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란 무엇인가. 요즘 주위를 살펴보노라면 한국적인 것 나아가 전통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을 알게 된다. 가령 사람들은 애틀랜타 올림픽 경기 전야제를 보면서 저 정도는 우리가 치른 서울 올림픽 전야제의 그 한국적인 멋과 흥겨움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곤 한다. 흐뭇한 자부심이다. 그러나 이런 흐뭇함도 잠시, 교외의 유명 사찰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일이 많다. 하긴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어느 전도사가 절에 들어가 망치로 불상 아홉 개를 부수는 열성을 보였던 적이 바로 얼마 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면서도 우리는 과연 한국적인 전통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적인 것, 그리고 동양적인 것에 대한 탐구. 이는 우리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자발적으로 생긴 욕구일까. 그러나 이런 반문에 대해 전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것이 보다 솔직한 느낌인 듯하다. 서양에서 일어난 동양 붐1)에 편승한 추종의 한 양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같은 이면에는 인도나 아랍 등 제3세계에서 일어난 반서양적인 문화적 민족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깔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식민지를 지배했던 서양을 아직 잘 모르면서도 여전히 그 쪽으로 쏠리고 있는 심리적 경사에 미루어 볼 때 과연 그런 억척스런 감정이 있는지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국토나 문화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글들을 읽을 때 여전히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것은 지금까지 초라하고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굳이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느껴보자는 안타까운 항변을 문면에서 읽게 되기 때문일까. 아니, 우리 것에 대한 찬양과 찬탄, 그리고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회한을 느끼기 전에 그 책들에서 우리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해와 음미의 울림이 부족한 사실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는 스스로 생성변천하는 역사의 제약으로부터 초연한 진리임을 선언한 가르침의 하나이며,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납득되고 공감되는 종교이다. 그러나 이런 보편성은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직관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파악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불교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도처에서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의 불가피한 창조적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창조의 노력은 불교를 알고 난 이후 더욱 활발해졌고 우리 문화 역시 불교적 진리의 실천과 이해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무시한다면, 이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 눈을 가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불교는 우리의 위대한 전통이며 문화적 근원이며 정신적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T. S. 엘리어트도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전통의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전통 즉 전해 내려온다는 것의 유일한 형식이 바로 전세대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또는 무서워하며 이에 집착하여 그 방식을 그대로 쫓는 것이라면 전통은 확실히 저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흐름이 모래 속에 파묻히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되풀이보다는 신기가 오히려 낫다. 전통이란 더 광범위한 의의를 가진 문제이며, 그것은 유산으로서는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얻자면 큰 힘을 들여야 한다. 전통은 첫째 역사적 의식을 내포하는데…… 이 역사적 의식에는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 뿐만 아니라 그 현재성에 대한 인식도 내포되어 있으며 (중략) 시인이건 어느 부문의 예술가이건 혼자서 완전한 의의를 갖는 자는 없다. 그의 중요성, 즉 그에 대한 평가는 그와 과거의 시인들, 예술가에 대한 관계의 평가이다.1)
엘리어트의 말처럼 전통이란 어느 특정한 사상 체계임을 표나게 명시한 기성품처럼 우리들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어느 특정 상품의 독점적 가치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따라서 전통이란 이제 이 시대에 비로소 있기 시작한 무슨 신기한 가치처럼 생각해서는 안되는 역사의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불교를 추상적이고 미신적이거나 아니면 어딘가 꺼림칙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답답하고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 문화에 대해 일시적이면서 항구적인 인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실을 왜 잊고 있는 것일까. 어떤 민족이든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노력은 종교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역사적 시간 속에서 차지하는 우리들의 위치와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날카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불교는 우리 민족에게 최초로 구체적인 윤리의 기준을 준 사상이다. 유교의 삼강오륜이 조화로운 사회적 질서에 더욱 관심을 돌렸다면, 불교적 윤리관은 인간의 윤리적 사명의 기저를 파헤쳤으며 인간의 시선을 보다 차원 높은 세계로 향하게 했다. 우리의 불교문화는 불교 자체가 지닌 세계성이 현현된 실체이자 일승화정(一乘和諍)의 정신2)으로 육화된 지고지순한 역사의 총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다양한 독창적 개성을 말살하고 물리적인 힘으로 하나의 동일한 형식 속으로 몰아가는 저급한 문화가 아니다. 우리 문화는 불교를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의 불교가 지금까지 호국불교적 성격이나 주술적 타락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호국불교적 성격은 사회적 정치적 불안 속에서 불가피하게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적 풍토가 불교에게 강요했던 달갑지 않은 변모라고 볼 수 있고, 기복성은 빈곤 ― 온갖 종류의 사회악과 뒤섞인 정신적인 혼란까지 포함해서 ― 으로 인한 신비의 미숙한 파악 즉 미신이며 주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너그러움을 버리고 불교를 마냥 천박한 문화의 한구석으로 내몰아 세워 비하하면서 자조적으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방공간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불교와 전통문화의 수용 양상 나아가 편집 세목을 살펴보려는 것은 이런 반성과 회의에서 비롯된다.
Ⅱ. 해방공간의 감격과 혼돈
(1) 중등국어의 경우
1948년 이극로․정인승이 정음사에서 펴낸 중등국어(남자 2)를 보면 광복의 감격과 민족의 기개를 드높인 글 ― 가령 「백두산 벋어 내려」(박종화), 근화사(槿花詞)」(정인보), 「충무공의 최후」(이은상), 「한글의 앞날」(최현배), 옛책에서 발췌한 「사명당」, 「학생의 정신」(안창호) 등 ―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어린이 예찬」(방정환), 「바다」(이태준), 「산」(이효석), 「양」(오장환), 「불」(염상섭), 「허생원과 도적」(염상섭), 「백결선생」(김동인), 「만물초」(양봉례), 「부용화」(홍종인) 등이 있다. 지난 88년까지 월북작가로 처리되어 교과서는 물론 문학사에서도 볼 수 없던 이태준과 오장환의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시대적 제약과 이데올로기의 편협성을 느끼게 된다.
