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제40호, 2017, 봄, 북랜드)
-특집, 이 작가를 주목한다
김희준
1963년 영천 출생. <<포항문학>>(1997) · <<수필시대>>(2014) 등단.
포항문인협회·보리수필문학회·청하(靑荷)문학회·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수필집 <<눈 내리던 밤>>(북랜드, 2017).
봄
감꽃
밤안개가 옅게 내린 삼경이다. 보름달이 하늘 가운데서 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닷새 만에 온 몸을 덮쳤던 살을 떨치고 건강함의 고마움을 새삼 느낀다. 그래 며칠 미뤘던 빨래를 이렇게 늦은 밤에 해치우고 있다. 마당에 있는 빨래 줄에 빨래를 넌다. 발밑에는 주인집 누렁이가 멀뚱멀뚱 날 본다.
난 어릴 때 강단은 있었지만 잔병치레는 유난히 많이 했다. 그 가운데 감기는 나의 병 손님 단골이요, 약방의 감초였다. 그러한 때 나는 두 가지 방식의 치료로 그것을 이겨내곤 하였다. 하나는 엄마 등에 업혀 이웃에 있는 시골 약방에 가 부지깽이보다 더 큰 주사를 엉덩이 양쪽에 울면서 맞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엄마의 마술로 치료하는 것이다.
칠흑 같은 밤에 엄마는 실로 꿰맨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별빛이 내려앉은 정화수를 긷고, 거기에다 밥 몇 숟가락을 푼다. 엄마는 나의 얼굴을 문지방 밖으로 내밀게 한 뒤, 짚을 내 목에 두른 다음 바가지를 턱밑에 바치고, 부엌칼로 나의 머리카락을 몇 벌 훑어 내린다. 부엌칼끝을 통해 그 바가지 물을 입안에 몇 방울 흘려준다. 그리고는 방문을 닫게 하고서 대문을 향해 벽력같은 고함을 친다.
"에끼! 이놈의 객귀들아! 썩 물러가라!"
그러면서 대문 밖까지 부엌칼을 땅에 던지는 소리가 어린 나의 가슴에도 생생히 전해졌다. 그러고 나면 열이 내리고, 신비하게도 감기가 뚝 나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난 이제 안다. 엄마의 그 마술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줄 안다. 그 만큼 난 모든 것을 신화의 베일에서 꺼내어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커버렸다. 그러나 난 이제야 내가 진정한 바보임을 또한 알겠다.
"친구야, 안녕! 난 방학을 양친이 계시는 시골의 녹음에서 보냈단다. …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 손마디가 더욱 거칠어지신 어머니…"
이것은 대학 일 학년 때 여름방학 마치고 학교신문에 투고했던 나의 편지 글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리고 겨울 방학이 왔고, 엄마는 동지 때 불공드리러 오봉산에 다녀왔다. 설날에 우리 가족은 아버님, 어머님께 세배 올리고는 하얀 눈을 뽀드득 뽀드득 밝으며 이웃의 어른들께도 세배 드리러 다녔다. 그 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을 때 엄마는 가슴이 몹시도 편찮았다. 엄마와 나는 대구의 동산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그 날 밤 나는 엄마에게 약속했다. 가슴이 다 낫는 날, 자식이 다니는 캠퍼스의 벚꽃을 구경하러 가자고.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노래지고 가슴이 답답하여 왔다. 한 달 뒤에 엄마의 기는 흩어져 태허(太虛)로 돌아갔다.
이제 엄마의 모습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땅 끝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난 외할매하고 울었다. 많이 울었다. 서러웠다.
그 해 오월 시골 정류소에서 바라본 새파랗게 장성(壯盛)한 보리밭은 한하운의 보리피리 가락이 되어 내 가슴에 강물로 흘렀다. 엄마는 조선의 마지막 여인이었다. 언제나 치마저고리에 비녀를 꽂은 정갈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병마사공(兵馬使公)의 효자각을 지키고 누대로 살아온 청주 양씨(楊氏)의 후예인 엄마에게는 장부의 기상이 몸에 서려 있었다.
엄마는 그 해 겨울에도 마을 앞 시냇물 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빨래했다. 깡깡 얼어붙은 세답(洗踏)을 방 귀퉁이에 늘면 큼지막한 아버지의 핫바지, 저고리에서 누렁암소 눈방울 같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곤 하였다.
뒷산 대숲에서 이는 바람소리가 멀리 파도 소리 같은 겨울밤이면, 우리 집 뒤안간 키 큰 감나무 꼭대기에선 부엉이가 날아와 울고, 그때 엄마는 부엉이 뒤에는 ‘호랭이’가 따라다닌다며 무서워하는 날 꼭 껴안아 주곤 하였다.
한 해 겨울 동지 때 엄마는 오봉산에 갔다가 어느 불심 깊은 신도가 어머니의 명복을 발원하는 공양으로 보시한 부모은중경, <<소원의 종-에밀레종>>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엄마는 그 책을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돋보기안경을 하고선 일제시대 때 시골 교회 야학에서 배운 언문 실력으로 낭랑히 읽어 내려갔다.
검정 색 무명 호청 솜이불 속에서 고개만 쏘옥 내밀고 지켜보는 나에게도 엄마는 읽어보라고 했다. 난 그 때 국민학교 이 학년의 어린 나이였는데도 무엇이 그리도 슬펐는지 그 책들을 읽고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내(城內)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작은누나가 주말에 집에 오면 엄마와 누나는 두런두런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엄마와 누나는 이야기 끝에 울고는 하였다. 그 때 엄마는 말했다.
"딸자식의 정은 봄눈이고, 아들자식의 정은 겨울눈이다."
중학교 때는 흙길 삼십 리를 자전거로 통학하였다. 그래서 잠은 언제나 잘 잤다. 꿈결에 누가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나의 볼에 뺨을 부비며, 진주보다 더 고귀한, 치렁치렁한 밤하늘의 별빛보다 더 고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도 모르게 흐느끼고 있었다. 칠흑 같은 그믐밤의 앞산보다 더 큰 무게를 이고 엄마의 몸은 거문고가 되어 저음으로 울고 있었다.
삼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멀리 도회지로 나가서 공부하게 되면 부모님께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하라고 하시며,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에게 받은 최초의 편지라며, 빛바랜 누런 봉투 한 통을 품속에서 꺼내 보여 주시었다.
"된장이 다 됐을 텐데 집에 와서 좀 더 가져 가거라……"
란 구절이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는데,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간 선생님께 보내신 것이었다.
