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성씨와 시조◈
소주가씨->가유약(임진왜란때 명의 장군으로 왔다가 귀화)
가평간씨->간균(고려 의종때의 문신)
남양갈씨->제갈규(제갈공명의 아버지)
합포감씨->감성조(고려시대의 문신)
회산감씨->감계(원나라 문신으로 공민왕때 귀화)
진주강씨->강이식(고구려 도원수)
금천강씨->강감찬(고려의 장군)
신천강씨->강후(중국 주나라 왕족)
충주강씨->강일(중국 진나라 대부)
천녕견씨->견권(고려 개국공신)
상주견씨->견훤(후백제의 황제)
태인경씨->경설정(선조가 고조선때 귀화)
청주경씨->경진(고려 명종때 문신)
수안계씨->계석손(중국 성양태수의 아들)
제주고씨->고을라(탐라국 왕)
면천곡씨->시조미상(중국 당나라인 귀화)
곡부공씨->공자(중국의 대학자,유교의 창시자)
김포공씨->공명례(당나라 18사의 한사람인 공윤보의 후손)
문천공씨->공보원(당나라 18사의 한사람인 공윤보의 후손)
창원공씨->공의(고려조의 문신)
청주곽씨->곽원(신라의 문신)
현풍곽씨->곽경(중국 송나라 출생, 고려 인종때 귀화)
평해구씨->구대림(중국 당나라 출생,고구려의 문신)
능성구씨->구존유(중국 송나라 장군,고려에 귀화)
창원구씨->구성길(중국 출신, 고려 혜종때 문신)
담양국씨->국양(중국 송나라 출생, 고려의 문신)
토산궁씨->궁흠(중국 태원출생, 고조선때 귀화)
안동권씨->권행(신라 왕족, 고려 태조 왕건때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움)
예천권씨->흔적신(고려의 호족,후에 권씨로 바꿈)
봉화금씨->금응(중국출생, 고조선때 귀화)
행주기씨->기우성(고조선 왕인 기자의 후손)
해평길씨->길당(중국 당나라 8학사중 한사람, 고려문종떄 귀화)
가평김씨->김계공(조선시대 무신)
감천김씨->김만추(신라의 문신)
강동김씨->김윤해(조선 숙종때의 문신)
강릉김씨->김주원(신라의 시중)
강서김씨->김반(조선 정종때 문관)
강진김씨->김원경(고려의 문신)
강화김씨 개성파->김성(고려 명종의 문신)
강화김씨 숙천파->김광(조선 성종때 문신)
강화김씨 의주파->김송학(조선의 무신)
개성김씨->김용주(고려 문종때 무신)
결성김씨 상주파->김예철
결성김씨 위원파->김달손(조선의 문신)
경산김씨->김맹(고려의 무신)
경산김씨->김육화(고려의 문신)
경주김씨->김알지(신라의 왕족)
계림김씨->김구사(조선의 문신)
고령김씨->김남득(고려의 문신)
고부김씨->김극
고산김씨->김환(조선의 문신)
고성김씨->김말로왕(신라 왕족)
고양김씨->김용한(조선의 문신)
공주김씨->김의손(조선의 문신)
광산김씨->김흥광(신라의 왕족)
광양김씨->김황원(고려의 문신)
광주김씨->김녹광(고려 고종때의 문신)
괴산김씨->김지효(조선 태종때의 문신)
교하김씨->김맹정(고려 인종때 장군)
구례김씨->김두남(고려의 구례태수)
금릉김씨->김중구(고려 고종 문신)
금산김씨->김신(고려때 문신)
금화김씨->김랑
김녕김씨->김시흥(고려 인종의 무신)
김제김씨->김천서(고려의 문하시중 벼슬 제수)
김천김씨->김화
김해김씨(가락)->김수로왕(신라왕)
김해김씨(우륵)->김충선(일본인,본명은 사야가, 임진왜란때 일본군장군으로 넘어와서 귀환)
김해김씨(법흥)->김염(고려의 문신)
김화김씨->김경원(고려때 시중벼슬 제수)
나주김씨->김운발(신라 경순왕의 손자)
낙안김씨->김수징(고려 명종때 무신)
남포김씨->김충길(조선시대 사람)
당악(해남)김씨->김인(조선 태종때의 공신)
당악김씨->김락(고려 개국공신)
대구김씨->김달(조선 태종때의 무신)
덕수김씨->김니
도강김씨->김희조(고려때 문하시중 제수)
동래김씨->김흥도(조선 중종때 동래부사제수)
등주김씨->김장생(중국 명나라 한림학사,등주 즉 안변에 정착)
무장김씨->김선(고려 공민왕때 문신)
문화김씨->김검달(경주김씨의 후손)
밀양김씨->김승조(고려 원종때의 무신)
배천김씨->김선(조선 성종때 전라좌수사 제수)
보령김씨->김억적(조선시대 무신)
부안김씨->김일(신라 마지막 태자,마의태자)
사천김씨->김부(고려 공양왕때 공신)
삼척김씨->김위옹(고려 삼한벽상공신)
상산김씨->김수(고려때 시중 제수)
서흥김씨->김보(고려때 무신)
선산김씨(일선)->김선궁(고려 태조 왕건때의 공신,선산군 호족)
설성김씨->김지선(고려의 문신)
수안김씨->김선(고려의 문신)
수원김씨->김품언(고려 현종때 공신)
순천김씨->김총(신라 헌안왕때 공신)
신천김씨->김득추(조선 개국공신)
안로김씨->김지경(고려시대 호족)
구 안동김씨->김숙승(고려의 문신)
신 안동김씨->김선평(고려 태조 왕건의 공신, 고창전투시 고창호족)
안산김씨->김긍필(고려)
안성김씨->김돈(고려 고종때 문신)
안악김씨->김영(조선 단종때 문신)
야성김씨->김취린(고려때 장군)
양근김씨->김인찬(조선 개국공신)
양산김씨->김연(고려때 문신)
양주김씨->김원보(고려 고종때 문신)
언양김씨->김선(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아들)
연안김씨->김섬한(신라때 문신)
연주김씨->김준손(조선 중종때의 공신의 아들)
영광김씨->김심언(고려 성종때 문신)
야성(영덕)김씨->김취린(고려의 장군,거란 침입막은 공신)
영산(永山)김씨->김영이(고려의 문신)
영산(靈山)김씨->김순(조선 세종때 문신)
영암김씨->김숙(고려 명종때 왜적침입 막은 공신)
영양김씨->김충(중국 당나라 형주자사, 신라에 귀화)
영월김씨->김여생(경순왕의 아들)
영해김씨->김억민(조선의 문신)
예안김씨->김상(고려의 호족)
오천김씨->김서흥(고려 인종때 문신)
희천김씨->김우(고려 강종때 무신)
용궁김씨->김존중(고려 인종때 문신)
용담김씨->김순서(고려때의 문신)
우봉김씨->김알지(신라왕족)
울산김씨->김덕지(경순왕의 아들)
웅천김씨->김중재(고려의 호족)
원주김씨->김거(고려 고종때 문신)
월성김씨->김광우(조선 세종때 덕천군수제수)
은율김씨->김상동(조선 명종때 문신)
은진김씨->김전개(조선 명종때 문신)
의성김씨->김석(신라 경순왕의 아들)
의주김씨->김성갑
이천김씨->김순걸
장연김씨->김정신(고려 문종때 문신)
적성김씨->김상환(조선 현종때 문신)
전주김씨->김태서(고려 고종때 문신)
정주김씨->김수
진도김씨->김국빈(고려때 무신)
진위김씨->김기문(조선 명종때 문신)
진잠김씨->김극복(조선 세종때 문신)
진주김씨(김알지계)->김추(경순왕의 아들)
진주김씨(김수로왕계)->김원술(김유신의 아들)
진천김씨->김사혁(고려 공민왕때 문신)
창원김씨->김을진(고려의 문신)
창평김씨->김석규(조선의 문신)
청도김씨->김지대(고려 문종때 문신)
청주김씨(김정계)->김정(신라 경순왕의 아들)
청주김씨(김하통계)->김하통(조선초의 호족)
청주김씨(김사지계)->김사지(조선 연산군때 문신)
청풍김씨->김대유(고려 말의 문신)
춘양김씨->김이(고려 충렬왕때 문신)
충주김씨->김남길
칠원김씨->김영철(조선의 문신)
태원김씨->김학증(중국 명나라의 무신, 아들이 명나라 패망후 귀화)
통천김씨->김교(고려의 호족)
파평김씨->김장수(고려 공민왕때 장군)
평양김씨->김려하(조선 태종때의 문신)
평해김씨->김맹절(조선 세조때의 문신)
풍기김씨->김승원(조선의 문신)
풍덕김씨->김우양(고려 공민왕때 문신)
풍산김씨->김문적(고려의 호족)
하음김씨(김희정계)->김희정(조선의 문신)
하음김씨(김효일계)->김효일(신라 경순왕의 후손)
함창김씨->?(고령가야의 왕)
당악(해남)김씨->김인(조선 태종때의 공신)
해주김씨(김맹계)->김맹(조선)
해주김씨(김문동계)->김사겸(고려말의 문신)
해평김씨->김훤술(고려 개국공신, 시중제수)
해풍김씨->김숭선(고려의 문신)
홍주김씨->김인의(경순왕의 후손)
화순김씨->김익구(조선 숙종때 문신)
희천김씨->김우(고려의 무신,경순왕의 손자)
금성나씨->나총례(고려 태조의 삼한벽상공신,선조 나지강은 중국 당태종때 장군-고구려 원정 반대하다 망명)
나주나씨->나부(중국 당태종때 문신, 망명)
