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그림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로로 첫 번째 그림을 1번으로 해서 번호를 부여하여 설명을 했다.
1.손양원목사 장례식후 가족 사진 1950년 9월28일 손양원목사님이 순교하심으로 장례를 했다.장례식후 찍은 가족 사진이다.맨뒤의 학생은 손양원목사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씨를 1948년 여순사건때 죽였던 안재선씨다.손양원목사가 살려내 양아들로 삼았다.동인,동신씨를 대신해서 맞 상주의 책임을 다했다.하얀 옷을 입은 분은 손양원목사 사모님 정양순씨이며 안고 있는 아들은 손양원목사님이 돌아가신 날 새벽에 태어나신 손동장목사님이시다.현재 분당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다.그 옆에 있는 아이들은 둘째딸 동임씨와 셋째 동연 씨이다.
2.성경학교 손양원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1940년9월25일부터 1945년8월17일까지 옥중생활을 하셨다.출옥후 순교신앙을 가르치는 성경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학교는 정확하게 어느 학교이며,어디에 있었는지 잘모른다.
3.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장면 손양원목사님은 1939년7월14일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셨다.당시 교회당 내부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다.참고로 당 시 성도들은 1000명이 넘었다.1000명이 넘는 성도 가운데 제직은 전체가 24명이었다.현재 애양원에 있는 교회당은 손양원목 사 시무당시의 교회이긴 하나 본래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4.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5.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는 모습 애양원 환우들을 위로 하기 위한 위안관이 있었다.지금은 철거되고 없다.그 위안관에서 당시에 거둬들인 풍성한 곡식을 하나 님께 바치면서 감사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다.
6.손양원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 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 이 바뀌었다.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7.순교하신 손양원목사 시신 앞에 앉아 계신 사모님과 손동길목사 1950년9월28일 여수시 미평동 과수원 골짜기에서 공산군들의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당시 순교의 현장에 손양원목사의 둘째 아들 동신씨의 친구가 함께 있었는데 그 친구만 유일하게 살아났다.그 친구가 애양원으로 달려와서 순교 소식을 알려주자 교 인들이 손목사의 시신을 순교장소에서 애양원으로 운구해 왔다.운구해온 시신을 앞에두고 그 날 새벽에 태어난 아들을 안고 앉아 계신 손목사님의 사모님,유복자,그리고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의 모습이다.
8.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서 바라보아 누워계신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고, 손동연씨,손동임씨,사모님,유복자,안재선씨,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중요한 것은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맞 상주가 되었다.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9.안장후 손동인,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신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그 비석뒤 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1948년10월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 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8 년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목사님의 묘가 있다.
10.손동인씨의 모습 1925년11월6일 출생했다.1948년10월21일 여순사건때 순교하셨다.순천사범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순교하셨다.당시 동인씨는 기독학생 회장이었을 뿐 아니라 좌익 계열 학생들의 활동에 반대를 했다.뿐만 아니라 졸업후 미국 유학을 가도록 되 되어 있어서 좌익들이 미제의 앞잡이라고 온갖 박해를 가했다.그러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맨 먼저 좌익들에게 붙잡히게 되었 다.그는 죽일려는 좌익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도를 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11.손동신씨와 기독학생들 1930년9월18일에 출생했다.1948년10월21일 형 동인씨와 함께 순교했다.당시 순천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학교에서 돌아온 동신씨는 형이 붙잡혀간 것을 알고 형을 죽이려고 한 형장으로 달려갔다.폭도들에게 형은 집안의 장자 이므로 자기를 대신 죽 이고 형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그러자 형은 너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집에 가서 자기를 대신해서 부모님을 잘모시고 살라고 하고 동생은 형은 장자이므로 죽으면 안된다고 하며 부둥켜 안고 울었다.이 광경을 보던 폭도들이 둘다 죽이자고 하면서 만약 예수를 부인하고 성경책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형제가 똑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의 총에 맞아 순교 했다. 사진 정면 앞줄 한가운데 계신분이 손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안재선씨를 살려낸 지금의 순천제일교회를 시무하셨던 나덕환목 사님이시다.
12.박신출집사님이 운영하고 있던 부산의 통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손동인,동신씨 형제의 모습 1940년 9월25일 손양원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 수감되어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손목사님의 옥중생활이후 애양원 에는 일본 원장이 오게되었고 손목사님 가족은 사택에서 쫓겨났다.쫓겨난 가족은 손목사님이 수감되어 있는 광주로 옮겨 목 사님을 뒷 바라지를 했는데,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동인,동신 형제가 돈을 벌어야 했다.광주에서의 직장 생활이 어려워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자 그 사정을 안 부산에 박신출집사가 자신의 공장으로 부르게된 것이다.그곳에서 23원을 받아서 3원은 용돈 을 하고 20원은 생활비로 썼다.
13.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14.손동인,손동신씨의 운구행렬 1948년10월21일 순교한 손동인,동신 형제의 장례식을 교회 마당에서 거행하고 장지를 향해서 운구해 가는 행렬이다.
