속에서 강단에 설 수 있고 숨길 수가 있으나 ---
버려야 한다. 버리라 ! 페놀성분이 든 수도물 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알아야
한다.
성령이 괴로와 하시며 근심함을 알아야 한다.
2. 내 속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엡4:32) `서로 인자하게 여기며 서로 용납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가. 서로 친절(인자)하게 하라
서로 작은 것이라도 선을 베풀어 주는 행위가 용서의 치료제이다.
예) 어느 성도가 하루 종일( 출근, 업무 , 퇴근까지) 머리가 아파/ 그래 왜
그런가 곰곰히 생각하니 성령이 마음을 깨닫게 해 /
`너 아침 8시 반에 누굴 만났지?`
`예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좋지 않은 말을 했지 ?`
`예 그렇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땠지 ?`
`속상했습니다, 자식이 사람을 몰라보다니 내가 누군데 나를 무시해`하는
마음이 들면서 기분이 무척 나빴습니다`
`네가 누구냐?` -> 네가 그럴 처지냐 네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냐?
--> 회개 용서빌음
그후 또 만나는데 서로 인사해도 내게는 아직도 개운치가 않아
그래 기도하다가 생각난것이 롬 12장 21절이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냥 참고 이기려 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작은 선물을 하나 했는데 거기에서 놀라운 변화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 지금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고
*!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는 쉽다. 그러나 어려운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기쁨을 갖게 된다.
나. 불쌍히 여기라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라는 것
a) 상대방의 입장이되라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한마디만 해보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예) 상대방의 장점에 눈을 돌리고 `그래도 그런 면은 좋아`해보라
b) 성령님의 입장이되라는 것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정화한다.
성경) 엡 4:3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르 용서함과 같이 하라`
문제) 버리고 받아들이는게 컴퓨터처럼 이뤄지는게 아닌 우리 인간이다.
주기도문에서 :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종려 주일 고난 주간 - 과연 우리의 십자가란 것이 무엇인가 ? 무슨 의미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것은 화해와 용서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는다`- `너희가 누구이냐?
죽어야할 죄인이 아니냐,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위선자가 아니냐, 티끌은커녕 죄의 들보를 안고 살아가는 너희가 아니냐` - `그런데 너희를 위해 나는 죽는다. - 그러면 너희는 너 관계된 사람들에게 잘못된 사람을 정말 용서할 수가 있는가? 예) 요셉의 신앙 차원(창45:1-15)
분투하는 신앙
캐나다 동부의 도시 토론토에 수족관을 차릴 때의 일이다. 그 수족관에는 서부해안의 어류도 있어야 했으므로 서부의 도시 뱅 쿠버에서 서해안의 어류들을 기차로 수송하기로 했다. 큰 철통 에 산소공급 장치며 바다의 해수교환 시설을 면밀히 다 하여서 수송하는데도 일주일 후 목적지에 도착해 보면 많은 어류들이 죽어 있었다. 어류학자들은 많은 것을 검토한 후 몇 번을 시도 했으나 큰 진전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번은 그 어항에 큼직 한 문어를 한 마리 넣었다. 어항 속에서 이 문어는 가만히 있지 않고 슬금슬금 가서 어류들이 잠들만 하면 발로 건드려 깜짝 놀 란 어류들은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느라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일주일 후 목적지까지 한 마리의 고기도 죽지 않고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실은 바다에서 큰 고기한테 이리 쫓기 고 저리 쫓기던 고기들이 아늑한 어항에 들어오니 만사가 다 편 안해져서 안심하고 잠들다보니 결국 죽어버린다. 쉬지않고 활동 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활동하지 않고 잠만 자게 되면 하나님 은 우리의 삶 속에 문어를 넣어 계속 괴롭혀서라도 잠들지 못하 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핍박 속에 성장하고 순교의 피를 흘린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신앙으로 시험 감당
내 용 : 부산에 어떤 장로님의 간증이다.
1.4후퇴 때 피난길에 부인과 같이 임진강을 건너야 하는데 부인의 임박한 해산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밤12시쯤 됐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해서 열었더니 `손들엇!`하는데 인민군 하나가 총을 들고 나타났다. `동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구! 동무는 인민공화국이 좋은가? 대한민국이 좋은가?`질문을 하였다. 그 장로님은 많이 배워 똑똑한 분인데 하는 체하지 아니하고 `저이 뭐 압니까? 호박 같은 세상에 둥글둥글 살아갑니다. `대답했더니 `동무 희미한 동포야! 하더니 총살 집행이야 하면서 나가자고 할 때 부인이 일어나서 벽에 걸린 윗저거리를 입고 가시라고 잡아체는데 주머니에서 포켓 성경책이 떨어졌다. `동무 예수 믿소? `이왕 죽게 되었으니`나 교회 장로요`라고 대답했다. 이때! 그는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오 수색대원이요`하면서 안에 입은 국군 복을 보여주면서 쌀밥 약 구호 품을 갖다 주더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적 신앙
어떤 어머니가 5살난 딸을 데리고 점쟁이에게 갔더니 그 아이는 43살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같은 암시를 받은 딸 아이는 죽을 이유가 없는데 그 나이에 수술을 받다가 43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5살때 점쟁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왔기 때문에 죽었다고 합니다.
