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신촌 로터리
고임순
길은 우리의 삶을 이어주는 서정의 공간으로 그만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 분위기에 젖어 걸어가기 마련이다. 길은 우리에게 자연 현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뜻하는 인간의 언어로 다가온다. 숱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돌아오며 삶의 발자국을 남기는 길에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미래로 그리움이라는 과거를 읽는다.
고서, 골동 도자기, 서화 작품들이 진열된 인사동 거리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3대를 이어 성업하고 있는 전북지업사, 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통문관, 낡은 간판이 옛스러운 전통 찻집 등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서사시를 음미하듯 양쪽 가게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여유는 신촌에 다다르면 사뭇 달라진다.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 신촌 로터리로 향하면 나는 단거리 선수처럼 긴장이 된다. 질주하던 차들이 빨간 신호등 앞에서 일제히 숨을 멈춘 8차선 횡단보도를 재빨리 건너는 군중들, 장대 같은 젊은이들 틈에 낀 나는 사람의 홍수 속에 휘말려 떠밀려 간다.
“헬로 존. 디스 이스 제임스 김.” 어떤 청년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앞질러 걸어가고 있다. 그의 유창한 영어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최근 기업체의 수출입 관련 부서 사원들이 이름까지도 영어로 바꾸어 명함에 새기고 다닌다는 데 그 중의 한 사람이리라.
길 초입, 굴다리 아래 소형 자동차에는 ‘X세대 최신가요’라 써붙인 녹음 테이프들이 진열되어 그 감각적인 랩 리듬이 이 길의 배경음악으로 깔려 흥을 돋우고 있다.
“얘, 내 루즈 색깔 어때, 핑크 무드지?”
“그래 맞다. 나시하고 롱바지 쇼핑 안 갈래? 피자 살께.”
“야호! 2차는 비어 한 잔이다.”
운동모자를 눌러 쓰고 영어로 무늬진 T셔츠에 청바지의 아가씨들이 스웨터를 허리에 두르고 손뼉 치며 걸어가고 있다. 활기 넘치는 젊음의 거리. 유독 길 가득 한창 나이의 남녀 쌍쌍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어느 사이 나도 모르게 붕 떠가는 눈앞에 가로 세로 촘촘하게 크고 작은 간판들이 어지럽게 널린다. 일년초처럼 쌈박거리는 간판들은 모조리 외국 이름인데다 표기마저 영어로 되어 있어 영어를 모르면 눈뜬 장님이다.
찻집과 음식점들은 대부분 외국 도시 이름이어서 ‘베네치아’, ‘나폴리’, ‘허리우드’, ‘스페인 하우스’ 등으로 멋부리고 있다. 비단 음식점뿐만 아니다. 사진관은 모두 ‘스튜디오’로 바뀌고, 금은방도 ‘타임피스’, 신사 양복점도 ‘게이트’, 의류점도 ‘유니온 베이’ 신발 가게도 ‘시티 헌터’, 도장집까지도 ‘알파사’이다. 그 외에 노래방, 당구장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달라진 가게마다 ‘파격 세일’, ‘기절초풍세일’이 나붙어 있어 서로 물건을 파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머리를 자르려고 미장원을 찾았다. ‘헤어샵’보다 ‘헤어시네마’쪽의 문을 들어섰다.
“고데하시게요?”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고 쓰고 있는 종업원들. 머리만 자르겠다고 하니 “아 -, 숏컷트요.” 한다.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 ‘필’, ‘퀸’ 등 여성 대중잡지들이 모두 외국 잡지를 방불케 했다.
미장원을 나와 ‘바이더웨이’라는 24시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 봉지를 골랐다. 하나같이 생소한 이름들이다. 약국과 화장품 가게에도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난무하고 있어 어리둥절해진다.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사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버스 정류소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토요일 오후여서 더욱 혼잡한 길은 오고가는 차량들도 마치 주차장이다. 건너편 레코드 가게에서 각국 회화 녹음이 흘러나와 소란을 부채질한다. 그 옆 비디오 가게의 TV 화면에는 블랙 힙합댄스 곡을 부르는 인기 절정의 그룹 룰라의 모습이 행인들을 잡아매고 있다.
바로 옆 공중전화 박스에는 앞머리를 색동으로 물들이고 뒷머리를 쥐꼬리처럼 늘인 사내가 통화중이다. 그 뒤에는 초미니 스커트에 배꼽티를 입은 소녀가 대기중이다. 한껏 개성을 창출한 신세대들.
국경을 넘나드는 다문화 시대의 소비 주체들. 마치 어느 외국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금년에 접어들어 이 거리는 앞장 서서 세계화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 각계 각 분야에서 날만 새면 세계화를 부르짖고, 광복 50년 기념행사를 벌이기에 바쁜 움직임이다. 눈앞의 어지러운 간판과 행인들의 대화에서 흘러간 우리 격변의 역사가 살아나고 있다. 외래어인지 외국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외래적 요소들이 범람하고 있는 거리. 아무리 영어가 세계어로 부상되었다고 해도 말이란 그 민족의 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얼빠진 채 흥청거리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기다리는 버스가 쉬 올 것 같지 않아 나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움을 부르는 옛 길. 한 시대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더불어 길도 달라지기 마련인가. 이 근처 신수동에 뿌리를 내린지 30년 가까운 세월. 이 길은 내 삶의 터전이었다. 예전에 버스 종점이던 이 곳은 길 양쪽에 과일 채소 등의 노점상들이 늘어져 있었다. 흙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쑥이며 냉이, 엿기름을 팔던 노파의 인정이 어디쯤인가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된 이 곳은 이어서 재래시장을 밀어내고 그랜드와 그레이스 두 현대식 고층 백화점이 차례로 들어서자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대중들의 정서 구조를 크게 뒤바꿔 놓은 새로운 소비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차츰 우리의 경제가 발전되면서 여행 스포츠 등 여가를 이용하기 위한 가족 단위의 쇼핑문화의 형성이 활발해졌다. 더욱이 이 곳에 인접해 있는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의 새내기 동아리들의 뒤풀이 문화의 공간으로 활기는 더욱 가열되고 있다.
어느덧 해가 진 거리는 어둠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길은 어둠 속에 더욱 현란하다. 네온이 반짝이기 시작한 것은 디스코나이트클럽의 간판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호객하는 사람의 몸에서도 어지럽게 명멸한다. 이 길을 뒤로 뚜벅뚜벅 걸으며 전설 같은 옛 길에 향수를 느낀다면 나는 낙오자일까.
인간의 체온이 풍기는 길을 잃은 것은 인간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본다. 아무리 고층건물이 솟아 문명이 발달하고 세계화가 된다 해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허전함과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해가 서산으로 지듯 어제의 나는 오늘도 지고, 저 길에 들끓는 젊은이들도 어쩔 수 없이 내일도 침몰하리라. 그 내일은 어떤 길이 될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비단 과거에 대한 향수만은 아닌, 오늘을 숨쉬고 사는 어버이들의 내일을 염려하는 자녀 사랑이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