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가서 옷 잘 입은 체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예산은 충청남도의 경제 중심지였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 충청남도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친 내포땅의 동쪽과 남쪽이 지금의 예산이니 가히 살기 좋은 땅임을 알 수 있다.
평야가 넓어서 예로부터 농사가 풍족했으니, 고덕면에 구만포라는 곳은 아산만에서 뱃길로 벼 9만 섬을 실어 날랐다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또한
아산만에서 무한천을 오르는 수로도 발달해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상거래도 활발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예산은 여느 지역에 비해서 발전이
덜 된 한갓진 고장임을 느낄 수 있다.
충절의 고장, 백제의 역사를 간직하다
예산의 옛 이름은 백제 때 오산현으로 예산군 대흥면에 백제 부흥 운동의 본거지였던 임존성이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 곳 예산이 백제 당대에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은 화전리 사면석불이 말해 준다. 유서 깊은 수덕사의 창건도 백제 시대로 알려졌거니와,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말기에 지은 소중한 옛 건축물로 오늘날까지 늠름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서울서 고속 도로를 타고 자동차를 달리다가 천안으로 빠져 나가 아산과 도고를 거쳐 들어간 예산은 서울서 고작 120여 km밖에 되지 않는다. 예산으로 들어서면 ‘충절의 고장 예산’이라는 현수막과 만난다. 찬란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충 ·효·예를 으뜸으로 내세워 살았다는 예산 사람들의 진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추사 고택과 열녀문
추사 고택이 있는 신암면 용궁리로 가는 길 양편으로
사과가 한창이다. 대구·경북 사과 다음으로 치는 예산사과는 전국 사과 생산량의 4%를 차지한다. 언덕진 도로변에 즐비한 과수원에는 지난 가을 초 태풍
예니를 견디고 붉게 익은 사과가 꽃처럼 화사하다.
나뭇가지가 처질 만큼 묵직하게 사과가 연 사과밭을
보며 차를 달리다 보면 곧 추사 고택에 닿는다. 야트막한 오석산을 등 뒤에 두고 햇볕을 담뿍 받으며 정갈하게 서 있는 고택엔 샛노란 은행잎이 빗물처럼 뚝뚝 지고 있다.
고택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 걸린 추사의 글씨체가
긴 세월 흐른 후에도 아름답고 힘찬 글씨로 생생히
남아 있다. 대가의 기품이 서린 고택 처마는 부드러운 곡선의 머리를 치켜든 채 너른 예당평야를 바라다보고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추사 고택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에 비껴 있고, 그 안으로 안채가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만 남향을 한 채 단아한 육간 대청이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는 고택 방안엔 과거 글 쓰던 문방사보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어 은은한 묵향이 곳곳에 배어 있는 듯하다. 고택 왼편엔 김정희 선생이 잠들어 있다. 묵묵히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는 허리 굵은 소나무가 늦가을 빛에서도 청청한 모습으로 아담한 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추사 고택에서 신암면 방향으로 500여 미터 더 나아가면 열녀문 하나가 나타난다. 화순옹주 홍문이다. 영조의 장녀이며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하사한 열녀문이다.
수덕사에서 만난 비구니
내포땅 가야산의 최고 명승지를 들라 하면 수덕사를 꼽을 수 있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특히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은 목조건물 대웅전은
700년이나 지난 지금도 간결함 속에 힘과 멋을 간직하고
있다.
오래 전에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이런 노래의 사연 때문인지 필자조차도 수덕사를 찾아가며 이 절은 여승인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곳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수덕사를
들어서며 가장 먼저 만난 스님도 비구니였다. 그 분께 수덕사엔 비구니들만 계시는가고 물었더니 삭발한 머리가
반백인 비구니는 조용히 웃으며 아니라고 말한다.
불교의 전통으로는 비구니가 독자적으로 절을 짓고 생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단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구와 비구니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생활하며 참선과 경전, 염불 등을 공부한단다.
