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에서 5월 20일 까지‘보현 옛 공예 콜렉션-탐미와 서정의 세계’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는 180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옛 여인들이 애용하던 목가구, 노리개, 여성장신구, 금속공예, 도자기, 생활용품 등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의 아낌을 받았던 공예품들은 각별한 애정의 눈길이 머물 때만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며 “콜렉션한 작품들을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아끼고 전통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창조에 보탬이 되고자 전시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가분자료관의 여성용구들도 언젠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일 기회를 꿈꾸며, 이번 "탐미와 서정" 도록에 청탁받아 실은 '컬렉션과 나'라는 글을 통해 옛 화장용구에 기울이는 박가분의 애틋한 마음과 반가움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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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뻐라, 옛 여인의 치레걸이이 무 열 | |
내 어쩌다 옛 여인네들의 치레걸이에 담긴 속멋과 그 의미와 마음결을 좇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돌이켜 보니 이십 수 년 전 예천 출장길, 허드레 민속품을 취급하는 고미술상에서 소꿉같이 조그맣고 반달같이 휘어진 얼레빗 하나를 만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줌 안에 쥐고 얼마나 매만졌던지 발갛게 손때 묻고 빗살 틈에는 때도 끼어 일견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살을 고르고 맨 것인지도 모를 그 얼레빗이 품고 있을 곡진한 사연은 알길 없어도 왠지 정감 있게 가슴에 다가왔던 건 또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아마 어린 시절, 동백기름 발라 윤이 나고 앞가르마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비녀 꽂은 외할머니의 정겨운 모습과 따뜻한 목소리를 떠올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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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의 외할머니 경대는 윗대에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와 나무가 맞물리는 부분을 사개짜임으로 옛 법식에 따라 짜 맞춘 제대로 된 조선시대 목물이었다. 그 치장이랄까 꾸밈을 위해 서랍에는 복을 가져다준다는 박쥐문양의 들쇠를 달았다. 옆면의 부재는 오랜 세월 옻칠이 살아 나뭇결이 선명할 정도로 얼비쳐 보였다. 안정감을 고려하여 조금 두드러진 받침다리와 경대 몸체에는 고추잎과 국수형감잡이를 사용하여 견고한 부착성과 미관을 위한 배려를 하였다. 느티나무의 자연스런 결을 살리면서 단순 간결한 형태의 이 경대는 정작 경대의 윗두껑을 열어 젖혀 놓고 보았을 때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유리 뒷면을 깎아 대나무를 조각하고 상단엔 둥그런 달이 떠있는 상태에서 아말감을 올려 물체를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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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진작 세상을 버리시고 거울을 보며 문득 홀로 남은 외할머니의 기나긴 봄밤은 어떻게 속절없이 깊어 갔을까. 무서리 내리는 그 가을날의 국화꽃은 외할머니 가슴에 또 어떤 빛깔로 사무쳐 진저리치며 피어났을까. 굳이 외할머니가 아니라도 우리네 옛 여인들은 자르르 손때 묻어 윤기마저 흐르는 경대 앞에서 그 무슨 생각을 하며 단장에 골몰했을까 자못 궁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자신을 가꾸기에 온 정성을 괴었으리. 더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못 이룬 소망이거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는 추억에 젖어 아슴아슴 눈시울을 붉히는 시간도 있었으리. 또한 제 나름의 마련된 호사와 한껏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넘칠 듯이 가득한 미쁜 사랑을 가만가만 두 손 꼽아 헤아리기도 하였으리라. 경대 서랍에는 일반적으로 분통이나 족집게와 빗이나 장식과 실용의 기능을 위한 뒤꽂이와 |
비녀 빗치개 등속을 넣어 두곤 했는데, 오밀조밀 고만고만한 것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이 요긴하게 소용에 닿는 것들이었다. | |
예천의 출장길 이후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허둥거리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출장비에서 애써 여투어 낸 푼돈은 홀린 듯 옛 여인네들의 생활용구들과 바꾸어지기 시작했다. 애써 눈 주어 돌아보고 마음 가 닿지 않고서는 그냥 태무심하고 지나칠 도리 밖에는 없던 것들이 저마다 의미를 갖고 앉은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 |