백두산, 어린이, 무궁화, 충무공, 한글, 사명당, 학생이라는 소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광복의 기쁨과 민족 정기의 고양, 조국건설에 대한 각오, 일제의 침략에 대한 증오심 고취 등이 그 내용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문학(시, 소설, 희곡, 설명문)과 읽기(논설문, 설명문, 수필, 전기문) 두 영역으로 편성된 요즘의 중 2- 1 국어교과서와 비교하면 이 시대의 성격과 교육목표를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5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국어 교과서 모두 여전히 불교에 대해 무관심하며 나아가 왜곡된 범주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사명당」의 경우, 임진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우리 불교의 호국정신이나 일본보다 우월했던 정신문화적 수준을 설명하지 않고 야담 수준의 옛글을 실음으로써 불교를 신비한 도술 내지 샤머니즘으로 격하시켜 버린 느낌마저 든다. 이은상의 「충무공」이 한 인물을 표나게 우상화함으로써 민중의 역량을 폄하하는 중립성을 잃은 글이라면 「사명당」은 사명당의 신비한 능력과 맹목적 애국심만을 강조함으로써 높은 불교정신을 저급하고 신비한 도술의 수준으로 격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요즘 교과서의 「우리 나라의 민화」에서 불화를 무속과 불교가 합쳐져서 생긴 민화로 묶어 설명하고 있는 사례와도 비슷하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무속과 불교가 습합된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교문화의 오롯한 독창성과 세계관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설명이 더욱 보강되어야 하겠다. 이는 정인보가 「근화사」에서 “신시(神市)로 내린 우로(雨露) 꽃 점진들 없을쏘냐 왕검성(王檢城) 첫 봄빛에 피라시니 무궁화를 지금도 나곧 대하면 그제런 듯하여라”라고 읊었던 우국지정을 문화적 민족주의의 미명 아래 왜곡시키고 신비화한 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1949년 문교부에서 편찬한 중등국어 3 역시 이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불교나 전통문화에 관계된 글은 설명문 「신라의 화랑제도」, 「원효」(윤승한), 전기문 「깐디」, 「강서 삼고분」(현진건), 「향산기행」(노천명) 등인데 대부분 설명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소개하는 내용도 정확하지 않다. 사담가(史談家)인 윤승한(尹昇漢)은 「원효」에서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을 원효의 저술로 설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깐디」에서 필자는 간디가 “나는 힌두교고 기독교고 모슬램이고 그리고 유태교인”이요 말했다고 강조하면서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를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이에 비하면 노천명의 「향산기행」은 보현사를 중심으로 상원암, 금강굴, 가섭봉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쓴 전형적인 기행문으로 문학적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류문인의 섬세한 감상에 치우쳐 사찰이나 문화재 뒤에 깔려 있는 전통과 거기에 깃들인 정신문화의 도저한 그림자를 밟고 있지 못하다. 가섭봉을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의 일절을 보면 작가의 지나친 감상과 애상의 정도를 알게 된다.
서대는 다람쥐가 길을 자주 알리우고
갖은 서리 틈에 석남(石楠)은 연연하고
전나무 썪어진 뿌리향은 그저 남았다.
1953년 문교부에서 나온 중학국어 3은 앞의 교과서와는 달리 “1. 사색을 적은 글 2. 시를 읽자 3. 기행문을 읽자 4. 소설을 읽자 5. 고전을 읽자”라는 차례로 보다 체계화된 교과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다시 실은 현진건의 「강서 삼고분」 정도가 전통문화의 인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으나 강서 고분과 경주 고분의 차이는 물론 그 차이를 만든 정신문화적 토대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다.
이 강서고분과 경주고분의 차이를 보아 그 편린을 짐작할 것인 듯 싶었다. 그러나 새기고 그리는 방법은 다를지언정 인공(人工)을 뛰어넘어 신공(神工)에 가까운 예술의 지경을 동서가 방불하다 할 것이나 더욱더욱 고구려 유물이 온전히 전하여지지 않은 것이 서럽고 애닯다. 귀중한 조선문화의 한 모서리를 그대로 상실한 것이니 얼마나 비탄할 노릇이냐.
딜타히는 문화의 본질이 종교인 것처럼 종교의 형태는 문화라고 말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우리 국어교과서에는 아직도 이런 자각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지 않았던 것 같다.
