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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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정부흥회 담다, 닮다]
04 참된 가족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라
엡 2:14-19
지난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제22기 행복플러스 가정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목회자 가정 포함하여 총 15가정이 함께 참여하였는데요, 많은 은혜와 회복이 있었습니다.
참석했던 부부 중에 한 남편의 간증입니다.
“지난 2년간 아내와 헤어져 지낸 시간은 주님께서 저희 가정을 올바르게 세우시고자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행복플러스 세미나를 통해 아내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주님께는 저희 가정을 다시 살려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믿음 위에 그리고 말씀 위에 바로 세운 가정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가정되도록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정말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이혼 위기의 가정, 마음의 상처가 있던 많은 가정들이 회복되었습니다.
8월 말에는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행복플러스가 있으니 많은 가정들이 등록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부부의 관계를 회복케 하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부흥회 때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정의 형태가 있으니 바로 독신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에 독신들을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부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부부 관계를 통해 자손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구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가정을 번성케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7:7-9] 7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합니다. 8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
바울은 명령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홀로 지내면서 남은 시간과 재정과 삶을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독신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게다가 결혼은 현세에만 주어진 일시적인 제도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런 식의 가족 제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중요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지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이 영원합니다. 따라서 독신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에서부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로서 살아가는 가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독신은 결혼한 부부보다 못한 2등급 신자가 아닙니다.
물론 독신의 삶에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어려움도 있고 치러야 할 대가도 있을 것입니다.
부부간에 누릴 수 있는 친밀함이나 홀로 있기에 겪을 수도 있는 외로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독신도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독신의 사명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께 속한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는 것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최선의 삶에 미치지 못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지난 교회 역사상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걷게 하셨던 길, 언약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주를 위해 솔로가 된 이들을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쓰지 말아야 할 단어는 노총각, 노처녀, 골드 미스, 이런 단어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이제 사회에서도 거의 퇴출되고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무례한 표현이면서 낙인을 찍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아직도 혼자에요? 아직도 결혼 안 했어요?” 이런 질문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질문 때문에 명절이 싫은 분들이 있고, 이런 질문 때문에 심지어 공동체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 목사부부수련회 준비 모임 때 나눔을 하면서 마음 아픈 상을 각 조별로 준비했습니다.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도 있지만 마음 아픈 일은 무엇이었나? 한 조에서 상을 받으신 싱글 남자 목사님이 나오셨어요. 왜 나오셨을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그것 맞습니다. 싱글로서 부부수련회에 가야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아픈 거죠. 웃으시면서 소감을 밝히셨어요. “목사부부수련회라는 타이틀 자체가 마음에 안 듭니다.” 좋은 배우자 위해 기도하고 계신대요. 여러분도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홀로 사는 분들에 대해 우리도 모르게 가졌던 편견이나 우리도 모르게 하는 표현들 속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표현들이 있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오죽 했으면 본 교회의 싱글 공동체인 다윗 공동체에서 두 번째 주에는 싱글들을 위한 자체 예배를 드렸을 정도입니다. 가정 부흥회가 자신들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1인 가구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 한 예능의 제목인데요,
“나 혼자 산다”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이미 1인 가구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1인 가구 비율이 2000년도 15.5%에서 2021년 33.4%로 2배 이상 늘었습니다.
1인 가구 절반은 미혼이고 1인 가구의 44%는 결혼 안 해도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인이 된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배우자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뒤 홀로 지내는 1인 가구 어르신의 비율이 2050년에는 42.9%까지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1인 가구는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어른 세대에서의 비율이 크다는 겁니다. 문제는 현재 1인 가구 가운데 몸이 아프고 집안일을 부탁할 때 도움 받을 사람이 없다고 답한 비율이 3명 중 1명(32.3%)입니다. 종합해보면 1인 가구 비율 증가의 이유는 고령화 시대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어르신들, 저성장 시대에 취업난에 맞닥뜨린 청년들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1인 가구 증가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핀란드(47%), 스웨덴(45.4%), 독일(42.1%)의 1인 가구 비중은 40%를 넘고 있습니다. 영국(31.1%)도 30%를 넘어서게 되면서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직(Minister for Loneliness)을 신설했다고 하지요.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했습니다. 정부에서 개인의 외로움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다루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장관은 2년간 장관이 세 번이나 바뀌고 예산도 적기에 뚜렷한 성과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단지 옆에 누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만은 아닙니다.