15.벽돌 굽는 가마터와 애양원 초대 원장 윌슨박사 1909년 광주 양림동에 선교 본부를 두고 선교 활동을 하던 의료 선교사 중에 오웬선교사가 과로로 쓰러졌다.병이 중하게 되자 목포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던 친구 포사이트의사에게 전갈을 보내 급히 와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부탁을 받은 포사 이트 의사가 영산포까지 배로 오고,영산포에서 조랑말을 구해 타고 광주로 가던중 나주를 지나고 있었다.나주 남평쯤 지나가 고 있는데 길가에 한센병이 걸린 여자 환자가 쓰러져 있었다.포사이트 의사가 말에서 내려 그 여자 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이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선교본부에 도착해 보니 오웬의사는 돌아가신 후였다. 데리고 온 한센환우를 마땅하게 치료해줄 곳이 없어서 당시 선교부 건물을 짓기 위해서 사용했던 벽돌을 굽는 가마 굴을 깨끗 청소하고 그곳에서 치료를 해주었다.이것이 한국의 맨처음 한센병자 치료의 시작이다.
16.하루에 세 번씩 종을 치시고 예배를 드리신 손양원목사 1950년6월25일 육이오가 발발하고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왔다.당시 공산군의 점령하게 있던 지역은 교회가 종도 칠 수 없 었을 뿐 아니라 예배도 드릴 수가 없었다.애양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그런데 손양원목사는 그런 와중에도 꼭 하루에 세 번씩 종을 치시고 예배를 드렸다.그때 설교는 주로 "잘죽자"였다고 한다.
17.손양원목사 하관식 장면 애양원 동도섬에 순교자 손양원목사를 안장하는 모습이다.
18.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 른다.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별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 이다.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그 환우는 죽었다.
19.한성신학교 건물 손양원목사님이 부임해 오신후 애양원 같은 형편에 있는 환우들에게 건강 사람이 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라 생각하고 환센환우들 중에서 저들을 목회할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신교 설립을 추진하시던 중에 순교를 하셨다.이러한 손목사님의 뜻을 받아 후대 목사님과 원장님이 한성신학교를 설립했다.3년제 신학교로 2회까지 졸업생을 배 출한후 폐교되었다. 지금은 토플하우스로 개조해서 애양원을 방문한 분들의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아주 편안하고 안락한 호텔식 쉼터로 만들어 놓았다.흠이 있다면 25명정도의 인원밖에 수용을 못한다는 것이다.
20.동인,동신,동희,동장씨가 자치했던 순천 자취집 사진의 자취집에서 동인씨(순천 사범학교),동신씨(순천중학교),동희씨(순천매산중학교),동장씨(순천남국민학교)가 바취를 했다.동인씨는 이곳에서 죄익 폭도들에게 끌려가 순교를 당했다.
21.손양원목사 생가 손양원목사님 부친 손종일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손양원목사는 4형제다.손양원목사,손의준목사,손문준목사 그리고 당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손양원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22.애양원 병원 입구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손양원목사 해방후 일본 원장이 쫓겨가고 미국 선교사들이 오시기전까지 일년정도 손양원목사님이 병원 원장을 겸이했다.그때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23.광주 양림동 선교사들이 한센환우들을 위해서 기증한 집 포사이트 선교사가 한센환우를 선교본부로 데리고 온 후 선교사들간에 한센환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가마터에서 치료 하게 할 수 없다며 한 선교사가 자신의 집을 한센환우들의 거쳐로 내 놓았다.
24.광주 봉선리 한센치료 센타 남자 병동 포사이트 의사에 의해서 시작된 한센환우 치료는 당시 기독병원 원이었던 윌슨이 뛰어들므로 활성화 되었다.윌슨은 본격적으 한센 환우들을 치료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고 그곳에서 치료를 시작했다.그곳이 바로 봉선리었다.지금의 광주 봉선동이다.초 창기 남자들을 수용해서 치료해주었던 남자 병사이다.
25.하동군 옥종면 성도들 1940년9월25일 손양원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옥중생활이 시작되고,애양원에는 일본원장이 부임을 하게 되었다.손양원목 사 가족은 일본원장에 의해서 쫓겨났고,애양원에는 신사참배 강요를 받게 되었다.그때 사진에 있는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고 손양원목사님 가족을 돕기 위해서 애양원을 떠나게 된다.이들은 낮에는 동냥을 하고 밤에는 옥종면 산속에서 다쓰러져 가는 집에서 생활을 했다. 이들은 동냥을 해 온 것들 중에서 십의 일만 자신들이 먹고 십의 구는 손목사님 가족에게 드렸다.그 사실을 알게된 주변의 거지들도 동냥을 해오면 십의 일을 손목사 가족을 위해서 내놓았다고 한다.사진 정면에 양복을 입고 삭발한 분이 해방후 옥중 에서 막 출옥한 하신 손양원목사님이다.그리고 그 뒤에 있는 남자 학생은 손양원목사의 둘째 아들이다. 왜 손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동냥하는 사람들속에서 해방될 때까지 함께 살았느냐? 손목사님은 옥중에 가신후 자녀들이 학교에 가면 신사참배를 하고 궁성요배를 한다고 학교에를 보내지 않았다.그러니 일본 정부가 손목사 가족에게 신사참배나 궁성요배를 시킬 길이 없었는데 마침 그때 큰 아들이 나이가 22살로 군대갈 수 있는 나이 었다.그래서 징집영장을 발부했다.징집영장을 받아든 손목사님 가족은 의논 끝에 가족이 전부 흩어지기로 했다.사모님과 동인 씨와 당시 동임씨는 남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동신씨는 하동 옥종면 성도들에게로 가고 동희,동장씨는 구포고아원으로 갔 다.그래서 동신씨가 옥종면 성도들과 해방때까지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다.