고성,영양,의령,남씨->김충(중국 당나라의 형주자사, 신라에 귀화,후에 후손들중 일부가 남씨로 바꿈)
개성내씨->?(고려 왕족출신이었으나 고려 패망후 성을 바꿈)
곡산노씨->노조(고려 충숙왕때 문신)
광산노씨->노수(신라의 공신)
교하노씨->노강필(고려 개국공신)
만경노씨->노극청(고려 명종때 문신)
안강노씨->노곤(고려의 문신)
안동노씨->노우(고려의 문신)
연일노씨->노경령
풍천노씨->노유(신라의 문신)
해주노씨->노시헌(조선)
강화노씨->노용신(고려 고종때 문신)
광주노씨->노필상
밀양노씨->노중연(중국 주나라 사람, 진시황 축출하는데 공세움,후손이 고조선때 귀화)
함평노씨->노목(고려 인조때 무신)
개성노씨->노은경(중국 원나라 한림학자,귀화)
강음단씨->희상(중국 강음현사람으로 임진왜란때 원병으로 왔다가 귀화)
연안단씨->유인(조선의 문신)
밀양당씨->당성(중국 절강성 명주 사람, 원나라 말기에 귀화)
밀양대씨->대중상(발해 황제 대조영의 아버지)
성주도씨->도순(중국 려양출생)
광천동씨->동중서(중국 한무제때 사람, 후손이 조선초에 귀화)
두릉두씨(경령계)->두경령(중국 송나라 병부상서로 고려 목종때 망명)
두릉두씨(교림계)->교림(중국 명나라의 기주자사, 임진왜란때 원군으로 와서 귀화)
목천,장흥마씨->마려(백제건국 공신)
영평마씨->마난(고려 개국공신)
개성,강화만씨->만세덕(임진왜란때 명나라 장군, 귀화)
신창맹씨->맹자(중국 유학의 거장)
서촉,연안명씨->명옥진(원나라 말기에 성도에 나라를 세워 대하국 건국, 황제칭함, 명나라 주원장에게 패망하자 고려로 귀화)
함평모씨->모경(중국 송나라 장군, 이자겸난때 원군왔다가 귀화)
광녕묵씨->묵서(중국 명나라 문신, 후에 귀화)
감천문씨->문원길
남평문씨->문다성(신라의 문신)
정선문씨->문임간(고려의 문신)
재령미씨->미영성(조선)
여흥민씨->민칭도(고려의 문신)
강릉박씨->박순(고려 명종때의 문신)
월성박씨->박언의(신라 왕족)
고령박씨->박언성(신라 왕족)
고성박씨->박빈(고려의 문신)
광주박씨->박명훈(고려의 문신)
구산박씨->박자(고려말의 문신)
군위박씨->박헌(조선개국공신)
나주박씨->박병묵(고려의 문신)
노성박씨->박연의(조선초의 문신)
면천박씨->박득의(고려개국공신 박술희의 아들)
무안박씨->박진승(고려초의 문신)
문의박씨->박의중(고려 공민왕때 문신)
문주박씨->박한보
밀양박씨->박언침(신라 경명왕의 아들)
반남박씨->박응주(고려의 호족)
비안박씨->박우(고려의 문신)
사천박씨->박자문(고려)
삼척박씨->박원경(고려 공민왕때 문신)
상산박씨->박언창(후삼한시대 사벌주에서 사벌국 건국 왕을 칭함, 11년만에 후백제 견훤군에 의해 멸망)
상주박씨->박여(사벌국 왕인 박언창의 후손,고려 충렬왕때 문신)
선산박씨->박선민(조선의 문신)
순창박씨->박두간(고려)
순천박씨->박영규(후백제 황제 견훤의 사위,훗날 고려 개국공신)
여주박씨->박지석(고려의 문신)
영암박씨->박항(고려 인종때 문신)
영해박씨->박제상(신라때 문신)
운봉박씨->박중화(고려말의 문신)
울산박씨->박윤웅(고려 숙종때 장군, 10만의 동여진족이 침공하자 이를 4개월만에 평정)
월성박씨->박언의(신라 경명왕의 아들)
은풍박씨->박치온(조선초의 문신)
음성박씨->박서(고려시대의 장군,몽고군 격퇴)
의흥박씨->박득서
인제박씨->박율(신라 경명왕의 후손)
장성박씨->박공발(고려 인종때 장군, 홍건적과 탐라국 정벌)
전주박씨->박언화(신라 경명왕의 아들)
죽산박씨->박기오(고려초 삼한벽상공신,지방호족)
진주박씨->박진문(고려)
진원박씨->박유화(고려의 무신)
춘천박씨->박항(고려 고종때 문신)
충주박씨->박영(고려의 문신)
태안박씨->박원의(고려의 문신)
태인박씨->박언상(고려 문종때 문신)
평산박씨->박지윤(고려 태조 왕건때 삼중대광,시중 제수)
평주박씨->박수경(고려 태조 왕건때의 개국공신)
평택박씨->박지영(조선초의 문신)
함양박씨->박언신(조선의 문신)
거제반씨->반부(고려 충렬왕때 문신)
남양방씨->방준(중국 당나라의 8학사중 한명, 귀화)
수원방씨->방정유
온양방씨->방지(중국 당나라 한림학사, 귀화)
개성방씨->방두현(중국 당나라 한림학사, 귀화)
태원방씨->방발(중국 태원사람, 귀화)
경주배씨->배현경(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공신)
수원백씨->백우경(중국 소주사람으로 황족의 후예)
금성범씨->범승조(원나라 문신, 귀화)
안주범씨->범영부(고려 우왕때의 문신)
초계,밀양변씨->변정실(고려 성종때의 문신)
원주변씨->변안열(중국 출생으로 원나라때 귀화)
장연변씨->변경(고려의 문신)
황주변씨->변여(중국 송나라 사람, 송나라가 멸망하자 귀화)
면천복씨->복지겸(고려 태조 왕건때의 개국공신)
하음봉씨->봉우(고려 인종때의 문신)
제주부씨->부을라(탐라국 왕족)
수성빈씨->빈우광(중국 송나라 사람, 귀화)
경주빙씨->빙여경(중국 명나라 사람, 귀화)
청주사씨->사요(중국 명나라 개국공신, 고려 공민왕때 귀화)
목천상씨->상국진(후백제 부흥운동을 펼침)
남평서씨->서호(조선)
달설서씨->서진(조선의 문신)
당성서씨->서득부(조선)
대구서씨->서한(고려의 문신)
부여서씨->여륭(백제 의장왕의 태자)
연산서씨->서준영
이천서씨->서신일(고려의 유명한 문신인 서희의 조부)
장성서씨->서릉(고려 고종때 시중)
평당서씨->서준방(고려때 문신)
월성석씨->석재흥(고려의 문신)
충주,홍주석씨->석린(고려 의종때 무신)
해주석씨->석성(중국 명나라의 장군,임진왜란때 원군으로 와서 귀환)
보성선씨->선윤지(중국 명나라의 문신, 고려 우왕때 귀화)
경주설씨->설손(위그루족 사람,원나라에 귀화하여 단주태수 제수, 홍건적의 난 피해 망명)
경주,순창설씨->설지덕(신라의 호족)
창녕성씨->성인보(신라의 호족)
진주소씨->소경(중시조,신라의 호족)
평산소씨->소옹(고려의 문신)
경주손씨->손순
구례손씨->손정택(고려의 무신)
나주손씨->손광유(고려의 문신)
밀양손씨->손순(신라의 호족)
부령손씨->손순조
비안손씨->손을구(고려의 무신)
일직손씨->손응(고려의 무신)
청주손씨->손순(고려 원종때 문신)
평해손씨->손순
김해송씨->송천봉(고려 충혜왕때 문신)
남양송씨->송공절(고려말의 문신)
덕산송씨->송곤산(고려말의 문신)
문경송씨->송신경(고려말의 문신)
신평송씨->송유익
야성송씨->송맹영(고려 목종때의 문신)
양주송씨->송도성(조선초의 호족)
여산송씨->송유익(고려의 문신)
연안송씨->송경(고려 공민왕때 문신)
용성송씨->송주은
은진송씨->송대원
진천송씨->송순공(신라때 문신)
철원송씨->송화길(고려때의 문신)
청주송씨->송춘
홍주송씨->송평(조선의 무신)
연일, 광산승씨->승개(고려 정종때 장군)
절강시씨->시문용(중시조, 중국 명나라의 무장, 임진왜란때 원군으로 왔다가 귀화)
거창신씨->신수(중국 송나라 사람, 고려 명종때 귀화)
고령신씨->신성용(고려의 문신)
아주신씨->신영미(고려말의 호족)
평산신씨->신숭겸(고려개국 1등 공신)
영산,영월신씨->신시랑(중국 당나라 사람, 신라로 귀화)
삼척심씨->심동노(고려의 문신)
청송심씨->심홍부(고려의 문신)
풍산심씨->심만승(중국 송나라사람, 고려 예종때 귀화)
순흥안씨->안자미(고려의 문신)
죽산안씨->안원형(고려 충혜왕때 문신)
탐진안씨->안원린(고려의 무신)
태원안씨->안만세(원나라 문신, 고려 공민왕때 귀화)
원평야씨->야선조(고려 충렬왕때 무신)
남원양씨->양우경(신라 경덕왕의 공신)
제주양씨->양순(중국출생, 신라 경무왕때 귀화)
남원양씨->안경문(고려의 문신)
밀양양씨->양근(고려말의 호족)
안악양씨->양만수(고려때의 문신)
중화양씨->양포(고려 고종때의 문신)
청주양씨->양기(중국사람, 고려 공민왕때 귀화)
통주양씨->양복길(중국 명나라의 9의사중 한명, 명나라 패망후 조선으로 귀화)
경흥어씨->어계복(중국 명나라 사람, 조선에 귀화)
충주어씨->어중익(1061?~1131)(고려 제10대 문종 때의 문신이며 본래 충주지씨이다.)