케임브릿지대학교 국제 비즈니스경영센터 부소장을 역임했던 노리나 허츠는 그녀의 책 “고립의 시대 the Lonely Century”에서 외로움은 단지 애정이나 동반자, 친밀감을 상실한 느낌으로만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친밀하게 느껴야 하는 사람들과의 단절된 기분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과 단절된 느낌, 사회와 가족이라는 맥락에서 제대로 지지받지 못하는 느낌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배제된 느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단지 혼자 살기 때문이 아니라 대화와 감정의 교감이 막혀버린 관계나 사회적 정서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1인 가구도 편히 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공동체인가? 1인 가구의 새가족과 어르신들이 왔을 때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공동체인가? 만일 그렇지 못하고 그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생물학적인 가정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각 가정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가정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으로 한정 짓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가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19절 보세요.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Ephesians 2:19, ESV] So then you are no longer strangers and aliens, but you are fellow citizens with the saints and members of the household of God,
지금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인종과 민족을 뛰어 넘는 한 가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이런 생물학적이고 인종적인 구분과 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허무셨다는 겁니다. 14절입니다.
[엡 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Ephesians 2:14, ESV]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이 담은 단지 인종적인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종과 다름 때문에 서로 갖는 적대감을 의미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싫어했던 것처럼, 또한 한국인들이 일본 사람들을 과거사로 인해 미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사람들 사이에 담이 생겼습니까?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과 담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 담(the dividing wall)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있어서는 안 될 담이고 무너져야 할 담입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그 탐욕과 분열과 폭력의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특정 나라의 민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담은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이 담을 허무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 값을 치르시고 그 담을 허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습니다.
분리의 담은 이제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가정에게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인 구분이나 너의 가족, 나의 가족이라는 담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가족은 생물학적인 부모와 자녀로만 이루어진 가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면 타인이라는 담이 있습니다. 너의 가정과 나의 가정. 이것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하나님의 가족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밑에 믿는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만드셨나요? 15절을 보세요.
[엡 2: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Ephesians 2:15, ESV] by abolishing the law of commandments expressed in ordinances, that he might create in himself one new man in place of the two, so making peace,
둘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한 새 사람, 이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참된 가족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는 한국인, 미국인, 이러한 인종적, 국가적인 구별보다 더 분명한 표지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표지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담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경계라는 담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9절 보세요.
[갈 3:26, 28-29]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이 한 새 사람이요, 하나님의 참된 가족이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생물학적인 가족만을 가족으로만 여긴다면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을 허무신 일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을 허무신 일을 부정하고 거부하겠다는 뜻입니다.
언제요? 혈연으로 맺어진 내 가족만을 가족이라고 여길 때. 내 가족만을 사랑하겠다고 할 때.
매우 두려운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가족만 가족이라고 사랑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을 생물학적인 가족에만 제한시키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그런 유혹을 저항해야 합니다.
지난 4월에 이취임식을 마친 주간에 목사 공동체에서 두물머리라는 곳으로 단합을 위해 일일 리트릿을 다녀왔습니다. 팔당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편도 12km, 왕복 24km 정도의 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했습니다.
리트릿을 계획하신 어떤 목사님께서 자전거 대여를 위해 먼저 전화로 자전거 예약을 하셨습니다.
“남자 22명에 여자 1명이요”, 그랬더니 대여점에서 이렇게 묻더랍니다.
“아, 건설 회사신가요?” 뭐,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이들, 우리는 킹덤 빌더(the Kingdom Builder)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두물머리를 처음 갔는데요, 많이 아시겠지만 그곳은 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바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지요. 왼쪽 상류에서 북한강이 내려오고, 우측에서 남한강이 내려옵니다. 두 강의 물줄기가 머리를 맞대듯이 만나는 곳이 두물머리입니다. 저 곳을 지나면 그 밑에서부터는 더 이상 북한강, 남한강이 아닙니다. 한강입니다. 한강의 뜻은 큰 강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강(One River)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두물머리를 간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선한목자교회의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흘러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목사 공동체의 기존 세대와 새로 들어온 세대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혈연과 학연과 지연을 넘어서서 주 안에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느 학교 출신이냐, 어느 교단이냐의 담이 없습니다.