록 뮤직의 스타인 엘비스 플레슬리(Elvis Presly)가 43살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가 43살에 죽을 것을 늘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죽을 병이 아닌데 그도 43살에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신적인 것에 매여서 인생을 두려움속에 떨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력 설날이되면 사람들은 무슨 화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을까하여 점을 치기도 하고 부적을 사서 문지방에 부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요,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 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바로서지 못한 사람 입니다.
어떤 교인은 점치는 사람에게 가서 점을 쳐보니가 "당신 점쾌가 10월이나 12월이 좋지 안으니 조심하시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하나님, 10월과 12월에 점쾌가 나쁘니 이 악운이 다 물러가게 하여 주십시요"하고 기도하는 어리석은 교인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샤마니즘적인 신앙입니다
신앙과 실천
마경일 목사가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최하는 선교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하여 1959년 9월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교회의 정체되어 있는 모습과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남쪽에서는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교회지도자들 중에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회 전체의분위기와 오랜 습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경일 목사는 어느 흑인 교회에서 3일간 집회를 인도하고 그 교회의 흑인 목사와 인종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흑인 목사는 백인들의 크고 화려한 저택들을 가리키며 털어놓았다.
"저들은 다 좋은 크리스천들입니다. 공산당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아주 냉대합니다."
분투하는 신앙
캐나다 동부의 도시 토론토에 수족관을 차릴 때의 일이다. 그 수족관에는 서부해안의 어류도 있어야 했으므로 서부의 도시 뱅 쿠버에서 서해안의 어류들을 기차로 수송하기로 했다. 큰 철통에 산소공급 장치며 바다의 해수교환 시설을 면밀히 다 하여서 수송하는데도 일주일 후 목적지에 도착해 보면 많은 어류들이 죽어 있었다. 어류학자들은 많은 것을 검토한 후 몇 번을 시도 했으나 큰 진전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번은 그 어항에 큼직한 문어를 한 마리 넣었다. 어항 속에서 이 문어는 가만히 있지 않고 슬금슬금 가서 어류들이 잠들만 하면 발로 건드려 깜짝 놀란 어류들은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느라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일주일 후 목적지까지 한 마리의 고기도 죽지 않고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실은 바다에서 큰 고기한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던 고기들이 아늑한 어항에 들어오니 만사가 다 편 안해져서 안심하고 잠들다보니 결국 죽어버린다. 쉬지않고 활동 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활동하지 않고 잠만 자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문어를 넣어 계속 괴롭혀서라도 잠들지 못하 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핍박 속에 성장하고 순교의 피를 흘린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신앙인과 실패
전기대학 합격자 발표가 끝났다.희비애락의쌍곡선이 수험생 가슴에 파고들고 있다.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수험생은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양 활보하고, 불합격의 쓴잔을 마신 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을 잃고 면식 자를 기피하며 방안으로 파고 들어간다. 수험생도 수험생이지만 부모 역시 죄인처럼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며 할말을 잃는다. 심지어 어떤 불합격 수험생을 둔 부모는 창피하다고 교회 마져 나오길 꺼려한다.고 3이되어 자녀를 대학에 합격시켜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 출입마저도 제한하고 공부시켰는데 불합격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게지만 한번의 실패가 그렇게도 심각한 문제일까?
패자는 설자리가 없는 곳이 오늘 우리내 삶의 현장인지라 실패는 곧 악과 결핍,수치라는 함수로 연결시켜버리지만 이 세상에는 모두의 실패도 모두의 성공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하여 보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특히 신앙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실패는 항상 죄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만도 인과응보적 댓가로 지불되는 것은 아니다.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기독교의 일반론적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상황에서 개별적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기적도 있고,사탄의 유혹도 있고,자신의 연약함도 있고,
환경적 제약도 있다.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나 조건에 정확히 반응하는 슈퍼 컴퓨터로 오해하여 내가 이정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였으니 마땅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여야 할텐데 실패를 하였으니 신앙이 모자라서,개인적 결핍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좌절하면 실망 만 할것이 아니다.
