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1강 암태도소작쟁의
암태도소작쟁의 기념탑(상)과 소작쟁의의 지도자 서태석의 무덤(하)
11강 암태도 소작쟁의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뱃길로 3시간에서 5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암태도가 있다. 일제 치하인 1920년대에 들어 전국에 각종 사회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작은 섬 암태도에서는 1923년 8월 소작 농민들이 쟁의를 일으켰다. 이곳의 농민들은 토지가 척박해 힘든 농사일에 비해 생산량이 적은 데 비해 소출의 70~80%라는 고율의 소작료를 물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곳 장고리에는 암태도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이를 통해 이곳 소작쟁의를 더듬어 보자. 암태도 수곡리 출신 지주 문재철은 800여명에 이르는 암태도 소작농에게 섬 전체 수확량의 1/3에 해당하는 1만 석 가량을 소작료로 걷어갔다. 그는 암태도 뿐 아니라 자은도를 비롯하여 전라남도 일대와 전북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 해 거둬들이는 소작료가 삼만 석이나 되는 대지주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정책에 편승하여 토지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지 지주였다.
이곳 암태도 농민들은 1923년 8월부터 수확의 7할에서 8할까지 소작료를 받아가던 지주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싸움을 시작하였다. 이 싸움은 해를 넘겨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대표가 일제 경찰에 잡혀 감옥에 들어갔다. 암태도 농민들은 목포로 건너가 목포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소작료를 내리고 감옥에 갇힌 대표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여 마침내 소작료인하에 성공하였다.
암태농민들이 소작투쟁에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1923년 8월 암태청년회 회장 박복영과 서태석 등이 중심이 된 암태소작인회의 조직이었다. 그들은 고율의 소작료에 항거하여 소작불납동맹을 맺고 가을걷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섬 농민들로서는 무턱대고 가을걷이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암태소작회는 11월 말부터 일단 벼를 베기로 하였다. 소작인회는 소작인들에게 “추수한 벼 중에서 40%의 소작료를 제외하고 나머지 60%는 소작인의 몫으로 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알리고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문지주는 소작인들이 가을걷이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을 보내 소작료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양쪽 사이에 여러 번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24년 3월 27일 소작인회는 면민대회를 열고 소작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문지주의 부친 송덕비를 부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 날 문씨 집안 사람들 수십 명이 면민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서태석을 비롯한 소작인들을 습격하였다. 소작인회는 경찰에 폭행자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오히려 소작료 문제를 화해하라고 말했다. 일제 경찰은 군함을 암태도 남강부두 앞에 세워놓고 공포를 쏘는 등 위협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지주의 위협은 오히려 소작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분노한 소작회 간부와 회원 1백여 명은 ‘암태소작회 만세!’를 외치며 마침내 커다란 문지주 부친의 송덕비를 쓰러뜨렸다. 송덕비가 부서지자 문씨 집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소작인 회관을 부수고 소작인회 사람들을 습격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다음날 목포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은 양측에서 50여 명의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러나 경찰은 서태석 회장을 비롯한 소작인회 간부는 13명이나 구속하고 먼저 싸움을 건 문씨쪽 사람들은 겨우 3명만을 구속하였다. 수감된 사람들은 광주검사국 목포지청의 예심에 회부되었다.
암태도 농민들은 분노와 패배감으로 몸을 떨었으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제 경찰의 태도에 섬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암태 소작인회는 목포로 건너가 싸우기로 다짐하였다. 이제 농민들의 투쟁은 섬에서 육지로 번져갔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싸움이 차츰 지주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과 소작인 사이의 싸움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소작인회 간부 대표와 소작인회 회원, 구속자가족, 청년회원, 부인회원 등 4백여 명이 목포에 도착하였다. 목포경찰서에 들이닥친 암태 농민들은 “소작회 간부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밤샘 농성을 계속하였다. 다음날 다시 섬에서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목포로 나와 법원으로 몰려가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당시 ꡔ동아일보ꡕ가 연일 암태도 농민들의 농성을 보도하자 목포시민이 모여들어 재판소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것만으로도 암태소작료 쟁의사건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데는 커다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단 전술상 후퇴를 하기로 하고 암태도 농민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구속자들에 대해 석방은커녕 그들을 ‘소요 및 상해죄’로 재판에 회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24년 7월 8일, 암태도 농민 600여 명은 10척의 배에 나눠 타고 또 다시 목포로 떠났다. 농민들은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을 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암태도를 돌아보며 이번에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6월에 있었던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으로 우에마쓰 경찰서장이 사직하고 새로 부임한 나까지마 목포경찰서장은 여전히 “질서를 어지럽게 하면 법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노동단체, 농민단체 지도자들이 문지주를 만나 쟁의 조정문제를 협의하였으나, 문지주는 되레 무너뜨린 송덕비를 다시 세우고 원래대로 소작료를 낼 것이며 신문에 사죄문을 실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성난 농민들은 목포의 문지주 집으로 쳐들어 갔다. 경찰은 또다시 30여 명의 농민들을 잡아갔다.