(2) 고등국어의 경우
정학모(鄭鶴模)․손낙범(孫洛範) 편 고급국어 권1(범인사,1945.8.25)은 전통문화 특히 불교문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해방을 맞이한 조국을 건설할 미래의 청소년들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결과인 듯하다. 「국어의 길」(정학모), 「나랏말삼」(최현배)은 민족문화를 함양하고 세계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그 문화를 표현하는 언어생활과 태도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불국사」(현진건)는 불교예술의 정수를 이루기 위해서 희생했던 아사녀의 사랑과 헌신, 아사달의 장인 정신 또는 예술혼을 노래한 소설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차돈의 죽엄」(이은상)은 신라에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살신성인한 이차돈의 내면적 갈등을 극화한 글이며, 이병기의 「난초」는 선미(禪味)를 느끼게 하는 현대시조이다. 이처럼 불교와 전통문화의 선양에 기울인 정성이 결코 소홀하지 않았지만 신라 불교 중심이어서 아쉬운 느낌을 준다. 이밖에도 「청포도」(이육사), 「길순이」(이인직), 「마을의 밤」(이기영), 「개화」(김남천), 「추석」(함세덕), 「낙엽을 태우면서」(이효석), 「국화」(장덕조), 「조선의 소설들」(이태준), 「학생은 시대에 앞서라」(박치우), 「신문화의 들임」 (문일평) 등도 싣고 있어 당시 문단의 내밀한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알다시피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조직된 문인단체는 임화, 이태준, 김기림, 김남천, 이원조 등이 만든 조선문학건설이다. 이 단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 등이 연합해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5. 8. 18)를 결성하면서 예술활동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해방 후 최초의 문화단체로 조직을 확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 단체를 주도하고 있던 임화 등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민족계열의 문화인들 가운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가담하지 않았던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김영랑, 이하윤, 김광성, 김진섭, 이헌구 등이 별도의 문화단체인 중앙문화협회(1945. 9. 18)를 설립한다. 한편 이기영, 한설야, 송영, 윤기정 등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회의 노선에 반발하면서 각 부문의 문화예술인들을 다시 규합하여 조선프롤레탈리아예술동맹(1945. 9. 30)을 조직하게 된다3). 그 결과 문단의 갈등과 반목으로 생긴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고 있는 이 교과서에는 어떤 뚜렷한 교과목표가 없으며 작가들의 지명도나 문단적 헤게모니에 의해 글을 편성한 느낌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교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있었던 편린을 보게 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런 예감은 고급국어․ 중 (고려문화사, 1946)을 보면 너무 빨랐음을 알게 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좌익계열의 문화단체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으로 이원화되자 조선공산당은 두 문화단체의 조직을 합작하도록 종용한다. 결국 1945년 12월에 좌익계열의 두 단체는 좌익문화운동의 통일전선을 확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조선문학동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 조선문학동맹은 그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1946년 2월에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했고, 이 대회에서 단체의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정식 승인받고 있다. 그리고 1. 일본제국주의 잔재 소탕 2. 봉건주의 잔재 청산 3. 국수주의 배격 4. 진보적 문화문학의 건설 5. 조선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라는 다섯 개의 항목의 강령을 채택한다. 이를 반영하듯 고급국어․중에서 임화는 반인민적인 요소와의 투쟁을 통해 문화건설의 과제를 성취시켜 나갈 것을 격렬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瀕死의 새여! 낡은 심장이여!
안보이는가? 안들리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가?
불길은 바람의 멱살을 잡고
암흑인 하늘의 가슴을 한껏 두드리고 있지 않는가?
(중략)
오라! 어둠이여! 울어라! 폭풍이여!
怒呼하라! 死와 暗黑과 마르세이유여!
그렇지 않은가?
누구가 大地로부터 슴여올으는 生命인 봄의 수액을
누구가 靑年의 가슴 속에 자라나는 영웅의 정신을
주검으로서 막겠는가 암흑인가? 폭풍인가?
雷鳴인가?
임화는 우리의 비극적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학과 운동으로 치열하게 맞서 싸워온 문제적 개인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시는 우리의 역사적 전통과 이 땅의 구체적 삶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천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그가 조급하게 서구사상과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경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이원조는 「민족문화건설과 문화」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 밑에서 볼 때 우리 민족문화건설에 있어 우리 문화유산의 계승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역사적 현단계가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의 시기라는데 소응해서 우리 민족문화도 형식은 민족문화요 내용은 민족주의로 하는 민족문화인 만큼 우리가 가진 봉건주의 문화유산 가운데 오늘의 우리 민족문화의 원천이 되고 영양이 될 수 있는 모든 장점만을 계승해야 할 것이며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다. 봉건사회의 문화가 아무리 영주적인 특권계급의 독점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거기에도 인민의 의욕과 생활감정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얼핏보면 이원조의 주장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최근에 북한에서 나온 사전을 보면 온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원조의 주장이 얼마나 실상과 멀었던 것인가를 알게 된다. 가령 「종교무용」 항목을 보면 “무당춤과 절간춤은 봉건통치배들과 사상적으로 결탁된 종교인 계층들이 인민들의 창조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지배계급들의 착취와 억압에 순종시키기 위한 것으로 일관된 것이다. 봉건통치배들과 사상적으로 결탁된 종교인 계층은 무용을 비롯한 예술적 수단을 통하여 인민들에게 봉건착취제도에 대하여 눈을 감고 순종하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반동적이며 허황한 종교교리를 선전하였다”4)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이 비록 봉건사회와는 대립물이라 하더라도 그 문화 속에서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또는 양식으로나 우리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부분을 전부 섭취하고 살리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라는 이원조의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와 전통문화 나아가 교과서는 해방공간부터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고급국어․중에는 정인보의 「근화사」와 「순국열사추도문」, 「구운몽」(김만중), 「농민의 성능」(최호진), 「어부사시가」(윤선도), 「황혼」(임학수), 「고전문학에서 얻은 감상」(이희승), 「김삿갓」(이응수), 「공맹(孔孟)의 노동관」(김동석), 「도야지」(이효석), 「사미인곡」(정철), 「조국」(유치진) 등이 실려 있는데 정인보가 한용운을 기린 「풍란화 매운 향내」를 읽는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풍란화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하 돌아오소서
