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만주에서 당한 참변은 일본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국제여론이나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여 마적과 손잡고 수많은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만주대륙이나 북중국
사람들은 마적이란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좀도둑은 쇼톨(小溫兒), 홍후즈(紅胡子) 등의 단어를 쓰고, 마적은 일본인이 주로 쓰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좀도둑, 강도 또는 실제로 말을 타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행패하는 기마도둑 등 도적의 무리는 모두 마적으로 불렀다. 여기서는 주로
무리를 지어 재물을 약탈하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도적을 편의상 마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들 마적의 무리가
변방을 무대로 들끓었다.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을 때면 특히 심했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방에는 각종 성향의 마적떼가 할거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재물을 탐하는 ‘순수한’ 마적도 있었지만 친중국의 배일마적단과, 일제에 매수되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마적도 많았다.
물론 한인을 동정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마적단도 없지 않았다. 마점산(馬占山) 장군은 원래 마적 출신으로 녹림(綠林)에 있을
때부터 우리 독립군을 도와주었으며 중국군의 장군이 되어서도 크게 협력해 주었다.
독립군들에게 친일 마적단의 존재는 보통 버거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적이 중국이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제의 앞잡이로서 정보와 살육과 재산 탈취를 예사로 하기에 방치할 수도
없었다. 친일마적 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사람은 장강호(長江好)로 대규모적인 마적단을 이끌고 있었다. 산악지대와 오지, 벽지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던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머리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거나, 막대한 금품 또는 신식 무기를 대여해 주면서 이들을 이용하였다.
장강호는
1920년 5월 2일 무송현에서 한국홍업단원 김성규ㆍ오제동ㆍ김재호ㆍ송계원 등을 유인하여 임강현 육도구에서 한족회 회원 7명과 함께 학살하는 등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장강호는 조선총독부 관리에게 매수되어 독가스까지 지원받으면서 한인 민족학교인 정몽학교 교사와 학생을 집단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간벽지의 한인촌을 습격하여 수많은 독립군과 한족을 학살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 장군도 1924년 7월 홍정현 이도구(二道溝)에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부하 유정열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친일마적이 자행한 독립군과 한인의 피해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산간벽지에서, 주로 심야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중에도
<천략각서(天樂覺書)>라 하여 일본군이 기록해 둔 극비문서를 광복 후 연합군사령부가 압수하여 미국 워싱턴 내셔널
아카이브(국가공문서보관소)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여 그나마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략각서>는 나카노라는 마적이
저지른 악행을 소상히 기록한 자료이다. 나카노는 1920년 조선총독부의 위탁을 받고 장춘에 일동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마적 두목이 되어 장강호와
친교를 맺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나카노는 장강호와 협력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정 8년 11월 내가 만주
장춘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는 사람을 통하여 중국, 조선의 국경 밖에 있는 불령선인 토벌에 마적을 이용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므로, 나는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길림성 봉강현에 있는 장강호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였더니 이를 그는 승낙하고 협의하고 싶다는 뜻을 회답하였다. (천략각서)
이렇게 총독부 밀정과 만주의 마적 대장이 한 통속이 되어 총독부의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으면서 우리 독립군과 한인학살에 혈안이
되었다. 이들의 행적 몇 가지를 살펴보자.
1920년(대정 9년) 10월 하순 부하들을 총소집하여 1,400명 중에서 가장 정예
500명을 선발하고, 잔여부하는 대기시켜 놓고 나와 장강호는 선발대를 직접 지휘하여 불령선인을 토벌하기 위해 몽강현 청강곤을 출발하여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대개 불령선인의 광복단은 봉천성 안도현 유두산에 있었다. 이곳은 40여 호의 조선인과 3호의 만주 토민(土民)으로 이루어졌다. 부락에
있는 조선인은 모두 광복 단원이었으며, 광복단 모임도 여기서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여 호를 소각하고
광복단 연변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및 부원 3명, 아울러 구장(區長)ㆍ부구장ㆍ광복단 병졸 등 10여 명을 독가스로
죽였다.
대정 9년 11월 5일 아침 전부대가 장강호 및 증야천락의 지휘 밑에 안도현성(城)으로 향하였다. 6일 미명에 공격을
개시하여 정오에 이르러 점령하였으므로 중국 관병은 모두 현성에서 퇴각하였다.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우리측은 전사자 5명, 중경상자
14명이었으나 중국 관병은 사상자 수가 50여 명에 달하였다. 4일간 머물면서 불령선인을 소탕하였다. 광복단 외교부원 병졸 27~28명을 죽이고
증거서류를 압수하여 해산진경찰서에 교부하였다.