툇마루 끝에서 다듬이질하며, 무어라 응얼대며, 세답돌 위에 올라서서 곱게 풀 먹인 세답을 꼭꼭 밟으며, 엄마는 처마 밑으로 보이는 신작로 끝 동구의 꿀밤나무 숲 너머로, 발뒤꿈치를 세우고 응시하곤 하였다. 대구에 가서 공부하며, 그렇게 멀리 객지에 나가 사는 형님, 누님들을 걱정하던 엄마에게 편지 한 장 하지 못했다. 막내인 나마저 나와 공부하니, 양친만이 사방 난달인 큰 집을 지키고 계심을 바이 알면서도 부모님께 문안 글조차 올리지 못했음을 지금에야 뉘우친들 어이 하리…… .
자취생활하며 있던 그 때 지독한 치통을 앓았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는지 몰랐다. 토요일에 시골집에 가서 그 얘기하니까 엄마는 그날 밤 꿈에 내가 보이더라고 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엄마는 언제나 우리 형제, 조카들의 책 한 권씩을 싸리 소반에 담아서 부뚜막에 올려놓고서는, 조왕신과 성주신 그리고 삼신할매에게 소지(燒紙)하며 치성 드린다. 그리고는 마당에 나가 동녘 하늘에 둥그렇게 떠오른 달님에게도 두 손 모아 절한다. 신기해하는 조카와 나에게도 절하라 하였다.
"달님에게 절하면 올 한해의 소원을 다 이룰 수 있단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영랑의 모란이 우리 집 우물가 화단에 가득 피면, 엄마는 그 고운 꽃잎을 내 작은 손바닥에 따 주곤 했는데…….
달포 전 대해일, 홍수가 나 집채만 한 물결이 굼실대어 건널 수 없는 저쪽 언덕에 어머님이 누님들과 같이 서서 이 쪽 언덕의 날 불렀다. 꿈이었다. 달력을 보니 내일모래가 어머님의 제삿날이었다.
난 이제 다른 사람의 선생 노릇을 하고 산다. 보름 전에 아끼는 나의 학생 철이의 어머니 상에 두 아이를 데리고 조문 다녀왔다. 돌아오는 동해면 도기야(都祈野) 바닷바람 세찬 일월동 그 언덕길이 그렇게도 쓸쓸할 수가 없었다.
내 잊지 못하는 오봉산 기슭에 묻혀 있는 노계(蘆溪)의 시조 한 머리가, 어제가 어버이날인 오늘 이 밤에 이리도 절절히 가슴에 맴도는 까닭은 무엇일까?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이 아니와도 품엄 즉도 하다마난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밤이 깊었다. 벌써 보름달이 서산 마루턱에 푸르게 걸려있다.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주말에는 시골 가서 꿀밤나무숲 너머 뽕밭머리 어머님의 산소를 둘러보고 와야겠다. 땀 절인 엄마의 살 냄새 묻어나는 옛집 장독대에는 젖빛 감꽃이 꿈처럼 떨어져 있을 거다.
*뒤안간: 집의 뒤뜰을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
*세답돌: 다듬잇돌
여름
옥룡암 기행
아침부터 내리는 몬순 기후의 장맛비가 몸을 청량하게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학교에 온 미국인 불자 선생님의 고물 차를 타고 경주로 갔습니다.
남산 옥룡암(玉龍庵)에 다다르니 암자 앞의 계곡물이 불어 있고, 삼단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소리가 제법 우렁찼습니다. 여울가의 바위에는 이끼가 물을 머금고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차장에 덩치는 토끼만하고 눈은 볼록 틔어 나온 갈색의 치와와 개 한 마리가 보이기에, 불러서 쓰다듬어 주었더니 발발거리며 우리를 암자까지 앞장 서 주었습니다.
안양교(安養橋) 돌다리를 건너니 푸른 단풍나무 터널 속으로 돌계단 길이 나 있고, 활짝 열린 대웅전 꽃살문 안으로 금빛 부처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법당에 들어 삼배를 올리고 좌정하고 명상에 들었습니다.
이윽고 점심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비가 잠시 그쳤습니다. 경내의 마애 조각들과 석탑이 있는 신라의 불적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밀교 사찰이 있었지만, 이제는 절터에 기와 조각들만 흙속에서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우리겨레의 ‘마야문명’ 유적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위벽에 새겨진 황룡사 구층 목탑의 처마마다 매달린 풍경들에서 ‘댕그랑 댕그랑’ 하고 맑디맑은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습니다. 닫집 아래의 부처님 머리 위에는 천인들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천상에서 지상으로 하강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비천상들을 신라인들이 새기고, 오늘 제가 천 년도 넘는 시간의 장막을 걷고 마주하노라니 가슴에 환희로운 느꺼움이 새록새록 일었습니다. 사자가 새겨진 바위 위에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가만히 앉아 한적한 시공 속으로 들어온 낯선 사람들을 미동도 없이 바라볼 뿐 이었습니다. 맑은 바람이 물결치는 대숲과 솔숲에는 수정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마애 조각 중에 나무 아래에 수행자가 앉아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득히 먼 숙세에 수행하던 나 자신의 모습처럼 다가왔습니다.
다시 법당으로 돌아와 선정에 들었습니다. 미국인 법우는 향 한 심지를 부처님 전에 공양 올렸습니다. 얼마 뒤에 한 무리의 사람이 암자로 왔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 아버지 손잡고 따라온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명상 수행을 하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외국인이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음이 천진하고 생기가 넘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바로 천사이고, 부처님임에 분명합니다. 계곡에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 미묘하고 매끄러운 음성으로 지저귀는 숲속의 새 소리, 넓적한 보리수 잎사귀에서 새파란 이끼 깔린 땅바닥으로 후드득 지는 빗방울 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끊임없이 불룩하였다가 가라앉는 아랫배와 들숨 날숨을 알아차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조금 전에 했던 대화 주제가 머릿속에서 이어지다가, 다시 호흡을 알아차렸습니다.
밤낮으로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아뢰야식의 작동을 잠시 멈추고, 여여한 시공간에서 몸과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었습니다. ‘나’라고 이름 하는 존재는 들숨과 날숨의 사이에 잠시 머물며 심신을 정화하였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참선을 마치고 법당에서 일어나 일로향각(一爐香閣) 툇마루에 앉았습니다. 추녀 끝 연꽃잎을 닮은 암막새 기와 끝으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시공을 응시하였습니다. 단청을 입힌 서까래 아래의 법당 문설주에 기대서서 바깥을 내다보는 키다리 미국인은 이대로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호젓한 명상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이날은 사진기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조화옹은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면서 우리를 그 속에 그려 넣었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서 옥룡암 단풍나무 숲길을 걸어 나와 이웃하고 있는 보리사로 갔습니다. 남산의 부처님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신라의 옛 부처님입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고 중생을 반겨 맞아 줍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들이 조각한 미려한 대리석 석상들보다, 강철보다 더 견고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 얻은, 천 년의 세월 저 너머에서 신라의 석공이 빚어낸 천진무구하고 천의무봉한 저 미소를 나는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그 앞에 서면 제 마음은 한 오라기도 남김없이 무장해제 되고 맙니다.