실패란 누엇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 그리고 자신의 의도대로 무엇인가가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실패라고 한다.그렇다면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패가 아닐수도 있다.기독교인의 삶이란 나의 의도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한 실패와 성공의 최종적 판결은 하나님의 의도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우리가 실패라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성도는 긍극적으로는 실패란 없다고 보아야 한다.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실패는 단편적으로 실패처럼 보일 따름이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실패는 아니다
삶의 과정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시험에 불합격하고,사업에 실패하고,병들고,죽고,실연당하는 것은 사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실패와 고통을 전혀 거치지 않는 사람도 있게 지만 그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자라면서 당연히 거치는 위기라 하여 이러한 것들을 자신만 유독 격는 사건위기와 구별하여 발달위기라 한다.입시의 실패는 나만이 겪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대한민국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다. 어릴땐 모든것이 자신의 뜻대로 될 것 같이 생각하지만 성장하여 이러한 실패의 과정을 통하여 세상의 다른차원-타인과 한계,부정과 고통의 차원을 실제적을 체험하여 알게 된다.실패는 반드시 수치 고통,결핍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신앙인은 실패 속에서 하나님이의 주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느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자고 했다.그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노를 저어 항해를 하였다.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몰아 닦쳤다.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노를 저어 갔는데 왜 그들은 풍랑을 만나 침몰의 위기를 당해야 했을까?
순도 높은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련소의 용광로가 필요하다.그리고 강도 높은 칼을 만들기위해서는 대장장이의 힘겨운 당금질과 다드미질이 필요하다.마찬가지이다.견고하고 정결하며 순수한 신자를 만들 기위해,그리고 실패속에서 인간의 한계상황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
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바르게 적용할수 있는 신앙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패의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다.온실 속의 꽂은 그당시는 풍성하게 보이지만 실외에서는 연약하다.그러나 폭우와 갖은 기후의 변동에 적응하며 자란 들풀은 거칠게 보이지만 강인하다.예수께서는 폭풍
의 위기를 당한 그들에게 악이나 수치,결핍이라는 함수로 그들을 질책하지 않으셨다.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 그들에게 도전했고 자신이 모든것의 통치자이다는 사실 즉 자연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자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실패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신앙인은 실패할때 자신의 결핍 죄의결과라는 단순 논리로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자학하며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가서는 안된다.실패의 순간이 다가올 때 그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하고 냉철하게 원인을 분석해 그원인을 치유하며 실패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실패없은 생을 생각해 보라.그 사회와 그 인간이 어떻게 되겠는가.모든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한다면 이세상은 하루도 존속하기 힘들 것이다.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자신의 마음대로 다 이룬다면 하나님이 필요하며 하나님을 찾겠는가.시간 속에 나타나는 실패는 인간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이며 이 지구를 존속하게 하는 원리이다.그러므로 실패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성공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신앙인이 궁극적 실패는 없다.
불같은 신앙시험
본문: 단3:13-18
“그리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이니하겠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18)
Ⅰ. 느부갓네살 시대의 신앙시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당시 세계를 평정하고 그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두라 평지에 높이 27미터, 폭 2미터 70센티미터의 거대한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낙성예식 때 금신상에게 절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만일 거역하는 자가가 있으면 불 가운데 던져 넣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였습니다. 믿음없는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람들의 행동은 바보스럽기 그지 없었으나, 믿음의 사람들이 볼 때, 이들은 믿음이 무었인지, 어느 정도 믿어야 되는 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음도 불사하는 일사각오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었입니까?
Ⅱ. 일사각오의 신앙태도
1)형통한 날 뒤에 갑자기 찿아오는 불같은 시험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 가운데 왕이 잃어버렸던 꿈을 찿아주고 해석을 함으로써 일약 국무총리와 도지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신앙을 포기하고 우상에게 절하라는 불같은 시험이 찿아왔습니다. 언제 불같은 시험이 찿아옵니까? 성경은 기도응답 받은 후에, 형통한 날이 찿아 왔을 때 시험이 온다고 경고하고 있읍니다. 형통한 날에는 더욱 겸손하시고, 곤고한 날에는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믿음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은 일사각오로 신앙을 지키는 자와 언제나 함께하심.
그들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풀무불 가운데 죽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사람이 불속에 던져졌지만 네사람이 불속에 걸어다녔습니다. 그들은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순교를 허락하신다면 언제라도 순교할 각오가 되어있었습니다. 이처럼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사는 성도는 사나 죽으나 그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합니다.
3)하나님은 일사각오의 신앙을 통해 더욱 더 영광을 받으심.
그들에게 있어서 풀무불은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무서운 심판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믿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신앙의 절개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형통한 날보다도 곤고한 날에, 건강할 때 보다도 아플 때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더욱 더 귀합니다. 지금 인생의 어떠한 풀무불 가운데서 싸우고 있습니까? 끝까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증인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 :1) 우리는 관객으로 꽉 메운 올림픽 경기장에 결승점을 향해서 달리는 주자들과 같다.