일제가 악덕지주 문재철을 오히려 두둔하고 죄없는 암태도 농민들을 잡아 가두자 서울, 순천, 광주, 목포에서 민중들은 규탄대회를 열고 ‘암태 소작인 아사동맹 동정단’을 만들었으며 돈을 모아 격려, 지원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도 변호사 김병로, 김태영 등이 자진하여 소작인들을 변호하겠다고 나섰다.
마침내 일제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낌새를 채고 마침내 1924년 8월 30일 목포경찰서에서 ‘소작료 조정 약정서’를 체결하였다. 그 자리에는 박복영과 문재철, 나까지마 서장, 광주노농회 간부 서정희 그리고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장 고가(古賀)가 참석하였다. 소작료를 4할로 내리고, 문지주는 이천 원을 소작인회에 기부하며, 미납된 소작료는 3년 동안 나누어 낸다는 내용이었다. 구속된 소작인회 간부들도 그 뒤 모두 풀려났다.
암태도 농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악덕 지주와 그들을 부추기는 일제에 맞서 싸워 얻은 승리는 단순한 승리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이전부터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싼값에 뺏어가기 위해 갖가지 술책을 부려왔다. 조선을 식민지로 합병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수많은 농토를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지주들 앞으로 뺏어가고, 돈벌이에 눈먼 조선인 지주들을 부추겨 소작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그래서 암태도 농민들이 거둔 승리는 곧바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하여 거둔 비록 작지만 소중한 승리였다. 또한 그들의 승리는 전라남도 서해안 여러 섬의 소작 농민들의 투쟁을 자극하였고, 커다란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이들을 앞장서서 지도하던 서태석은 그뒤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병사하였다. 송곡리 도로변에는 그의 무덤이 남아 있어 암울한 시기에 농민들을 이끈 그의 활동을 기릴 수 있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2강 전태일과 평화시장
전태일이 근무하던 평화시장 전경(상)과 모란공원의 전태일 묘(하)
12강 전태일과 평화시장
당시 노동청의 집계에 따르면 평화시장과 통일상가, 동화시장에는 428개의 작업장과 7천6백여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3만여 명의 노동자가 8백여 개의 작업장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으면서 하루 14~16시간에 달하는 장시간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0년대 이래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이와 같이 가혹하고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삶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 가로등 아래에는 전태일이 분신한 곳에 추모동판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청계천이 새로 복개되면서 그 근처 전태일거리가 조성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전태일의 활동을 살펴보자.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내의 직종은 대체로 재단사, 미싱사, 미싱보조, 재단보조, 시다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 여공들이고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주로 남자들로서 여공이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금은 시다가 월 1천8백원에서 3천원,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5천원, 미싱보조가 3천원에서 1만5천원, 그리고 재단사가 1만5천원에서 3만원 정도였다. 이들은 보통 아침 8시에서 밤 11시까지 일하였고 일거리가 많을 때에는 야간작업을 하였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겨우 1.5미터인 악명 높은 다락방의 끊임없는 소음과 먼지 구덩이 속에서 열서너 살 되는 어린 여공들이 햇빛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일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바보회와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섬유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했던 전태일과 동료들은 이날도 노동청에 제출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당국이 받아주기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한 11월 7일이 되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대신에 평화시장 일대에는 경비원과 형사들이 쫙 깔려 삼엄한 분위기였다. 전태일과 동료들은 마침내 11월 13일 노동자들의 권리장전인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평화시장 일대는 경비원과 경찰들의 몽둥이에 밀리면서도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때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전태일이 달려 나왔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며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다 인근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결국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수십 명의 노동자가 달려왔다.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삼동친목회 회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과 혈투를 벌이며 동대문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찰의 곤봉에 머리가 으깨어지고 구둣발에 짓밟혀 개처럼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꽃다운 스물 두 해,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끝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려했던 청년노동자 전태일.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스스로를 태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던져 노동해방의 불꽃으로 산화해 갔다.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렸다.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한 그는 밤 10시경 성모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전태일의 시신은 마석의 모란공원에 묻혔다. 모란공원은1970년 전태일 열사가 묻힌 이래 민주주의를 위해 숨져간 많은 민주 열사·희생자들이 묻힌 민주열사 묘역이 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불꽃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을 던진다. 불꽃이 아니면 침묵의 밤을 밝힐 수 없다. 허덕이며 고통의 길로 끌려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길을 비추어 보이는 것은 오직 불꽃뿐, 불타는 노동자의 육체뿐. 얼음처럼 굳고 굳은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불꽃뿐이었다. 전태일. 그는 목숨을 거는 단호한 투쟁만이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활로임을, 억압과 착취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가장 유력한 전술임을 깨닫고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의 죽음은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의 의지의 폭발이었다. 그의 손에는 노동자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킨다는 의미로 근로기준법 책자가 들려 있었고, 이 꽃다운 청년노동자의 분신투쟁은 이후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투쟁으로 되살아나곤 하였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3강 유생과 머슴새가 쌍봉을 날다