수덕사 절간 바로 아래는 수덕여관이 자리잡고 있다. 아직까지 고집스럽게도 초가지붕을 고수하고 있는 이 여관은 우리 나라 근현대기에서 가장 빼어난 화가 중 한 사람인 고암 이응로가 머물던 곳으로 그의 문자추상화가 새겨진 바위 그림이 있다. 수덕여관의 초가 지붕과 소나무와 바위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 곳 수덕여관은
지금 고암의 부인이었던 아흔 살의 박귀희 여사가 지키고 있다.
윤봉길 의사 기상 드높다
덕산면 기량리의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향해 가다가 덕산면 대동리에 새로 들어 선 한국건축박물관을 들어가
보았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기능을 후세에 전수하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한국건축박물관은 문화재 수리 기능 보유자인 전흥수 회장이 90여 억 원의 사재를 들여 지었다.
한국건축박물관의 개관을 기념하여 높이 띄운 애드벌룬이 지척처럼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 덕산 가는 45번 국도변에 윤봉길 의사 사적지와 의사의 충의를 기리는 충의관이 있다. 충의관은 내부에 윤 의사의 농촌 지도 계몽 운동과 4.29 의거 장면 등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 놓은 교육장으로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면 쉽게 상황 설명이 가능하겠다.
대흥면 일대는 예당저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예당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인 예당저수지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저수지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저수량도 많다. 강처럼 넓은 저수지는 사철 아름다운 풍광도 만들고, 민물고기도 많아 낚시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흥면 상중리의 봉수산 정상에 오르면 장대한 성벽과 마주 대한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였던 대흥 임존성지이다. 가파른 산을 아홉 구비나 돌아 올라야 하는 높은 산
위에까지 적이 오르기도 쉽지 않을 텐데, 깎아지른 성벽을 공격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굳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일. 임존성은 성 안의 사람들이 내분으로 인해 죽고 죽이고 항복을 하는 통에 당군에게 내주고 말았으니 백제 부흥 운동도 막을
내리고, 유민들의 피 어린 한숨만 남게 되었다.
성으로 오르는 산기슭에는 대련사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조용한 산사는 백제 의자왕 16년 도침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당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는 단아한 절엔 풍경소리 맑다.
예당저수지를 끼고 차를 달리면 매운탕과 붕어찜집이 유독 많아 미식가들의 눈길을 끈다. 그 중 대흥면 하탄방리의 메기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양어장집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우면서도 이야깃거리가 있다. 윤승병 사장 등 삼형제가 직접
메기를 양식하여 아내들이 운영하는 양어장집에 메기를 대는 것이다. 최고의 메기를 기르기 위해 치어서부터 직접 키우고, 지하수 깊은 물로 메기를 키워 비린내도 없이 내오는 메기 요리는 가히 일품이다.
서울서 가까운 온천 관광의 명소
예산을 여행하다 보면 온천 표시가 눈에 많이 띈다. 서울과 인천 경기 지역에서
온 관광 버스 행렬도 쉽게 볼 수 있다. 온양과 도고 등과 함께 온천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가면 오촌리엔 조선 전통 옹기를 재현하는 전통 예산 옹기집이 있다. 인간의
고향이며 최후에 돌아갈 곳인 흙과, 인류 문명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던 불과의
만남으로 하나의 결정체를 이루며 탄생하는 옹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직접
물레를 돌려 항아리와 가마솥, 찬기, 화병 등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들판에선 구기자 수확이 한창이다. 농업 인구가 50% 이상을 차지하는 예산에서는 어디 하나 그냥 노는 땅을 볼 수 없다. 그저 한뼘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제각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인심도 넉넉한 충절의 고장, 사과의 고장 예산. 서울 가까이 온천까지 갖춘 이 곳에 가족과 함께 온천을 즐기며 역사와 충절을 배워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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