동서고금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히브리 11장의 신앙의 용사들과 순교자들이 우리의 신앙생활 현장을 지켜보며 격려해 주고 있다.
사자굴과 풀무불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우리의 증인이다.
한 마디만 부인하면 살려줄텐데 86년간 나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는 일이 없는 주님을 어찌 부인할 수 있느냐고 화형을 받은 폴리캅, 모두 우리와 동주자다.
안티오커스 애피파네스가 BC170년경 유대종교를 말살하려고 대 박해가 일어났을때 일곱형제가 순교한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이다. 7형제를 목전에서 차례차례 차바퀴에 매달아 돌려 쇠못에 찢겨 죽이고 철못손으로 찢어서 죽이고 달군 가마에 볶아 죽이고 쇠갈구리로 가슴통을 꿰어 매달아 죽이고 점점이 자르고 돌방아로 깨고 끓는 가마에 끓여 죽여도 오히려 여호와를 찬송했던 그런 사람들이 우리 선배들이다.
쟌 다크의 신앙
프랑스를 영국군에서 해방시키려 신앙인 군대 6,000을 가지고 오를레앙성을 향했던 프랑스의 애국소녀이며, 성녀인 쟌 다크는 영국군을 깨뜨리고, 오를레앙 성에 갇혔던 프랑스의 군인 뒤노아를 구출했읍니다. 이어서 랑스에서 프랑스왕 사를 7세의 대관식까지 행하기에 이르렀으나, 왕의 측근들의 시기로, 영국군에 팔려, 루앙에 유폐되기에 이르렀읍니다. 박해하는 자들이 잔 다크에 향하여, 그녀가 외톨이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고 하자, 쟌 다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읍니다.
`하나님과 함께 혼자 있는 편이 좋읍니다. 하나님의 우애(우애)는 나를 버리는 일이 없고, 그 권고도 사랑도 나를 실망케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죽기까지 그의 능력에 의해 계속 싸울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의 깊이는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5,56.
어느 저녁 무렵, 한 노인과 그의 손자가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령, 계절은 왜 바뀌며, 여자들은 왜 지렁이를 싫어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마침내 손자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나요
?" 그 노인은 잔잔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이젠 점점 하나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우리의 하루 하루가 바로 이 노인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라보며,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천국 생활을 준비한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로 날을 거듭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더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
외신이 전하는 한 작은 교회의 모습이 있다. 1978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소련의 크리스챤 7명이 저지를 무릅쓰고 뛰어 들었다.
이들을 길거리에 내 보내기에는 인권을 말하는 미국 양심에 저해되고, 서방으로 이주시키자니 소련과 묘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 불청객들은 그동안 미국 대사관의 지하실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굳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생명의 투쟁이다. 이들의 신앙은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신비를 증언한다. 그것은 탄압과 박해가 신앙을 죽일 수 없다는 산 증인이다.
바로 이 교회가 처음 교회의 신앙의 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인 것이다.
'비행 착각' '신앙 착각'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 보면 자주 '비행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고 한다.
여객기는 주로 같은 방향으로 비행 하지만, 전투기의 경우 공중에서 빙빙 돌며 한참 날다 보면,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하늘이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구분을 잘 못해서 당황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또 같은 고도에서도 비행기가 선회 비행을 하면서 회전을 할 때는, 속력을 좀 내면 비행기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속력을 좀 늦추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은 같은 고도에서 날고 있어도 조종사는 종종 이와 같은 비행 착각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가 비행 착각을 일으커 어느 쪽이 바다이며 어느 쪽이 하늘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을 때나, 비행기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지 밑으로 내려 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려고 할 때에도 자기의 감각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반드시 계기판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조종할 때, 조종사의 감각과 비행기의 계기판이 같다면야 구태여 계기판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다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행기에 계기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행 착각이 일어날 때에는, 조종사 자신이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계기 판에 나타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공중에서 사고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비행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 역시 자주 신앙 착각에 빠진다.
'신앙 착각'이란 무엇인가.?
실제로 비행기가 같은 고도에서 비행을 하고 있어도 조종사가 비행 착각에 빠지면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생각이 분명히 다른데도 말씀보다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믿는 신앙 착각을 많이 일으킨다는 것이다.
비행 착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계기판을 보아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착각 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에 깊은 신앙의 착각 속에 빠져 드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만날 때,
"당신은 정말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정확하게 분별해야, 그 사람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을 때 말씀으로 바로잡아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나에게 신앙 상담을 요청 할 때, 나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해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서 빗나가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기뻐하며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옹고집과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말씀이야 어떠하든지간에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이 옳은 것으로만 믿고 있었다.