쌍산의소의 의병들이 무기를 만들었던 대장간터(화순군 이양면 증리), 시커먼 것은 무기를 만들고 남은 쇠찌꺼기이다(상). 등소산 머슴새로 유명한 안규홍의 승첩비(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비들고개)
13강 유생과 머슴새가 쌍봉을 날다
쌍봉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봉우리로 쌍산이라고도 불린다. 서쪽으로 능주와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보성으로 연결된다. 가까이는 화순군의 대표적인 사찰인 쌍봉사가 있다. 1905년과 1910년 사이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개된 의병전쟁은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다시 불붙었으며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해산 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일부가 의병 대열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어 의병항쟁은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894년 농민전쟁 이후 크게 타격을 입고 잠잠했던 호남 지역에서도 의병들이 저항의 대오를 갖추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에서 특히 화순과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유생과 농민들의 의병 활동이 점차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 중 쌍산의소는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능주의 대표 유생 양회일(梁會一)이 이 부대를 지휘하였다. 1905년 11월 먼저 호남의 대표적인 유림인 고광순, 기삼연과 접촉한 끝에 고광순은 광주, 창평, 기삼연은 장성, 양회일은 능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어서 양회일은 능주에서 기병을 꾀하기 위해 양열묵, 이병화를 통해 많은 유림들을 끌어들이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1906년 10월 양회일은 능주 증동의 실력자인 임노복을 찾아가 많은 조언을 구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노복은 병기와 군량에 필요한 재원과 함께 유능한 인물의 확보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양회일 자신이 가산을 정리하고 친척의 논밭을 잡혀 2천여 원의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또한 임노복과 안찬재 등도 자신의 집에서 일정 기간 의병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이 중 임노복의 집은 쌍산의소의 본부로 활용되었다. 그 밖에 의병지도부는 많은 군자금을 지역 주민으로부터 끌어냈다. 또한 의병지도부는 수많은 인사들과 접촉한 끝에 능주의 학동과 청장년의 참여뿐만 아니라 전라도 인근 지역과 경상도 지역에서도 필요한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광선, 노현재, 임창모를 비롯한 200여 명이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1906년 음력 10월부터 훈련에 들어가는 한편 무기 확보에도 힘을 기울여 동복군으로부터 병기 300정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지금까지 의병의 경우와는 매우 달랐다. 종래 유생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주로 향교나 사우를 중심으로 강회를 연 뒤 기병한 반면에 쌍산의진은 오랫동안 군사훈련과 병기 확보를 통해 기병 준비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증동은 화전촌이 아니라 의병기지인 의병촌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쌍산의소는 드디어 1907년 1월 사방에 격고문을 띄웠다. 쌍산의소 지도부는 거사에 돌입하면서 활동 방향을 정하였다. 즉 장기적인 전투를 예상하여 능주와 화순을 공격한 뒤 동복에서 일정 기간 모자란 훈련을 채워 정예병을 키우고자 하였다. 이에 쌍산의소는 능주와 화순에 들어가 군아를 비롯한 주사청, 우편소, 경무서, 일인 상가 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907년 4월 22일 이곳에서 맞닥뜨린 일본 정예군의 막강한 화력과 전술에 막혀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지도부 6명이 체포되었고, 전사자 1명, 부상자 수명, 포로 1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나머지 의병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쌍산의소는 궤멸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살아 남은 일부 지도자는 또 다시 기병을 꾀하였다. 쌍산의소의 선봉장이었던 이광선은 독자적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으며 도포장(都砲長) 유병순은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소의 군량관으로, 호군장 안찬재는 심남일 의진의 중군장(中軍長)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중군장 임창모는 머슴 출신의 의병장 안규홍 지휘 아래 의병운동을 벌여 나감으로써 쌍산의소가 다시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안규홍 부대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 탐학한 토호를 비롯하여 일본의 앞잡이인 일진회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 기선 1척, 기정 약간, 해군 11함대 등이 동원되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의병을 철저하게 색출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호남의병운동은 절멸의 위기에 몰렸고 안규홍부대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규홍도 1909년 9월 25일 부장 염재보 등과 함께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뒤 1911년 5월 5일 대구 감옥의 형장에서 일제의 손에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살, 죄목은 폭동, 모살(謀殺), 강도, 그리고 방화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전쟁은 일제의 탄압으로 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효과는 적지 않았다. 우선 일제가 각 마을에 조직한 자위단이 해체하였으며 지방의 행정업무 및 징세 업무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또한 일진회와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은 그들의 각종 침략 활동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일제의 경제 수탈 정책에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이후 의병전쟁은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역량을 증가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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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4강 3.1운동과 서부
안성 만세고개에 세워진 3.1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상)와 주동자 홍찬식에 대해 증언하는 그의 자부(하)
14강 3․1운동과 서부 안성
