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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은 오장산경(五藏山經), 해경(海經), 대황경(大荒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오장산경의 경우, 중산경(中山經), 남산경(南山經), 서산경(西山經)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앙의 <중산경>을 중심으로 방위에 따라 외곽 네 지역의 산천 형세와 동식물, 산출되는 각종 광물 등의 지리적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오장산경에 서술된 산의 의미에 대해서 ‘26개 산줄기에 관한 기록으로 산은 저자가 기술하려는 세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단위이자 요소’라는 견해가 있다(서경호의 <산해경 연구>에서 인용). 따라서 <산해경>을 신화적 상징체계로서가 아니라, 당시의 지리적 필요와 지리 지식체계에 의해 집필된 지리서라는 관점의 연구 필요성이 재확인되고 있다.
원래 <산해경>은 32권이었다. 하지만 전한(前漢) 때인 BC 1세기 경, 유수(劉秀)가 교정을 하면서 오늘날처럼 18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전체 항목은 837조에 달하며, 본문의 글자는 모두 30, 825자에 이른다.
<산해경>은 고대 중국과 아시아에 관한 방대하고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더욱이 전체 분량의 3분의 2에 달하는 많은 양이 다른 고문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어서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헌이다.
조선·개국·숙신 등 동이계 기록들 보여
또한 <산해경>에는 조선(朝鮮), 개국(蓋國), 숙신국(肅愼國), 맥국(貊國) 등의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의 고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동이계(東夷系) 국가들이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18세기에 집필된 이익(李瀷)의 저서에도 이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등의 명칭이 <산해경>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 의하면, 신단수 아래 신시에 내려온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린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산해경>의 대황경에서도 풍백과 우사는 폭풍우를 일으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산해경>은 중국의 고대 지리서이지만, 우리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전설의 산’으로 인식되어온 곤륜산이 우리 문화 속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아울러 18세기 지리서에 보이는 곤륜산 관련기록도 살펴보고자 한다.
‘곤륜산 일지맥에 해동조선이 마련돼야’
조선시대의 시문학에서 곤륜산은 시의 주제, 또는 시인의 철학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임계 유호인(林溪 兪好仁·1445-1494)의 몽유청학동사(夢遊靑鶴洞辭)에서 찾을 수 있다. 관련된 부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취수(翠水) 서쪽 만리를 반린(斑麟)과 백봉(白鳳)을 타고 / 곤륜산에 놀러 가니 서왕모(西王母)가 밝은 얼굴로 맞으며 / 청조(靑鳥)를 시켜 경장(瓊漿)을 건네 주네’
앞의 시에는 ‘불사약을 가진 선녀’로 인식되던 서왕모를 비롯해 상상의 동물인 반린과 백봉, 청조, 그리고 신선이 마시는 음식인 경장 등이 등장한다. 유호인은 ‘신선이 사는 전설적인 공간’인 곤륜산을 통해서 세속적인 이해관계에서 초탈한, 자신이 추구하는 높은 정신적 경지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호인의 몽유청학동사는 노장(老莊)의 도가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도가 계열의 시로 볼 수 있다. 또한 지난 호에 설명한 곤륜산과 서왕모를 전설로 보는 중국의 신선사상과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유호인은 조선 초의 대표적인 학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제자다.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은 김종직은 유호인을 비롯해 김굉필, 정여창, 노필(盧珌) 등에게 도학 사상을 전수했다. 특히 김굉필은 문하에 조광조를 배출해, 학통을 계승케 하는 것은 물론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호인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한 조선시대 성종 때의 문신이다. 시와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 당시에 삼절(三絶)로 일컬어지던 인물이다.
한편 우리의 전통적인 기층문화 속에서 곤륜산은 앞서 설명한 유호인의 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현실적인 실체로 나타난다.
‘선천수 후천수는 / 억만 세계에 무궁한데 / 건곤이 개벽 후에 / 산천이 개탁하야 / 천지조종은 곤륜산이요 / 수지조종은 황해수라 / 곤륜산 일지맥에 / 해동조선이 마련되야 / 함경도 백두산은 / 압록강이 둘러 있고 / 경기도 삼각산은 / 임진강이 둘러 있다 / 강원도 금강산은 / 팔도강산 명산인데 / 팔도강산 좋은 명기 / 역력히 끌여들여…’
충북 중원군에 전해지는 상여소리다. 장례의식 때 부르는 소리로, 망자의 영혼을 달래고 망자가 묻힐 장소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곤륜산에서부터 이어지는 지리적 사실을 나열하고 있다. 각 선소리 뒤에 ‘에헤 달구’ 라는 후렴이 따라붙는다.