비행 도중에 계기판을 보지 않은 조종사는 자기의 감각과 판단만 믿는 것처럼, 성경을 읽지 않거나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은 신앙의 올고 그름을 자기의 관념이나 기준으로써 판단하기 때문에, 말씀은 외면한 채 자기의 생각에 올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믿는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은 자기 생각에 '내가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저주를 받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고,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워하며 절망 속에 빠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전혀 은혜를 입지 못했다.
반면에, 세리나 간음한 여자, 십자가의 강도 같은 추한 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입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큰 죄인인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성경 말씀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보다도 우리의 판단 기준과 감각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려고 한다.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보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우리가 큰 죄인으로 나타나 있어도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덜 짓고 살아 온 사람은 자기가 그리 큰 죄인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종사는 비행기를 조종할 때에 자기의 감각에 어떠하든지 계기판의 바늘만 믿어야 하듯이,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야 어떠하든지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고 그 말씀의 증거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녀에 신앙교육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22:6)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육학자들 은 사람의 사고와 인격은 대개 여섯살 이전에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력을 기울여 양육할 때 자녀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떠나 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젖을 뗀 후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 왕자 로서의 교육을 받았지만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받은 야훼 신앙교육 으로 인해 늘 야훼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40세에 민족해방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다음 미디안 광야에 들어가서도 신앙을 잃지 않아 40년 후 소 명을 받고 기어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치단결의 신앙
어떤 집에 아들 오 형제가 서로 밤낮 분쟁 불화로 부모의 속을 태운다.
마침내 속이 상한 아버지는 별세하게 될 때에 아들 오형제를 불러 놓고 마지막 유언으로 아들들에게 나뭇가지를 한 개씩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나뭇가지 한 개씩을 꺾어 보라고 하였다.
아들들은 힘 안들이고 쉽게 꺾어 버린다.
다음에는 다섯 개의 나뭇가지를 한데 묶어서 꺾어 보라고 하니 꺾을 장사가 없는지라, 아버지는 그렇게 너희 오형제가 제각기 분열하면 속히 꺾기어 망할 것이나 너희 오형제가 일심 단결만 하면 너희를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고 한마디를 남겨 놓고 운명하였다.
아들 오형제는 그 유언을 지켜 축복의 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삶 나의신앙<이영민>
{여호와는 너의 그늘 , 너를 지키시는 이, --- 네 오른편에 서 계신다.}(시편 121)
나의 신앙이다. 그는 나의 여로(여로)속에 함께 계신다. 이 신앙과 생의 신념이 나의 젊은 날, 일제말의 어려운 행로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흐르고 있었다. 집떠난 생활속에서 교회생활은 드문드문 출석하고 활동적이 아닌 나였지만 .
1943년 봄에 학교를 마치고 전북 도청 토목과에 취직햇다. 19세 때이다.그때 [고원]이란 지위는 상당한 우대였는데 이는 당시 동양최대요 조선땅 최초의 갑종학교인 경성공고 출신인 까닭이라고 말들을 했다.
초임금이 45원이었다. 첫 월급을 받은 날의 서글픔이 기억난다.
그때 같이 졸업했던 일본인들은 여기저기서 한결같이 우리보다 60%를 더 받았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그간 일본이 침략행위의 호도책으로 표방해 오던 조선민족 동화론이나 내선일체(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하기야 그러한 차별적 우대는 수준급 일본인들을 이 땅에 유치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땅은 일본의 아시아 대륙진출의 중요한 발판이었던 것이다. 경성공고에는 훌륭한 선생이 많았고 지사(지사)형 사람들도 있었다. 도청 토목과장 이하 간부들도 거의 우수한 일본인 기술진으로 짜여 있었다. 사실 그 당시 아시아를 석권하고 지배하려는 일본인들의 강렬한 의지는 이 땅의 모든 분야에 흐르고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도청에 있으면서 많은 동료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며 일했다. 나의 첫 직장이요 사회생활의 첫 걸음이다. 이 때의 경험과 이들 교회밖의 일반사회 동료 친구들과의 만남이 후에 나의 교역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보다 넓은 사회안목과 인간이해의 깊이 면에서 말이다.