함종어씨->어화인(중국 남송사람, 고려 명종때 귀화)
영월엄씨->엄임의(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신라 경덕왕때 사신으로 와서 귀화)
성주,함양여씨->여어매(중국 후한 오나라의 여몽의 후손)
의령여씨->여선재(중국 송나라 사람, 고려로 귀화)
곡산연씨->연계령(중국 흥농사람, 고려로 귀화하여 문신이 됨)
전주연씨->연주(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공신)
파주염씨->염형명(중국 황제의 일족, 후당때 신라로 귀화)
부계예씨->예악전(고려 인종때의 문신)
고창오씨->오학인(고려 정종때의 문신)
군위오씨->오숙귀(고려의 문신)
나주오씨->오숙규(고려의 문신)
낙안오씨->오사용(고려의 무신)
동북오씨->오현좌(고려 고종때의 장군)
보성오씨->오현필(고려 고종때의 장군)
연일오씨->오흡(고려의 호족)
울산오씨->오연지(고려의 호족)
장흥오씨->오천우(조선의 무신)
전주오씨->오준민(고려의 무신)
평해오씨->오극중(고려때의 시중제수)
함양오씨->오광휘(고려말의 장군)
함평오씨->오잠(고려 원종때 문신)
해주오씨->오현보(고려 고종때 장군)
화순오씨->오원(보성오씨의 시조 오현필의 아들)
의령옥씨->옥진서(중국 당나라의 8학사중 한명, 고구려에 귀화)
성씨(姓氏)가 널리 보급(普及)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그렇다고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일률적(一律的)으로 성(姓)을 갖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왕건(王建)이 후삼국(後三國)을 통합(統合)했다고는 하지만 개국(開國) 초기(初期)에는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정치제도(政治制度)도 확립(確立)하지 않았으며 각 지방(地方)은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중앙(中央)의 통제력(統制力)이 약화(弱化)되어 반란(反亂)이 일어나던 무렵이라 각 지방(地方)을 근거(根據)로 독자적(獨自的)인 기반(基盤)을 닦고 성장(成長)한 토착세력(土着勢力)이 한 개 군(郡) 지역(地域)을 차지하여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지배(支配) 영역(領域) 내의 농민(農民)으로부터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이는 등 독립적(獨立的)인 지위(地位)를 누리면서 성주(城主)나 장군(將軍)으로 일컫고 있던 호족(豪族)들에게 지배(支配)되고 있었다. 이에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개국(開國) 초기(初期)부터 측근(側近) 세력(勢力)을 구축(構築)하기 위한 유화정책(宥和政策)의 일환으로 새 왕조(王朝)를 수립(樹立)하는 데 공(功)을 세운 중앙세력(中央勢力)에게 성(姓)을 많이 하사(下賜)하였다. 또한 중앙(中央)과 연결(連結)된 호족(豪族)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姓)을 갖게 됨으로써 많은 성(姓)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 (卜智謙)등이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성(姓)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려(高麗) 건국(建國)에 공(功)을 세웠기 때문에 홍술(弘述)을 홍유(洪儒), 백옥(白玉)을 배현경(裵玄慶), 삼능산(三能山)을 신숭겸(申崇謙), 복사귀(卜沙貴)를 복지겸(卜智謙) 등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성(姓)을 하사(下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유(洪儒)는 부계 홍씨(缶溪 洪氏), 배현경(裵玄慶)은 경주 배씨(慶州 裵氏), 신숭겸(申崇謙)은 평산 신씨(平山 申氏), 복지겸(卜智謙)은 면천 복씨(沔川 卜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또한 왕건(王建)이 세력(勢力)을 점차 넓히게 되자 각처에서 왕건(王建)의 편에 서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勢力)을 물리치고 고려(高麗) 왕조(王朝)를 창업(創業)하는 데 공(功)을 세운 호족(豪族)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주장군(溟州將軍)이라 일겉던 왕순식(王順式), 벽진장군(碧珍將軍)[성주(星州]이라 일컫는 이총언(李悤言),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영천(永川)] 황보능장(皇甫能長) 등이었다. 왕순식(王順式)은 명주(溟州)의 호족(豪族)으로 고려(高麗) 건국(建國) 후에까지도 지방(地方)에서 독립(獨立) 세력(勢力)을 유지(維持)하고 있었으나 승려(僧侶)로 고려(高麗) 지배권(支配圈)에 살던 아버지가 귀순(歸順)을 권하자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 귀부(歸附)했으며, 다른 아들 장명(長命)에게는 1백 명의 사병(私兵)을 데리고 가서 태조(太祖)의 왕궁(王宮)을 숙위(宿衛)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도 태조(太祖)를 배알(拜謁)하여 왕씨(王氏) 성(姓)과 대광(大匡)이라 관직(官職)을 받았다. 이총언(李悤言)은 왕건(王建)의 권유(勸誘)를 받고 아들 영(永)에게 군사(軍事)를 이끌고 왕권(王權)을 돕게 했으며, 황보능장(皇甫能長)은 왕건(王建)을 도와 공(功)을 세우고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이총언(李悤言)은 벽진 이씨(碧珍 李氏)의 시조(始祖)가 되고, 황보능장(皇甫能長)은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오늘날의 성씨(姓氏) 중 상당수는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후예(後裔)들이다. 앞서 언급(言及)한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나 무송 유씨(武松 庾氏)의 시조(始祖)인 유검필(庾黔弼)처럼 군인(軍人)으로서 공(功)을 세워 중앙(中央) 세력(勢力)으로 등장(登場)한 인물도 있었고, 지방(地方) 세력(勢力)으로도 왕순식(王順式), 이총언(李悤言), 황보능장(皇甫能長)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문화 유씨(文化 柳氏)의 시조(始祖)인 유차달(柳車達)은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문화(文化)]의 부호(富豪)였는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칠 때 1천 량의 수레를 동원(動員)하여 군량(軍糧)을 보급(普及)해 주었다고 하며, 전의 이씨(全義 李氏)의 시조(始祖) 이도(李棹)는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할 때 금강(錦江)의 물이 넘쳐서 군사(軍事)들이 강(江)을 건너지 못할 때 그들이 강(江)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고,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은 공암(孔巖)[양천(陽川)]의 부농(富農)으로서 왕건(王建)의 군사(軍事)들에게 군량(軍糧)을 대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외에도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각 성씨(姓氏)의 시조(始祖)가 된 이들이 많았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시조(시조) 권행(權幸),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始祖) 한란(韓蘭),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시조(始祖) 홍은열(洪殷悅), 홍주 홍씨(洪州 洪氏)의 시조(始祖) 홍규(洪規),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시조(始祖) 장정필(張貞弼),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시조(始祖) 방계홍(房季洪), 원주 원씨(原州 元氏)의 시조(始祖) 원극유(元克猷),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莘達), 용인 이씨(龍仁 李氏)의 시조(始祖) 이길권(李吉卷), 청주 이씨(淸州 李氏)의 시조(始祖) 이능희(李能希), 면천 박씨(沔川 朴氏)의 시조(始祖) 박술희(朴述希), 아산 이씨(牙山 李氏)의 시조(始祖) 이서(李舒), 동주 최씨(東州 崔氏)의 시조(始祖) 최준옹(崔俊邕), 풍양조씨(豊壤 趙氏)의 시조(始祖) 조맹(趙孟), 영광 전씨(靈光 全氏)의 시조(始祖) 전종회(田宗會), 선산 김씨(善山 金氏)의 시조(始祖) 김선궁(金宣弓), 해평 김씨(海平金氏)의 시조(始祖) 김훤술(金萱述), 봉화 금씨(奉化 琴氏)의 시조(始祖) 금용식(琴容式)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권행(權幸)은 원래(元來) 김씨(金氏)였으나 권씨(權氏) 성(姓)을 하사(下賜)받았고, 그 외에는 성(姓)을 하사(下賜)받았다는 기록(記錄)이 없어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전부터 사용(使用)하던 성(姓)이었던 듯하다.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전에 성씨(姓氏)가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根據)로는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호장(戶長)을 시조(始祖)로 삼은 예가 많음을 들 수 있다. 호장(戶長)이란 고려(高麗) 건국(建國) 초에 새 왕조(王朝)에 귀부(歸附)하지 않은 지방(地方) 세력(勢力)들을 강제로 향리(鄕里)의 장(長)으로 삼아 강제로 새 왕조(王朝)에 귀속(歸屬)시켰던 것을 말한다. 그 예로는 신라(新羅)에서 벼슬을 살던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始祖) 이순유(李純由)는 고려(考慮)가 건국(建國)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이름을 극신(克臣)으로 고쳐 경산(慶山)[성주(星州)]에 숨어 살다가 경산부(慶山府)의 호장(戶長)으로 강제로 귀속(歸屬)되었고, 역시 신라(新羅)의 신하(臣下)였던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시조(始祖) 유의신(兪義臣)은 기계현(杞溪縣)의 호장(戶長)이 되었다. 그 외에 호장(戶長)이 된 인물(人物)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는 성씨(姓氏)로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 한산 이씨(韓山 李氏), 진성 이씨(眞城 李氏), 합천 이씨(陜川 李氏), 덕산 이씨(德山 李氏), 고흥 유씨(高興 柳氏), 단양 우씨(丹陽 禹氏), 고력 신씨(高力 申氏), 순창 조씨(淳昌 趙氏), 동래 정씨(東萊 鄭氏),봉화 정씨(奉化 鄭氏), 창녕 성씨(昌寧 成氏), 예안 김씨(禮安 金氏), 반남 박씨(潘南 朴氏), 양주 조씨(楊州 趙氏), 무송 윤씨(茂松 尹氏), 목전 상씨(木川 尙氏) 등이 있다. 위에 든 성씨(姓氏)는 이외에도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인물(人物)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는 성씨(姓氏)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신라(新羅) 말기(末期)부터 고려(高麗) 초에 이르는 사이에 지방(地方) 호족(豪族)이나 고려(高麗)의 공신(功臣)들이 대부분 왕(王)으로부터 성(姓)을 하사(下賜)받거나 성(姓)을 만들어 가졌다고 보여지며 고려(高麗)에 들어와서는 성씨(姓氏) 앞에 본관(本貫)을 표시(標示)하여 혈족(血族) 계통(系統)을 구별(區別)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성씨(姓氏)는 특권층(特權層)만 가지고 있었고 일반화(一般化)되어 있지는 않았다. 성씨(姓氏)가 일반화(一般化)된 요인(要因) 중의 하나는 958년[광종(光宗) 9년]부터 실시(實施)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들 수 있다. 중국(中國) 후주(後周) 사람으로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된 쌍기(雙冀)의 제안(提案)으로 시작(始作)된 과거제도(科擧制度)는 제도(制度)가 자리잡아가는 과정(過程)에서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하기 위한 필수(必須) 요건(要件)으로 성(姓)을 가져야 하고 본관(本貫)[출신지(出身地)]을 밝혀야만 했다. 더욱이 11대 문종(文宗) 9년(1044년)에는 응시자(應試者)의 성명(姓名), 본관(本貫), 4대조(四代祖) 까지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에 提出하도록 하는 봉미 제도를 시행(施行)함으로써 성(姓)은 널리 보급(普及)되었다. 그러나 천민계급(賤民階級)에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성(姓)이 없었다.
韓國 內의 中國姓氏
1. 蘇州賈氏
시조는賈維鑰. 明나라 兵部尙書 薊遼都察使로 壬辰倭亂때 明軍을 이끌고 와 安州싸움에서 倭軍을 물리치고 돌아갔다가 丁酉再亂때 아들 손자와 함께 다시 들어와 부산에서 싸우다 순절 하였다. 원래 賈氏는 周 文王의 자손으로 公明이 賈(지금의 洛陽, 蘇州 일대)伯에 봉해짐으로써 賈씨가 되었다.