장맛비에 돌계단이 허물어져 있어도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절 경내는 여전히 정갈하고 단아하였습니다. 인적이 없는 마당을 돌아 솔숲 아래의 비탈로 올랐습니다. 온화한 부처님의 미소를 우러러 뵙고서 합장 배례하였습니다. 뒤로 돌아서서 광배에 새긴 약사여래 부처님을 또 뵈었습니다. 일천이백여 년의 풍상을 그렇게 다사로운 미소를 머금고 앉아서 견디고 참고 기다려야 하는 이 사바세계,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고해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중생들을 말없이 자애롭게 맞이하여 주시는 남산 자락 여기 이 부처님을 뵈올 수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한없이 행복하였습니다. 이승에서도, 꿈에서도, 그리워도, 뵙지 못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저는 여기 보리사 부처님 얼굴에서 만납니다.
한 부부가 다가와 부처님 전에 나란히 서서 합장하고, 두 눈을 감고 가슴 속 올망졸망한 바람들을 기원하였습니다. 절 마당의 세 그루 늠름한 낙락장송이 마치 삼보를 보여주는 듯도 하였습니다. 시선은 비안개 자욱한 짙푸른 들녘 저 너머,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의 왕릉이 있는 낭산과 진평왕릉 쪽으로 가 닿았습니다. 달밤의 진평왕릉은 고도 월성(月城)의 제일경이라고 경주를 아는 사람은 말한다고 하지요.
비구니 스님들이 참선하는 공간, 적묵당(寂黙堂) 앞을 지나서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의 아담한 옛 탑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천년의 세월에 고탑은 모서리마저도 부드러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범종각 앞을 지나 절 마당을 걸어 나오자니 빗물에 아직도 지지 않은 하얀 치자꽃 두 송이가 보였습니다. 코를 벌름대며 다가가니 향기가 아직도 진하였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씀대로 과연 향기는 비에도 젖지 않았습니다.
평생 불교학자로 살았던 불연(不然) 거사의 추모비가 주차장 곁에 있었습니다. 이 분은 신학을 공부하러 벨기에로 유학 갔다가, ‘그대 나라의 원효를 아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부끄러이 여겨서 그 길로 원효 스님을 공부하였습니다. 지도교수는 가톨릭의 신부님이지만 세계적인 불교학자이고 불자로 자부하였다고 합니다.
이윽고, 서출지(書出池)에 이르자 이요정(二樂亭)은 텅 비어 있고, 못 둑에는 백일홍이 짙붉게 피어나 있었습니다. 보름달처럼 둥근 못에는 만개하여 풍염한 연꽃송이, 채 피지 않은 합장한 모양의 꽃봉오리들이 둥글고 넓적한 연잎 위로 점점이 곧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짙은 향기가 청풍에 묻어났습니다. 둥근 연잎마다 새맑은 빗방울이 수정구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었습니다. 고려 말의 유종(儒宗), 목은(牧隱) 선생이 벗인 나잔자(懶殘子) 스님을 찾아가며 빗속에서 읊은 시 한 머리가 제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습니다.
아침에 비를 마주하노라니 흥취가 담박하여
홀로 남쪽에 있는 못에 가서 연꽃을 감상하고 싶네.
다만 두려운 것은 천태의 절이 가까워서
시 읊는 소리에 놀라 지관(止觀)의 참선을 깨뜨림이네.
비안개 자욱한 들녘을 지나서 불국사 앞에서 천둥소리를 내는 배를 비빔밥으로 채웠습니다. 한 끼 밥을 같이 먹는 우리는 숙세의 무슨 업연으로 그렇게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나긴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오늘은 또 하나의 인연을 낳는 찰나이겠지요.
주말에는 미국인 벗은 어머니 아버지와 형제가 기다리는 몬타나의 그리운 고향 집으로 한 달 간의 휴가를 떠난다고 합니다. 어제는 여름 장맛비가 녹색 물감을 풀어 내 몸과 마음에 시원한 여백을 그려 넣어준 날이었습니다.
가을
능금밭
저녁밥을 먹으면서 아내가 부엌의 쌀자루가 바닥을 드러내었다고 말해 주었다. 주말 오후에 고향으로 갔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논이 있고, 우리 논을 소작하는 이웃이 학교 위의 방앗간에다 땅세로 주는 나락을 쌓아 두고 있었다. 나락을 찧고 나서 어릴 적 동무가 살던 집이 있는 윗마을로 차를 몰아 느긋한 마음으로 올라 가보았다.
국민학교 시절 그토록 멀기만 하였던 동무들 살던 마을이 이제는 지척에 있었다. 탄산가스가 목구멍을 톡 쏘던 '애플사이다' 한 병을 사서 누나들이 싸준 김밥과 함께 가방에 넣고 행렬 지어 소풍 가던 길이었다. 까마득히 높이 솟고 병풍처럼 마을들을 감싸고 있던 사룡산(四龍山)의 허리를 관통하는 고속철도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십여 년 전부터 채석장이 들어서서 허옇게 뼈를 드러내며 헐린 산의 몸을 사람들은 말은 없어도 모두 안타깝게 여겨 오던 터이었다.
학교도 오래 전에 폐교가 되고 우리들이 공부하던 교실은 자취도 없이 헐리고, 당번할 때 선생님 책상 위의 꽃병에 꽂을 꽃을 꺾던, 붕어와 개구리가 깃들어 살던 연못은 메워지고, 사환 누나가 치던 종도 교무실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공기며 고누놀이를 하며 놀던 우리들을 지켜주던 그늘 드넓은 플라타너스나무는 베어지고 없었다. 나무가 얼마나 크던지 나는 아직도 그만큼 큰 나무를 본 일이 없다. 어머니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지켜보던 운동회날 달리기하던 넓었던 운동장은 갈아엎어져 농작물을 파종한 밭이 되어 있었다. 무상한 시간에 유정한 세월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는 웃을 때 입가가 위로 올라가던 영목이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호랑이 이야기를 잘 해주던 덕만이가 살던 마을이고, 조금 아래의 능금밭은 병근이와 병조 사촌 형제들이 살았다.
