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바보
김윤선
“남에게 밥이 되어라 바보 같이 살아라,” 김추기경님과 법정스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살기를 희망한다.
세종대왕께서 밥은 하늘이고 백성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 조상들은 강대국들의 억압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먹을 것이 없이 굶어 죽고 맞아죽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일제 강정기를 지나 6⸱25를 거치면서 우리 시대만 하여도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사람들이 눈앞에 보였다. 일체 치하에서 농사를 지어도 모두 강탈당하고 초근 목피로 목숨을 연명하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다.
내 어린시절 사라호 태풍을 거치면서 또 몇 해를 지나 한 달 동안 장마가 져서 보리가 모두 썩어버렸다.
그해 큰집이 부산으로 이사를 올 때 무작정 배를 타고 따라 왔다. 오빠가 부산에 있으니 취직시켜 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왔지만 다행이 오빠가 근무하는 양과자점 곁에 보세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거대한 공장에 약 6백 명이 기계 처럼 일을 하는 모습에서 놀랐다. 나도 그 많은 사람 속에서 포장 일을 할 수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물만 먹고 그냥 굶었다.
아침에 겨우 밥 한 공기를 부뚜막에서 먹고 종일 굶고 일을 하며 차비가 없어 왕복 2시간씩 걸어 다녔다.
공장 사람들은 점심시간 까마귀 떼처럼 음식점을 갈 때 나는 물만 먹었다.
저녁이면 미국에서 온 서양 냄새 나는 옥수수 가루 죽을 먹고 밤새 설사를 하며 생명을 이어왔다. 6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온 해골 같은 딸을 안고 통곡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벽에 눈을 뜨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너는 바보” 하며 싱긋 웃으면 나도 알 수 없는 물기가 눈가에 촉촉이 젖어 든다. 얼굴엔 검버섯이 덤성덤성 자리하고 흰머리카락이 틈틈이 자리를 잡아가니 초로의 노파가 앞에 서 있다.
나에겐 50년 지기 친구가 있다. 스므 살 즈음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 우리 옆 가게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오빠 같은 남 친구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여 3년이 지날 무렵 남 친구는 아내와 약혼 날을 받아놓고 서울로 간다고 했다.
나는 물건 구입 차 서울로 가는데 남친도 물건 구입 차 간다고 해서 함께 갔던 것이다.
열차를 타고 한참 가더니“선아 이번에 가면 나 약혼을 한다” 남친의 말에 깜짝 놀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날을 잡았나?”고 했더니 서울 쪽에서 재촉하여 빨리하게 되었다는 사정을 이야기 해 주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키가 아주 작은 아가씨와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는 처음 만나 인사를 하고 함께 자가용을 타고 남대문 시장을 갔다. 두 사람 사이에 눈치도 없이 차를 함께 탔던 것이 인연이 되어 50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여 친구는 키가 작고 몸도 작지만 못하는 것이 없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시부모님 모시고 종손 역할까지 하는 것이 나와 똑 같다. 처음 만난 친구는 남편이지만 그 아내가 내 분신처럼 늘 함께 하고 있다.
이북이 고향인 친구는 장손 며느리로서 부모님을 비롯 팔 남매의 대가족을 짊어지고 오늘에 왔다.
친구는 몸이 빠르며 늘 소녀 같다. 주산 일단인 친구는 장사뿐만 아니라 그 많은 손님과 종업원을 다스리며 장부와 매상 등 혼자서 일사천리로 다 했다. 성격이 총알 같은 남편의 시중을 들어가며 부모님을 모시고 모든 매사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어 기계처럼 잘하니 주변에서는 친구를 똑순이라고 불렀다.
나는 친구를 “밥 엄마”라고 이름을 지었고 나는 “바보”라고 이름을 지었다.
친구는 사람을 좋아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면 밥을 사준다.
이웃이나 친구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아낌없이 도와주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며 모두 천사라고 부른다.
“모두가 천사면 천사 아닌 사람은 누구지?” 하면 친구는“나는 속을 다 빼 놓은 사람이다”라며 웃는다.
칠순이 넘은 친구는 단발머리에 운동과 몸 관리를 잘하여 뒷모습이 소녀 같다. 걸음도 경쾌하고 행동도 아이들처럼 빠르다. 운전도 잘해서 주변 친구들을 다 태워 공도치며 함께 한다. 친구는 모든 매사가 똑 부러지는 반면 나는 좀 느슨하고 어눌하다. 극과 극이라고 할까? 그래도 서로 만나면 혈육처럼 편하고 눈만 보아도 서로를 안다.
어머니께서 여자는 시집가면 벙어리 3년 귀먹어리 3년 장님 3년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누누이 들어왔다.
그렇게 십년을 기다려 왔는데 평생 목까지 차오르는 아픔을 참고 소처럼 일만 하고 살아왔던 것이 바보가 되어버렸다.
위로 오빠가 넷이니 남자처럼 투박하고 멋도 부릴 줄 모른다.
결혼했어도 아들을 넷이나 낳고 오부자에 병든 시어머님과 아버님 조카 둘 여덟 명의 남자와 열 식구가 함께 살며 오랫동안 수레를 끌어왔다.
주변의 혈육들도 내 책임에 평생 살아온 내 자리가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잘하니 힘든 일이 있으면 윤선씨가 생각난다는 이름 난 유명 인사도 있었다.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들었으니 밑바닥 일부터 몸으로 봉사 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일을 손수 찾아 했던 것이 어느새 바보 취급을 하고 있었다.
큰일을 앞두고 어려울 때 무수리처럼 써먹고 가차 없이 던져버릴 때, 나 자신을 용서 못 해 쓰린 아픔에 참기 힘든 분노가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이 바보야!” 나를 채찍질 하곤 했다. 장사를 할 때도 상대가 큰 소리로 욱박지르면 말이 목 안으로 들어가니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만 흘린다. 동료들이 볼 때 내가 눈치가 없다고 한다.
내 마음처럼 모두를 믿었으니 바보로 살았던 것이 참 많은 상처를 입었다.
성철 대종사님의 말씀에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라, 알고도 져 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불자의 실천”이라고 하셨다. 장바닥에서 거짓으로 살아왔던 40년 세월을 탈피하려고 25년간 주경야독으로 찾아온 곳이 글 밭이었다. 바보는 내 개인의 손해는 용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음모로 꾸미는 일은 용서를 할 수 없다. 동료들은 왜! 실컷 힘든 일 다 하고 쓴소리를 듣는다고 안타까워 한다. 어쩌랴! 눈치도 없는 나는 바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동료들이 있으니 행복합니다.
모과는 썪어가면서도 향내를 잃지 않는 것 처럼 나는 “밥과 바보”를 좋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