고급국어 3(범인사, 1945. 8. 25)은 고급국어․중과 달리 민족문화에 대한 시선이 과격하지도 않고 편파적이지도 않다. 「국어의 힘」(조윤제), 「신시운동」(이하윤), 「그믐달」(나도향), 「탈출기」(최학송), 「예술가」 「알 수 없어요」(한용운),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무영), 「수필문학 초고」(김광섭), 「산성의 오후」(박화성), 「진달래」(김소월), 「사육신」(김성칠), 「조선의 맥박」(양주동) 등은 물론 한용운의 시를 두 편이나 싣고 있다. 당시 편집자들이 선승과 시인 독립운동가의 삼위일체적 인격을 구현한 한용운의 높이와 넓이를 높이 평가한 결과이겠지만, 아직 좌익 문인들이 기승을 부리지 않았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50년에 문교부에서 편찬한 고등국어(1)를 보면 좌익문단이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를 계급적 이념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민족계열의 우익문단 역시 실천적 방략과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우익진영이 문단을 정비하고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거쳐 다시 소장파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면서 1. 자주독립 촉성에 문화적 헌신을 기함 2. 민족문학의 세계사적 사명의 완수를 기함 3. 일체의 공식적 노예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정신을 옹호한다는 강령에 걸맞은 교과서 체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소월의 시, 「민충정공」(조용만), 「예술의 성직」(문일평), 「민족정기론」(이병도), 「모란」(김영랑), 「대한의 영웅」(심훈), 「인도 기행」(고황경), 「죽지 않는 진리」(조만식), 「시인의 사명」(이헌구), 「해방의 노래」(김광섭), 「독서에 대하여」(김진섭), 「승무」(조지훈), 「오륙도」 「성불사의 밤」(이은상), 「화초」(이효석),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오상순), 「토함산 해맞이」(윤희순), 「소설의 첫걸음」(조연현), 「산골아이」(황순원), 「시작 과정」(서정주), 「서울의 지붕 밑」(안석영), 「매화사」(정인보), 「인간 이순신」(이상백), 「언어․문화․민족」(이희승), 「국어의 생활」(조윤제)로 미루어 이 교과서가 얼마나 문학의 자율성을 지향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중에 주목되는 것은 문일평, 이병도, 윤희순의 글이다. 특히 이병도는 불교의 정신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불교에서는 의욕을 무명 혹은 혹 또는 업이라하여 역시 소극적 견지에 있어서는 이것을 결단하고 극복함으로써 불성 자리에 이른다고 하나 적극적 견지에서 본다면 도리어 이것을 점차로 확대시키어 소욕을 대욕으로 소아를 대아로 바꿔 말하면 소우주를 대우주로 일치시킴으로써 진여의 도를 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의 이른바 천상천하유아독존은 결코 소아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주대로 확대된 대아를 말한 것이다. 이러한 극치의 계단에 도달하기는 보통 정도의 결심과 노력으로서는 원래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불교를 너무 관념적으로 해석해서 피교육자들이 불교를 현실생활이나 문화역사적 맥락에서 동떨어진 사변적 종교로 해석하기 쉬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윤희순이 「토함산 해맞이」에서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자연과 인생과 예술과 종교의 혼연일체에서 찾고자 했던 점과 많은 대조가 된다. 해방공간의 교과서에서 불교는 아직 우리들 옆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산 속의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Ⅲ. 한국전쟁의 비극과 혼돈 그리고 분단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폐허의 현실 속에서 형성된 우리 사회는 여러가지 상황적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교육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전쟁의 비극을 초래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문제가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제기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형상화나 검토 작업이 문학외적인 제약으로 불가능해졌다. 문학은 물론 교육 역시 완강한 정치적 질서와 이념의 테두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이런 성격은 4. 19혁명을 계기로 전환기적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4. 19혁명은 전쟁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사회에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자기 각성,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신념을 다시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4. 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열망과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내포함으로써 정치, 사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의 중대한 정신사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4. 19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지식인들은 짙은 회의에 빠져들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당시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불교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서 이런 정신사적 흐름의 일부는 물론 우리 전통에 대한 역사인식의 한계를 점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중등 국어의 경우
시의 세계, 기행문, 전화와 방송, 영화와 시나리오, 신문과 잡지의 5장으로 구성되고 있는 중학국어 2-1(문교부, 1959. 3)을 보면 우선 정치적 외압으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잠복된 대신 문학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동시에 전화나 방송, 신문, 잡지 등 현대의 매스 미디어와 영화나 시나리오 등 새로운 예술장르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봄소식」(유치환), 「산 너머 남촌에는」(김동환), 「봄길에서」(김영랑), 「새로운 길」(윤동주), 「사향도(思鄕圖)」(김광균)를 싣고 비평적 감상문을 덧붙인 1장의 「시감상」은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기능적인 요즘 교과서에 비해 훨씬 순수하고 아름다운 국어교과서답다. 더구나 1장에는 시 감상 이외에도 시 작법, 시조 감상, 시조 작법을 싣고 있어 즐거움의 복원이 문학 이해의 지름길이라는 - 아주 당연하고도 그럼에도 무시되고 있는 - 사실에 충실한 느낌이다. 다만 전통 서정시 일색으로 민중적 서정성을 담은 시는 볼 수 없고, 지나치게 우리 것을 강조한 나머지 그렇게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없는 현대시조를 너무 많이 실었으며, 과거에 친일행위를 한 시인의 작품은 될 수 있는 한 수록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비판적으로 싣고 있다. 이런 편향성은 2장 기행문에 나온 「신라의 문화」에서 필자가 신라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찬탄으로 일관하면서 불교가 이를 뒷받침한 창조적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대목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지만 다시 실린 현진건의 「강서 세 고분」은 역시 그릇 큰 작가답게 이런 경사에서 벗어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우리 교과서에서 패배주의와 샤머니즘에서 연유하는 정신적 복합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런 어두운 그림자는 분단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야말로 정직하고 바른 태도의 소산이라면 이런 경사와 편향의 결과는 당대로 그치지 않는 어두운 세력으로 남게 된다. 정치 현실의 경직화에 따라 자유스러운 지적 분위기가 위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현실의식이 부자유스러웠음을 당시 교과서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이런 부자유스러움과 편협함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지나친 추측만은 아닐 것이다.