먼저 학교에 다니던 누나들과 형으로부터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매를 드시고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말을 들은 나는 속내를 털어놓지도 못하고 학교에 입학하는 날이 더디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코흘리개 일 학년에 입학하자, 아버지보다도 더 인자한 웃음을 만면에 머금고 까칠한 턱수염으로 우리들의 얼굴을 부비 주고, 연필을 깎아주고, 빨간 색연필로 받아쓰기 공책에다 소라껍질 같은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날마다 쳐주시던 할아버지 선생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첫여름 소나기가 내리던 아침, 우리 교실에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능금밭에 살던 병조와 병근 형제가 노란 장화에 노란 비옷을 입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 멋진 옷과 신은 난생 처음 보았다. 나는 그들과 단번에 동무가 되고 말았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뽕나무 잎사귀가 짙어졌다. 어느 날 오후 학교 공부가 끝나는 대로 나는 병조와 병근, 이 멋진 사촌 형제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였다. 학교 가까이에 있는 집에 오니 어머니가 동무들을 반겨 맞아 주었다.
기와지붕 초가지붕 열대여섯 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감나무 숲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내가 태어나 일곱 해를 살던 세계의 전부이었다.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땅거미가 마을로 밀물처럼 내려오면 뒷산에서 들려오는 멧비둘기 소리가 석양에 구슬펐다.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수런수런 잠자리에 들던 대숲이 한없이 넓었다. 자고 나면 젖빛 감꽃이 마당에 비처럼 뿌려져 있었다. 해와 달이 뜨고 무지개 걸리는 산 너머엔 누가 사는 어떤 곳인지 늘 궁금할 뿐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병조와 병근이가 막내가 학교에 가서 데리고 온 이웃마을의 첫 아이들이었다. 이 귀한 손님들을 엄마는 반갑고도 정성껏 대접하였다. 암탉이 낳은 따끈한 훈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달걀을 삶고 맛있는 쌀밥을 지어주었다. 우리들이 올 줄을 미리 알고 계셨던 듯이 질금을 달여 단술을 금방 만들어 주었다. 담장 가에 서있는 늙고 키가 큰 뽕나무가 선사하는 검은 오디를 한 그릇 따다 주었다. 달콤한 물을 가득 머금은 오디를 우리들은 입가에 검은 물을 들인 채 먹으며 깔깔대고 웃고 이야기하였다. 병조와 병근이의 얼굴은 보얗고 볼에는 홍조를 띠고 보조개가 귀여웠다. 목소리는 석양에 타는 붉은 빛깔 능금을 닮아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앞산에도 들녘에도 성큼성큼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을 몰고 올 때였나 보다. 토요일 오후 학교 끝나고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윗마을 병조와 병근이가 사는 능금밭으로 갔다. 넓고도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미루나무가 서있는 냇가에 이르렀다. 징검다리를 밟으며 한없이 맑은 물이 흐르는 넓은 시내를 건넜다. 그리고 사립문을 지나서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능금밭으로 들어섰다.
연초록 잎사귀의 물결이 늠실대는 능금나무 가지마다, 나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의 손길이 내미는 곳마다 병조와 병근이의 홍조 띤 볼보다 더 붉은 능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능금나무 숲 속에서 일꾼들의 말소리는 들려와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능금이 지천으로 열려 있었다. 능금밭 가운데에는 병근이와 병조가 살고 있는 커다란 집이 있었다. 호랑이와 사슴, 뱀과 개구리가 평화스럽게 함께 살고 아담과 이브가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에덴동산이 이러하였을까?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복숭아밭이 있는 계곡을 노닐고 와서 화원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그러하였을까? 어부가 복사꽃 흘러내리는 시내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돌문을 지나서 전쟁도 굶주림도 병고도 없고 불로장수하는 사람들이 사는 무릉도원에라도 온 듯하였다.
병근이 어머니가 나와서 나를 반겨 맞이하여 주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에 무엇인가 알지 못할 수심이 드리워져 있음이 나의 어린 눈에도 읽혀졌다. 능금밭 샛길에서 능금나무 가지를 잡고 서서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묻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에게 말하였다. '얘야! 다음에 다시 오려무나! 내가 병이 다 나으면 너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하여 주마…… .'
그 드넓은 능금밭에 서 있어도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주렁주렁 달린 능금들을 보아도 하나도 먹고 싶지 않았다. 병조와 병근이와 같이 있어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힘없이 능금밭을 되돌아서 걸어 나왔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냇가에 외로이 서있는 미루나무 곁을 지나서, 그 넓고도 머나먼 흙길을 책가방 메고 혼자서 맥없이 대숲 아래 엄마가 있는 집으로 걸어왔다. 엄마가 누구 집에서 놀다 왔느냐고 물어도 나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지은 저녁밥도 많이 먹지 못하고, 멧비둘기 구슬피 울고 새들이 대숲에서 수런수런 잠자리에 들 무렵, 나도 지쳐 잠들고 말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능금밭 울타리의 탱자들이 노랗게 물들고 능금이 석양빛을 토할 무렵 병근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 해쓱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병근이가 나타났다. 까칠한 턱수염이 시커멓고 인자한 얼굴의 우리 반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병근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나는 한마디도 병근이에게 말을 걸지 못하였다. 그 뒤로 병근이의 얼굴은 풀이 죽어 있었고 병근이의 몸에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봄이 오고 새 학년이 시작될 무렵, 병조는 야속하게도 대구로 전학 갔다. 병근이와 나는 그 뒤로도 오래 같이 학교를 다녔다. 병근이 편으로 전학 간 병조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때때로 능금 같은 얼굴에 보조개가 살포시 깃드는 병조의 얼굴이 떠오르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번도 병조를 만나지는 못하였다. 병근이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가서 공부하면서 오래도록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승의 같은 하늘 아래 서로가 깃들어 사니 나이가 들면서, 장가를 가고, 부모가 되고, 또 타관의 낯선 땅 낯선 물가에 살수록 옛 동무가 그리워진다.