1919년 3월 1일 학생,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그런데 3.1운동 때 가장 많이 참여한 계층은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농민들이다. 농민들의 참여모습과 실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안성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사례이다. 안성은 경기도 남단, 서울에서 약 50킬로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조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등 세 군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으로 통합되었다. 이 곳은 서울과 가까울 뿐 아니라 교통도 매우 발달하였다. 조선후기 이래 장시가 발달하고 안성맞춤이라고 할 만큼 유기공업이 발달한 것도 교통요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철도가 부설되면서 경부선의 평택역이 가까이 있어서 비교적 서울과 왕래가 쉬운 지역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달 째인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만세시위가 세차게 일어났다. 이 날의 시위는 농민이 중심이 되었고 비폭력시위가 폭력시위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시위가 적극적인만큼 일제의 탄압도 가혹했던 곳이다. 당시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실력항쟁으로 꼽힐 정도로 이름 높았다. 안성의 시위는 3․1운동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초기 농촌에서의 시위는 대부분 동리 단위로 농민이 동원되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3월 하순-4월 상순에 접어들면서 면단위, 군단위 연대시위로 발전하였다. 4월 1-2일에 일어난 안성군 원곡면, 양성면 시위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연대시위는 시위대원 수가 늘어날 뿐 아니라 대규모 시위를 펼칠 수 있었다. 본래 두 면에서는 연대시위가 있기 전에 별개로 시위가 있었다. 양성면의 경우 3월 11일 면소재지가 있던 동항리의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반적인 모습처럼 초기에는 학생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며칠을 만세 부르고 난 뒤에 면 전체가 통일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었기에 학교가 있었던 양성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다. 3월 하순부터는 만세시위에 농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는 원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연대시위가 있기 전 3월 25일경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28일 내가천리 이시련의 집에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이때 이시순이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발의하여 여러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가까운 동리와 칠곡리 등에 연락하여 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를 불렀다. 29, 30, 31일 잇달아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31일 시위를 마친 뒤 해산할 때에 칠곡리 이유석, 홍창섭이 내일도 모이라고 당부하였다. 이런 시위는 양성면에 영향을 주었다. 4월 1일 양성면의 여러 마을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면소로까지 나아갔다. 목표는 면소가 있는 동항리였다. 이들은 면소의 주재소로 몰려가서 소리 높여 만세를 외치다가 밤 9시 50분경 해산하였다. 양성면에서는 일단 면소재지까지 가서 평화시위를 벌인 것으로 마무리를 한 셈이었다. 이날 원곡면에서도 다시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전보다 훨씬 조직적이었다. 4월 1일 여러 동리의 사람들이 면사무소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는 양성으로 향하였다. 처음부터 양성면으로 향할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양성면은 이전 양성군 시절의 군소재지였으므로 이전의 개념으로 본다면 읍치로 향한 셈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순사주재소, 우편소 등 식민통치기구와 일본 상인 등이 살고 있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기에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었다. 양성으로 가는 길은 현재 45번 국도로 따라 동쪽으로 약 7킬로미터 정도 걸어야 했다. 그 중간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에 성은고개(또는 양성고개)가 있었다. 원곡면민들이 성은고개에 이르렀을 때 지도부에서는 군중들의 행진을 멈추게 하였다. 쉬어갈 겸, 행동을 통일해서 나아가기 위해 집회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필요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 양성면 내의 순사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쫓아내자고 하였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도록 하였다. 성은고개의 집회는 만세시위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단순시위에서 폭력시위로 바뀌어나갔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구체적인 활동지침을 내린 것으로 미루어 지도부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시위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은고개를 내려오면 바로 양성면으로 길이 열렸다. 이 무렵 양성면 시위군중들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시위를 하고 해산하고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원곡면의 시위군중이 합류하면서 군중들은 약 2천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밤 10시경 이들은 다시 순사 주재소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유리창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다음에 10시반경 군중의 일부는 전선을 끊으러 달려가고 나머지는 양성 우편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우편소에서 안성으로 가는 전신주 세 개의 밑동을 도끼로 찍어 넘겨 불태워 버렸고, 그 사이를 이은 전선은 토막토막 잘라 버렸다. 이어 시위군중은 일본인 잡화상인과 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였다. 시위군중은 이튿날인 4월 2일 새벽 다시 성은고개를 넘어와 원곡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곳은 서류, 물품 등과 함께 집이 송두리채 불태워졌다. 이 또한 농민항쟁 때 읍치를 공격한 다음으로 외방의 통치기구, 토호를 공격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이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식민지배의 상징인 철도를 다음 대상으로 하였다. 시위대는 아침 식사를 한 뒤 서남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평택의 경부선 철도 침곡 핀을 뽑아 파괴,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하였다. 시위대는 일본 수비대의 진압을 지연시키기 위해 안성에서 양성으로 통하는 길의 다리를 파괴하였다. 이처럼 원곡, 양성의 시위는 만세시위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독립운동항쟁의 차원으로 나아갔다. 이 같은 시위는 일제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더구나 한정된 무장단체나 결사단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민 전체가 저항하여 일어났으므로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경찰의 치안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 배치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진압에 나섰다. 