물론 넘어야 할 담이 있습니다. “건설회사 이신가요?” 더 건강한 여성 리더십이 세워지길 원합니다.
제가 이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더니 그날 마침 유 목사님께서 보시고 댓글을 이렇게 다셨습니다.
“유기성: 부럽고 샘나서 마음이 요동칩니다~”
다음에는 원로목사님 모시고 가야겠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를 지나면 이제는 한강이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헬라인과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은 혈연보다 더 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된 가족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친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그럴 수 있나요?
현재 여러분들의 가족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저는 부모님께서 저를 낳으셨다고 굳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저를 낳으신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거죠.
저에게는 누님 두 명이 계신데요, 저는 그 누님 두 명이 저의 누님인 줄로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누님들이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부모님께서 누님들을 낳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저 첫째 누님을 낳으셨고 둘째 누님도 낳으셨다고 증언하신 것을 저는 믿는 겁니다.
돌아보면 놀랍게도 부모관계나 형제, 자매 관계도 다 믿음으로 받은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라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니까. 그것을 역시 믿으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요한을 향해서 “보라 네 어머니라” 마리아에게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 안에서 모두 한 형제, 자매이고,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한 가족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주의 깊게 말을 듣던 아들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에게 그러더래요.
“형?” 여러분, 이 아들은 천재입니다. 어떻게 오늘의 이 진리를 이렇게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지요.
여러분, 교회가 진정 이 참된 가족으로의 교회를 회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까 나누었던 사회적 이슈들이 대부분 해결될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가족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선교입니다.
위드 네이버스! (With Neighbors)의 비전 중 하나는,
“복정동과 성남, 교회 주변에 더 이상 홀로 외로운 이들이 없게 하자!”입니다.
나와 너의 담을 허물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선언하고 이 믿음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가능합니다. 그 예가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다름 아닌 참된 가족으로의 교회의 모습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 이방인들은 자신의 가족만을 살리겠다고 달아나거나 심지어 가족도 버리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서로를 돌보았고 가족을 대신해서 죽은 자들을 장사해주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 하나 된 가족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과 달리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훨씬 높은 생존율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기독교인들의 사랑은 이교도들에게까지 뻗어 나갔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믿지 않았던 이들은 전염병 앞에 무너져버린 사회적 관계망을 대치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 안으로 들어오면서 참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기독교가 성장했던 요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세상에서 어떻게 복음의 공공성을 갖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먼저 어떠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입니다.
그저 혈연과 가족주의로 뭉친 집단(aggregation)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혈연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하나님의 참된 하나의 가족이요 회중(congregation)이 될 것인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보다 우선하는 것은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가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가족으로 세워진 공동체만이 세상의 공적인 영역에서도 막힌 담을 허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다가오는 목사부부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사전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한 사모님께서 나누어주셨어요. 공동체 안에서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요? 자기가 뇌하수체종양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을 때, 모든 사모님들이 금식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뭔데 나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주시는가? 그때 받은 그 사랑이 교회 공동체에서 받은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생물학적인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의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참된 가족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양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주의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 모두 하나야! 아무런 문제없이 어려움 없이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육신의 저항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죄성이 있습니다. 나와 너를 갈라놓고 서로를 원수 맺게 하는 악한 영의 역사도 있습니다.
다른 극단은 냉소주의입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교회 내의 관계 문제, 시기와 질투, 갈등을 보면서 조롱합니다. 가족이라며? 하나라며? 이런 냉소주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둘을 모두 배격합니다. 순진한 이상주의도 아니고 냉혹한 냉소주의도 아닙니다.