고속철도 터널 공사가 한창인 구룡산(九龍山) 아래 마을의 병조와 병근이가 살던 능금밭은 자취도 볼 수 없었다. 능금나무들은 모조리 뽑혀나가고 갈색으로 말라버린 포도덩굴들만이 스산하게 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 옛날 병근이와 철규가 위험한 줄도 모르고 낭낭 꼭대기 까치집을 뒤지러 올라갔던 고압 전선 철탑만이 샛바람에 윙윙 소리를 내며 예대로 하늘 높이 치솟아 있을 뿐이었다. 능금밭 터 한 가운데 내 어린 날 병근이 살던 집터에는 새로 지은 이층 벽돌집이 서있었다. 저 집에 가면 지금도 동무가 살 것 만 같고, 씻은 듯이 병이 나은 병근이 엄마가 나와서 서른다섯 해 전 '네가 다시 오면 맛있는 것 많이 해주마.'하고 약속한대로 반겨 맞아 주실 것만 같았다. 쌀자루를 실은 차를 길가에 버려 둔 채, 나는 병근이네 집으로, 능금밭 속으로 몽유병자처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층집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서 창문을 두드렸다. 병근이의 늙은 아버지가 포도밭 일을 하시다가 누구냐고 묻는다. 젊은 어머니가 나와서 아들 친구라며 반겨 주었다. 하지만 동무가 없는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병근이와 병조의 전화번호만 물은 채로.
운전을 하며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옛 학교 대문을 지나서 대숲 아래 무너진 내 살던 옛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외갓집 대나무 울 너머 산비탈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무덤이 보이는 언덕으로 나의 눈길이 채 머물기도 전에 차는 아스팔트길을 바람처럼 내달렸다.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처럼. 두보는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읊었건만, 산천도 부서지고 능금밭도 황량하게 변하고 말았다. '동무'라는 말이 '친구'에게, '능금'이란 말이 '사과'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 것처럼, 어릴 적 내 동무들도 엄마도 나의 마음속에서 신기루처럼, 엄마가 저녁밥 짓는 굴뚝의 저녁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아득하기만 하였다. 시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그리운 시절이.
집에 온 나는 저녁밥을 먹자말자 서른다섯 해 전 국민학교 일학년 시절 그 능금밭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병근이 나다. 희주이다!'
'머? 희주이라꼬?!'
‘……’
'음식집 빨간 지붕 집이다!'
(*분량 때문인지 이 작품은 <<문장>> 편집 과정에서 빠졌다.)
겨울
눈 내리던 밤
교장 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는 아침부터 축복이라도 하듯이 눈이 내립니다. 눈이 드문 포항에 겨울이 다 가도록 오지 않던 눈입니다. 퇴임식이 끝나고 점심을 동료 교사들과 같이 먹고 모두들 설을 쇠러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한 시간은 다가오는데 눈발은 하늘에 분분하게 날렸습니다. 낡은 외투를 입고 우산을 받쳐 들고서 문방구로 갔습니다. 편지지를 사려고 말입니다. 중년의 주인은 책상 위에 논어를 펼쳐 놓고 선 채로 묵독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구절을 그는 그 때 읽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어 허두의 그 유명한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벗이 있어서 천리 걸음 멀다 않고 찾아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저녁을 같이 먹는 동안 눈이 제법 쌓이더니 밤이 깊어지고, 길 위의 차들은 미끄러지고 거북이걸음이 되었습니다. 대숲에 눈이 내리고 처마 끝에서 눈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백합 법우님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명멸해 간 찰나 속의 우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담긴 작은 액자와 감사의 편지를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대를 통하여 그대같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와 불교를 배웠노라.'고 하며 '앞으로 다시 만나 같이 하이킹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쪽지 끝에 내가 지어준 한국 이름을 그 동안 익힌 한글로 또박또박 쓰고, 평소에 독송하라고 내가 권해준 빨리어 경전명인 '메따(Metta)'를 써서 주었습니다.
백합 법우님은 멋진 우리 옷 외투와 티베트로 가는 칭장(靑藏)열차 속에서 먹을 곶감을 선물하였습니다. 딸을 걱정하는 자애로운 엄마처럼 말입니다.
저는 연꽃 씨앗이 들은 목걸이와 닥종이에 꽃잎이 무늬 놓아진 편지지와 편지 봉투 한 첩, 영문판 불교 잡지 그리고 여행 중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쓸 수 있도록 먹물이 들은 붓 한 자루를 건넸습니다. 연밥 목걸이는 절에서 산 것입니다. 군항과 벚꽃 축제로 이름나고 섬이 그림처럼 떠 있는 남해 바닷가의 항구에서 가진 교사 불자 연수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입니다. 요사채 앞의 샛노란 수선화가 가랑비에 젖으며 피어나던 작년 봄 서울 도반들과 함께 기림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호진 스님의 법문도 듣고 새벽 예불에도 동참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차를 마시며 찻잔이 자연미가 있어서 좋다고 한 일이 기억나고, 추석 연휴에 지리산과 화엄사에 갔다가 나를 위해 작설차 한 통을 선물해 준 일이 고마워서 새로 연 미술관에 그제께 갔다가 산 까만 토기 찻잔과 연꽃 받침도 건넸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고향집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과 사촌들과 조카들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내가 법륜 스님과 같이 고구려 발해 독립운동 유적지로 역사 기행 갔던 만주 벌판처럼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말이 뛰노는 잔디밭이 있는 집과 강물과 호수가 있는 목가적이고 한적한 아이오와의 고향집이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해맑게 자라던 열 살 무렵의 어린 자신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편지 쓰고 선물 준비하느라 급히 나오며 잊어버린 예순 네 장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저녁 먹고 우리 집에 와서 건넸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삼백 예순 날, 내가 안내하며 같이 다녔던 곳의 사진들입니다.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에도 같이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촬영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그에게 짐이 무거울까봐서 저녁 먹을 때 가져가지 않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대형 사진도 짐을 고향으로 부치지 않았다고 하여 건넸습니다. 어제께 사진관에 갔다가 저와 친한 사장님께 부탁하여 우연히 구한 것입니다. 청춘의 한 때에 좌절하여 폭풍우 치는 알래스카에서 한 철 여름을 보내고,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어 아시아를 떠돌며 외로워하는 불심 깊은 그에게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언제까지나 함께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칠백 년 만에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보러 그와 나는 동시를 쓰는 내 고향 누님과 함께 통도사 성보박물관에도 다녀왔습니다.