1. 중국에 明나라 兵部尙書 계원도찰사(薊遼都察使) 역사적 기록이 있는가?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역사의 기록이 있는가?
2. 檜山甘氏
시조는 감규(甘揆), 元나라 사람(원래 노(魯)나라 한림학사)로 고려 충정왕 1년 魯國公主를 따라 元朝의 翰林學士들이 陪從해 올 때 함께와,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延陵君에 봉해졌다. 그때 함께 온 분들은 孔紹. 張敬. 皇甫榮. 獨孤億. 西門氏. 南宮氏. 邊肅등 학사들이라 한다. 檜山은 지금의 昌原이다.
감씨(甘氏)는 원래 주나라 무왕(武王)의 셋째아들인 숙대를 감후(甘侯)에 봉함으로써 나라 이름을 따서 감씨라 하였다.
1. 원나라 노국공주로 왔다는 기록이 중국과 한국에 있는가?
2. 같이 왔다고 하는 7학사의 기록도 있는가?
3. 南陽葛氏
제갈씨의 시조는 諸葛亮의 아버지 諸葛珪이며 그의 20세손 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귀화 하였다. 고려조 고종 때 제갈공순의 12세손 諸葛泓. 諸葛瀅 형제가 각기 諸氏와 葛氏로 分宗하여 姓을 삼았다.
1. 중국 족보에서 諸葛珪의 20세손 諸葛公巡을 확인 할 수 있는가?
2. 신라 흥덕왕 때 사적을 확인 할 수 있는가?
4. 信川康氏
시조는 康候. 箕子가 동래할 때 西周 武王의 아우 康叔封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8조(條)를 제정하고 윤리를 교화한 공으로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되고 , 아버지 강숙의 <康>자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中始祖는 康之淵이며 후대에 谷山. 載寧. 忠州. 晋州 등의 별관이 생겼으나 信川으로 통일 하였다.
1. 西周 武王의 아우 康叔封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역사적 기록이 있나?
2.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된 기록이 있나?
5. 忠州强氏- 미상
强씨는 晋나라의 大夫 强검의 후예로 宋나라 휘종 때 强浚明과, 理宗때 警巡 强伸 등이 전해 오고 있으나 東來시기는 알 수 없다. 剛氏는 1908년 민적부에 기재할 떄 强氏를 잘못 적은 것이라고 한다.
강씨(强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 : 감숙성 남동부 위수에 면한 상업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진(晉)나라 때 사람인 강 일(强 일)이 시조(始祖)가 되며, 우리나라 강씨는 북송(北宋) 휘종(徽宗)때의 전당(錢塘) 출신인 강준명(强逡明)의 후손으로 전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동래(東來)하였는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5-1 剛氏강씨- 미상
강씨(剛氏)는 중국(中國) 청(淸)나라 덕종(德宗 : 제 11대 황제, 재위기간: 1875~1908) 때 사람인 강의(剛毅)가 만주(滿洲) 출신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낸 것으로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에 동래(東來) 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6. 驪州介氏- 미상
‘ 韓國氏族統譜’에 따르면 介氏는 중국 太平(지금의 山西城)에서 系出되었다 한다. 周襄王때 晋에 介子가 있어 王光臨으로 改名 했다고 한다. 동래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7. 泰仁. 海州景氏- 미상
시조는 景汝松. 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뒤 平壤에 세거하였다. 그 뒤 譜系를 잃어 고려조에 樞密院副使와 東南都兵馬使를 지내고 泰山府院君에 봉해진 景磋를 1世로 하고 있다. 그 뒤에 또 昭穆이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直提學大司空을 지낸 景祥祖와 左僕射에 있었던 景祥祿 형제를 貫祖로 삼아 泰仁과 海州로 분관하였다.
8. 淸州慶氏- 미상
경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서 제(齊)나라 공족(公族)이었으나, 언제 우리나
라에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하내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현존하
는 관향은 청주 단본이다. 시조로 전하는 경진은 고려 명종 때 정의광정대부
를 지냈다. 중국에서 왔다는 근거가 없어 중국과 확실히 연계할 수 없다.
9. 遂安桂氏
시조는 桂 碩遜. 明나라 天水사람으로 성양 태수(城陽太守) 경횡(炅橫)의 셋
째아들이다. 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洪武帝(明太祖)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 禮學을 전수 한 뒤, 귀화하여 遂安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
다. 遂安은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다.
1. 明나라 天水사람, 성양 태수(城陽太守) 경횡(炅橫)의 셋째아들 근거가 있나?
2. 洪武帝(明太祖)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온 근거 있나?
10. 廣寧高氏- ?
시조는 高有寶. 明나라 사람으로 明. 淸 교체기에 淸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인조 초에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는 宋나라 진종 때 衛國의 충렬무왕인 高瓊의 후손으로 禮部侍郞을 지냈다. 廣寧은 중국 지명이다.
11. 曲 氏- 미상
곡씨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로 龍宮. 沔川 두 본이 있다. 원래 중국 성씨로 唐나라때 장군을 지낸 曲環이 있다. 東來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태조때 評察를 지낸 曲矜會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된 성씨임을 알 수 있다.
12. 曲阜孔氏
시조 孔紹는 元의 翰林學士로 있다가 공민왕비 魯國公主를 陪從, 8학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공민왕조에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檜原君에 봉해졌다. 공씨의 선조는 孔子로, 세록에도 文宣王 孔子를 시조로 起世하면서 曲阜孔氏 中國宗統편에 엮고 있다. 중국 魯나라의 孔氏와 동원임으로 曲阜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1. 공민왕비 魯國公主를 陪從, 8학사와 함께 온 역사적 근거.
13. 金浦公氏
시조 公允輔. 唐나라때 사람으로 安祿山의 난을 피해 18학사 중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김포에 정착, 公氏의 시조가 되었다. 공씨의 선계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이자 공자(孔子)의 제자로 72인의 반열에 들었던 공숙문자(公叔文子), 즉 공하수(公夏守)라 하였다.
1. 安祿山의 난을 피해 18학사 중 한사람 근거 있나?
2. 공자(孔子)의 제자로 72인의 반열에 들었던 공숙문자(公叔文子), 즉 공하수 (公夏守)의 후예는 어디가 많은 가?
14. 善山郭氏
곽씨(郭氏)는 중국의 성씨로서 주문왕(周文王)의 아우 괵중(괵仲)이 괵(괵)
에 봉함을 받은 후 괵과 비슷한 음을 따서 곽공(郭公)이라 불렸기 때문에 곽
(郭)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선계는 周나라 왕손 郭穆인데, 고려조에 호를 巖谷이라한 正懿公 郭鏡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苞山君에 봉해져 포산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고려 중기에 銀靑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겸 太子詹書를 지낸 郭佑賢이 善山君에 봉해져 선산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때 포산곽씨와 合譜하여 포산으로 통일했으나, 그 뒤 세계간의 연대차가 발견되어 西川公 郭佑賢을 시조로 하고 있다.
15. 玄風(苞山)郭氏
시조는 郭鏡. 宋나라 關西의 弘農 사람으로 文淵閣 翰學士가 되었다. 고려 인종11년에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 16년 등과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平章事文化侍中을 지냈고, 金紫光祿大夫에 올라 苞山君에 봉해졌다. 현풍곽씨 중에는 한때 본관을 善山. 海美. 江陵 등 별관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이 의례 玄風郭氏 (시조 郭鏡)의 후손이라 써 왔기에 1979년 종회 의결로 본관을 玄風으로 통일하였다.
1. 宋나라 關西의 弘農이 어디인가?
2. 고려 인종11년에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온 근거 있나?
16. 綾城具氏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진(晋)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여,「동사보유(東史補遺)」와「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 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 潛)과 함께 고려(高 麗)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具存裕의 장인은 宋나라 사람 朱潛으로 翰林學士를 지냈다. 宋나라가 蒙古에 게 패망하자 7학사와 함께 錦城, 지금의 羅州에 망명해 왔다. 유명한 朱熹는 妻 高祖가 된다.
1.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주 잠(朱 潛)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 (歸化)한 역사 있나?
16-1.창원구씨(昌原具氏)- 미상
「창원구씨세보(昌原具氏世譜)」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창원구씨는 원성(原姓)이 구씨(仇氏)로 한(漢)나라 명환(名宦) 구 남(仇 남)의 후손 구성길(仇成吉)이 동래(東來)하여 서기 945년(혜종 2) 서경(西京)에서
공(功)을 세원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贊成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 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
하 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생원(生員) 설(雪)을 일세조(一世祖)
로 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종
길(宗吉)을 중시조(中始組)로 계대(繼代)하여 오다가 1791년(정조 15) 현재
의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17. 平海丘氏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
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구(丘>자(字)
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구
(邱)〉자를 자손(子孫)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丘大林. 중국 唐나라 장군으로 신라 문무왕 3년에 우리나라 黃氏의 都
始祖인 黃洛장군과 함께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경북 蔚珍郡 平海에 표
착, 平海丘氏의 조상이 되었다.
1. 黃氏의 都始祖인 黃洛장군과 함께 왔다는 근거가 있나?
2. 황 씨 측의 주장은?
18. 潭陽鞠氏
시조는 鞠周. 시조 국 주(鞠 周)는 원래 송(宋)나라 사람으로 1126년(인종 4) 황제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잡혀가자 남송(南宋)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고려 인종 6년 (南宋 高宗建炎 2년) 함께 東來하였다. 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와 邊九萬 등과 함께 東來하였다. 인종은 그를 監正官에 제수했고, 그 뒤 金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위를 떨쳐 秋城君에 봉해졌다. 秋城은 지금의 潭陽이다.
1. 시조 국 주(鞠 周)가 고려 인종 6년에 동래했다는 역사적 근거.
2. 인종이 그를 監正官에 제수했다는 근거는?
19. 國 氏- 미상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國氏는 중국 성씨로, 유명 인사로는 春秋戰國時代 鄭나라 宰相 子産을 들 수 있다. 자산의 본명은 國僑이다. 국씨는 백제 8대 姓중 하나이다.
20. 兎山弓氏- 미상
시조는 弓欽. 본래 중국 太原 의 후손으로 殷나라 末에 東來하여 兎山(黃海道 金川郡에 있는 지명)에서 世居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계가 失傳되어 弓繼信을 1世로 삼아 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궁씨(弓氏)는 중국의 성씨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궁(叔弓)이 <궁(弓)>자를 따서 성을 삼았다고 한다.