분명 서로를 갈라놓는 육신의 소욕과 개인주의, 이기주의, 또한 악한 영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18절에서,
[엡 2: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Ephesians 2:18, ESV]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in one Spirit to the Father.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만 모두가 아버지께 나아가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느 날 토요일에 교회 근처를 산책하다가 사랑부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마을학교라고 해서, 사랑부 장애학생 주말 돌봄학교입니다. 부모님들이 사랑부 자녀들을 맡기고 선생님들이 사랑부 자녀들과 함께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함께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학생이 30명이고 교사가 60명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분들이 부모님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었습니다. 정말 부모님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어찌나 한 명 한 명을 사랑해 주시던지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에게도 이것이 도전이었습니다. 정말 성도들을 한 가족처럼 여길 수 있는가?
제게 잘해주시고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와 전혀 다른 분들을 가족으로 여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꼭 넘어야 할 벽이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연세가 70세가 넘으신 유대인이요 고아요 장애인 한 분이 교회에 찾아오셨습니다. 이분을 전적으로 섬기던 분이 타주로 가시게 되면서 그분이 저에게 돌봐주시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고 가셨어요. 이분과 저는 공통점이 없는 분입니다. 인종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단 하나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라고 부르지요. 어쨌든 이분이 장애인이었기에 일을 할 수 없어서 전적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기가 어려운 분이셨어요. 그분이 20대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옆에서 차가 들이받고, 그 다음에 연이어 세 대의 차가 충돌을 하는 큰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지요. 그 이후로 15년간을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했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후유증이 있어서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함께 이분을 돕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분의 옷을 기증했고, 어떤 분은 중고 휴대전화를 구매해주셨으며, 어떤 분은 음식을 제공해주셨습니다. 남선교회에서는 라이드를 제공했습니다. 저도 라이드에 동참했습니다. 일주일이나 두 주일에 한 번씩 그분이 음식을 제공해 주는 곳에 가서 음식을 받을 수 있도록 차로 모셔다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을 모시고 두 군데 음식 제공하는 곳을 들리고 약국까지 들리고 돌아오는 시간이 대략 4시간 반 정도 소요됩니다.
어떤 날은 더 오래 걸리기도 하지요. 어느 날 제가 그분을 모셔다 드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를 않으셨어요. 걱정이 되면서도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사실에 또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늦어져도 그렇지 내가 이것 때문에 짜증을 내거나 불편해지면 안 되는데 왜 그럴까?
그러던 중에 정말 불현듯 내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어요.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너에게 갚을 수 없는 이를 도우면 네가 복되리라..”
성경에 있는 말씀이지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온 말씀에 모든 불편한 마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약 5분 지난 다음에 그분이 나오셨어요. 그리고 두 번째 음식을 받으러 갔는데 우리가 늦게 가서 그날 음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큰 마트로 모시고 가서 함께 장을 보았습니다. 거의 평생을 혼자 장을 보신 적이 없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시니까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모든 것을 기다려주고 드디어 나라에서 제공하는 집에 모셔다드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5분 뒤에 전화가 다시 왔어요. 그분이에요. 또 무슨 문제일까 싶어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러시는 거에요. “오늘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그리고 추수감사절 식사가 교회에서 있나요?데이빗 목사님, 혹시 저를 목사님의 가족으로 여겨주신다면, 저를 초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순간 제가 번개를 맞은 듯했습니다. 바로 “가족”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제가 그분을 종종 도와 드리기는 했지만, 저는 그분을 정말 친가족처럼 여기지는 못했던 거예요.
그분과 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보신 겁니다.
가족이 없는 고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분. 주님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정말 그의 가족이 되어주겠느냐?” 그해 교회에서 목요일 저녁에 추수감사주일 식사를 했는데 그때 저는 그분을 초대하였고 함께 식사하며 우리의 가족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다시 허름한 숙소에 모셔다 드릴 때, 그분의 음성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고마워 데이빗, I love you!”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겼던 지난 2년 이상의 세월을 참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한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많이 우신 분 중에 한 분이 그분이었습니다.
“데이빗,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해?”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교회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멋진 교회 가족들이 여기에 있어요. 그들이 돌보아 줄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1인 가구 시대에 우리 주위에 참된 가족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가족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혈연과 생물학적인 가족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참된 가족이 된 그들을 사랑하십시다. 선한목자교회가 그러한 참된 가족의 모습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