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의 여러 사상(私商) [27회 2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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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①
* 조선 후기의 여러 사상(私商)
서울 도성의 상인인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 사상(私商)들이 종루, 칠패, 배오개(이현), 송파, 누원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하자 시전상인들은 국역을 담당하는 대가로 난전(사상)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인 금난전권을 행사하였으나, 정조 때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되며(1791, 신해통공) 사상(私商)들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사상의 활동은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송상), 평양(유상), 의주(만상), 동래(내상)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이들 지방 상인들은 대외 무역에도 종사하였다.
송상은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대외 무역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한강을 무대로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의주의 만상은 대청 인삼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동래의 내상은 일본 상인과의 무역을 주도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만상과 내상을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② 개항(1876) 이후 조청수륙무역장정(1882)의 체결로 청.일 등 외국 상인들이 침투해 오자 서울 도성의 시전상인들은 이에 맞서 1890년 철시 투쟁을 벌였으며, 황국 중앙 총상회(1898.9) 등을 조직하여 상권 수호 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2) 보부상 [29회 24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63513485746FBB618)
정답: ⑤
* 보부상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시에서 주로 활동하는 상인은 보부상인데, 보부상이란 봇짐장수와 등 짐장수를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단결을 굳게 하기 위하여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① 신라는 지증왕(500~514)은 수도 경주의 시장인 동시의 관상들을 감독하기 위해 동시전을 설치하였다(509).
② 조선 후기 최대의 사상(私商)인 송상은 ‘사개치부법’이라는 일종의 복식부기를 사용하였고,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대외 무역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 만상과 내상을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③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는데 의주 상인인 만상이 주도하였다.
④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3) 사상(私商)이 발달한 조선 후기 경제상 [25회 25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F0F485746FBD63D)
정답: ④
* 사상(私商)이 발달한 조선 후기 경제상
18세기 이후에는 사상(私商)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이현, 칠패, 송파, 누원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송상), 평양(유상), 의주(만상), 동래(내상)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특히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송방)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대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①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동전인 상평통보(1678)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②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의 유행).
④ 조선 전기에는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관장)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이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식비 정도만 지급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가계를 꾸렸다. 이 기술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관영 수공업은 16 세기에 들어와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⑤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설점수세제). 이에 따라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4) 상평통보 [24회 2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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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⑤
* 상평통보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 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으나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에는 상평통보(1678)가 주조되어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전국 어디에서나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어,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①, ②, ③ 주전도감(1097)을 설치하고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다. 이 은전은 은 한 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딴 은병을 만들어 통용시켰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 불렀다. 그러나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의 특징상 널리 통용되지는 못하였다.
④ 고려 말에 등장하여 유통되던 지폐인 저화의 가치가 날로 떨어져서 화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세종 때(1423)에 그 보완책으로 조선통보가 주조되었다.
(5) 허생전이 쓰여진 조선 후기 경제 상황 [28회 2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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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③
* 허생전이 쓰여진 조선 후기 경제 상황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의 소설 등을 통해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①, ②, ④, ⑤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팔았다.
③ 고려 시대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996)를 만들었으며, 숙종(1095~1105)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저포)를 사용하였다.
(6)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26회 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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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③
*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 조선 후기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김홍도, 신윤복 등이 그린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①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의 유행).
⓶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1678)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③ 고려는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④ 조선 후기에는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상품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⑤ 조선 후기 사상(私商)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7) 신해통공(1791)이 실시된 조선 후기의 경제상 [24회 22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454304F5746FC522E)
정답: ⑤
* 신해통공(1791)이 실시된 조선 후기의 경제상
1791년(정조 15)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 대한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각종 상품에 대한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한 상업 정책인 신해통공 정책을 통하여, 소상인층 및 소생산자층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되었다(私商의 발달).
㉠ 15세기 후반부터 장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 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 고려 시대에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 조선 후기의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 조선 후기에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 되면서 상인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은 의주의 만상과 일본 상인과의 무역을 주도한 동래의 내상이었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인삼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