26.김구선생님이 운영하던 학교에서 강연을 한후 해방후 김구선생님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여학교에 손목사님을 강사로 초청 강연을 했다.강연후 학생들과 김구선생과 함께 한 사진이다.
27.옥중서신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에는 이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이외의 많은 사진들과 손양원목사님의 친필 설교 노트,옥중편지,성경등 많은 유품이 전시되었다.그리고 당시 손양원목사님이 활용하셨던 고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28.합동결혼식 장면 초창기 애양원에는 남자 병동과 여자병동이 구별되어 있어서 서로간에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해방이후 가정을 허락한후 합동 결혼을 하고 난후 기념사진이다.
29.손양원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그러자 공산군들이 시 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30.서울 남대문 교회 부흥집회 후 기념사진 맨 앞줄 손양원목사 왼쪽에 서 있는 학생이 동인,동신시를 죽인 안재선씨다.당시 죽음의 자리에서 살려내 양아들로 삼은후 믿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부흥집회때 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 남대문교회 집회 이후에는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31.하동군 옥종면 성도들이 살면서 신앙을 지켰던 집 신앙을 지키기 이해서 애양원에 나온 성도들이 이집에 모여서 신앙을 지키고,손양원목사 가족을 도왔다.
32.안재선을 용서하시는 손양원목사 여수사건때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씨를 용서해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33.손양원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그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 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그리고 옥중생활할 때 취조받게 고문받는 장면이다.
34.동인을 붙잡아가서 취조했던 당시의 순천경찰서 여순사건때 폭도들에게 점령당해 취조 장소로 쓰였던 순천경찰서이다.
35.선한 사마리아인 포사이트 포사이트 의사가 광주로 가던 중 길가에 만났던 환센병 환우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선교 본부에 도착해서 안아 내리는 장면이 다.
36.기도가 생활인 사람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의 생활은 기도였다.그로 하여금 기도가 생활이 되게 한 것은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이시다.기도가 생활이 되도록 훈련하시는 손종일 장로님내외간과 어린 손양원목사의 모습이다.
37.출옥성들과 함께 해방과 함께 출옥한 후 출옥성도들에게 간증하고 함께 찍은 사진이다.
38.인천제일교회 부흥회 인도 해방후 인천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모습이다.
39.세분목사님들 손양원목사님의 부탁으로 안재선을 살려낸 나덕환목사님,손양원목사님,그리고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 양아들 삼았다는 소리를 듣고 미국에서 달려와 사랑의 원자탄을 쓴 안용준 목사님이시다.
40.성산학교 학생들과 함께 어려서 병이들어 애양원에 온 환우들을 교육 시키기 위해서 애양원교회 교육관에서 성산국민학교,성산중학교 운영했다.당시 교장이신 손양원목사와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모습이다.
41.손동인과 기독학우들 사범학교 졸업전 기독학우들과 함께 한 사진이다.순교직전의 사진이다.
42.피난 선 육이오사변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이곳 애양원으로 와서 애양원에 있는 배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그때 사용되었던 배다.손 양원목사님도 피난권유를 많이 받았으나 1000명 교인들이 다 함께 피난을 가면 같이 가도 한 사람이라도 애양원에 남은자가 있으면 그와 함께 하겠다며 피난을 가시지 않았다.
43.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44.성산학생들 은동회 운동장에서 성산국민학교 중학교 학생들이 운동회 하는 장면이다.
45.경남 마산 여자 성경학교에 다닐 때의 손목사님 사모님 애양원교회 부임 2,3개월 전의 손양원목사 사모님의 모습이다.맨뒷줄 맨 오른쪽 사람이다.
46.엘리야의 까마귀 손양원목사님 시무당시 1000명이 넘는 교인들중에 유일한 여집사님들이다.이들은 손양원목사님을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니 면서 섬긴 사람들이다.그래서 엘리야의 까마귀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47.김구주석과 손양원목사 해방후 김구주석께서 당신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의 교장으로 손양원목사를 초빙했는데 애양원 식구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그때 김구선생님께서 기념으로 글을 써주셨는데 그 글을 쓰고 계시는 모습이다.
48.김구주석께서 손목사님께서 써주신 글 눈 덮인 길을 손목사님이 걸어 갈 때 그 발국을 보고 따라 오는 사람이 있으므로 바르게 걸어가라는 뜻을 담은 글이라고 한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