그 때 그는 우리나라의 '김삿갓'이나 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스님처럼 일생을 방랑하였던 일본의 시인 마츠오 바쇼오(松尾 芭草)의 하이쿠(俳句) 시집을 읽고서 나에게 쓸쓸하고 고요한 암자에 가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워질 양이면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며 시자와 이승의 마지막 작별을 한 경봉(鏡峯) 선사께서 머무시던 극락암의 삼소굴(三笑窟) 풍경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라사에 가거들랑 사브리에 텐베르켄 선생님이 운영하는 티베트 시각 장애인 학교에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 동안의 고마움과 은혜에 보답삼아 내려는 오늘 저녁 한 끼 밥값을 그대를 떠나보내는 사람인 백합 법우와 내가 낼 테니, 그 학교에 보시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텐베르켄 선생님은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인으로 스스로가 시각장애인이지만 독일에서 티베트학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가 흰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베이징과 청두(成都)를 거쳐 혈혈단신으로 라사로 들어갔습니다. 티베트의 시각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티베트 점자를 발명하였으며, 점자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장치까지 개발하였습니다. 천고만난을 무릎 쓰고 학교를 이십 년 동안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텐베르켄 선생님과 이름도 비슷하지만 두 사람 다 독일인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도 티베트에 가서 영어 교사로서 봉사할 뜻을 가지고 있기에, 좋은 인연이 있기를 내심 바랐지요. 달라이 라마 성하와 오바마 대통령이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법우님들과 같이 재작년 여름에 티베트와 청두를 다녀와서 사브리예 텐베르켄 선생님의 이야기, <<티베트로 가는 길>>과 함께 읽었던 스웨덴의 탐험가이고 지리학자인 스벤 헤딘의 <<티베트 원정기>>도 낯선 길 걷기를 좋아하는 그의 이번 티베트 여행의 길라잡이로 권했습니다.
낮에 학생들과 눈싸움을 하고 왔다고 말한 그에게 저녁을 먹고 나오며 식당 마당에서 눈을 뭉쳐 장난삼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나 나나 우리는 모두 허물없고 격식 없는 눈처럼 순수하고 포근한 인정이 그리운 사람이니까요.
미끄러지는 눈길을 헤치고 백합 법우님을 모시고 댁이 있는 아파트로 갔습니다. 길가 버스 정거장에서 두 분은 꼭 안고서 엄마와 딸처럼 서럽고 안타까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터미널로 가서 인천 공항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깊은 밤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가족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감기가 든 그에게 배와 도라지를 달인 한 잔의 따끈한 물을 권하고, 설에 먹는 유과와 조청에 버무린 강정을 또 한 봉지 싸 주기도 하였습니다. 마침 심야에 장을 보러 나가는 우리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그가 우리 집을 나서는데 아직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이브’ 같다고 말입니다. 눈이 대숲에 솔가지에 히말라야시다 나무에 푹푹 쌓였습니다.
시계 바늘은 자정을 향하여 달려가고, 차는 소티재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침묵 속에서 슬픔은 농도가 진해지고, 평생에 잊지 못할 눈 내리는 밤은 어둠 속에서 깊어만 갔습니다. 별리의 순간은 마침내 목전에 당도하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그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는 외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사랑과 연민심이 많은 그대에게 이 세상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티베트의 사원들을 순례하고, 네팔로 가서 히말라야를 여행할 것이며, 다시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드가야로 갔다가 캄보디아에서 사귄 친구를 만나러 델리에서 영국의 요크로 가는 석 달의 긴 여행을 하고, 어머니의 생신에 맞춰 그리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아이오와의 고향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임대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냉혹하게 가스 공급을 차단하여 차가워진 방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국을 떠나기까지는 친구 집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파트의 집집마다 불이 꺼지고 적막하지만, 먼 먼 길을 나서는 그를 축복하는 목화솜 같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어서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렁그렁 눈물 글썽이는 목소리로 나를 꼭 껴안고 싶다고 하여 나도 그를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손을 부여잡고 한참 동안 그 동안의 나의 우애에 진정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영어이고, 지금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순간에는 그의 말을 완벽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마음이라고 하면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등을 돌리고 가다가 되돌아와서는 내가 그의 생일날에 선물로 한국 이름을 지어준 일도 진정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나는 기묘하게도 생일이 하루가 차이가 납니다. 산비탈 솔숲 속에 연연한 진달래가 피어나고, 담장 가에 백목련 꽃잎이 청향(淸香)을 뿌리며 지는 철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눈은 푹푹 쌓이고 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그런 밤이 깊어가고, 사람 사는 정이 눈처럼 쌓이는 밤이었습니다. 나는 눈발 속에서 차를 몰아 다시 고개를 넘어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북국의 정서가 흠씬 묻어나는 백석(白石)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저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백신애(白信愛)의 수필 <눈 오던 그날 밤>이 절절히 생각나는 밤이 깊어 가고 있었습니다.
소열제(昭烈帝) 유비의 능과 제갈량의 사당이 있고, 애첩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험난한 잔도(棧道)를 타고 들어가고, 신라의 왕자 출신 무상정중(無相淨衆) 스님이 두타행을 하고 마조 선사와 티베트 사신에게 선불교를 전하였으며, 지금도 오체투지로 머나먼 라사로 순례를 떠나는 신심 깊은 티베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옛 촉나라 땅, 쓰촨성 청두에 내일이면 그는 가 닿을 것입니다. 붓글씨로 닥종이에 써내려간 나의 편지를 그곳에서 뜯어볼 것입니다.
떡갈나무에 꽂힌 어린 날 쏜 화살이 나오는 시, 제가 중학 시절 영어 시간에 배운 롱펠로우의 시 대신, 한글로 만해 스님의 시, '님의 침묵'과 짧은 영문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그 편지지에 둥그런 꽃잎이 새겨진 짙붉은 무늬를 꾹 눌러 찍었습니다. 그 도장은 인도 성지 순례 중에 콜카타의 인디아 박물관 앞에서 가난한 인도인 아주머니에게 사 왔던 것입니다. 상좌부 불교의 신자인 그와 대승의 보살도를 닦는 제가 이 우주의 한 티끌로 영겁의 시간 속에서 지난 한 해 동안 맺은 그 인연과 인정을 어찌 필설로 다 나타낼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온 그대를 만나 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봄에 저의 소개로 함께 가 보았던 호수, 그대가 날마다 거닐면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한 해 동안 살았던 읍내의 그 못에 연꽃이 피어날 때마다 저는 언제나 여름날의 연꽃, 그대 '하련(夏蓮)'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선물로 준 연꽃 씨앗을 그대의 집에 심어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나면 그 소식을 알리는 편지를 부치시길 바랍니다. 그대는 이미 그대가 찾는 그대 마음속의 아름다운 집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법보시한 틱낫한(釋一行) 스님의 책을 늘 가까이에 두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그대에게 있으시길!'