21. 幸州奇氏
시조는 奇友誠. 백제 溫祚王 때 侍中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幸州에 세거, 幸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奇씨는 幸州 단일 본으로 箕子조선을 연 箕子가 先系祖라고 밝히고 있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이다.
箕子의 41세손 箕準(哀王)이 燕人 衛滿의 침입으로 南遷, 현재의 익산으로 옮기고 그의 7세 손 箕勳(元王)에 이르러 3형제를 두었는데 그들은 각기 다음과 같이 改姓을 했다고 한다.
1) 첫째 友誠은 德陽(幸州)奇氏 2) 두째 友諒은 上黨(淸州)韓氏로
3) 세째 友平은 北平(平壤)鮮于氏가 되어 지금까지 통혼을 하지 않고 있다.
1. 箕子의 41세손 箕準(哀王)이 衛滿의 침입으로 南遷했다는 역사적 근거.
2. 한씨와 선우씨의 족보상 주장은?
3. 箕子에 대한 중국 측의 견해는 ?
22. 幸州箕氏
箕氏는 고대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사람인 箕子 후예라고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幸州奇氏와 同源으로도 전해진다.
1. 幸州奇氏와 同源인가?
23. 海平(善山)吉氏
시조는 吉瑭. 길씨(吉氏)는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해온 8학사(八學士)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당)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는 중국 唐나라에서 列卿의 벼슬에 있었다.
冶隱 吉再의 증조이며 成均生員을 지낸 吉時遇를 시조로 삼아 起世하였다.
24. 英陽金氏
시조는 金忠. 唐나라 사람으로 荊州刺使겸 按廉使를 지냈다. 그는 鳳陽府 汝南사람으로 신라 경덕왕 14년 일본에 초빙되어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착.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南氏로 賜姓하였다. 賜姓前 아들을 金氏, 賜姓後 아들을 南氏로하였다.
25. 太原金氏
시조는 金學曾. 명나라 신종때 복건성 都御使를 지냈고 翰林太原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金坪이 翰林侍講을 지낸 뒤, 인조 4년에 우리나라에 망명, 김해 대종산 아래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太原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26. 錦城羅氏
시조는 羅聰禮. 금성나씨는 본래 중국 祝融씨의 후예인 운씨(鄖氏)였는데 춘추시대에 羅國에 봉해짐으로써 羅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唐 太宗때의 尙書左僕射로 있던 羅至强이 우리나라에 망명, 지금의 羅州에 정착한 뒤 신라조의 左丞相에 올라, 후손들의 繁衍의 기틀을 가졌다. 나주의 옛 이름이 錦城일 뿐 아니라 시조가 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는 연유로 금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羅文瑞를 시조로 하는 軍威羅氏는 錦城羅氏에서 분적 된 것이다.
27. 羅州羅氏
시조는 羅富. 고려조에 正議大夫監門衛 上將軍을 지냈다. 羅富는 南宋 고종조때 고려조에 奉命使臣으로 왔다가 미쳐 돌아가지 못한 사이에 宋나라가 멸망, 艅艎(지금의 나주)에 눌러 살게 되어, 후손들이 나주로 貫鄕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28. 安定羅氏
시조는 羅天瑞. 고려 공민왕 때 門下侍中 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에 安定伯 겸 安川君에 봉해졌다. 안정나씨는 나주나씨에서 본이 옮겨졌다고 한다. 또 원래 唐나라 태종 때 翰林修撰官으로 있다가 참소를 입어 우리나라에 피신, 지금의 나주에 정착 관향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1) 중국 唐나라 태종 때 翰林修撰官 羅天瑞가 있었는가?
29. 英陽. 宜寧. 固城南氏
시조 南敏. 중국 唐나라 鳳陽府 汝南사람으로 원명은 金忠이었다. (영양김씨 참조) 고려 명종 때 南敏의 후손 3형제가 높은 관직에 올라 각기 중시조가 되었다.
1) 南洪輔: 英陽南氏 2) 南君輔 : 宜寧南氏 3) 南匡輔 : 固城南氏
1) 鳳陽府 汝南이 어디인가?
30. 咸悅南宮氏
시조는 南宮元淸. 고려 성종조의 門下侍郞 平章事를 지냈고 甘勿阿(咸悅의 옛이름)伯에 봉해졌다.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그는 중국의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李惟成, 皇甫儉 등과 함께 箕子를 따라 동래하여 司徒를 지낸 南宮隋의 후손이다.
31. 揚州浪氏-미상
浪氏는 중국 揚州(지금 강소성 강도현) 단본이며, 시조는 단지 浪忠正公으로 전해올 뿐 어느 시대 인물인지 알 수 없다. ‘朝鮮氏族統譜’에는 “浪氏는 중국 江蘇省 揚州에서 왔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일설에는 明나라 때 兵部侍郞을 지낸 浪礎라는 사람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고 등주(登州)에 유배 되었다가 禍를 피해 조선조 인조 때 배를 타고 건너 왔다고 전해진다.
32. 盧 氏
우리나라 노씨는 노수(盧穗)를 都始祖로 한다. 그는 중국 唐나라 때 范陽 출신
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신라 효성왕 때 安祿山의 난을 피해 아들 9명을 데리
고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평안도 定州에 정착 하였다가 龍岡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谷山盧氏. 光州(光山)盧氏. 交河盧氏. 萬頃盧氏. 新昌盧氏. 安康(慶州)
盧氏. 安東盧氏. 延日盧氏. 長淵盧氏. 豊川盧氏. 海州盧氏등 대부분이 盧穗의 후
손이다.
33. 魯 氏- 미상
중국 殷나라 太師 箕子가 8백 義士를 데리고 온 성씨 중의 한분으로 여러 번의 변란을 겪으며 鼻祖의 이름이나 官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魯氏는 周나라 때 周公의 아들 伯禽이 魯候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魯’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魯氏는 江華. 廣州. 密陽. 咸平 등이 있는데 모두 同祖, 同 源이다.
1) 周나라 때 周公의 아들 伯禽이 魯候에 봉해진 사실이 있는가?
34. 開城路氏
노씨(路氏)는 중국 내황(內黃)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노(路) 땅에 봉해진 황제(黃帝)의 후손이 지명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된다.
시조 路門儆. 원래 元나라 翰林學士인데, 고려조 공민왕 때 魯國公主를 배행하여 東來, 開城에 정착 하였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開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 계를 이어왔다.
35. 喬洞雷氏- 미상
본관喬洞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귀양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朝 鮮氏族統譜’에 따르면 雷氏는 본래 中國姓氏라고 한다. 동래 시기는 알 수 없다.
36. 江陰段氏
遠祖는 段一河. 중국의 延安城 江陰縣사람으로 明나라 헌종조에서 內院直閣을 지냈고, 뒤에 魯의 領詔使가 되었다. 그의 4세손 段萬里가 壬辰倭亂때 摠兵將으로 왔는데, 그때 그의 아들 段希詳이 함께 왔다. 江陰段氏는 段萬里를 중시조로 섬기는데, 江陰은 황해도 김천군에 있던 지명이다. 段氏는 稀姓임에도 10여개의 본관이 있는데 ‘汎段氏大同譜’를 작성하고 있어 본관이 하나로 통일될 전망이다.
단씨(段氏)는 본래 중국 경조(京兆: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의 후손이 이름자인 단(段)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1) 延安城 江陰縣은 지금의 어디인가?
2) 중국 경조(京兆: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되었다고 하니 그곳을 추적해 볼 것.
37. 端 氏- 미상
端氏는 韓山 단본으로 옛 文獻에도 보이는 성씨이다.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端氏는 본래 중국성씨라고 한다.
38. 密陽唐氏
시조는 唐誠. 본래 浙江省 明州人으로 元末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李成桂의 조선왕조 창업을 도운 開國功臣으로 태종 12년 嘉靖大夫 恭安府尹이 되었고 密陽唐氏로 賜貫 되었다.
당씨(唐氏)는 중국 진양(晋陽 : 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도당씨(陶唐氏 : 제요를 일컬음)의 후예(後裔)가 당(唐)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39. 密陽大氏
시조는 大仲象. 원래 唐나라 장군으로 말갈족을 통치하였으며 震國公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大祚榮이 渤海를 세워 228년간 왕권을 유지하였는데 契丹에게 멸망하자 哀王의 아들 大鐸이 자손을 이끌고 密陽에 와 정착하였다. 한편 渤海가 망하자 후손 大光顯이 고려에 투하하여 王氏(太氏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를 下賜 받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40. 星州. 八莒. 星山都氏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 계(都 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 계(都 稽)의 후손 도 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재위기간 : BC 32~BC 7) 때 고구려(高 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 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도씨는 聖州. 聖山. 八莒(지금의 漆谷)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同祖 同源이다.
41. 順天陶氏
시조 陶球元은 원나라의 進士이다. 駙馬都尉로 元세조 2년, 곧 고려 충렬왕 22년에 원(元)의 賓塔實憐 공주의 陪臣으로 우리나라에 와 순천에서 눌러 살았다.
「순천도씨김포세보(順天陶氏金浦世譜)」에 의하면 순천 도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인 도 단(陶 丹)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도 간(陶 侃 : 257-332)이 진(晋)나라 무장(武將)으로 진(晋)왕조가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統 一)하는 데 훈공을 세웠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 로 유명한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무장 도간(陶 侃)의 증손(曾孫)이다.
42. 固城道氏- 미상
道氏는 중국 성씨로 고성 단본인데, ‘陶谷叢說’ ‘典故大方’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다.
도씨(道氏)는 한(漢)나라 때 중국 여음(汝陰 : 지금의 안휘성 영주지방)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도씨(道氏)의 연원(淵源)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발견된 성씨이나 자료가 충분치 못하다.
43. 南原獨孤氏
先祖 獨孤共舜은 원래 중국 하남성 남원(南原)출신으로 고려 중엽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하여 정착 하였다. 일세조 獨孤信은 고려조 충숙왕때 유명한 학자로 남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독고씨(獨孤氏)는 중국 고양(高揚 : 지금의 직예성 보정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남원(南原)․광릉(廣陵 : 중국)을 비롯하여 나주(羅州)․황주(黃州)․의주(義州) 등 다섯 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한다.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 말엽에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해 정착세거(定着世居)한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44. 廣川蕫氏
시조 동승선(董承宣) 한무제(漢武帝) 때의 대유(大儒)로 광천백(廣川伯)에 봉해진 蕫仲舒의 43세손으로 고려말에 接慰使로와 卜地하게 된 蕫承宣으로부터 비롯 됬다. 廣川은 董仲舒의 고향으로 중국의 하북성에 있다.
