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대구시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서 정말 기뻤다.
그것도 우리 시골학교에서는 1년에 단 한 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명문고등학교인 경대사대부고를 입학한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물론 대구의 제일 명문인 경북고를 가지 못한 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온 가족들과 집안 친척들까지 축하해 주고, 자랑해 주셔서 부모님께서도 아주 흡족해 하셨다.
한 때는 한강 이남에서 제일인 때도 있었다고 들었다. 100명 이상이 서울대에 응시해서 합격율이 한강이남에서 최고였고, 입학수도 최고였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 때는 특차였었다고 했다. 우리보다 6-7년 선배 때까지 였다.
우리학교는 전교생이 300명이었다. 다른학교는 모두 8반으로 480명이었고, 부고만 6반으로 300명이었으니까 졸업생 수에 비해서 서울대 입학생 수에서도 앞서 있었다니 우리 선배시에는 대단했던 것 같다.
집안에서도 공부 잘 하기로 소문 났다던 6촌 형님이 사대부고 2회였던 것 같다.
또한, 우리 때부터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국립 고등학교인 우리학교가 당시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남여공학을 실시하였고 우리들이 그 1회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시골에는 남여 공학인 고등학교가 많았지만, 대도시의 고교가 남여 공학인 학교는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우리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서울에는 국립고등학교인 서울 수도사대부고가 남여공학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우리학교가 지방에서는 첫 시범이 되었다.
나중에 입학후에 알았지만, 타 학교에서는 남여 공학인 우리학교를 매우 부러워했던 학생들이 많앗던 것 같앗다.
1월 달에 입학시험을 치른 후에 1월 말 경에 합격 발표가 있었고, 중학교 졸업은 1월 달에 있었기에, 2월 한 달 동안 실컷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중학교 졸업은 1월 중순이었고, 그 때는 아직 1차 고등학교 합격 발표가 있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합격여부를 모른 채, 중학교 졸업식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당시에 그렇게 한 연유는 다른 모든 고교 카리큐럼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합격발표 후에 졸업식을 한다면, 합격자와 불합격자간의 상반된 입장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스승님과의 관계에도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무튼 우리들은 중학생에서 졸업하고, 이제 소년 티를 벗어나서 어엿한 청년기에 접어드는, 사춘기의 청년으로 여학생도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다소 가슴설레는 가장 겁없는 아이어른이 된다는 게 더 기쁘고 흐뭇해졌다.
우리들은 3.3.5로 짝을 지어 정신없이 돌아 다녔다. 그렇다고 매일 놀러만 가는 것은 아니었고, 학교 가지 않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에 나무하러도 다녔다. 당시에 시골에서는 취사와 난방이 전부 땔감으로 충족했기에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일꾼들은 할 일 없이 매일 산에 가서 나무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어려운 가정형편에 땔감을 장만해서 시장에 나가 팔기도 했지만, 어쨋건 겨울에는 일꾼들의 천국이었다.
눈이라도 내리면 일꾼들은 몇몇이 어울려 집안의 개들을 몰고 눈덮힌 산으로 올라 토끼를 잡는다. 3-4 명이 산을 오르면 토끼 1-2 마리는 거뜬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날 밤은 축제 분위가 되곤했다.
나는 아침부터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오전 일찌기 뒷산에 올라 나무를 했다. 당시에는 동네가 모두 땔감을 사용했기에 가까운 곳에는 낙엽이 없었다. 어느정도 산을 올라야만 소나무 낙엽인 깔비가 있었다. 갈비는 정말 좋은 불쏘씨개요, 좋은 땔감이었다. 밥솥의 아궁이에 깔비로 밥을 지어면 연기가 거의 나지도 않았고, 열량도 강해서 적은 양으로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밥을 지은 후에 별도로 난방을 위해서 군불을 때기도 했다. 군불은 주로 장작등을 사용했고, 저녁밥을 지은 후에 아궁이 깊숙히 장작을 밀어 넣어서 구들장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었다.
2월 초가 구정이었으니, 고교 1차 시험에 합격한 친구들은 모두가 부담없이 놀았다.
구정 때는 친구집들은 물론, 친척집에도 들렸다. 할아버지 형제가 4형제였고, 둘째할아버지는 동촌 금호강변에 사셨고, 당숙이 두분이었다. 그 두 분 다 금호강변에 큰 과수원을 하고 계셨다. 당시에는 과수원 하는 분들이 다 부자였다. 명절이 되면 당숙부 두 분들이 고향에 오셨는데, 우리들이 세배를 하면 큰 당숙께서는 세배돈을 많이 주시곤 했다. 당시에 고향에서는 세배시에 현금을 주시는 분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어렵게 살던 터였고, 시골에서는 현금을 만져 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속에서 땔나무를 팔아야 겨우 푼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그런 때였다. 당시에 큰 당숙으로 부터 세배돈을 받을 수 잇는 우리들은 언제나 명절이 돌아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이웃 친구들 중에서도 친척 어른들로부터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보통은 세배를 하면, 그 집에서는 강엿등 먹거리를 내어 주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사촌들과 함께 그 당숙들의 집을 방문하는 게 아주 큰 행사처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