내가 여행하며 청두 망강루(望江樓) 공원에서 만난 당의 시인 설도(薛濤)는 일찍이 촉의 지방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천애의 고아가 되었습니다. 뒤에 시를 잘 지어 관아에서 교서(校書) 일을 하며 기생이 되었습니다. 관청 생활에서 물러나 시사(詩史) 두보가 전란에 가족과 헤어져 초당(草堂)을 짓고 한 때 머물기도 했던 금강(錦江) 가 벽계방(碧鷄坊)에 살며 우물을 파고 종이를 만들며 살았습니다.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새와 꽃무늬가 있는 열 가지 색의 편지지를 발명하고, 티베트 군사의 침략이 있는 변방을 우려하며 주변루(籌邊樓)를 지은 애국적인 시인이었습니다. 강남으로 좌천되어 가고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연인 원진(元稹)을 그리워하며 설도가 지은 시, <동심초(同心草)>를 나는 이제야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가 봅니다.
어젯밤에 아메리카 아이오와 만 리 이방에서 온 사랑하는 나의 법우, '나타샤'와 이승에서 작별을 하였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사위는 고요하고, 눈에 폭 파묻힌 대숲과 솔숲 속 암자에서는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목탁 소리, 독경 소리가 들려옵니다. 인가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가 꿈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그와 함께 가서 보았던 청량산 설경을 그린 그림, 야송(野松) 선생의 청량눌애도(淸凉訥愛圖)가 문득 눈앞에 펼쳐집니다. 중학 시절 배운 시 한 머리가 제 마음에 아득히 떠오릅니다.
千山鳥飛絶 산이란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萬徑人踪滅 길이란 길에는 사람 발길 끊겼다.
孤舟蓑笠翁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 차가운 강엔 눈이 내리는데 홀로 낚시한다.
*메따(Metta): 빨리어로 자애(慈愛), 우애(Loving Kindness). 상좌부 불교 신자들이 자애 명상을 하며 날마다 독송하는 경전이 메따 수따(Metta Sutta)인데, 자애경.
<신작>
시클라멘
봄의 여신이 풀피리를 불며 찾아올 적이면 나는 어느 절 아래의 계곡을 홀로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는 앙증스런 연보라색 얼레지 꽃들이 무리를 지어 피어나 해마다 환상의 공화국을 세우기 때문이다.
아내가 강추위가 습격한 베란다에서 얼레지꽃을 닮은 화분 하나를 거실로 들여 놓았다. 녹색의 큼지막한 잎사귀에는 하트 모양의 흰 그림이 생겼고, 덩굴 뿌리에서 죽 올라온 대궁 끝에는 작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새로운 줄기들이 솟아나고 봉오리들마다 붉은 꽃을 피워내었다. 진홍색 나비 떼가 수풀 속에 나래를 접고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작년 봄, 아내의 생일에 시청 앞의 베트남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 초청한 미국인 연인들이 선물한 꽃이다.
그날 육척 장신의 연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헬멧을 쓴 채 나타났다. 마치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비행해 온 외계인들 같았다. 화분을 건네는 이방의 아가씨는 눈동자가 파랗고, 짙붉은 입술 속에 하얀 이가 빛나며, 금발이 눈부시었다.
꽃의 이름을 몰라 점심을 먹던 식당 옆의 꽃집에서 물어보았지만 아둔한 나는 금방 잊고 말았다. 늘 궁금해 하는 나를 대신하여 아내가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시클라멘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꽃말이 질투와 수줍음이라고 한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이 꽃에는 전설이 어려 있다. 수줍음 많은 수녀가 수도원을 뛰쳐나와 연인 곁으로 갔지만, 변심한 청년이 떠나가고 슬픔에 잠긴 그녀는 가슴에 비수를 꽂고서 죽었다. 그 피가 흘러내린 흙덩이에서 그녀의 영혼이 이듬해 봄에 이 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우리 집의 시클라멘은 지금 한창 객혈을 토하며 상사병을 앓고, 향수병이 도져 있다. 아무래도 이 땅의 토박이인 얼레지 꽃이 이방에서 온 벗, 시클라멘에게 병문안을 와야 될 것 같다.
사월 초파일에는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신라의 산성이 있는 오봉산의 암자에 동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 아내와 먼먼 나라에서 온 이 연인들을 차에 태우고 암자로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내 곁으로 온 불자들이다. 생각하면 아득한 인연이고 고귀한 불연인 것이다.
산 아래에 차를 세우고, 굵은 빗줄기와 비구름을 헤치고 걸어서 암자가 있는 산꼭대기로 올랐다. 암자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옥구슬로 엮은 발을 치고, 섬돌 아래 뜨락에는 비에 젖은 모란꽃 잎이 져 있었다. 같은 부처님 제자로서 우리는 연등을 달고 부처님 전으로 나아가 절을 올렸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후원의 방으로 들어가 점심 공양을 하였다. 할미들은 태평양 저 너머에서 온 젊은이들이 마치 친손자 친손녀인양 살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천 년도 넘는 신라의 옛 암자가 창건된 이래로 이들이 처음으로 찾아온 외국인 신도들일 것이다. 중년의 여인은 ‘꼬리앙 케키’라며 손에 흰 절편 떡 봉지를 건넸다. 공양주 보살님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새파란 미나리나물과 빨간 고추장을 듬뿍 올린 비빔밥과 김치 국물을 곁들인 상을 차려 주었다. 방 안에는 남녀노소가 어울려 동서고금의 인정으로 버무린 밥을 먹는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다. 다시 못 올 도솔천의 하루였다.
낭도 득오실을 위로하고자 죽지 화랑이 술과 떡을 가지고 찾아왔던 신라의 산성은 잔해만 남아 있었다. 어머니 생전에 바랑 메고 올랐던 오솔길은 낙엽 속에 묻혀 희미하였다.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하지만,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고개를 넘고 비탈진 저 길을 따라 초파일에 여기 암자로 올라왔다. 부처님이 머무시던 왕사성(王舍城) 독수리봉을 닮은 신령스러운 바위 아래의 영산전(靈山殿) 뒤 안에서 등불을 켜고 새벽녘까지 지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왈칵 눈물이 나고 목이 메어왔다.
어머니 물 길어 날랐다던 성벽 아래의 우물에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물을 긷지 않는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이방의 연인들과 함께 온 아내와 막내인 나를 얼마나 반겨 맞아 주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쳤다. 녹이 슨 양철 뚜껑이 덮인 채 쓸쓸하게 버려진 깊디깊은 우물 속에서 득오실이 죽지랑(竹旨郞)을 그리워하며 부른 향가가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간 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설어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
주름살 지니려 하읍내다
눈 돌릴 사이에나마
이승에서 만나 뵈옵도록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이여, 낭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다니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이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나라에 와 있는 연인들이 외로울세라 우리 집으로 초대하였다. 예쁜 성탄카드와 미국인들이 성탄절 아침에 마시는 스리랑카와 히말라야의 다르질링에서 생산된 홍차 한 통을 선물로 내밀었다.
