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서
"나의 병세가 심상치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마디 말은 전하여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구별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전족통일(全族統一)이라 함은 말로 주장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물론 극란한 일이오,
그러나 제일 먼저 주의할 것은 적어도 우리 광복사업에 헌신하려고
자처한 건전분자들은 지중(至重)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운 이상에는 환경의 어떠함을 물문(勿問)하고 다 한데 뭉쳐야 되겠오.
물론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별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사당 혹은 붕당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여하튼 우리도 이 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래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
독립운동은 우리의 제일 중대한 사업인 즉,
이를 기성코자함에는 하등의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못하게 됨이 사실이요.
바로 말하자면 즉 우리 민족의 체면이나 장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위험성을 가진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광복사업에 대하여 일호라도 이익있게 보이는 일은 다 실행하도록 주의 하여야만 되겠오.
이같이 말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즉 우리가 장래 우리 민족을 의하여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 먼저 기초되는 독립국가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오.
독립운동의 성패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문제이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에 성공코자 하면 우리가 통일적 행동을 하여야 되겠으며
단결되어 일하려면 독립운동이라 하는 전민족을 살리려는 대사업에 목표를 두고
이 일을 진행함에 사개인(私個人) 사이에 교분 혹은 감정관계의 어떠함을 일체 돌아보지 말아야 되겠오.
나의 말한 몇가지 일이 실해키에 어렵지 않음은 아니나 하려면 아니 될 것은 없고 잘 될 터이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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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자 성칠(聖七). 호 겸곡(謙谷)·백암(白巖)·태백광노(太白狂奴).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申耆永)·정관섭(丁觀燮) 같은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작성&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http://cafe.daum.net/kok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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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유언』
박은식(朴殷植)1859. 9. 30∼1925. 11. 1호: 백암(白巖)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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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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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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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이뤄지지 못해 서글플뿐입니다..
원주불꽃
04.03.16 19:33
님이시여...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사랑한다한국!
04.09.2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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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시여...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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