검거가 부진하자 원곡면장을 시켜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사면해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겠다고 하면서 헌병대가 서쪽과 동북쪽에서 나타나 주민을 포위하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안성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구속된 사람들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27명이 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먼저 3․1운동이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이라고 하지만 이 지역의 경우 그야말로 전주민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적확하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만세시위는 장날에 많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곡, 양성의 경우 장날이 아니었을 뿐더러 한밤에 모이고 시위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시위양상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순사 주재소, 우편소 등 일제의 기관을 공격하였고 일장기를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이 지역에 사는 일인 상점과 고리대금업자를 공격하고, 나아가 침략의 상징인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려 했고 일본군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다리를 끊을 정도로 적극적인 시위였다. 이렇게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이양섭, 최은식, 홍창섭, 이희룡 등 4인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그밖에 20여인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모두 100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단일지역으로서 가장 많은 숫자이다. 이 때문에 안성에는 3․1운동 관련지역으로서는 드물게 기념관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1년 7월 원곡면 칠곡리, 성은고개(현 만세고개) 위에 세워졌다. 양성읍내 사거리와 원곡면사무소의 기념비석도 그날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5강 6.10만세운동과 서울거리
순종의 장례행렬과 모인 군중, 그리고 이를 경계하는 일본 기마병(상) 영결식이 열렸던 을지로 6가 훈련원 자리(하)
15강 6·10만세운동과 서울거리
오랫동안 우리나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서울은 역사의 깊은 사연을 그만큼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숨 가쁜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역사의 값진 흔적은 갑자기 사라지고, 흐릿한 기억마저도 봄날 눈 녹듯 망각 저편에 묻혀버렸다. 설령 역사의 한 자락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조각난 것이거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관계없는 아주 먼 옛날의 어떤 일쯤으로 여기기 일쑤다.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 돈화문을 지나치면서 옛 왕조의 역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황제 순종이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 죽음을 계기로 1926년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창덕궁을 오른편으로 하고 옆으로 돌면 금호문이 있다. 4월 25일 순종이 죽고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골청년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바로 그곳이다. 목표로 삼았던 사이또 총독 처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라 잃은 설움’에 젖어있던 조선인에게는 ‘송학선 의거’는 통쾌한 일이었다. 지금, 금호문과 창덕궁 사이의 길거리에 ‘송학선 의거 기념비’가 조그맣게 서있지만, 송학선 의거가 6·10만세 운동의 한 조짐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돈화문과 금호문에서 6·10만세 운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제 2의 3·1운동’이라고도 하는 6·10만세 운동의 배경과 의의를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6·10만세 운동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동안 6· 10 만세운동을 단순한 학생운동쯤으로 다루면서 운동의 내용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지난날 반공 이데올로기가 온 사회를 짓누를 때,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6· 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지를 철저하게 숨기면서 6· 10만세 운동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6·10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은 중국 상해에 있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국내 세력과 함께 1926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해 4월 25일 순종이 죽자 계획을 바꾸어 3·1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조선공산당 임시 상해부’와 연결된 국내 조선공산당이 천도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과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만세운동 추진과정에서도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조선공산당 계열은 운동의 지도부를 이끌었고, 천도교는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격문인쇄와 지방연락을 맡았다. 6․10만세운동을 맨 처음 계획한 조직은 조선공산당이었지만, 전국적 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가장 힘 있게 결합한 세력은 천도교였다. 안국동 수운 회관 옆에 자리한 ‘천도교중앙앙대교당’이 6· 10만세 운동의 또 다른 현장이다. 천도교 측은 지방 조직을 활용해서 3·1운동 때처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곳에서 6․10만세운동에서 사용할 격문을 보관하고 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6·10투쟁특별위원회’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운동을 확산시키려 했다. 만세시운동을 4일 앞두고 조선공산당의 거사 계획이 발각되었지만,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서울 지역 만세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 종로 3가 사거리 단성사 맞은편에 기념비가 서있다. 6· 10만세 시위 운동이 처음 벌어졌던 곳이다. 오전 8시반 단성사 앞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청계천 3가 관수교 남쪽, 을지로 3가, 동대문 앞 시위 등 순종 인산행렬을 따라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서울 8개 곳에서 일어났던 만세 시위는 더 확대되지 못했다. 6·10만세운동은 일제가 말하듯, “학생들의 감상적인 민족의식으로 일어난 충동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6·10만세운동은 비록 규모도 작고 오래 가지도 못했지만,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힘을 드러내었다. 사회주의 진영이 민족주의 진영 일부와 손을 잡아 ‘민족통일전선’을 실천했다는 것은 6·10만세운동이 단순한 ‘제2의 3·1운동’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옛 자취가 거의 사라진 서울보다 오히려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지곡리에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다. 그 마을 앞산 후미진 곳에 6·10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권오설의 무덤이 있다. 마을 입구에 권오설 기념비도 세웠다. 일제 고문으로 목숨을 잃고 고향 앞산에 평장으로 묻혔던 권오설 무덤가에 얼마 전 묘비도 세웠다. 요즈음 정부는 권오설에게 서훈을 주기도 했다. 이런 변화에서 이제야 6·10세 운동의 실체가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6강 학생운동의 고향, 1929년의 광주
