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11.112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끌고 가는 사람과 밀고 가는 사람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이는 '하륜'
전위를 거두어들인다는 결정을 내린 태종 이방원은 심신이 지쳐 있었다. 국정을 멀리 하고 쉬고 싶었다. 개경으로 피접하고 싶다는 뜻을 하륜에게 밝히자 반대했다. 왕도에서 너무 멀다는 이유다. 안암동에 있는 검교호조전서 김식의 집을 수즙(修葺)하라 이르고 인소전을 찾았다. 전후사정을 모후에게 고하기 위해서다.
다음 차례는 태조 이성계가 기거하고 있는 덕수궁(德壽宮)이다. 혼나러 가는 길이다. 길창군(吉昌君) 권근과 옥천군(玉川君) 유창 그리고 지신사 황희가 시종했다.
"나라를 전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인데 왕이 나에게 고하지 아니함은 무슨 연유인가? 더구나 왕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벌써 희어졌나? 학문이 아직 통하지 못하나? 사리를 알지 못하는가? 갑자기 물러나 편안히 쉬려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내가 백세를 맞은 뒤에는 자의대로 행하게 두겠지만 아직 죽기 전에는 다시는 이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신(臣)이 혼자 들어와 모시고 있으니 부왕의 꾸지람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태종 이방원은 머리를 조아렸다. 시종한 신하들이 멀리 있으니 더 심한 꾸지람을 주어도 달게 받겠다는 뜻이다. 권위를 자랑하는 임금이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이다. 그 또한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라 태상왕이지 않는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조 이성계가 지신사 황희를 불렀다.
"큰 잔(盞)에 술을 부어 그대의 주상에게 권하라."
선위파동을 용서한다는 벌주(罰酒)다. 황희가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올리자 태종 이방원이 부복하여 자리를 피하며 아버지에게 먼저 드리라고 사양했다.
"비록 너의 벌주잔이나 내 또한 마음이 흐뭇하여 먼저 마시겠다."
세자를 강하게 만들어라
안암동 김식의 집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한 태종 이방원은 강무(講武)에 나섰다. 오늘날의 군사훈련이다. 강원도 철원과 평강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 태종 이방원은 포천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환궁한 태종 이방원은 대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광주에서 강무를 강행했다. 왕으로서 군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태종 이방원은 세자로 하여금 종묘에 배알하고 인소전에 제사를 올리게 하는 한편 혹독한 학문 연마를 독려했다. 친밀감이 쌓이면 나태해진다는 이유로 세자사(世子師)와 서연관(書筵官)을 수시로 교체했다. 세자와 죽이 맞아 장난놀이를 한 세자궁 환관(宦官)의 종아리를 때리는가 하면 환자(宦者)의 볼기를 때렸다.
임금이 직접 환관과 환자 노분의 볼기를 때렸다는 소식을 접한 세자사 성석린이 세자궁 식구들을 소집했다. 자존심 상하고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다. 세자사 성석린이 빈객(賓客) 권근, 유창, 이내, 조용과 서연관(書筵官)을 불러놓은 자리에서 권근이 세자에게 힘주어 말했다.
"보통 사람은 반드시 배워야 입신하지만 세자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아닌데 꼭 글공부를 해야 하느냐?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옳지 않소. 보통 사람은 비록 한 가지 재주만 능하여도 입신할 수 있지만 상위(上位)에 있으려면 배우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고 정치를 하지 못하면 나라는 곧 망하는 것이오."
세자의 장래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세자 공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서연관(書筵官) 문학(文學) 정안지, 사경(司經) 조말생을 불러 명했다
"이제부터 서연에 입직(入直)하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있을 때에도 좌우를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만약 듣지 아니하거든 곧 와서 보고하라."-<태종실록>
시관(侍官)을 별도로 불러 꾸짖었다.
"요즘 듣건대 세자가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은 너희들의 소치이다. 세자가 만약 다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면 마땅히 너희들을 죄줄 것이다."