나는 교량설계도 배우고 어려운 삼각측량도 했다. 이리 치수(치수)사무소에 파견되어 제방공사 설계를 하고 이평 근처의 동진강 유역과 김제의 두월천 제방공사 현장감독을 했다. 흔히들 말하는 [공사판 현장]이다. 감독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더우기 지난 날은 한층 거칠고
어수선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계에서 나이 어린 감독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현존(현존)]을 생각하며 지낼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스무살때 징병검사를 받았다. 제1을종의 판결을 받아 당장엔 군대에 가지않게 되었다. 어렸을때 앓은 폐렴이 폐에 자국을 남긴 까닭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징병검사때 아무리 목청을 높여 보아도 소리가 작다고 군의관으로부 고야단을 맞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내 음성이 체격에 걸맞지 않게 작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 말기에 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교회장로로서 아버지는 불순자의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다가 점차 심해져가던 쌀 공출량을 산출하는 작황검사의 불공평성과 압력은 우리집 같은 대농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척집을 위해 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어 우리의 한해 농사가 모두 그 일을 처리하는데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가세가 다시한번 크게 기울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의 어머니의 강한 믿음과 생활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병인 기침병으로 약한 몸이면서도 아침 일찍부처 일꾼들을 지휘하고 가계를 꾸려 나가셨다.
부모님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취적이고 자녀를 위해서는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 고장에서는 우리집이 처음으로 딸들을 여학교에 보냈는데 그래서 누님들(이영자, 영수)이 전주와 서울에 가서 각각 공부를 했다.
그리고 후에 동생들(이현승, 현국, 현덕)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대학공부의 꿈을 이룰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믿음의 가정의 축복으로 여겨진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의 소식을 나는 숙부의 김제 병원집에서 접했다. 라디오에서 항복을 고하는 일왕의 침통한 목소리를 들으며 벅찬 감회와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다. 곧바로 전주에 가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사무실에서 연락이 올때까지 화호리 집에 내려가 있기로 했다.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기쁨과 감사와 경축의 물결속에서 바쁘게 지냈다. 마을의 일본인들은 숨을 죽이고 칩거하고 있다가 큰 사고없이 집단적으로 떠나갔다.
화호리 일대의 큰 경축대회가 학교교정에서 치러진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누이동생(이영림)과 함께 이중창으로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무슨 용기로 그런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하여튼 우리는 그때 헨델의 대합창 행진곡, 개선의 노래를 불렀다.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
결코 잘 부른 노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 가슴속에 깊은 인상과 감명을 준듯, 지금도 그때 그 일을 기억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반세기 전 이야기이다. 그때만 해도 교회밖의 많은 사람들이 옥외에서 그런 감동적인 환희의 노래를 이중창으로 들어 본 기회가 그 고장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광복의 찬 x악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였음을 느끼며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신앙인이 받은 능욕의 면류관
보헤미아(뵈멘)의 종교 개혁자 히에로니무스(영어로는 제름) 는 교회 정치의 부패,성직자의 불품행을 탄핵했기 때문에,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소환되었는데, 그 개혁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화형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는 다음 과 같은 말을 했다. `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처럼 나는 그를 위하여 기쁨으로 능욕의 면류관을 쓰노라`고. 그리고 그는 화형장에 나가면서 찬송하고, 불에 타서 말소리 조차 사라졌으나, 그 후에도 불타는 입술을 빨 리 놀리면서 약 15분동안이나 기도했다는 것이다.
말세에 처한 신자는 누구이거나 때로 이 세상사는 동안 이러한 능욕의 면류관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적 치유
미국 가정의학회의 양케로비치 파트너스박사는 16일 하버드대학에서 열린 치유에 관한 학술회의에서 『2백69명의 가정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99%가 환자의 종교적 신앙이 질병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는 연구보고서를 제출했다고 AP통신이 보도.한편 다트머스의과대학 연구팀도 이 회의에 제출한 연구보고서를 통해 혈관바이패스 수술을 받은 심장병환자 들은 수술 후 6개월 안에 사망할 확률이 평균 9%인데 비해 교회 다니는 환자는 5%에 불과하다고 보고.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육, 교회, 믿음,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효도,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역경을 이기는 침된 신앙
역경이나 시련이라는 것은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 속에서 견딥니다. 아니 역경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합니다. 가짜는 역경이 오면 떠나갑니다. 더 이상 이것이 내게 유익하지 않고 편리하지 않다는 이기심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것이 돌밭 같은 마음입니다. 옛날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믿었습니까?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그 신앙을 견디고 지켰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모택동으로 인해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추방명령을 받아 모두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던 선교사 한 분이, 제자훈련을 받고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자란 중국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물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텐데 견딜 수 있겠소?" 그랬더니 그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차를 바라보면서 말을 잇더랍니다. "선교사님, 차가 뜨겁죠?" 그러면서 차 티백을 들었습니다. "이 티백이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맛을 잃었나요? 아마도 뜨거운 물 속에서 진짜 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저는 이 신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난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을 이깁니다. 역경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밭 같은 마음은 역경 가운데 신앙을 부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참된 신앙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앤드루 뉴버그 교수는 “종교는 뇌의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대뇌의 한 부분인 두정엽(頭頂葉)의 활동이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두정엽의 활동이 정지되면 사람들은 우주와 하나가 된 듯한 몰아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캔자스대학교의 대니얼 뱃슨 교수는 “두뇌가 종교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아노가 음악을 만든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고 예배하는 인간의 기본 정신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외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참된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성급한 현대인과 신앙인
우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공업 시대에 살고 있다. 속도기가 설치되어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가중된 속도감은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경험할 수 있다. 하루 24시간은 우리가 달력에 표시해놓은 모든 계획들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짧다.