앞의 인용문에서는 곤륜산을 천지조종(天之祖宗)으로, 황해수를 수지조종(水之祖宗)으로 설정하고 있다. ‘황해수’는 서해를 뜻하는 황해수(黃海水)가 아니라 곤륜산에서 발원하는 강을 뜻하는 황하수(黃河水)를 구전되는 발음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인용문 중에 눈에 띄는 것은, 곤륜산 한 지맥이 흘러 백두산을 만들었고, 다시 백두산이 해동 조선(한반도)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이중환의 <택리지>와 상당 부분 유사한 지리체계를 갖고 있다.
한반도에서 외떨어진 서해 상의 백령도에도 비슷한 내용의 소리가 전해지고 있다.
‘산지조종은 곤륜산이요 / 수지조종은 황해수라 / 곤륜산이 떨어져서는 백두산이 되어 있고 / 강이 한 갈래는 목단강이 되어 있고 / 한 갈래는 두만강 한 갈래는 압록강이 되어 있다 / 백두산이 떨어져서 조선으로 건너와 / 한양 성중 생길 적에…’
백령도의 상여소리는 곤륜산을 천지조종이 아닌 산지조종(山之祖宗)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산지조종과 천지조종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북 예천군 등지에도 대체로 비슷한 의미와 체제를 가진 소리가 전해지고 있다.
앞의 인용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전설의 산’으로 인식되어온 곤륜산이, 황하와 백두산, 압록강 등 실재하는 지명들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곤륜산을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속의 산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는 곤륜산부터 시작되는 산줄기의 서술이 지난 호에서 설명한 <택리지>의 내용과 대체로 부합하고 있으며, 백두산 이하 각 지역의 산줄기 흐름도 <산경표> 등 전통지리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호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곤륜산과는 다른, 곤륜산을 실재하는 산으로 보는 지리적 인식체계가 별도로 형성, 전래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곤륜산을 한반도의 근원으로 본 기층문화권
더욱이 앞의 상여소리 속에서 곤륜산은 한반도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도서 지방을 포함하는 한반도 전역이 그 지리적 연원을 곤륜산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산과 물의 근원으로 각각 곤륜산과 황하로 나눈 것은, 음과 양의 두 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완벽할 수 있다는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황하가 곤륜산에서 발원하고 있으니, 결국은 곤륜산이 이 세상의 근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산을 우선시하는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신앙도 이 같은 원리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 문화 속에는 곤륜산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체계가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중국의 신선사상에 영향을 받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보는 상층 문화권과는 달리, 상여소리 등의 기층 문화권에서는 곤륜산을 이 한반도의 근원을 이루는 실재하는 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례의식은 한 집단의 공동체 의식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제의다. 따라서 의식의 절차와 진행과정이 엄격하며, 그 본래의 원형이 쉽게 훼손되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장례의식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역사적 문화적인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앞의 상여소리들은 오랜 연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집단이 살고 있는 특정 장소가 이 세상의 근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은, 지리적 사실 관계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 집단 전체의 세계관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민족 특유의 뿌리 깊은 산악숭배신앙과 풍수지리설 등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곤륜산을 한반도의 지리적 근원으로 보는 설정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같은 설정 속에 함축된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곤륜산을 백두산의 조산(祖山)으로 보는 종래의 풍수지리적 논리에 불과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곤륜산은 우리 문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관련학계의 연구는 아직 미진한 수준이다. 특히 곤륜산을 ‘전설의 산’으로 보는 기존의 인식 때문에 문화인류학, 종교학, 민속학 등 곤륜산과 관련된 우리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곤륜산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 이익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다.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곤륜산 관련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 등 5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아래에 3, 007개에 달하는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모두 223개 항목으로 구성된 천지문은 천문과 지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역사지리에 관심이 높았던 이익은 각 시대의 강역 등 지리적 고증에 관한 글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성호사설> 중에서 곤륜산과 백두산 등 이 연재와 관련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곤륜산이 북쪽 삭방(朔方) 밖으로 뻗어나갔는데 북쪽 지역의 상황은 알 수가 없다. 그 남쪽으로 내려온 가닥이 동남쪽으로 내달아 내려와서 백두산이 되고,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흘러 혼돈강(混同江)이 되는데, 북쪽에서 흑룡강(黑龍江)과 합류되어 다시 동쪽의 바다로 들어간다.