그런데 광천동씨(廣川董氏)에는 동승선의 후손 외에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도진사(都眞使)로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명장(明將) 동일원(董一元)의 후손이 있다. 동일원은 명군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따라 종군했던 아들 대순(大順)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후금(後金)의 난>이 일어나자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45. 東 方 氏- 미상
동방씨(東方氏)는 중국 제남(濟南 : 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나왔다고 하여 동방(東方)을 성(姓)으로 삼은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東方씨의 중시조는 조선조 정조때 문과에 급제, 典籍을지낸 東方淑으로 알려졌다.
46. 杜陵杜氏
두씨(杜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경조(京兆 : 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시작 된다.
1) 杜慶寧系 : 중국 북송 太宗 때 兵部尙書를 지냈다. 왕위계승 문제로 직언과 극간을 하다가 蘇州刺使로 좌천되어 가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古群山列島에 표착 하였다. 杜陵은 지금 의 全北 金堤郡 만경면을 말한다.
2) 杜喬林系 : 杜喬林의 아들 杜師忠이 壬辰倭亂때 李如松장군을 따라 구원군 으로 와 활략한 뒤 그 아버지를 시조로 삼고 정착했다.
47. 上谷麻氏
중시조는 麻貴. 明나라의 大將軍 兵部尙書로 선조 30년 丁酉再亂 때 구원병을 이끌고 온 明나라의 제독이다. 관향인 上谷은 河北省에 있고, 시조 역시 遠祖인 回回國王 麻立으로 하고 있다.
1) 上谷은 河北省에 있다고 하니 확인 할 것.
48. 萬 氏- 미상
萬氏는 보통 壬辰倭亂 때 援兵으로 왔던, 明나라 經理使 萬世德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그 이전부터 나타난다.
만씨(萬氏)는 중국 부풍(扶風 :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한(漢)나라 명제(明帝 : 후한의 2대 왕, 재위기간 : 58-75) 때 28장군(將軍)의 한 사람인 만 수(萬 修)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49. 忠州梅氏- 미상
梅氏는 忠州 단본이다.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에 “ 梅氏는 본래 중국 山東성 濟南府 출신인데, 梅氏를 賜姓받고 관향을 忠州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대 인물로는 조선조 중종 때 黃澗사람인 梅漢孫이 있다.
50. 新昌孟氏
시조 孟軻는 유명한 亞聖 孟子이다. 그의 50세손 孟尤鉉이 고려 원종 때 國子監을 지냈으며, 그의 셋째아들 孟理가 門下侍中을 지낸 뒤 그의 아들 依가 조적(曺頔)의 亂으로 공을 세워 新昌伯에 봉해져 본관을 新昌으로 삼았다. 新昌孟氏는 孟子를 시조로 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출세한 후손 중 孟理를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있고 있다.
51. 西蜀(延安)明氏
시조 明玉珍. 중국 隨州사람으로 元 순제 23년 (고려 공민왕 12년) 成都에서 大夏를 세워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 明昇이 嗣立, 왕통을 이었으나 朱元璋의 신흥 明나라 군세에 밀려 나라가 망하고 공민왕 21년 어머니와 함께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 뒤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태조가 그를 華蜀君에 봉했다. 후손들은 중국 四川省에 있는 西蜀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西蜀明氏와 同祖同根인 延安明氏는 延安에 세거하며 蕃行하게 된데서 연안을 관향으로하는 후손도 있게 되었다.
52. 毛 氏 -미상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라고 한다.
모씨(毛氏)는 중국(中國) 서하(西河 : 지금의 산서성 하동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아들을 모(毛)에 봉하여 모(毛)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헌(文獻)에 나타는 모씨(毛氏)의 본관(本貫)으로는 광주(廣州 : 중국 산동성)를 비롯하여 서산(瑞山)․김해(金海)․공산(公山 : 공주의 별호)이 전한다.
53. 咸平牟氏
모씨(牟氏)는 본래 중국(中國) 평양(平陽 : 지금의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며, 고대(古代) 축융(祝融)의 후예(後裔)가 고을 이름을 성(性)으로 삼은 것이 시원(始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시조는 牟慶, 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의하면 모 경(牟 慶)은 북송(北宋)의 휘종조(徽宗朝 : 북송의 8대 왕, 재위기간 : 1101~1125)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호북경서(湖北京西) 선무사(宣無使)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송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흠종(欽宗)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랐다.
고려 인종 4년 李資謙의 亂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平亂의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策勳되었다. 그 뒤 다시 우리나라에 와 平章事의 직첩을 받고 牟平(咸平의 옛 이름)君에 봉해졌다. 晋州牟氏도 咸平本과 同源이다.
54. 泗川睦氏- 미상
시조는 睦孝基. 고려 고종때 郎將同正을 지냈다. 고구려 영류왕 24년, 唐나라에서 파견되어 건너온 8學士중 한분인 睦種이 泗川睦氏의 先始祖라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뒤 경남 泗川에 살아, 그곳을 관향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형제 사이의 우애가 남달라 성을 睦氏라고 했다고 전한다.
55. 驪興閔氏- 미상
민씨(閔氏)는 중국(中國) 농서현(농西縣: 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系出)
된 성씨다.
始祖는 閔稱道. 고려조에 尙衣奉御를 지냈다. 閔氏는 본래 孔子의 제자 10哲의 한 사람인 민 손(閔 損 : 자는 자건(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使臣으로 왔다가 驪興(지금의 驪州)에 정착 하였다. 閔稱道의 先系와 대수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8세손 閔漬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오르고 驪興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驪興이 관향이 된 게 아닌가 여기고 있다.
56. 巨濟潘氏
시조는 潘阜. 南宋 사람으로 翰林學士를 지낸 뒤 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蒙古의 침입으로 燕京이 점령당하자 몽고군에 잡혀갔다. 고려 원종 7년 樞密副使 金方慶이 원종 遜位로 入蒙했을 때 세자(충렬왕)의 부탁으로 그를 데려왔고 이름도 阜로 고쳤다. 巨濟. 結成. 光州. 南平 등으로 분적 되었으나 단일본이다.
57. 班 氏- 미상
반씨(班氏)는 중국(中國) 부풍(扶風: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되었다. 班씨는 중국 고대 전욱(顓頊)의 후예, 또는 楚나라 사람 鬪班의 후손으로,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나 언제 우리나라에 왔는지 알 수 없다. 본관은 開城. 固城. 光州. 平海로 전해오고 있다.
58. 溫陽方氏
시조는 方智. 중국 河南省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 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문화사절로 와 薛聰과 더불어 예의를 강론하고 선교와 교육으로 ‘東方文敎의 宗’이라 일컬어졌다. 후에 方雲이 고려 태조조에 左僕射에 오르고 溫水君에 봉해져 溫陽方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59. 南陽房氏
시조는 房季弘. 고려조의 開國功臣이다. 중국 당나라 文昭公 房玄齡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 보장왕 奏請으로 우리나라에 온 唐의 8학사중 한 사람인 房俊의 9세손이다. 南陽은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하고 있다. 水原房氏 시조 房貞儒는 南陽房氏 시조 方季弘의 손자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방씨(房氏)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 8, 고구려 영류왕 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60. 邦 氏
중국 山西省 鴈門道代縣 출신으로 명나라 唐王때의 사람인 邦苞의 후손이 귀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근대 인물로는 우리나라 기독교사상 최초의 목사로, 기독교 초창기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邦基昌牧使를 들 수 있다.
61. 開城龐氏
시조는 龐斗賢. 원래 원나라 直省舍人으로 학사를 지냈는데, 고려조 공민왕 때 魯國公主를 배종한 육시랑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하여 開城에 정착 세거하였다.
62. 太原龐氏- 미상
시조는 방발(龐浡). 원래 중국 太原人으로 指揮都摠長을 지냈는데,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 세거 하였다고 한다. 년대는 미상.
63. 水原白氏
시조 白宇經은 중국 蘇州사람으로 황제의 후손인 白乙丙의 원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조에 僉議事와 吏부사서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신라 선덕왕 1년에 망명 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 때 中郞將을 지낸 白昌稷을 중시조로 하여 起世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백씨는 모두 同源을 이룬다.
64. 錦城范氏
시조는 范承祖. 중국 랑야(瑯琊)사람으로 元나라의 禮部侍郞으로 元의 계국(薊國)公主를 陪從하여 고려 충렬왕 때 왔다. ‘甲午譜’에 보면, 그는 우리나라에 올 때 程伊川의 易傳, 朱子의 四書集註, 百家禮說 등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는 錦城, 지금의 羅州에터를 잡아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65. 安州凡氏
시조는 凡永富. 선계는 중국 河南사람이며 시조 凡永富는 고려 우왕때 文化安集使를 지냈다고 한다. 관향은 安州 단본이다.
66. 黃州. 原州邊氏
都始祖는 邊呂. 宋나라 瓏西 사람으로 宋나라가 망하자 고려 때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 황주변씨와 원주변씨는 모두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1) 黃州邊氏 : 시조인 邊呂가 황해도 取城(지금의 황주)에 세거의 터를 잡았고 上將軍에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되고 있다.
2) 原州邊氏 : 시조 邊呂의 후손 중 邊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審陽路千戶侯 벼슬을 지냈는데, 그 손자가 원주변씨 시조인 邊安烈이다. 그는 공민왕비인 노국 대장공주를 陪行해 왔으며, 화려한 관직을 거쳐 刑部尙書가되었다.
67. 長淵邊氏- 미상
시조는 邊鏡.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門下習秘侯를 지냈다는 說, 신라 때 阿飡을 지냈다는 說, 고려 때 門下侍中을 지냈다는 說이 있다. 그의 후손 邊有寧이 고려 인종 때 淵城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다. 淵城은 長淵의 옛 이름이다.
68. 草溪(密陽)卞氏
시조는 卞庭實. 고려 성종조에 등과하여 門下侍中에 오르고 八溪君에 봉해졌다. 八溪는 草溪의 옛 이름인데 草溪는 경남 합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先系는 중국 唐나라 현종 때 禮部尙書를 지낸 卞源이다. 그는 唐帝의 명을 받아 “孝經”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 使臣으로 왔다. 卞庭實의 4세손이 密陽으로 移居하여 일부가 그 곳을 貫鄕으로 쓰고 있다.