중학국어 3- 1(문교부, 1961)은 이런 위축된 현실의식을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하고 있다. 연설․토론, 소재와 표현, 연극, 독서, 규약․법문 등 5단원으로 구성된 이 교과서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내용의 글들 ― 가령 「링컨의 연설」, 「한국을 사랑한 원한경 박사」 등 ― 이나 규약이나 법문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에서 당시 사회의 편향되고 경직된 시대적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 세계사적인 냉전의 흐름과 혁명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글에서 어떤 한쪽으로의 경사가 지나쳤다는 것은 반성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4단원의 「귀한 책들」에서 고려대장경을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아주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한 책이 무엇이냐 하면, 먼저 고려 때 간행된 고려판 대장경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장경은 불교의 경전과 그 주석 및 불교의 역사와 또 경전 등에 나타난 어려운 말을 해석 설명한 사전 등을 모은 책입니다. 고려 때 대각 국사가 송나라에서 받아 온 송판(宋版) 대장경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저작을 합치고 멀리 북안의 글안(契丹)과 남으로 바다 건너 일본의 불교서적까지 구해 넣어서 도합 1,539부(책의 가지 수), 6,805권이나 되는 굉장한 분량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고려의 대장경은 고려 현종이 개판(開版)하여 만들고 대각 국사가 다시 확대시켰던 것이 고종 19년(서기 1232)에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에 있는 부인사(符仁寺)에서 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고종 36년(서기 1249)에 대장경 판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경판 수는 팔만 일천 이백 여장이나 되는 것으로서 글자를 양면에다 새겼으므로 면면(페이지) 수는 그 곱이 됩니다. 이 책은 분량이 많다는 것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된 여러 대장경 중에서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판각하였고 그 새긴 글자 모양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오늘날 아직도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는 대장경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글의 교육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불교를 우리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담당한 종교로 소개하기 이전에 일부 뛰어난 문화유산의 정신적 배경으로 다루고 있어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국한된 불교적 관심은 국어 문제, 소설, 우리나라 고전(1), 우리나라 고전(2) 4단원으로 구성된 중학국어 3-2(문교부, 1962)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국문학 이야기」에서 향가를 설명하면서 “이 향가는 훌륭한 서정시로 불교에 기반을 둔 문학이었다”고 무성의하게 처리한 서술태도와 부합되는 것이다. 적어도 향가와 불교의 상관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향가의 작가가 이처럼 승려를 중심으로 한 화랑도로서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향가의 내용을 규정짓는데도 또한 유력한 증언을 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향가의 내용은 그 작가가 한정되어 있던 만큼 그 작가들의 정신생활이 반영되어 있음이 기대되는 바 그 작가가 곧 승려와 화랑도들이었다는 것은 곧 향가의 내용이 불교적인 이념에 그 기초가 있음을 얼른 추측하게 할 것이요, 또 실제 향가의 내용도 불교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승한 것을 본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향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불교의 경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요, 신라 문화가 불교 문화의 한 봉오리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상기할 때에 향가문학은 곧 불교문학의 한 절정을 이룬 것이라 할 것이다.5)
이밖에 유진오의 「창랑정기」 전문과 고전문학 작품인 「공양미 삼백석」, 「규중칠우쟁론기」, 「옛사람의 행실 등을 싣고 있다. 4. 19 혁명과 5. 16 군사혁명이라는 역사의 명암이 엇갈린 시점에서 불교는 아직도 과거의 어두운, 그러나 예외적으로 빛나기도 했던 유산처럼 홀대를 받았다.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란 어둠에서 밝음으로, 그리고 옆에서 옆으로의 혁명임을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불교가 그 혁명의 종교였음을.
(2) 고등 국어의 경우
앞에서 정치적 외압으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잠복한 대신 문학의 자율성이 강화된 중등 국어의 편찬 양상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국어생활의 이모저모, 문장도, 현대시조, 고전의 세계, 국어에 대한 이해, 계절의 감각, 장편소설로 구성된 고등국어 1(문교부, 1959)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문학이 즐거움을 주는 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문학적 독서와 문학적 논의의 목표에 대한 어떤 설명도 완전한 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편성 세목에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준, 모범, 원칙, 평균 등의 덕목을 갖추어야 할 교과서가 지나치게 특정한 작가나 장르를 선호하여 중심을 잃고 있을 때, 과연 그 교과서는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재미있고 나아가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지침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더구나 만일 이런 편향적인 편성 때문에 학생들이 문학과 삶, 문학과 역사 또는 전통의 관계에 정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결코 적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우려는 가령 2장 「문장도」에서 잘 드러난다. 시조 작가이자 국토예찬론자인 이은상의 문학적 공적을 너그럽게 감안한다 하더라도 같은 장에 「이은상의 문장도」와 「나무국토대자연(南無國土大自然)」을 잇달아 싣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뿐만 아니라 정비석은 고등국어 1, 2에 「들국화」와 「산정무한」을 싣고 있으며 노천명도 예외는 아니다. 혹시 이런 병폐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학연과 혈연, 지연 나아가 문단적 이해에 얽힌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런가하면 시조에 지나치게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는데 이 역시 편협한 선호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시 속에서 시조가 우대받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시조는 우리의 전통 문학양식이며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우대받을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설시조의 파생과 신시의 확립으로 시조가 역사적 표현양식이 되었다는 문학적 현실이 무시된 채 지나치게 우대만 하다보니 무리가 따른 느낌6)이 없지 않다. 김상옥의 「십일면관음」이 이런 우려와 기우를 혼자 감당해야 할 만큼 뒤떨어진 작품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을 말끔히 지워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줏이 연좌(蓮座) 우에 발돋음하고 서서