11월 3일 시위를 벌이던 광주고보생들은 편파보도를 하였던 광주일보사를 습격하여 항의하였다(상).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는데 이때 서울 이화여고보 학생들이 사용하였던 깃발, '피압박민족 해방만세' '무산계급 혁명만세'(하)
16강 학생운동의 고향, 1929년의 광주
으리으리하게 치장한 건물 한쪽으로 시간에 쫒긴 듯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또 다른 쪽으로는 사람들이 밀린 듯 튕겨 나오는 현대의 기차역. 그 기차역은 ‘현대’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옛 나주역은 지난날 모습 그대로이다. 부근에 드문드문 남은 몇 채의 집은 쇠락한 기운이 뚜렷하지만, 옛 나주역은 마치 저만치서 칙칙폭폭 느릿하게 기차가 다가올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 역이 1929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광주학생운동의 진원지’이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광주고보 학생과 일본인 학교였던 광주중학 학생 사이에 일어난 작은 충돌이 광주학생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하면, ‘조선과 일본 학생들 사이의 다툼’ 또는 ‘광주 지역에서만 일어난 학생운동’쯤으로 여기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이란 1929년 10월부터 이듬해 1930년 3월까지 광주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학생들의 민족해방운동을 말한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 관원자료에 따르더라도 전국 194개 학교에서 54,000여명이 참여한 커다란 투쟁이었다.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감정대립이 아무런 계기 없이 전국 항쟁으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한일 학생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광주학생시위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은 ‘성진회’ 출신의 청년운동세력과 독서회 중앙본부 같은 학생비밀 결사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본 학생에 대한 적개심을 독립 투쟁으로 바꾸고, 투쟁방향을 일제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1월 3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합 가두 시위투쟁을 벌였다. 11월 3일에 일어난 학생 시위에 놀란 일제는 10일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이 끝나고 학교에 나온 학생들은 12일 2차 시위투쟁을 벌였다.’학생투쟁지도부‘는 11일 밤에 미리 격문을 뿌리고 독서회 조직을 연락망으로 삼아 학생들을 동원했다. 광주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옛 광주역은 사라지고 지금은 소방서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현장인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건물 한 채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광주여고보를 중심으로 모든 학생이 시험을 치르지 않는 ‘백지동맹’이 일어나기도 했다.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한 반일 학생 시위는 곧바로 목포· 나주로 퍼졌다. 이어 12월이 되면서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투쟁이 번지기 시작했다. 두 번에 걸친 서울 학생시위투쟁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 투쟁은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중등학교 중심이던 학생투쟁이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곳에 따라서는 학생이 아닌 일반 민중이 참여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시위, 동맹휴학, 격문 살포, 백지동맹 등 여러 방법으로 투쟁을 했다. 그들이 내건 구호는 학내 문제나 식민지노예교육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1월에 시위가 거의 마무리 되었지만, 지방에서는 3월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 11주년인 1930년 3월 1일을 앞뒤로 해서는 3·1 운동 기념시위라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광주학생운동은 나라밖으로까지 퍼져갔다. 재일동포가 궐기한 데 이어 만주 곳곳과 중국에서도 궐기했다. 북간도에서는 학생들이 20회 남짓 시위를 일으켰다. 상해에서는 연합회를 만들어 군중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 밖에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 지역에서도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글로 알리거나 일제 탄압을 비판하는 대회를 여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광주만의 학생운동이 아닌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교육문제나 학내문제를 벗어나 민족적인 과제를 전면에 내세웠던 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대중투쟁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1930년대 민족 해방운동에 새로운 텃밭을 일구었던 운동이기도 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역사의 길에서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튼실한 밑바탕이 되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7강 학살과 항쟁의 섬 제주
제주도의 근현대사에서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났던 관덕정(상), 이덕구부대가 머물렀던 이덕구산전(하)
1948년 제주 4·3, 한국 역사에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한 곳에서 3만이 넘는 사람이 죽은 사건은 없었다. 그 4·3항쟁을 오랫동안 망각의 늪 속에 묻어둘 수 있었던 것도 놀랍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앞뒤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 “나라 망치는 단독선거 반대” 등의 내용을 담은 호소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 무장항쟁을 진압하면서 정부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요즈음 조금씩 그 진실이 알려지고 있지만, 4·3은 ‘공식역사’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몇 남지 않은 역사 현장마저 자꾸 사라져 간다.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불에 타 없어진 마을이나 학살 터, 은신처 등 4·3 항쟁 유적지 대부분이 훼손되거나 파손되었다. 그렇지만 이덕구 산전은 깊은 산에 있는 탓에 아직 옛 현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산사람’ 들이 쓰던 깨진 솥단지며 항아리, 접시 등이 남아있어 제주 4·3의 한 모습을 가늠케 한다. 제주 사람들은 산에 나무가 없이 평평한 곳을 산전(山田: 산밭)이라 부른다. 본디 이덕구 산전 근처 봉개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안시앗마루’라고 불렀지만, 이덕구가 이곳에서 토벌된 뒤부터 이덕구 산전이라 불렀다. 이덕구는 제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 책임자를 맡아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주둔하면서 게릴라 전술로 토벌대에 맞서 싸운 무장대 지도자였다. 그는 1949년 6월 7일 봉개전투에서 패배한 뒤 토벌대의 포위 속에서 격렬한 싸움 끝에 사살되었다. 그 뒤 그의 시신은 십자형 틀에 묶여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되었다.