(2)황하가 곤륜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아>(爾雅)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 때 성수해(星宿海)를 찾아가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성수해는 곤륜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산의 남쪽을 통과한 후 굽이쳐서 산 동쪽에 이르고, 다시 북쪽으로 흘러 차츰 서쪽으로 돌다가 산의 삼면을 감싸 반원형이 된다…중략…곤륜산은 황하가 삼면으로 싸고도는 중앙에 위치하여 하늘까지 치솟았으며 일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혀 있다…중략…들은 바에 따르면 서역에 대유사(大流沙)가 있는데, 이는 중국 북쪽에 있는 사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3)불경에서 말하는 아누산(阿語山)은 곧 곤륜산(崑崙山)이다. ‘아누’는 범어(梵語)로 가장 높다는 뜻이다. <어류>(語類)에도 ‘산정에 아누란 큰 못이 있어 물이 사면으로 흘러나가서 네 군데의 큰 물이 된다.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황하요 사면으로는 각각 서해, 남해, 북해로 흘러나가 약수(弱手)와 흑수(黑水)가 된다. 땅의 형체가 만두(饅頭)와 같은데 비틀려서 뾰족하게 솟아난 곳이 바로 곤륜산이다.
(4)높은 데 올라가서 보면 마치 별을 펼쳐놓은 것 같아 이름하여 화돈뇌아 (火敦腦兒)라 하였다. 중국 말로는 성수해가 된다. 물 흐름이 급하게 흘러 몇 리를 지날 무렵에 갈라져 두 개의 큰 못을 이루고, 다시 세 강이 합쳐지면서 점차 커지니 비로소 황하다. 강이 8, 9갈래로 갈라지기도 하는데, 20일 가서 대설산(大雪山)에 이르니 곧 곤륜산이다.’
(1)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곤륜산에서 발원한 산줄기가 중국 국경 밖으로 뻗어 나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이룬 산이 백두산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택리지> 팔도총론과 비슷한 내용이다. 이중환은 이익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택리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앞의 인용문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2)와 (3)은 곤륜산과 황하에 관한 기록이다. 인용문 속의 ‘대유사’는 타클라마칸사막을, ‘중국 북쪽에 있는 사막’은 고비사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곤륜산의 모양을 만두에 비유하고 있는데 <산해경>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4)에는 곤륜산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중국의 문헌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곤륜산에 대한 이익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정약용 등에 영향을 미친 이익의 역사관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익은 곤륜산을 실재하는 산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대유사 등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는 등 중국과 그 주변의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호사설>은 독서하다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 등을 그때마다 수시로 적어놓은 수문수록(隨聞隨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익이 당시에 어떤 책을 참고했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이익은 서학을 비롯한 외국 문물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집안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1612년(광해군 4년) 지봉 이수광(芝峰 李明光)과 함께 진청사로 중국에 다녀온 바 있다. 특히 도승지를 지낸 부친 이하진(李夏鎭)은 연경에 사절로 다녀오면서 수천 권에 이르는 중국 고서와 한역 서양서를 구입해 돌아왔다. 이같은 집안 환경 때문에 이익은 당시에 이미 서양화를 직접 보았을 만큼, 연경을 다녀온 연경사들과 교분을 쌓고 있었다.
<성호사설>에 나타난 이익의 세계관과 역사의식은 후대의 사학자와 지리학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을 비롯해서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1712-1791),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 등을 들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곤륜산을 한반도의 근원으로 보는 인식체계가 어떤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가설을 통한 그 가능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다.<계속>
박용수 소설가·한국산서회 회원
첫댓글 긴글 읽느라 눈이 침침하네요.
그러나 소설 처럼 재미있군요.
곤륜산 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