69 沔川卜氏
시조는 卜智謙. 王建을 도와 3한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의 開國功臣이 됐다. 그의 선조는 중국 唐나라 翰林學士로 五季의 亂을 피해 배를 타고 건너와 唐津의 沔川에 도착하여 서해에 들끓던 海賊을 소탕,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70. 隴西丕氏- 미상
비씨의 본관은 ‘隴西’ 단본이다. 隴西는 중국 甘肅省에 있는 지명이다. 丕氏는 稀姓으로 약 4백년전 귀화한 성씨라고 한다.
71. 賓氏(壽城. 達成. 大邱. 靈光)
賓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魯나라의 賓牟賈가 공자를 섬겼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壽城. 達成. 大邱. 靈光은 동일본이다. 達成賓氏의 시조는 賓于光(宇光)으로 賓牟賈의 후손이다. 宋나라 말엽에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宋이 망하자 書籍 1만 7천권을 가지고 고려로 망명, 學風을 진작시켰다 한다.
1) 중국 역사에 송나라 말 한림학사를 지낸 賓于光(宇光)이란 분이 있는가?
72. 慶州冰氏
시조 冰如鏡. 明나라때 禮部侍郞, 內閣翰林을 역임했다. 조선조 세조때 사신으로 동래하여 정착, 世居하였다. 세조는 그에게 吏曹參議를 제수하고 慶州府院君에 봉하였다. 그 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慶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73. 靑州史氏
시조는 史繇. 중국 山東省 靑州출신이며 明나라의 開國功臣으로 禮部尙書를 지냈다. 그 후 明玉珍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받아, 공민왕 21년 망명해 와 林泉에 숨어 살다가, 누명이 벗겨져 明의 洪武帝의 초서로 지금의 파주에 世居터를 마련하고 그의 출신지명을 따라 靑州로 관향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74. 謝 氏 -미상
사씨(謝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우리나라에는 청(淸)나라 말기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山) 2본으로 전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다.
75. 孝令司空氏
시조 司空圖. 唐의 僖宗때 中書舍人, 禮部尙書를 지냈다. 黃巢의 난을 만나 일가족을 대동하고 동료 7학사와 함께 신라 효공왕 1년(897년)에 동래해 왔다. 翰林學士 출신으로 문한에 밝아 文昌候, 崔致遠과도 교우가 깊었다. 고려 충숙왕때 孝令君에 봉해진 司空仲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孝令은 경북 軍威에 있는 지명이다.
76. 南陽徐氏. 唐城徐氏
시조는 徐趕.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신라 문무왕 때 8학사의 한분으로 와 唐城(남양의 옛 이름)에 정착, 신라의 太師가 되어 남양군에 봉해졌다.
唐城徐氏는 南陽徐氏의 시조 徐趕의 13세손 徐得富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
의 후손 가운데 花潭 徐敬德같은 인물이 배출 되면서 독자적으로 계대를 이
어오고 있다.
77. 利川徐氏
시조는 徐神逸, 利川徐氏世譜에는 箕子의 40세손 箕準이 衛滿을 피하여 利
川 의 徐河城에 와 살게 됨으로써 地名을 따 姓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1) 達成(大邱)徐氏. 2) 峯城徐氏 3) 長城徐氏도 利川徐氏와 맥을 같이하며 다
같이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
1) 재확인, 신라에서 왔다는 학설이 있음.
78. 浙江徐氏
시조 徐海龍은 중국 浙江城 사람이다. 후손 徐鶴이 丁酉再亂때 都摠管으로 동래하여 공을 세우고 星州에 정착하여 살았다.
79. 西 氏-미상
1930년대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이다. 중국 淸나라 덕종 때 西拉布
와 몽고인 西林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귀화한 성씨로 보인다.
80. 安陰西門氏
시조는 西門記. 중국 河南省 사람으로 中郞將에 理政을 겸하였다. 그가 元나라 順帝때 侍臣으로 공민왕비인 大長公主를 扈從하여 와 공민왕으로부터 安陰君에 봉해졌다. 안음은 현재 경남 咸陽의 安義面이다.
81. 潮洲石氏
시조는 石星. 明나라의 戶部, 工部, 兵部尙書를 지냈다. 明나라가 淸에 망하게 되자 그의 차남 石在錦이 숙부인 參政公 石奎와 그의 손자와 함께 망명, 가야산 아래 星州에정착, 관향을 星州라고 하고 혹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 潮州石氏라 하였다.
82. 海州石氏
시조는 石星.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은 壬辰倭亂 때 구원병을 보내 우리나라를 도운 것으로부터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장남 石潭이 遼東을 거쳐 해주에 표착 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首陽君에 봉하여 해주를 賜貫 했다.
83. 忠州. 洪州石氏
시조는 石隣. 중국에서 왔으며 고려 의종 때의 庚寅亂에 西京郞將으로 발탁되었고, 명종 6년에 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헌 忠州石氏의 기초를 세웠다. 洪州石氏는 忠州石氏에서 분관 되었다.
84. 寶城宣氏
시조는 宣允祉. 명나라 明殿試策에 장원하고 文淵閣學士로 있다가 고려 우왕 8년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湖南按廉使로 제수 했다.
85. 太原鮮于氏
시조는 箕子. 鼻祖는 鮮于靖이다. 기자가 箕子朝鮮을 세우고 그 맏아들 松이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仲을 于山國에 봉하여 조선의 鮮자와 우산국의 于자를 따서鮮于씨로 바꾸었다. 기자가 중국 殷나라 成湯의 후손이라는 데서 그 출신지 太原을 관향으로 삼았다. 衛滿의 亂과 溫祚의 변에 선우씨가 화를 입을까 變姓하여 씨족이 寒微해 졌던바, 고려 문종조에 中書注書를 지낸 鮮于靖이 나오므로 중흥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86. 慶州偰氏
시조는 偰遜. 元나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7년 紅巾賊의난을 피하여 망명 귀화하여 富原侯에 정해졌다. 선조는 위그르 사람으로 偰輦河에 世居 하면서 偰氏로 창씨 했고, 太傳 偰克直이 그의 8대조가 된다. 귀화 후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87. 慶州葉氏
시조는 葉公濟, 宋나라 사람으로 송의 고종조에 급제 翰林學士에 올랐다. 宋.
蒙古간의 和議에 반대 7學士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潭陽에 정착 하였다. 潭
陽을 본관으로 하다가 慶州로 이적 하였다.
88. 昌寧成氏
시조는 成仁輔. 고려조에 中尹 戶長을 지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민을 다스리
는 豪族長을 뜻한다. 成씨는 본래 周文王의 아들 叔武의 후예라고 한다. 당나라
학사 成鏡이 우리나라에 와, 그 후손이 번창했는데 고려 때 成淑昌이 戶長副
正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成仁輔라고 한다.
89. 平山邵氏- 미상
시조는 邵雍. 邵氏는 召字가 변하여 이루어진 성이라 한다. 邵雍은 周나라 召公의 遠孫으로 潁川團 鍊推官을 지내고 新安伯에 봉해졌다. 世系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平山에 살면서 그곳을 貫鄕으로 삼고 있다.
90. 宋 氏
‘宋氏上系世譜’에 보면 우리나라 宋씨의 都始祖는 중국 唐나라에서 戶部尙書를 지낸 宋柱殷이라 한다. 언제 귀화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 후 7세 宋舜泰의 후손 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여산송씨, 은률송씨,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1) 礪山宋氏 : 시조 宋惟翊, 나라에 공훈이 많아 礪山君에 봉해지고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증 되었다. 여산송씨에서 新平宋氏. 楊州 宋氏가 파생 되었다.
2) 恩律宋氏 : 시조 宋天翊, 그 뒤 세계를 실전하여 그의 후손 宋大原을 시조로 하고 있다. 송대원은 判院事를 지냈고, 恩律君에 봉해졌다.
3) 瑞山宋氏 : 시조 宋文翊, 그뒤 세계를 실전하여 조선조에 顯信校尉를 지낸 宋而碩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 외에 金海宋氏와 龍城宋氏를 비롯한 대부분의 송씨가 도시조 宋柱殷의 후손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91. 南陽宋氏
시조는 宋圭. 당나라 말년에 翰林學士로 있다가 간신의 참소로 7학사와 함께 신
라에 와 吏部尙書가 되었다.
92. 舜 氏- 미상
舜氏는 1930년 국세조사대 처음 나타난 성씨로 중국 河東에서 系出 되었다. 본관은 林川, 坡州가 있다.
93. 延日. 光山承氏
시조는 承愷. 고려 정종 때 大將軍을 지냈다. 우리나라 承氏의 조상은 중국 東漢 명제 때의 琅琊사람인 承宮으로 衛大夫 成叔承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건초 1년, 왕망(王莽)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와 경북 延日에 터를 잡았다. 光山承氏도 承愷의 후손 이다.
광산 승씨(光山承氏)는「여지승람(輿地勝覽)」에 광주(光州)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靖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승 개(承 愷)로 전한다.
94. 南原. 密陽昇氏
시조는 昇信. 중국 元나라 말기에 夏나라를 세워 隴西王이 된 明玉珍의 후손이다. 2대 왕 明昇은 명의 傳友德 장군에 패하여 공민왕 21년에 망명 해 왔고, 조선조의 태종은 그를 華蜀君으로 봉했다고 한다. 昇信은 그의 네째 아들로 본래의 姓을 버리고 아버지 이름자인 昇으로 改姓 했다.
95. 浙江施氏
시조는 施文用. 明나라 무장으로 兵部侍郞을 지낸 施允濟의 아들이다. 그는 丁酉再亂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 遊擊將軍으로 陜川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후 그는 돌아가지 않고 星州에 정착 하였다.
96. 綾鄕(泰仁)柴氏
시조는 柴登科. 壬辰倭亂때 督陣將으로 왔고, 丁酉再亂때는 遊擊將으로 와서 싸움에 이기고 돌아갔다. 그뒤 明나라가 淸나라에게 망하자 그의 아들 柴植이 明의 遺臣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와, 전라도 泰仁에 눌러 살게 되었다. 綾鄕은 신라 때 태인의 관할 지역이다.
97. 居昌愼氏-확인요
시조는 愼修. 중국 宋나라 開封府 사람으로 神宗때 진사를 지냈다. 고려 문종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와 문종으로부터 후대를 받았고 숙종 때 參知政事를 지냈다. 중국의 愼씨는 본래 고대 黃帝의 후손으로, 楚 惠王의 아들 連이 愼縣이란 곳에 숨어 살면서 姓을 愼으로 고쳤다고 한다.