‘눈물· 피 ·주검이 많은 삼다도’ 제주에는 곳곳에 학살의 현장이 남아있다. 1992년 3월에 발굴된 다랑쉬굴은 토벌대의 ‘민간인 살육작전’을 보여주는 곳이다. 북제주군 중산간지대에 있는 자연동굴인 ‘다랑쉬굴’에서 4·3항쟁의 희생자 시신 11구가 발견되었다. 다랑쉬 굴에서 희생된 사람 가운데는 어린이와 여성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무기가 아닌 생활유품들만 발견되었다. 이는 토벌대가 학살을 피해 산으로 몸을 피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4·3항쟁의 불길은 꺼졌어도 학살은 이어졌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에 들어간 사람과 ‘입산자 가족’이 수없이 ‘예비검속’에 걸려 처형되었다. 이들은 주로 제주 비행장, 모슬포 비행장, 사라봉에서 학살되었으며, 밧줄에 묶인 채 바다에 수장된 사람도 많았다. 육지형무소에 갇혀있던 4·3항쟁 연루자들이 ‘즉결처분’ 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 가운데 일부가 묻힌 무덤이 바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이다. 제주 모슬포 경찰서는 예비검속으로 붙잡은 사람 가운데 일부를 1950년 8월 송악산 한 봉우리인 섯알오름 기슭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은 한동안 그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었다. 군과 정부가 시신 수습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1956년 5월이 되어서야 유족들이 겨우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다. 시신 가운데 옷가지 등으로 구별할 수 있었던 경우는 가족들이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도무지 누구 시신인지 알 수 없는 시신은 척추 뼈 하나에 두개골 하나씩을 맞추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여러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이라는 뜻을 가진 ‘백조일손지묘’이다. 어느 것이 자기 조상 무덤인지 모르므로 후손들은 마땅히 이 무덤 모두를 자기 조상의 묘처럼 받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위령비에는 “백서른둘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됩니다”는 글이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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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8강 4월혁명과 마산
3.15부정선거 직전 마산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던 자유당 선거강연회의 벽보, 자유당 연사로서 이은상, 박종화, 조연현 등의 이름이 보인다(상).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마산도립병원 앞에 모여든 시민과 학생들(하).
이승만 정권은 해방이후 50년대 남한자본주의의 위기에 따른 부담을 세금을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민중에게 떠넘김으로써 광범한 계급, 계층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위기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이 3․15마산항쟁과 4․19였다. 3․15에서 4․19로 이어지는 항쟁의 시발은 2․28 대구시위였다. 2․28 시위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구 2․28시위를 시작으로 대전, 수원, 부산, 원주, 서울 등 전국에서 학원의 정치도구화반대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중고교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자유당 정권은 3․15정부통령선거를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치를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3․15 1차 마산항쟁으로 폭발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을 계기로 4월 11일 2차 마산항쟁으로 그리고 4․19로 이어졌다. 따라서 마산에는 4월혁명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 많다. 3월 15일 전국 각지에서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표 바꿔치기, 투표함 바꾸기 등 사전 계획된 부정선거가 실시되었다. 시내 각 투표소마다 자유당 요원들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이름 밑에 도장을 찍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였다. 당시 마산시민들을 분노로 몰아간 데는 민의원 허윤수의 변절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3․15항쟁의 또 하나의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마산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한 어부가 시체 한 구를 인양하였다. 3․15 제1차 마산항쟁 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 당한 채 바다 위로 떠오른 것이다. 김주열 군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분노에 찬 시위대는 1960년 4월 11일 오후 6시 경 3만여 명으로 불어나 자유당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나 인사의 집을 부숴 나갔다. 이승만 정권은 제1차 마산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가려 하였다. 4월 11일에서 13일까지 3일에 걸친 2차마산항쟁은 1차마산항쟁 때보다 규모나 싸움의 격렬성, 시민의 참여도가 훨씬 크고 높았다. 또한 김주열의 죽음은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뒤 전개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국회의사당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대정부 건의문을 결의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정치 깡패에 의해 테러를 당하여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4․18 고대생 시위 피습사건은 시민, 학생들을 더욱 격분시켰고 이는 마침내 서울의 시민, 학생 20만여 명이 경무대와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쓰러져가는 4․19로 이어졌다. 대구의 2․28항쟁에서 시작되어 마산의 3․4월 항쟁에서 불꽃을 피운 4월혁명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항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하는 민중의 승리를 가져왔다. 4․19는 결국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7․29총선을 앞두고 학생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진영은 큰 희망을 갖고 진보적 사회단체와 대중조직을 활발하게 조직하였다. 