우리는 언제나 서두르고 이 일에서 저 일로 달려가고 있다. 너무나 긴장이 쌓여서 터질 것같이 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스테레오,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계속 틀어놓는다.
우리는 마치 너무나 빨리 돌고 있어서 내릴 수도 없는 회전기에 타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활동적이 되어라. 바빠야 한다. 부지런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가만히 있어라. 조용하라. 서두르지 말아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단순히 활동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고 그 안에서 마음과 영이 잠잠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 영혼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소이며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 다른 모든 소리를 막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만큼 조용히 있지 못하고 계속 말을 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완전히 가만히 있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열심히 애쓰면 애쓸수록 그것은 더 어렵게 된다. 잊어버리고 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날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기도 한다. 우리 주위의 소음들은 더욱더 커진다. 그렇지만 우리 영혼의 안녕을 위해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정신과 의사인 길버트 리틀 박사는 정신건강을 위한 간단한 규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쉼이란 우리의 신체적인 생활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신앙의 대상
어떤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공처가 선발대회가 열렸습니다. “누가 진정한 공처가인가!”진정한 공처가를 가려내기 위해서 빨간색 깃발과 노란색 깃발을 꽂아 놓고 수없이 몰려든 공처가들에게 심판관이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 공처가라고 생각하면 노란 깃발 앞으로 모이시오.”거의 모든 泳宕湧?다 노란 깃발 앞으로 가는데 한 사람만 빨간색 깃발 앞에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심판관이 그 사람에게 왜 그렇게 혼자 그 쪽에 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내 아내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합도 아마 그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한 증거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의 그 모든 요구와 그들의 도전을 어떻게 어떻게 물리치셨으며 얼마나 능력있는 분이셨던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아합의 입술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없었던 것입니다. 표적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신앙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표적을 목격했읍니까? 그러고도 그들이 철저한 불신앙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보십시오. 아합에게 표적이 부족했읍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아직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표적이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주관적인 체험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생각, 판단도 주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역사가 증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한 그 그리스도만은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대상입니다.
교회이름-목회비전, 교회 신앙고백 표현
장로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어떤 것일까. 또 요즈음 가장 인기있는 이름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들과 함께 최근 만사운동의 영향으로 교회개척의 열기가 새롭게 가열 되면서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살펴보면 그 이름을 통해 달라지는 교회의 개척의 양상과 목회자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 변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장로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이름이다. 1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새문안, 남대문, 연동, 부산진, 서교동교회 등은 모두 그 이름으로부터 지역성이 강조된 교회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 교회 명칭의 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어 도시지역보다는 농어 촌지역 등 보수성이 강한 지역에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국 노회 가운데 도시와 농어촌 지역이 고르게 분포해 있는 서울노회의 경우를 보면 농촌지역에 위치한46개의 교회 모두는 예외없이 지명만 들어도 소재지를 알 수 있을만큼 지명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반면 도시지역의 경우에는 일부 교회가 지역명과 무관한 이름을 갖고는 있으나 그 비율도 40퍼센트에 못미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 대부분은 「교회명=지역」이라는 전통성에 기초해 오늘날도 교단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교회의 이름에 적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변해가는 이름의 추세
그러나 이러한 전통과 함께 점차 지역과 무관한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교단 분열과 함께 70년대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게 됐다는 점이다. 성장과 발전 분립의 순환속에 필연히 동일한 지역내에도 여러 개의 타 교단 교회나 같은 교단의 교회가 설립되면서 새롭게 출발하게 될 때는 이미 기존지역의 명칭을 사용하는 교회와의 구별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가장 손쉽게 채택된 방법들은 지명과 함께「중앙」이나 「제일」등의 부가명칭을 첨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후발교회이면서도 「새」 「신」이라는 첨가어뿐 아니라, 「제일」이나 「중앙」과 같이 의미상 차이가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마저 생겨나게 됐다.
둘째는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들이 갖고 있는 참신성과 시대정신의 반영등을 들 수 있다.