서연관 관원들과 세자궁 시종들을 직접 챙기며 세자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명나라 황실의 황녀(皇女)와 세자 이제를 혼인시키자는 의견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원나라 황실의 공주가 고려왕실에 하가(下嫁)하여 국가경영에 지대한 문제를 야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아연실색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신하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 불쾌했다. 비록 나라가 약소하여 중국에 사대하지만 신성해야 할 왕실의 혼인이 예속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둘러 김한로의 딸과 정혼한 태종 이방원은 세자와 황녀의 혼인 문제를 자신도 모르게 의논한 민제와 하륜 등 대신들을 불러들여 경위를 설명하라 명했다. 나라를 위함이었다는 원로대신들의 발명을 받아들여 그들의 죄는 공신이라 불문에 붙였다. 애꿎은 조박, 정구, 이현, 조희민, 공부, 안노생이 순금사(巡禁司)에 하옥 되었다 조박만 양주로 귀양 떠났다.
강무를 실시하여 무신(武臣)들의 군기를 다 잡은 태종 이방원이 문신(文臣)이라고 느슨하게 놓아줄 리 없었다. 종3품 이하 문신들에게 친히 시험을 실시했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공부를 놓아버린 관료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재교육시키겠다는 의도다.
좌정승 하륜, 대제학 권근을 독권관(讀券官)으로 하고 이조참의 맹사성, 지신사 황희를 대독관(對讀官)으로 한 친시(親試)에 108명이 응시하여 광연루(廣延樓)에서 시험이 치러졌다.
'사문을 연다(闢四門)'는 논제와 '안남을 평정한 것을 하례한다(賀平安南)'는 표제가 주어졌다.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다. 안남이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명나라는 안남(베트남)을 평정한 직후였다. 시험장에 아침과 저녁밥을 제공하고 주과를 내려주었다. 시험이 끝나자 태종 이방원은 합격자 명단을 친히 인정전에 붙였다.
예문관직제학 변계량, 이조정랑 조말생, 성균학정 박서생이 을과(乙科) 1등에 합격했다. 권지성균학유 김구경, 예조정랑 박제, 병조정랑 유사눌, 예문검열 정초, 성균직강 황현, 성균사예 윤회종, 전 사헌장령 이지강이 을과(乙科) 2등에 합격하였다.
변계량은 예조참의, 조말생은 전농부정 박서생은 우정언, 김구경은 봉상주부, 박제는 성균사예, 유사눌은 사헌장령, 정초는 좌정언, 황현은 경승부소윤, 윤회종은 성균사성, 이지강은 예문관 직제학에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고 홍패(紅牌)를 받았다. 태종시대의 신 엘리트 출현이다. 변계량은 이후 권근에 이은 외교가의 명문장가로 성가를 드높였다.
빠르다 생각할 때 늦을 수도 있습니다
문무백관을 시험에 들게 하며 국정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이 하륜을 조용히 불렀다.
"명나라 진하사(進賀使)에 누구를 보내면 좋겠소?"
"세자 저하를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너무 어리지 않소?"
"세자 저하께서도 이제 혼례를 올리셨습니다. 일찍이 명나라에 다녀와 견문과 학문을 넓히시는 것이 이로울 듯 싶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소만 너무 빠르지 않소?"
태종 이방원의 눈동자가 섬광처럼 빛났다. 그 순간 하륜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빠르다 생각할 때 늦을 수도 있습니다."
"으음,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태종 이방원은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신이 먼저 사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심(王心)을 읽어 내린 하륜이 길을 비켜선 것이다. 걸림돌을 스스로 치워놨으니 치고 나가라는 뜻이다. 눈빛 하나로 왕심을 읽어내는 하륜은 역시 천하의 하륜이었다. 정도전이 주군을 끌고 가는 성격이라면 하륜은 밀고 가는 체질이다.