98. 靈山. 寧越辛氏- 미상
시조는 辛鏡.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올라 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先系는 중국 隴山의 寧州사람으로 唐나라 天寶 연간에 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 한다. 그러나 그 뒤 계서가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辛鏡을 시조로 삼아 起世하고 있다. ‘辛氏姓貫考’ 편에는 寧州가 중국에 없다며 귀화 성씨가 아니라고 변증 하였다.
99. 豊山沈氏
시조는 沈滿升. 중국 吳興(중국 절강성 북부, 태호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도시) 사람으로 고려 예종 5년 胡宗且, 劉載, 安愼之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와 풍산현에 정착 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淸宦職에 발탁 되었고 이어 尙書奉御, 太子詹事府詹事에 올랐다.
100. 竹山安氏(舊)
시조 安邦俊. 그의 아버지 李瑗은 원래 唐나라 宗室 사람으로 신라 애장왕 8년에 건너 와 개성에 살았고, 그의 아들 3형제는 李枝春, 李葉春, 李花春인데, 경문왕 때 왜구의 노략질을 토평한 공로로 安國之臣이라하여 안씨로 賜姓을 받았다. 장남 이지춘은 안 방준으로 사명 받고 竹山君에 봉해졌다.
101. 廣州安氏
시조 安邦傑. 竹山安氏(舊)의 시조 안방준의 동생으로 원명은 李葉春이었다. 고려 태조 조에 大將軍이 되었고 廣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17세손 安元衡은 竹山安氏(新)의 시조가 되었다.
102. 耽津安氏
시조는 安元璘. 고려 충혜왕 2년 문과에 올라 政堂文學 檢校中樞府使에 이르렀고 耽津君에 봉해졌다. 丙午譜 서문에 보면 耽津安氏는 順興安氏에서 계출되었다고 한다. 안원린은 중국 朧西사람으로 新羅에 와서 安國之臣이란 칭호를 받은 李椀의 16세손 이며, 그의 장남 安祐는 紅巾賊을 토벌하여 난을 평정 했다.
103. 太原安氏
시조 安萬世. 元나라 太原사람으로 典書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魯國公主를
陪從하여 동래, 정착 세거 하였는데, 공민왕 때 벼슬이 禮部尙書에 이르렀다.
104. 艾 氏-미상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애씨(艾氏)는 중국 天水에서 계출된 艾孔의 후예이다.
우리나라의 애씨의 연원에 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다.
105. 淸州楊氏
시조는 後漢 楊震의 43세손 楊起로, 元나라 金紫光祿大夫 中書省政丞으로 있을 때 고려 공민왕비인 노곡대장공주를 陪從하여 왔다. 그뒤 다시 元나라에 들어가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여 三韓昌國功臣 上黨伯에 봉해졌고, 淸州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楊氏는 同祖 同根이다. 멀리 중국 弘農(지금의 河南省) 출신 唐叔虞의 후손 伯僑까지 그 선계가 올라 가지만 우리나라는 淸州楊氏를 비롯, 密陽. 南原. 中和. 安岳 등을 관향으로 하는 楊氏가 大宗을 이루고 있다.
106. 通州楊氏
시조 楊福吉. 중국 通州 출신으로 明나라 9義士중 한사람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昭顯世子를 따라 동래하여 함께 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자 귀화, 정착하게 되었다.
107. 襄 氏-미상
襄씨는 본래 중국 周나라 莊公의 아들 襄仲의 후손으로 謚號를 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 襄氏와의 관계는 명확지 않다. 1960년 국세조사 조사에는
238명이 파악 되었다.
108. 慶興魚氏-미상
明나라 尙書侍郞 魚石奎의 손자 魚繼福이 함경도 경흥에 정착, 魚氏로 賜
姓 받았다고 전하는 문헌이 있다고 한다.
109. 咸從魚氏-미상
시조는 魚化仁, 고려 명종 때 戶長同正을 지냈다. ‘癸丑譜’에 보면, 咸終魚氏는
중국 馮翊縣사람인데 南宋 영종(高麗 명종 1년)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의 江陵
에 왔다가 뒤에 평안도 咸從縣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하였다.
110. 寧越嚴氏
시조는 嚴林義. 고려조에 戶部員外郞을 지냈고 奈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중국 漢나라 嚴子陵의 후손으로 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여러나라에 전파할 때 嚴林義를 正使로, 寧越辛氏의 시조인 辛侍郞을 副使로 파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嚴林義는 그 뒤 영월 땅 杏亭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寧越嚴氏의 시조가 되었다. 영월엄씨에서 분적한 尙州嚴氏도 있다.
111. 宜寧余氏-미상
시조 余善才, 宋나라 사람으로 諫議大夫로 있으면서 天子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미움을 사,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려 조정에서 宜春君으로 봉해졌다. 宜春은 宜寧의 옛 이름이다. 우리나라 余氏는 모두 宜寧 단일본이다.
112. 呂 氏
시조는 呂御海. 본래 중국 萊州 사람으로 唐나라 僖宗 때 翰林學士로 있다가 黃巢의 난을 피하여 신라 헌강왕 3년에 우리나라에 와 典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星州(星山)呂氏와 咸陽呂氏로 분관 되어 왔다. 그러나 兵火등으로 중간에 譜版을 잃어 世次를 확인 고증할 길이 없어, 고려 말에 三中大匡을 지낸 呂良裕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113. 谷山延氏
시조는 延繼苓. 고려조에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을 지냈다.
중시조는 延壽菖은 원래 중국 河南省 弘農사람이었다는 說이 있다. 고려 원종의 아들 忠烈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원세조 忽必烈의 딸 齊國大長公主와 정략 결혼을 당했다. 1274년 충렬이 왕위 계승을 위해 고려에 환국할 때 元의 門下大將軍의 직에 있으면서 齊國大長 公主를 扈從, 고려로 건너온 인물이 延壽菖이다.
114. 燕 氏-미상
연씨는 본래 百濟 8대성의 하나로 ‘北史’ 東夷傳 百濟國條 ‘三國史記’ 등에는 여러 가지 燕氏가 나타난다. 한편 燕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周나라 敬王 때 孔子의 제자 중 燕伋이 있었고 漢나라 昭帝 때는 倉이 있었는데 燕의 나라 이름을 姓氏로 삼았다고 한다.
115. 坡州廉氏-미상
시조는 廉邢明, 혹은 郊明이라고도함. 後唐 때인 五季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온 뒤 지금의 파주인 峰城에 터를 잡은 뒤 고려 태조의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三韓壁上功臣이 된 분이다. 坡州廉氏는 峰城, 曲城, 坡州 순으로 改貫 되었다.
116. 義興芮氏-미상
시조는 芮樂全. 고려 인종 때 門下贊成事를 지냈고, 문장과 덕망이 빼어난 碩學이었다. 그의 선대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 단정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山西省에 芮省이 있고 慶南 蔚州郡 川前里의 신라 花郞石刻에서 芮氏姓의 金石銘이 발견되기도 해서 부정 할 수도 없다. 義興은 경북 軍威郡에 있는 지명이다.
117. 吳 氏
오씨는 신라 지증왕 1년 중국에서 건너와 한동안 咸陽에서 살다 귀국한 吳瞻을 都始祖로하여 여러 파로 分籍 하였다. 吳瞻은 22년간 살다가 돌아가고 이땅에 남은 吳膺의 후손이라는 說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吳膺의 12세손 吳光佑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현손인 吳延龍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吳氏의 始原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고려 고종3년, 吳瞻의 23세손 吳守叔이 吳賢輔. 吳賢佐. 吳賢弼과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각기 海州君. 同福君. 寶城郡에 봉해졌다.
1) 海州吳氏: 시조 吳賢輔-咸平吳氏 ,羅州吳氏, 樂安吳氏, 三嘉吳氏, 義城吳 氏, 平海吳氏가 파생됨.
2) 同福吳氏: 시조 吳賢佐-軍威吳氏가 파생됨.
3) 寶城吳氏: 시조 吳賢弼-和順吳氏, 興陽吳氏, 長興吳氏, 全州吳氏, 咸陽吳氏, 荳原吳氏가 파생됨.
118. 海州吳氏
시조는 吳仁裕, 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해 海州에 터를 잡았고 성종조에 檢 校軍器監을 지냈다. 吳氏門中에는 이같이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海州 吳氏가 있다. 吳瞻과 吳仁裕간의 관계는 고증할 자료가 충분치 않다.
1) 延日吳氏: 吳仁裕의 6세손 孝成公의 큰아들 吳延慶을 시조로 하고 있음.
2) 蔚山吳氏: 吳仁裕의 6세손 孝成公의 둘째아들 吳延祉를 시조로 하고 있음.
119. 宜寧玉氏
시조는 玉眞瑞,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8년 교수 자격으로 건너온 8학사 중 한 분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조에 벼슬하며 詩書禮樂을 가르쳐, 그 공으로 宜春君에 봉해졌다. 고려 신종 때 倉正이란 벼슬을 했고 문 장이 뛰어났던 玉恩宗을 起世祖로 하여 관향을 宜寧으로 삼았다.
120. 鳳城(金溝)溫氏-미상
‘鳳城溫氏族譜’에 보면 시조는 叔虞라 했다. 중국 周의 16대왕 成王이 아우숙우(叔虞)를 溫國에 봉함으로 성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계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나라 봉성온씨의 시조는 平康公主와 결혼한 溫達將軍이다. 고려 공민왕 때 右部侍郞을 지낸 溫信을 中祖로 하고 있다. 鳳城은 전북 김제군 金溝이다.
121. 開城王氏- 미상
시조는 國祖 , 고려를 건국한 王建의 증조부가 된다. 開城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인데 족보에는 東陽君 王垣을 1세조로 기세하고 있다. 선계에 관해서는 멀리 중국황제의 후손으로 東來 하였고 그 뒤 箕子朝鮮 때 師士가 되어 王氏로 賜姓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22. 濟南王氏
시조는 王以文, 중국의 濟南府 章丘縣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鳳崗, 자는 岐陽인데 효종이 以文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丙子胡亂의 결과 鳳林大君이 瀋陽에서 돌아올 때 陪從하여 입국했다. 濟南府 章丘縣 常遠庄에서 나왔기에 후손들은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123. 海州王氏-미상
시조는 王儒, 중국 山東省 사람으로 고려조에 귀화하여 太祖 때 賜姓 되었고, 大相을 지냈으며 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始祖로, 海州를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 왔으나 그 수는 극소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