속눈섶 조으는 듯 동해를 굽어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 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만 젓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전란의 비극과 혼란을 딛고 다급하게 외국의 문물을 수용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하면 석굴암을 예찬하고 노래한 것만 해도 대견한 일 ― 이밖에 현진건의 「석굴암」도 실려 있다 ― 이지만, 이제 비로소 우리 국토 그 자체가 박물관7)이라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싹튼 요즘과 비교하면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은상의 「나무국토대자연」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나무국토(南無國土)’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국토와 역사, 문화와 예술, 사상과 학문에서 불교는 이미 특정한 종교의 영역을 초월한지 너무나도 오래이건만........ 이밖에 요즘 중학국어에 수록된 「어린이 예찬」(방정환), 「청춘예찬」(민태원), 「신록예찬」(이양하)이 실려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찬해야 할 우리 불교는 여전히 화석화된 전통과 애상적인 회고주의의 대상으로 외롭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등 국어2 (문교부, 1959)는 보다 문학적인 자율성이 강화된 특성을 갖고 있다. 말하기와 쓰기, 수필․기행, 근대시, 영화와 연극, 독서, 고전, 국어 문자의 변천으로 이루어진 편성 세목도 그렇거니와, 특히 2장 근대시의 경우 「시의 운율」(서정주), 「시적 변용에 대하여」, 「근대시초」(박용철), 「시인의 사명」(이헌구)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5장 독서에 「면학의 서」(양주동)와 「다독과 정독」(유진오)을 싣고 있는데, 이는 문학작품에 대한 정서적 참여의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작품이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경험을 구조화하는 기능8)을 가진다면 이 편성 세목은 이에 걸맞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3장 「근대시초」에 실린 시인의 면모를 살펴볼 때 이런 긍정적 평가는 너무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알 수 없어요」(한용운), 「깃발」(유치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진달래꽃」(김소월), 「파초」(김동명),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마을」(김광섭), 「푸른 오월」(노천명), 「광야」(이육사), 「나비」(윤곤강) 등, 한 시기를 대표할 만한 시인의 작품을 골고루 선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 전통문화 특히 불교를 소개할 때 여전히 낭만적 회고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에 친일행각을 한 작가들의 작품을 무비판적으로 싣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지나치게 전통 서정시 일색으로 꾸몄다는 점도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그 대표적인 예로 이광수의 「산거일기」를 들 수 있다.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한국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한국정신사에 역시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9)이라는 평가처럼, 그의 문학과 행위는 가능한 한 엄격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것은 많은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당시 교과서는 이런 공통된 합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글과 공적을 실었다. 더구나 그가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쓴 「산거일기」를 실어 불교는 오로지 몰주체적인 자비의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종교로 오해받기 쉬웠다. 한용운이 불교의 자유의 법칙을 논하면서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다”10)고 했듯이, 자비 역시 엄격한 자기 비판과 참회의 나날을 보낸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적극적인 선이지 모든 죄를 무비판적으로 용서하고 수용하는 화해의 도가니만은 아니다. 불교를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자비의 정신을 오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교활한 사람들이 불교의 자비 정신 뒤로 숨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산거일기」는 이런 불교의 자비와 징벌의 경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환옹대사(幻翁大師)가 보여준 무심무욕의 경지를 예찬한 부분과 장남 봉근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목으로 이루어진 이 일기에서 그는 불교의 정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생은 슬픈 존재다. 그 중에도 앓고 죽는 양이 차마 볼 수 없도록 슬프다. 나고 죽는 것이 모두 헛것이요, 꿈이라 하더라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선을 하고 앉았느라면 마음에 오고 가는 끊임없는 생각들이 모두 싱거운 것뿐이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몇 겁(劫)을 앉아도 부처의 경지가 아니 나타나서 애썼다는 옛 부처의 심경도 이런 것인가?
시각형 지식인 이광수에게 불교는 여전히 관념적인 도피처의 하나였던 것 같다. 끝없이 자기를 합리화하며 과대망상 속에서 살았던 그에게 불교는 무와 꿈이라는 환상으로 다가섰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은 영혼을 해방하는 형이상학적인 기술11)이며 중생은 슬프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또다른 나이며 부처이다.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무욕과 무심의 경지는 자기를 남의 위에 놓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려는 시혜적 태도 ― 교만과 자기 희생 정신의 뒤얽힘 ― 의 소유자, 그 시각형 지식인12)이 다시 한번 보여준 태도의 변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함께 갖추었을 때 깨달음의 꽃으로 피어난다. 이렇게 이광수의 공적과 과실에 분명한 선을 긋지 않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참회하는 모습을 적은 글만 실은 것 역시 당시 교과서 편집자들이 갖고 있던 시각형적 사고 나아가 몰주체적인 역사의식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노천명의 시를 거듭 싣고 있는 것 또한 이런 안일한 역사인식의 소산으로 생각된다. 만일 학생들이 노천명이 1942년 2월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 것을 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동아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던 불야의 성
싱가포울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포울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英米)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이런 경력을 가진 작가나 어디 노천명과 이광수뿐이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만은 이에 대해 뚜렷한 비판의식을 내세우고 이에 걸맞은 작가와 작품을 선정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요구인 듯하다. 아니 오히려 때늦은 요구이자 권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보다 3년 전에 나온 고등국어2(문교부, 1956)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글들, 가령 「고구려의 민족사상」(손진태), 「미에 대하여」(고유섭), 「담징」(윤희순) 등이 실려 있으나 뒤에 나온 고등국어 3(문교부, 1963)에서는 이런 전통에 대한 지향의식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 든다. 현대 생활과 국어, 단편소설, 문학과 인생, 우리말과 글의 옛 모습, 국어의 장래, 우리의 고전문학, 국문학의 전통으로 구성된 고등국어3에는 불교에 대한 글이 거의 없는 것이다. T. S. 엘리어트가 말했듯이 문학작품은 내포적인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도적적이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방법에 관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인식, 그리고 전통의식의 함양을 요구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의 옹호를 위한 군색한 요청만은 아닌 것이다.
Ⅳ. 권력의 시녀와 변질된 이데올로기
(1) 중학국어의 경우
민족의 이상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인류의 이상 실현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되새기면서 우리는 민족의 중흥이 인류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확신하고, 지혜와 용기로써 전진을 계속할 것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며, 승리하는 중단하지 않는다.