"하하하, 역시 하공이구려, 내 일찍이 한나라에 장랑이 있었고 송나라에 치규가 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아직 조선에 그러한 인물은 없지를 않소?"
"황공무지로소이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과 조영무를 면직시키고 그 자리에 성석린을 좌정승, 이무를 우정승에 임명하고 총사령탑에 해당하는 영의정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를 임명했다. 이들을 받쳐주는 자리에 성석인을 예문관대제학, 박신을 참지의정부사, 권진을 사헌부대사헌, 조원을 우부대언, 이승간을 동부대언, 최함을 좌사간대부에 임명했다. 진용이 갖춰진 셈이다.
하륜이 사임한 후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의 죄를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새로 취임한 영의정 이화가 올린 상소였다. 하륜이 사직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12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왕과 인간
권좌는 하늘과 삼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다
"민무구, 민무질은 지나치게 성은을 입어 일가형제 모두 존영을 누리니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여 그 직책을 정성껏 지켜 교만하고 방자함이 있어서는 아니 되고 성은 갚기를 하늘같이 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분수를 돌보지 않고 권병(權柄)을 전천(專擅)하여 속으로 금장(今將)의 마음을 품고 발호(跋扈)할 뜻을 펴보려 하였습니다.
지난해 전하께서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형제는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신민의 여망에 따라 복위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형제는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소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듣건대 민무구가 주상께 아뢰기를 '세자(世子) 이외에는 왕자(王子) 가운데 영기(英氣)가 있는 자는 없어도 좋습니다' 하였다 하니 이는 금장(今將)의 마음을 품은 것이 명백합니다.
또 신극례를 부추겨서 친남(親男)의 먹장난(墨戲)한 종이를 취하여 찢게 하고 말하기를 '제왕의 아들에 영기 있는 자가 많으면 난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종지(宗支)를 삭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시고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를 국문하게 하여 난의 근원을 막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태종실록>
피바람을 예고하는 상소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는 태종 이방원의 장인 민제의 아들이며 왕비 원경왕후의 동생들이다. 그러니까 태종 이방원의 처남인 셈이다. 이방원이 정도전과 방석을 도모하던 왕자의 난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순화동 3인방이다. 헌데 그들이 국문의 대상이 되었다. 죄목은 '표정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이다.
표정관리를 잘못한 죄
태종 이방원이 세자 양녕에게 전위하고자 했을 때 기뻐하는 낯빛이었으며 전위를 거두어 들였을 때 슬픈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실에 불과하고 궁극적인 죄목은 금장(今將)에 있었다. 금장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는 말로서 '임금의 친척에게 금장이 있으면 벤다'는 말에서 유래한다.
춘추전국시대 공양고가 쓰기 시작하여 가학(家學)으로 전승 집필된 춘추공양전은 공자가 '춘추'에서 '난세를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아가게 한다' 라는 부분을 혁명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인(仁)을 설파한 공자도 혁명을 용인했다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에는 공양학파(公羊學派)가 생겨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孫文)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장(疏章)에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소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을 꾀했다는 혐의다.
민씨가(家)의 참화를 불러온 민씨 형제의 옥사는 원경왕후와 갈등을 빚은 태종 이방원이 외척을 척결하기 위하여 협유집권 획책 혐의를 내세웠다고 대부분의 역사서는 기술하고 있다. 부분적인 이유에서는 틀리지 않으나 정확한 맥에서는 비켜간 듯하다.
여자를 좋아하는 이방원은 비빈제도를 고치고 잉첩을 두면서 정비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기가 센 정비 역시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허나 이는 지엽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핵심은 금장이었다. 태종 이방원으로서 금장은 역심(逆心)이다. 자신은 '맹자'에 심취하여 혁명했지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근거한 그 어떤 모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세자(世子) 이외에는 왕자(王子) 가운데 영기(英氣)가 있는 자는 없어도 좋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이방원이 민씨가(家)와 인연을 맺은 혼인 당시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상황을 살펴봐야 이해가 빠르다.