하얀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어 보니,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아이가 새록새록 잠들어 있을 것만 같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오색 가루가 뿌려져 있지 않은가. 곰과 순록이 출몰하고, 늑대와 여우와 부엉이와 올빼미 울음소리가 밤마다 들려오는 이들 연인들의 로키산맥 숲속 집이 그러할 것이었다. 여름 방학 때는 고향집에 다녀와서는, 어머니가 눈물을 뿌리며 아들이 타국으로 떠나는 것을 잡더라고 하였다.
온 마을 아이들이 밤마다 예배당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탄일종이 땡- 땡-’하며 노래도 부르고, 동방박사가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가는 연극도 하던 어린 날 시골 교회의 성탄전야 풍경이 아련히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아내는 만리타향에서 생활하며 영양이 부실하여 감기라도 앓을세라 이방의 젊은이들을 아들딸 아이처럼 맞아주었다. 불고기와 잡채를 하고, 시금치나물을 무쳐, 야채샐러드와 김치와 함께 식탁에 가득 올렸다. 신이 나서 입이 불룩하도록 상치에 쌈장을 올리고 고기를 싸 먹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좋던지.
저녁을 먹고 내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영국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카드를 함께 펴 보았다. 해마다 성탄을 앞두고는 나에게 성탄카드를 보내주는 이 고마운 영국 신사 분은 영국 국교회 신자이다.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하는 판첸라마가 머무는 티베트 제이의 도시인 시가쩨의 따시룬뽀 승원에서 만났다. 박지성 선수가 활약하는 축구팀의 열렬한 서포터이기도 한 그는 나에게 시즌 티켓과 소식지, 요크 지방의 호수와 시골 마을들을 담은 커다란 사진첩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인터넷의 메일박스를 열고 전자카드의 주소를 클릭하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의 시골마을에 털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외로운 소년이 썰매에 작은 등불과 바이올린을 싣고 개울을 건너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른다. 길을 가다가 외로운 소년이 멈추어 서서 말없이 지켜보면, 전나무 가지마다 반짝반짝 전등이 켜지고, 사위는 고요하고 소복소복 눈이 내린다. 언덕 위에 올라 상자를 열고 바이올린을 켜자, 신묘하고 평온한 음악이 굼실굼실 흘러나오고, 마법처럼 시골집과 교회당의 창문마다 불이 켜진다. 소년이 켜는 음악은 영국의 전통 케롤송, ‘하느님은 기뻐하는 당신을 쉬게 하리라(God rest ye merry, Gentleman)’ 이다. 근심과 슬픔과 죄악과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 세상에 온 구세주,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전야다. 성탄의 새벽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기 시작한다. 그들 연인들과 우리 가족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밤이었다.
그날 밤, 나는 꽃 대궁이 올라오는 시클라멘 화분을 들어 보이며 그대들이 작년 봄날에 선물해 준 화분에서 꽃망울이 올라오고 곧 다시 꽃이 피어날 것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남쪽 바다를 건너서 봄바람이 불어올 제면, 눈 푸른 연인들과 함께 절 아래의 얼레지 꽃 공화국으로 찾아가야겠다.
<작가노트>
인문학의 호숫가를 거니는 일
한문에서 ‘문(文)’은 운문이고 ‘필(筆)’은 산문이다. 수필은 ‘살면서(隨)’ 겪는 온갖 체험이나 떠오르는 생각과 정서를 운율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筆)이다. 소재를 중시하고 글쓴이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장르가 수필이다.
어린 날, 포은(圃隱)선생이 시를 남겼던 금호강(琴湖江) 언덕의 서세루(瑞世樓) 마당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하여 상을 받곤 하였다.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장 공부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내가 열 살 무렵, 어머니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무대인 주사암(朱砂庵)에서 보시 받아온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부엉이가 우는 겨울밤의 호롱불 밑에서 낭송하다가 막내인 어린 나에게도 읽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90년 전 조부가 어린 선친을 위하여 이틀 동안 쓴 웅대한 서사시, 천자문(千字文)이 어린 시절 사랑방 시렁 위에 누런 표지의 족보와 함께 놓여 있었다. 겨울방학이면 뒷집 서당 영감 슬하에서 작은형이 그 책을 들고 가서 글을 외는 소리가 어머니 곁에 누워 있는 내 귀에도 담장 너머에서 들려왔다.
풋내기 역사교사 시절 교지 편집자가 원고를 모집하였다. 어버이날 학교 행사를 보내고 아카시꽃 향기가 싸하게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가자 내 마음 속에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정서가 말이라는 옷을 입고 수런수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자다가 일어나서 연필을 들고 그 말소리를 잠시간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낭독하였다. 곁에서 듣고 있던 동료 선생님이 감동적이라고 하였다. 인고의 삶을 사신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의 첫 수필, ‘감꽃’이 탄생한 순간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서정적인 수필을 많이 쓰는 것은 순전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감성 때문이다.
신문화사학(新文化史學)에서는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지만, 내가 사학도이면서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담는 문학이라는 그릇을 되찾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삶과 글이 유리되지 않고 구체적인 것이 역사와 수필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글은 분량과 내용이 많아지는 단점과 함께 그만큼 깊이와 폭을 확보하면서 독자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웅숭깊은 감수성이야말로 내 수필 창작의 힘이다.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며 그 애환과 발견을 아름다움과 깨달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수필 창작은 나에게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고 나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다. 은중경과 천자문을 통해 내 몸에도 전해진 문명의 씨앗과 문화유전자가 수필이라는 나무로 자라서 열매가 제법 풍성해진 것 같다.
나의 수필에서 포근하고 맑고 진실함은 토박이 우리말이, 간결함과 깊이는 한자어와 한문이 담아낸다. 역사나 종교, 시간 의식은 글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글감에 따라 문체가 간결하게도 되고 화려해지기도 하였다.
문학과 역사와 종교는 인문학의 호수로 흘러드는 물줄기이다. 수필문학은 나에게 인문학을 담아내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호수이자 동서고금의 사람을 만나게 하는 광장이다. 또한 인생을 위무하고 관조하게 하는 명약이고 바르게 서도록 하는 경책이기도 하다. 수필쓰기는 인문학의 호숫가를 거니는 일이다.
-<<문장>>(제40호, 2017, 봄, 북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