화접뒤꽂이에는 부부간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을 희구하는 여인들의 소담스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십장생 수저집에는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으로 동양의 장생사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비녀에 새겨 넣은 모란 문양은 부귀와 명예를 의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수복문을 담은 베갯모에는 다복과 장수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호랑이 발톱 같은 노리개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힘을 상징하여 장신구에 사용하게 된 것도 알게 되었다. 나달나달 닳아졌지만, 뇌문이나 아자문으로 난간을 두르고 겹국화, 벌, 박쥐, 초롱을 금박 물린 제비부리댕기 속에는 그넷줄 매어 창공을 치오르며 마음껏 자태를 뽐내고 싶던 날의 수줍음과 설레임이 보이는 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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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나 영주, 예천, 봉화, 상주, 의성, 점촌을 거쳐 장안평이나 인사동으로 내닫아 찾고 구하고자 했던 것은 돌이켜 무엇이었던가. 궁벽진 시골이거나 애써 옛 전통과 문화의 한 자락을 쉬 저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안간힘 쏟던 사람들에게서 내가 귀하게 얻어낸 것은 진정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 한 눈썹, 구름을 연상시키는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 복숭앗빛 뺨, 앵두빛 입술, 박 속같이 흰 이, 가는 허리, 그리고 백모래밭의 금자라처럼 아기작거리는 걸음걸이와 옥반에 진주를 굴리는 듯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 우리 옛 선조들이 예찬한 이런 이상적인 여인상은 부덕과 지혜와 건강한 신체와 올곧은 정신을 지닌 이성적인 아내상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 여겨졌던 이들은 짙고 화려한 화장을 한 반면 대부분의 여염집 여인들은 한 듯 만 듯 옅은 화장(談粧)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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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특히 정성을 들이고 애정을 품고 만난 여인네들의 치레걸이 중에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어도 빠져들 듯한 옛 화장용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후 구워낸 조선시대 청화백자 화장용구는 소담스럽고 앙증스러울 정도로 깜찍해서 내 마음 홀라당 빼앗겨 홀리지 않고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살펴보면 옛 여인들은 얼굴에 분단장하고 눈썹 그리고 연지를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크게 바꾸지 않는 자연스런 화장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고 주근깨 없으며 투명한 피부, 즉 옥 같은 피부를 갖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러한 피부를 가꾸기 위해 미안수를 만들어 사용하고 꿀 찌꺼기를 펴 발랐다가 떼어내는 미안법(팩)을 하는가 하면 오이를 얼굴에 문지르기도 하였다. 기억 컨데 내 유년의 뜰에도 동네 누님들과 봉숭아 꽃잎 콩콩 찧어 백반과 잘 섞은 다음 비닐로 싸고 실로 손톱에 칭칭 동여맨 시간들이 머물고 있다. 그 여름날의 해질녘 노을빛 곱게 물든 것 같던 분홍의 손톱에 피어오르던 아련한 그리움이나 못 다한 소망 같은 것이 수줍은 얼굴로 떠오르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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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월의 뒤안길 돌아 이제는 가고 없는 날의 여인들이 목숨처럼 아끼고 가까이했을 옛 장신구와 화장도구며 생활공예품이여! 솜씨 좋은 조이질로 은을 다듬고 칠보를 올리던 장인들도 죽고 그 연연하게 이어져 온 전통은 단절되고,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 졸리는 눈을 껌벅이며 수틀과 마주 앉았거나 금박댕기를 접던 어머니들의 손길을 다시는 보기 어려운 시절이 되고 말았다. 한 땀 한 땀 사랑과 꿈과 소망을 누비고 감치고 박고 이으면서 바느질을 하고 매듭을 매어 혼수품을 장만하던 처녀의 사연도 먼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마음이 가닿는 상상의 저편에는 부드럽고 긴 머리채 곱게 빗질하고 고운 댕기 드려서 칠보 은비녀를 반태스레 지른 여인 하나 있었다. 경대 앞에서 오랜 분단장 후 칠보단장 화접뒤꽂이 꽂고 쪽진 머리 들어 그 어디 먼 길 가시는가 치마꼬리 살짝 들어 외씨버선 사뿐히 마당을 나서는 상상을 가만히 해보곤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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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옛것에 눈이 오래 머뭅니다. 목요일 결석 신고하면서 ..
검게 타버린 목줄기 따라 돌아간 저고리 동정보다 더 뽀얗게 딱분 바르고 5일장 가시던 큰 형수님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