혐의를 받고 있는 민무구 형제의 누나가 낳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은 양녕을 비롯하여 효령, 충녕, 성녕, 네 명이었다. 모두 조카로서 누가 왕이 되어도 상관없을 텐데 왜 양녕에 집착했다는 혐의를 받았을까?
임금의 핏줄과 자연인의 혈연은 다르다
야인 이방원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정을 돌보지 못할 때 양녕 이제가 태어났다. 이방원이 장인 민제의 보살핌을 받으며 처가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할 때다. 외갓집에서 태어난 양녕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고 외삼촌들과 장난하며 성장했다. 다시 말하면 이방원의 안정기에 태어난 조카들보다 더 외가와 친밀하고 외가 지향적이라는 얘기다. 양녕의 둘째 아우 세종만 하더라도 한양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외가와는 별로였다.
태종 이방원이 경계하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왕권은 시간, 공간, 인간 즉 삼간(三間)을 하늘과 연결하는 매개자 즉, 천간(天間)이라 보고 있었다. 임금이 내리는 왕명은 자연인 인간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소망을 하늘에 전하여 그 가르침을 시간과 공간에 맞게 인간들에게 베푸는 것이 임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존엄한 왕권에 인간관계 즉, 외삼촌과 조카 관계가 끼어들면 하늘의 뜻을 전하는 매개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왕이라도 외삼촌 앞에 약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터득한 정치철학이다. 태종 이방원은 '군주는 만인지상이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자신이 비록 태상왕이라 하지만 아버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아버지의 부당한 처신에 끌려가는 것은 '천간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없었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도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자신의 그러한 폐해를 왜 살아생전 세자에게 전위하여 차기에 답습하려 하냐는 것이다. 이 숙제를 태종 이방원은 '핏줄'이라 풀어냈다. 임금도 임금 이전에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승하하실 때가지 폐해를 마음깊이 새겨두고 '만인지상'을 보류하자는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또 하나, 핏줄에도 색깔이 있었다. 부계혈통으로 이어지는 권좌는 온 신민이 힘을 합쳐 종묘사직으로 수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왕권이지만 외척과 처족은 천간의 하등 단계인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혈연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훗날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단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용상은 하늘과 삼간을 연결하는 자리다
'우매한 중생도 깨달으면 곧 부처다'라는 말이 있다. 심오한 말이다. 이방원이 야인시절 정도전이 전해준 맹자(孟子)를 책장이 헤지도록 읽으며 '덕을 잃은 군주는 폐하여도 된다'라는 말에 심취하여 혁명에 뜻을 품었고 하륜이 전해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독파하며 군주의 덕을 깨달았다. 대학연의는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다.
태조 이성계는 무골(武骨)이다. 이 때문에 가방끈이 짧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학을 깨우친 군졸을 군막에 불러들여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다르다. 어려서 스승 원천석으로부터 혹독한 인성교육과 함께 성리학을 공부했고 과거에 급제한 문인(文人)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태종 조의 학자 조준, 권근, 하륜 등 당대의 성리학자는 학문적으로 이방원에게 범접하려 들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세자 양녕에게 공부하라 독려한 것이다.
상소에서 "신극례를 부추겨서 친남(親男)의 먹장난(墨戲)한 종이를 취하여 찢게 하고 말하기를 '제왕의 아들이 영기 있는 자가 많으면 난을 일으킨다'고 하였다"는 대목에서 나오는 먹장난을 한 친남은 충녕 즉 세종대왕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먹과 가깝게 놀았고 총기가 있었다. 이 때 충녕은 10세였다.
영의정 이화의 상소가 있자 민무질이 억울하다며 대질을 요청했다. 상소에 적시한 혐의가 사실로 인정되면 대명률에 따라 참형에 처해질 중죄인의 운명이다.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가기 위한 안간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