중학국어 1- 1(문교부, 1974)를 펼치자마자 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의 저력」을 읽을 때 우리는 전진과 승리라는 극단적인 두 단어로 집약되는 1970년대의 빛과 그림자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경제개발의 성과는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외국자본과 기술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켜 경제적 토대의 취약성을 드러내었고, 산업화의 강력한 추진과 총력안보를 빌미로 유신체제라는 독재체제를 만들고 통치권력의 강화하여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낳게 되었던 1970년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통치권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지 않고 강력한 통제로 일관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그르친 경우도 적지 않았고, 결국 10. 26라는 불행한 통과의례를 겪어야 했다. 교과서에 나타난 불교 수용의 문제 역시 이런 시대의 어둠과 질곡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먼저 내용을 살펴보면 역시 서정시와 시조를 많이 실었고 군사문화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지지와 찬양이 드러나고 있다. 「해변」(최계락), 「미끄럼대」(전봉건), 「낙엽송」(박두진), 「산길에서」(이호우), 「비 갠 여름 아침」(김광섭),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하루의 소풍」(한정동), 「소녀 꽃장수」(김상옥), 「달밤」(조지훈), 「밤」(김동명), 「밀고 끌고」(정훈), 「의상대 해돋이」(조종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서정시와 시조 일색으로 꾸몄다. 특히 “형은 총을 들고/ 저는 손수레의 채를 잡고/ 형이 올 때까지 구김없이 살아요/ 엄닐랑 뒤에서 걸어만 오셔요/ 절랑 앞에서 끌께요/ 우리의 거친 길을/ 밀고 끌고 가셔요”라고 노래한 정훈의 시는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외치고 있는 이은상의 「산찾아 물따라」나 국립묘지를 찾아 뜨거운 조국애를 다짐하고 있는 「이름없는 별들」, 젊은 병사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에 젖어 휘트먼의 시를 떠올리고 있는 한흑구의 「닭울음」 등과 함께 당시의 억압된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다. 단결, 협동, 총화, 발본색원, 수출입국, 통일, 번영, 민족중흥 등 당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언어로 점철된 국어 교과서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편견일지 몰라도 “서로 없어서는 안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나’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라는 피천득의 「플루우트 연주자」 일절마저 군사문화 수립에 이바지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정도이다.
중학국어 2-1(문교부, 1974) 역시 이런 획일적이고 의도적인 구성 세목에서 예외는 아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조병화), 「삼월은」(이태극), 「박연폭포」(이태극), 「산넘어 남촌에는」(김동환), 「언덕」(김광균), 「초원」(이호우), 「효대」(이은상) 등을 보아도 그 한계는 여전하며, 수필이나 논설문 역시 국토방위의 중요이나 국민소득 향상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찬 글들일 뿐이다. 박종화는 「새로운 세대」에서 민족중흥을 외치고 있으며, 「나의 미래」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와 겨례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다짐하고 있으며, 「휙휙 내닫는 길」에서는 100억 달러 수출과 1000 달러 국민소득에 대한 희망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밖에도 「현충일을 맞으며」, 「원술랑」(유치진), 「원술랑을 읽고」, 「조국」(김동인) 등에도 국민총화라는 목표의식은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사 두 편」에서는 「통일․번영에의 열망 반영」이라는 제목 아래 「유신헌법안 압도적 지지」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유신 헌법안이 전국 91. 9%의 투표율과 91. 5%의 찬성률로 확정됐다.
정부 수립 후 세 번째로 실시된 이번 국민 투표의 투표율 91. 9%와 찬성률 91. 5%는 62년 개헌 당시의 투표율 85. 3%와 찬성률 78. 8%, 그리고 69년 개헌 당시의 투표율 77. 1%와 찬성률 65. 1%를 고려할 때 국민의 참여와 지지에 있어서 새로운 기록이 된다.
사회 교과서도 아닌 국어 교과서에 대통령의 어록과 유신헌법안 확정 기사를 실어야 할 만큼 초조했던 당시 통치권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교과서에서 전통문화를 폭넓게 수용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기껏 전통문화를 다루어도 체제강화에 필요한 덕목을 강조한 글로 채워진 실정이다. 「부모은중경언해」와 「금강산 기행」(이광수)은 겉으로 보면 자비와 효도와 국토 사랑이라는 거룩한 덕목을 강조한 글이지만 통일과 번영이라는 미명 아래에 서 일인 독재체제에 복무할 이데올로기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 그나마 「옛노래」에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싣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중학국어 3-2(문교부, 1974)에 실었던 「우리 나라 교육법(초)」 제5조에 나온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기하여 운영, 실시되어야 하며 어떠한 정치적, 파당적, 기타 개인적 편견의 선전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취지가 그대로 실현되었는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중학국어3-2에는 「솔거와 담징」(문일평)이 실려 있는데 위대한 예술의 바탕이 된 사유의 체계 곧 불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을지문덕의 전승과 맞먹는 업적에서만 그 의의를 찾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사유와 형상화의 무한대로의 수렴이야말로 모든 예술과 문학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던가. 사유없는 기술은 천박하고, 기술 또는 형상화의 능력이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 이러한 편견은 「세종대왕」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영도자의 능력이 한 시대의 문화를 빛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은 아닌 것이다. 만일 이순신, 김유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솔거 등 역사적 위인의 업적과 능력을 표나게 내세운 이면에 체제 강화에 필요한 영웅사관이 놓여 있었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지금 그런 의도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 고등국어의 경우