일본 관헌의 지시에 의하여 21도구(道溝)를 습격하도록 행군하는 도중 22도구 및
23도구에 산재한 불령선인의 가옥 수채를 불지르고 10여 명을 총살과 교살로 죽였다. 우리 부대(마적대)가 그곳을 토벌하여 모두 소탕하고 나니
당시 대안(對岸)에서 우리 부대 (장강호 부대)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관헌 수명이 무장한 채 강을 건너와 독가스를 사용한 현장이며 가옥을 소각한
행적 및 조선인의 상황 등을 임립(林立)하였다. (이강훈, <마적과 왜적>).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9장]
일제의 보복 ‘경신참변’ 독립군 기반상실 2013/06/28 08:00 김삼웅
1920년대 말 일본군에 의한 서ㆍ북간도 한인사회의 참변은
국내에서 자행된 의병 학살에 못지 않았다. 한민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제로부터 이토록 심한 참변을 당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만주의
마적단에게까지 학살과 약탈을 당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서북간도 한인사회의 참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세계 민중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으리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처럼 흉악하고 포악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ㆍ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찍이 있던 일이겠는가.
(주석
5)
일제의 ‘간도학살’을 길게 소개하는 것은, 홍범도와 여타의 독립군이 더 이상 간도에서 빨치산 투쟁이 불가능하게
되고, 국내진입의 전투도 사실상 종료되었음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일제는 ‘물고기가 사는 호수’를 황폐화시켜 버린 ‘삼광전략’을 편
것이다.
홍범도는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11월 하순 왕청현 북부지역에서 잠시 회동했으나, 이곳 역시 일본군이 주둔하여 오래 머물기
어려웠다. 1920년 12월 초 돈화현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도착하여 이 지역에서 잠시 부대를 재소집하는 일은 서둘렀다.
양수천자에서 주둔한 홍범도는 김좌진과 공동으로 해산했던 부대원들을 재소집하는 전단을 만들어 한인 거주 지역에 배포하였다. 일제의
간도 총영사관이 수집한 정보문건이다.
해산한 우리 군사에
고함
지난 번 우리 군대 병사를 해산시킨 것은 일시의 편법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광복사업이 성취되지 않는 한
이(군대)를 해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러시아) 노농정부(勞農政府)와 약정하여 군수를 충분하게, 또 무기와 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게 되었다.
(봉기) 이래 와신상담하여 산과 들을 누비면서 목우즐풍(沐雨櫛風:비바람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함)에 쉬는 날 없이
상하가 서로 피를 마시며 맹약한 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주석
6)
홍범도는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 특파한 안정근ㆍ왕삼덕 등과 함게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戰部)의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 중로연합선전부는 그해 8월경 상해 임시정부와 러시아 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攻守同盟) 조약문의
제5장 규정에 따라 설치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중-러 국경지방의 한인에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만 애초에
임시정부가 의도한 바는 중국과 러시아, 기타 세력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려는 데 있었던 듯하다. (주석
7)
간도지부가 집행하기로 한 내용은 이 시기 홍범도의 사상적 경향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홍범도 연구가
장세윤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은 조항에 규정된 ‘부호의 재산분배’를 실현하는 것이었으나, 홍범도가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중로연합선전의 간도지부 자체가 별 활동을 하지 못했으니 범도 자신도 곧 북만주로 북상하여 시베리아로 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중로연합선전부 간도지부에서 집행하기로 결정된 4개항은 다음과 같다.
1. 선전지부장 및 위원은 주로 간도지방 및 러시아 - 중국 국경방면에 거주하는 한인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함.
2.
집행군무사령관 및 그 휘하는 무력으로서 부호의 재산분배를 실행함.
3. 간도지방 주재 일본군경에 대해 기회를 보아 습격함.
4. 앞의
각 조항에 대해 반대행동을 하는 자는 전부 극형에 처함. (주석
8)
홍범도는 12월 13일 육도부(六道府) 근처에 일본군 토벌대의 한 지대가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포위 공격하여
지대장 다까하시 중위 등 18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21년 1월에는 부하였던 한준성과 김태화가 평안남도 성천군 통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금융조합 이사 등을 사살하였다. 간도에서 학살당한 동포들에 대한 보복공격이었다.
주석
5>
백은식, 앞의 책.
6> 장세윤 앞의 책, 198쪽, 재인용.
7> 장세윤 앞의 책, 197쪽.
8> 일제
고등경찰의 제95호(1921년 1월 8일자) <국외정보문서>, 장세윤 앞의 책,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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