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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서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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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스크랩 ※* 창암 이삼만 선생의 서체*★
김진만 추천 0 조회 84 08.08.08 1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철를 구부린듯 나무조각 모아 둔듯하여 拙의 단계도 뛰어넘어 神필이라 하여 이글씨를  보는 수준 따라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함(강암서예관 소장) 추사 김정희도 찾아 뵙고 존경한 분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무이구곡 7곡부분초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도 함)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道寒

일곱 굽이 배를 옮겨 碧灘에 오르니

隱屛仙掌이 다시 돌아다 보인다.

어제 밤 峰頭雨가 가련한데

飛泉添得함이 몇 번이나 추웠느냐


 

조선후기 3대명필로 秋史 金正喜(1786-1856) 창암 이삼만, 訥人 曺匡振(1772-1845)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글쓴이 : 김오삼 번호 : 68 조회수 : 61 2007.
菖巖 李三晩 | 먹물이 글씨가 될

저는 근간에 책을 읽다가 蒼巖 李三晩 선생에 대한 글을 여러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예가이면서 수필가인 정병철의 <아우라지>에서, 미술가이면서 미술평론가인 김병총의 <화첩기행1,2>에서 이였습니다.
 중국의 서체사는 줄줄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국의 서예에 대하여 무관심과 무시로 일관하던 제게 창암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조선말기의 대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창피함에 앞서 그의 평가가 모든 서예가들에게 무관심과 무시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창암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에 대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창암 이삼만 (1770 ~ 1845)

창암은 순조 3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하여 평생을 곤궁하게 지낸 선비였다.

 그는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고 하는 이야기와 벼루를 세개 맞창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렸다는 일화(磨穿十硯 禿盡千毫)를 볼 때 그가 글씨에 매진하였던 정열은 상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창암은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는데 그리하여 거침없는 '창암체(流水體)'를 이루었다. 그것은 글씨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筆舞)이었다고 한다. 뱀 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神筆이라고 한다.

 그래서 立春榜에 '李三晩'이라고 써서 문지방 아래 거꾸로 붙였다고도 한다. 그러면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정읍의 說話가 되었는데 뱀에 대한 이야기와 약방의 物目記로 인해 중국에 까지 알려진 이야기와 부채장수가 잠든 사이 부채에 몇자 적었더니 이상만 글씨라 하여 모두 팔린 이야기와 양반집 墓碑文의 墨痕이 지워지지 않던 이야기 등 많기도 한데 그만큼 그의 글씨는 유명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에서는 이삼만 글씨의 애호가들이 많고 또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는 學童들에게 體本으로 글씨를 써서 나누어 주었을 뿐아니라 원하는 知人들마다 선선히 글씨를 써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돈을 받고 써주진 않았다고 한다.

창암과 시대를 같이한 당시의 대표적인 書家로는 호서의 秋史 金正喜(1786~1856)와 강서의 訥人 曺匡振(1772~1840)이 손꼽혔다.

 당시의 명필이요 병조판서였던 추사가 현종 6년 윤상도 사건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전주의 창암을 만났다.

 그 때 창암의 나이는 71세요 추사는 55세 였으니 평교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창암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던 추사가 눈물로 相照하였다 한다.

 두사람은 밤을 새워 서법과 서체를 논하였다 한다. 후에 편지 왕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추사가 제주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전주에 들렀을 때는 창암이 세상을 뜬 이듬해였다.

 추사는 슬픈 마음으로 '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墓表文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이삼만의 묘소에 가면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주로 이사하여 옥류동에 터를 잡고 글씨를 쓰며 말년을 지냈다 한다.

 창암은 52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하고 옛부터 자주 만나던 名唱 심씨 부인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심씨 역시 회갑 전에 사별하고 오로지 글씨에만 전념하다 나이 78세에 세상을 떴다.

옥류동의 바위에 새겨진 '鳶飛魚躍' 그리고 한벽당의 '醉裡乾坤閑日月'과 '靈泉' 등의 刻字가 남아있고 호남 일대의 사찰에는 그의 편액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해남 대둔사의 '駕虛樓', 구례 천은사의 '회승당', '보제루', 전주 송광사의 '명부전', 곡성 태안사의 '拜謁門' 그리고 강화 전등사의 '원통각', 공주 동학사의 '동학사', 금산 보석사의 '대웅전' 밀양 표충사의 '원통당' 등이 그의 글씨이다.

그리고 정병철의 글을 빌리면 1987년 전북 문화방송 주관으로 전북도청 공보관에서 <조선말기의 명필 이상만 선생의 유작전>이 열렸고 그는 그 전시회를 보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전시된 작품들 대다수가 행초체가 주종이었고 몇 점 안되는 해서체는 그 서풍이 독특했다.

 점과 획 하나 하나가 마치 강철을 구부려 놓은 듯 손가락으로 튕기면 쩡하고 맑은 쇳소리를 낼 것만 같다.

 서체의 결구는 구양순을 따랐는 듯 했고 필획과 운필의 묘는 독자적인 개성을 바탕으로 심미의식을 형성시켜 작가 특유의 서법미를 창출했다.

 한눈에 작가의 강직한 성품을 보는 듯 했고 숨결 또한 들리는 듯 했다.서체 중 내 마음을 경탄으로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초서의 필세는 나의 아둔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현현하게 펼쳐지는 필묵의 세계는 신선이 운무 속을 노니는 듯 광풍이 바다를 뒤덮은 듯 해맑은 연담색 묵빛이 발하는 곳에 왕희지가 있고 장욱이 있고 회소가 있다.

 먹물의 임리마다 동기창과 미불을 희롱한다. 필획의 변화는 맹호가 험산을 달리다 느긋하게 다리쉼을 하고 급전낙하 속에서도 어느 사이 부드럽게 착지를 한다.

 결구의 형세는 대병이 일거에 산야를 치닫는 난중에도 전열이 흐트러짐이 없고 정연한 대오 속에 질서와 무용이 있다.

 세련된 필세는 자유분방하여 그 저류에는 조그마한 구애도 아첨도 보이지 않는다. 치졸하되 패기와 기개과 용솟음친다.

 필시 출신이 중인이라 양반과 사대부들로 부터 받은 멸시와 냉대와 울분을 오로지 서예술에 전력하여 충천하는 귀재의 예술성을 필신에다 한을 풀었는 듯 필획마다 광기어린 싸늘한 섬광이 빛을 뿌린다.

 초서체의 방일하고 웅취한 자태는 천하의 추사체도 미치지 못할 상위의 경지다.

 천금 만냥으로도 대가를 논할 수 없는 국보적 문화유산이며 찬란한 서예술의 금자탑이다."

또 전주의 향토사 연구가요, 서예가이신 鵲村 趙炳喜 선생은 창암의 글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창암이 관직을 가지지 못했고 돈도 없었던데다가 중인이어서 서울의 후레아들놈들이 글씨를 폄하해버렸지만 하나같이 뼈다구가 살아있는 좋은 것들이다."

여기서 서울의 후레자식은 아마 위창 오세창을 말하는듯 하다. 그는 창암의 글씨를 法이 모자라나 많은 습작으로 필력이 좋다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말기의 명필로는 추사만 있던 것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많은 선비와 서가들의 숨은 명작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라 추정해 본다.

 조상들의 遺墨들이 집안 깊숙이 숨어 있을 터인즉 하루빨리 재평가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묵들이 표구를 통해 잘 보관되어지길 또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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