대학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면서 ‘국민계몽운동’ ‘신생활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거창에서는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한 혁신세력은 7․29총선을 맞아 제각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여 한국사회당, 사회혁신당, 사회대중당 등을 결성하여 민주당에 맞서 총선에 참여했으나, 대중적 기반의 취약 등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혁신계와 진보정치세력은 8월 중순부터 자주적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결성을 추진하여 ‘민족통일 역량의 총집결’과 ‘통일유보 또는 선건설 후통일론 분쇄’ 등을 주장하였다. 4월혁명의 이 모든 투쟁의 성과는 5․16군사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4․19는 한국전쟁이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협소함 속에서 ‘실종된’ 민중운동을 부활하게 하였고, 이후 1970~80년대 사회민주화운동의 살아 숨쉬는 투쟁의 기억으로 작용하였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19강 죽음을 넘어 어둠을 넘어 우뚝 선 해방광주
광주항쟁의 불씨가 타올랐던 전남대 정문(상)과 망월동 묘지(하)
무등산 품안에 자리잡은 광주, 1980년 5월 광주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거머쥐려고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고, 이에 맞서 민중이 처절한 항쟁을 벌였던 곳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첫 불씨는 전남대 정문에서 타올랐다.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 찾아온 1980년 ‘민주화의 봄’ 때 학생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학도호국단을 없애고 민주적인 총학생회를 만들어 학원민주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자신의 정권장악을 위해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것을 모르고 아침 일찍 전남대 안으로 들어가려던 학생들을 공수부대원들이 무참하게 공격하여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이 첫 싸움에서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굽히지 않고 스스로 투쟁대열을 가다듬으며 도심으로 나아가 시위를 조직했다. 계엄군은 시위에 나선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공격하며 광주에서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맘껏 즐겼다.
금남로는 광주민중항쟁의 용광로였다. 5 18 이전에도 금남로와 도청 분수대 앞에서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는 집회가 열렸다. 서울 학생들이 ‘서울역 회군’ 뒤에 시위를 멈춘 것을 알면서도 금남로에서 5월 16일, 대규모 집회를 열어, “비상계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는 등의 구호로 광주 시내를 뒤덮었다. 항쟁 사흘째인 5월 20일 오후가 되면서 10만에 이르는 인파가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계엄군에 맞서 시위를 거듭했다. 이날 앞머리에 버스와 트럭을 앞세운 200대 남짓한 차량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에 들어섰다. 금남로의 차량시위는 광주민중항쟁이 조직적인 성격을 띠는 데 큰 이바지를 했다. 5월 21일 신군부는 오후 1시 정각에 느닷없이 애국가를 틀면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청을 마주한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
전남도청은 계엄군 임시본부였다. 5월 21일 오후 ‘시민군’이 그곳을 점령함으로써 항쟁을 벌인지 4일 만에 교도소를 뺀 광주 전체를 해방시켰다. ‘해방광주’에서 시민들은 날마다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항쟁을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시민군은 도청을 본부로 삼고 조직을 새로 정비했다. 그러나 외곽봉쇄작전을 펴며 광주를 진압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계엄군은 5월 26일 오후 6시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해방광주’의 심장, 도청에서 ‘시민군’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4시가 지나면서 계엄군이 쏟아내는 요란한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2층 복도에서 몸을 숨긴 채 계엄군과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끝내 계엄군에게 도청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늘 사람 기억 속에 떠오르는 곳이 바로 망월동 묘역이다. 망월동 옛 묘역은 5·18광주민중항쟁 때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이다. 광주민중항쟁 희생자 가족과 친지들은 공포와 분노에 떨면서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 이곳에 묻었다. 그 뒤 망월동 묘지는 ‘민주성지’가 되고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기리는 역사현장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망월동에 묻힌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유족들을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의 묘지 이장 책동에 맞서 싸우면서 망월동 묘역을 지켜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자 이곳에 묻혔던 영령들은 새 묘역으로 옮겼다. 그러나 망월동 묘지는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처참하게 안고 있는 곳인데다, 그동안 나라 안팎에서 참배객이 수없이 다녀간 곳이므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노동열사가 아직 이곳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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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찾아서-20강 87년 6월항쟁과 명동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