인문계 고등학교 국어1(문교부, 1975)에는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금당벽화」(정한숙)는 국가의 위난과 불교의 신심 사이에서 갈등하다 끝내 불심으로 벽화를 완성하여 세상을 교화하는 담징의 고뇌를 잘 묘사하고 있고, 「백자 이제(白磁 二題)」(김상옥)와 「선인들의 공예」(유홍렬)는 전통문화를 예찬하고 있다. 다만 김상옥이 시심으로 쓴 수필의 성격이 짙다면, 유홍렬은 공예품을 만든 장인들의 재질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 재질을 뒷받침한 불교라는 사유의 힘을 간과하고 있다. 그가 한국 공예문화의 특색이 가냘픈 선에 있다고 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 것도 이런 한계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이에 비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손명현)에서 상원사를 지키다 입적한 방한암(方漢巖) 선사의 불교적 신념을 찬양한 편이 훨씬 긍정적이다. 그리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이상보)은 신라 성덕 여왕 시절의 상원대사와 김화공(金化公)의 딸 사이에 얽힌 남매탑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정신문화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불교의 자비심을 은은하게 전해주고 있다. 한편 충담사의 「찬기파랑가」도 실려 있다. 그러나 불교를 긍정적으로 기리고 있는 글들이 많음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불교가 우리들 곁에서 멀리 있는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래의 시를 읽으면 보다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향 꽂고 삼귀의(三歸依), 꽃 드리고 묵념(黙念)이요,
바라밀경(波羅蜜經) 오이며 나즉이 정례(頂禮)하고,
원왕생(願往生) 축원 올리며 다시 합장(合掌) 하느니.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조종현)에 나타난 이런 생경한 시어와 시상으로 과연 불교의 합일의 정신과 유구한 전통력이 잘 전달될 수 있을 지 난감하다. 이런 관념적인 불교의 정신은 여전히 불교가 산에서 도시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단적인 증거인지도 모른다. 이에 비하면 「감사」(임옥인) 같은 글은 목사를 등장시켜 생활화된 특정 종교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집요하고 의도적인 포교의식을 가진 글은 인문계 고등학교 국어2(문교부, 1977)에 실린 유달영의 「슬픔에 대하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말한다. “신이여, 거듭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라고. 물론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므로 이런 대목을 두고 시비를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불교인들이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이미지가 마침내 사회적 통념으로 바뀌었을 때 그 책임은 과연 무지한 중생에게만 있는 것일까. 만해는 그래서 「조선불교유신론」 첫머리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며 이를 위해서 먼저 파괴하고 나중에 건설해야 된다고 외쳤던 것이 아닐까.
국어2와 국어3(문교부,1977)도 불교에 관계된 좋은 글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알 수 없어요」(한용운), 「탈고 안될 전설」(유주현), 「등신불」(김동리), 「국토예찬」(최남선), 「한국의 미」(김원룡)이 주목된다. 한용운의 시는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거의 다 실려 있는 셈인데, 특히 국어3은 「님의 침묵과 그 해설」(송욱)까지 싣고 있어 그의 삼위일체적 인격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유주현의 글은 그 애틋한 이야기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마치 세속의 번뇌를 끊기 위한 종교인 것으로 오해를 남기기 쉬운 글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출가란 가출이 아니고 승속의 번뇌를 끊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열반으로 인도하기 위한 실존적인 결단이 아니던가. 그에 비하면 김동리의 「등신불」과 최남선의 「국토예찬」13)은 불교의 정신에 부합하는 적극적인 의미와 주제를 갖고 있다.
진인(震人)의 고신앙(古信仰)은 천(天)의 표상이라하여 산악으로써 그 대상을 삼았으며 또 그들의 영장(靈場)은 뒤에 대개 불교에 전승되니 이 글이 산악 예찬, 불도량 역참(佛道場 歷參)의 관(觀)을 주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최남선에 의하면 조선정신은 역사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 나타나 있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그는 조선정신을 정치적이거나 대외적인 면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찾고자 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그의 조선정신은 법신(法身)이며 국토, 자연, 역사는 이 법신의 응화(應化)이다. 곧 조선정신이 체(體)라면 국토는 용(用)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는 불교를 통해 고유 문화권에 내재하고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축으로 해서 세계를 변혁하려는 신전통주의의 소유자였다. 불교, 이는 김원룡이 국어 3의 「한국의 미」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들 몸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의 미”인 것이다. 그 역시 석굴암의 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석굴암의 정밀세계(靜謐世界)에 들어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종의 삼엄한 전율감 같은 것을 느낀다. 조상이 만들어 낸 미의 극치 속에서, 감탄을 넘어선, 신앙에 가까운 신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밑에서 느끼는, 이국의 문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조상의 미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며, 자기의 미감(美感)과의 공감에서 오는 민족적인 희열이다.
국토순례를 하며 숨어있는 조선심을 찾으려고 했던 최남선과 무사무법(無師無法)의 독락(獨樂)을 즐기며 불교를 사랑했던 삼불암(三佛庵)14) 김원룡과 같은 폭넓은 이해의 소유자가 있는 한 불교문화의 미래는 결코 초라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Ⅴ. 문학의 지도와 역사의식의 세목
성공적인 문학작품에서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그것이 말해지는 방법이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지, 플롯, 인물, 사상, 감정, 리듬 등 여러 국면들은 세목의 지형도로 그려지지 않으며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관여한다. 그러므로 문학교육의 초기 단계에서 학생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사가 초기단계에서 지나치게 명백한 정의나 틀에 박힌 기준을 제공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중에 제거하기 어려운 문학작품에 대한 오해를 학생들에게 주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교과서대로 한다’는 말이 있듯이 교과서란 기준, 모범, 원칙, 평균 등의 뜻을 담고 있어야 하는 교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교과서는 이를 충족시켜 줄만큼 합리적인 문학 작품 선정도, 전통의식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글은 격동의 시대였던 해방공간에서 유신독재 치하의 70년대까지 나온 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이므로 일정한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목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나 좋은 시 소설의 ‘형식’(칼집)에서 ‘내용’(칼)을 뽑아내는 것이 학생들의 문학 감상의 발전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뒤따르는 것은 잘못된 교육일 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교과서마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거나 시대적 외압에 순응하고 전통의식이 결여된 교과서답지 못한 교과서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이는 마치 불입문자라는 공안을 용맹정진도 하지 않고 수양도 소홀히 하는 선승들이 자신의 졸렬함을 감추기 위한 흰 우산과 호신부로 내세우는 일과 같다. 교과서 본연의 덕목이 회복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