개척교회들은 대부분 그 이름에서부터 변화를 시도해 지역명칭과 같이 「주어진」교회의 명칭을 수용하는 대신에 목회적 비전이나 교회의 신앙고백 등을 아름다운 성서적 어감과 신앙적 용어들로 표현한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인데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이미 지역명칭을 사용하는 교회들이 포화상태에 이른것도 한 요인이 됐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본 교단 총회에서 발행한 96년도 교회주소록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특징은 앞서 지적한 지명을 사용한 예라 할 수 있지만 명칭은 대광(24개) 벧엘 영광 성광(23개) 등으로 나타나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중에는 교회의 사명인 「빛」을 담고 있는 교회의 이름이 셋 이나 되는 것도 한 특징으로 꼽을만 하다.
■ 새로운 변화
이러한 변화는 결국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를 중심으로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지명이나 혹은 「반석」「신성」「벧엘」등 명사 위주의 교회 명칭에서 형용사 혹은 부사적인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교회의 이름은 그 자페로 하나의 신앙고백적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됐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의 교회」「~(하)는 교회」등을 들 수 있는데 선호되는 이름으로는 주님의 기쁨의 나눔의 만민의 믿음의 교회와 아름다운 참된 복된 교회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땅끝까지 사랑하는 서로사랑 한알의 밀교회 등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징은 시대 정신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이름을 가진 교회들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가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부각됨에 따라 최근 개척되는 교회 가운데는 늘푸른 작은 나무교회 등이 있으며 물댄동산교회의 경우는 동명의 교회가 세 곳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개척돼 97년도 교회주소록에 처음 수록된 포항노회「푸른마을교회」 (이상은목사 시무)의 경우는 아름다움과 함께 목회적 비전을 엿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한데 동 교회의이 목사는 교회 이름의 배경에 대해 『「푸른」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마을」은 개인위주의 생활에서 공동체성 회복하자는 시대적 정신을 담고 있다』면서 『앞으로 교회 이름에도 조금 가벼운 경향은 있지만 순수국어가 사용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 만사운동의 영향도
이밖에도 최근 본 교단 총회가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 온 만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기념교회 개척운동이 확산돼 가면서 이에 따라 교회 이름에도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고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지명과 기성교회 명칭을 덧붙힌 이름으로 경주충신 고양자양 태백연동 광주충신 동부광성 일산 명성교회 등으로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교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의 형태는 이미 영락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사용하던 것으로 최근들어 이러한 경향이 확산되는 데 대해서는 긍정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 총회전도부장 유의웅목사(도림교회 시무)는 『개척교회에 있어 개척을 지원한 교회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것은 지역교회와의 유대감의 고조뿐 아니라 목회적 경험의 전수 등 후속적 지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지적하는 이들은 이미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시무)가 「미래 사회와 미래교회」제하의 저서에서 지적한 바 있는 21세기 교회의 특성 중 하나인 「개교회 주의 퇴조」의 부정적인 면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회 개척도 교회의 독자성보다는 체인식의 교회 개척을 부추기게 될 것으로 우려하며 최근의 기념교회들에 붙여지는 교회의 명칭을
그 예로 지적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본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은 「개교회」로 존재한다고 볼 수 는 없다. 이미 노회 산하의 지교회로 설립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명칭을 통해 굳이 특정교회와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총회 노회 교회로 이뤄진 교단적 유기성과 별도의 관계를 중복 설정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소중한 이름 「교회」
그 지역의 세워진 교회가 지역적 대표성을 갖고 이름에서부터 지역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교회 그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이름은 분명 우리 교회가 지닌 소중한 전통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듣기에 아름답고 소중한 의미를 가진 교회 이름을 갖는 것은 결코 소홀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이 이땅에서 환영받고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이름이 「교회」가 「교회」로서 기본적인 이름에 걸맞는 사명을 다할 때일 것이다.
신앙과 건강
지나치게 건강에 집착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이 드물다.‘건강에 집착하는 삶’과 ‘건강지향적 삶’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건강은 지속적인 생활의 열매지 순간적인 비약이 아니다.일시적인 건강의 체험이 곧 실제적인 건강증진을 의미하지는 않다.
주관적인 체험을 절대시 하거나 옛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곰쓸개 등 건강을 위해 온갖 것을 먹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한국인이 보약이나 몸보신에 집착하는 것은 건강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현대의학으로는 이상이 없다는데 자기 자신은 분명히 이상을 느끼는 현상,즉 ‘몸이 허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반건강’이라는 병아닌 병 때문이다.
반건강의 상태는 불건강으로 갈 수 있고 건강으로도 갈 수 있는 교차로다.아직 가시적인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신호등이다.이 신호를 보약이나 몸보신이 필요하다는 사인으로 잘못 봐서는 안된다.
세속문화의 영양을 받아선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어떤 극적인 체험이나 단순한 비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신앙과 건강은 단순하지 않다.결코 순간적인 경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철저한 신뢰와 세밀한 순종이 더욱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