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和 시인의 忌日
4월25일. 온 천하의 산들이 핏빛 진달래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나는 대구의 젊은 시인들과 함께 대구시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에 있는
李相和(이상화:1901∼1943) 詩人(시인)의 묘소를 찾았다.
아지랑이는 아른거리고, 두 볼을 스쳐가는 훈풍도 정겹게 느껴지고,
깃털이 고운 산새는 여기저기서 짖어대고…,
말 그대로 완연한 봄이었다.
젊은 문학인들은 모처럼 야외 나들이를 나서는 기대와 설렘으로
표정도 한결 밝아 보였다.
사실 이날은 相和 선생의 돌아가신 忌日(기일)이었기 때문에
미리 예정했던 묘소 참배를 실천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미더운 일인가.
상화 詩人이야말로 대구 지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문학활동을 하는 후배 문인들에게
늘 삶의 귀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는 北으로 팔공산과 南으로 비슬산을 끼고
분지 형국으로 발달한 신라 때부터의 古都(고도)이다.
근대사회로 접어들어서도
조국이 이민족의 통치를 받는 굴욕을 당하게 되자,
그것이 경제적 약체로 말미암아 빚어진 위기였음을 깨달은
이 지역 지식인들은 먼저 담배를 끊고,
국산품을 쓰고, 알뜰살뜰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돈을 모아서
나라가 일본에게 진 國債(국채)를 갚으려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갔다.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의 허구를 눈치챈 이곳 청년 학생들이
전국에서 맨 먼저 反독재 항거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곳도 대구였다.
이런 대구에서 태어났거나
이곳을 무대로 자신의 문학적 포부를 펼쳐갔던 문학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소설가 빙허 현진건, 장덕조, 백신애,
시인으로는 이상화, 백기만, 이육사, 이설주, 박목월, 이호우 등이다.
대구 지역 사람들은 이분들 가운데서도
유달리 相和 시인에 대한 애착을 특별히 갖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깊은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相和 시인야말로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항시 대구를 잊지 아니하는 자세로
자신의 문학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相和의 문학에 나오는 고향은 모두 대구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우리 국토의 전체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과 60편 가까운 詩작품뿐이지만 그 작품세계의 내부에는
통렬한 어조로 내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고,
제국주의 압제자에 대한 서슬 푸른 분노의 외침이 있으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 자신의 유약성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이 스며 있다.
「백조」 동인 시절에 발표된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의 식민지 낭만주의 詩작품의 한 특성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작품의 한 대목은
대구 달성공원 안에 세워져 있는 상화 詩碑(시비)에도 새겨져 있다.
이 詩碑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詩碑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개벽」지를 통해 발표된 초기의 대표시 중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相和의 詩정신을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시작품이다.
南北이 공감하는 작품
사실 이 詩로 말할 것 같으면 내 나이 십대 후반,
나의 몸과 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마구 방황하던 시절에
너무도 愛誦(애송)하던 詩작품이었다.
당시 나는 마땅히 安頓(안돈)할 곳이 없어
대구 수성못 부근의 상동이란 마을에 살고 있던 큰누님 댁으로 들어가
잠시 기식하고 있었는데,
때는 마침 가을이라 대구의 수성 들판은 온통 누렇게 황금 들녘으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상동 뒷길을 빠져서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수성못 둑 위에까지 오르곤 하였다.
논과 논 사이의 좁다란 길을 걸어가다 보면
相和의 詩에 나오는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과 함께
나란히 길을 걸어가기도 했고,
맨드라미 들마꽃이 피어 있는 밭두렁 부근에서는
나비와 제비가 「깝치는(보채는)」 듯이 어깨를 스쳐 날아다니기도 했다.
경상도 방언을 잘 모르는 詩작품의 해설자들은 이
「깝치지 마라」라는 대목을 「까불지 마라」라는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은 해석을 붙여서
복잡한 넌센스를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았다.
相和의 詩에는 그만큼 경상도 대구 지역의 토박이말이
제법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相和의 이 絶唱(절창)은
바로 대구의 수성 들판을 거닐며 쓰여졌다는 이야기를
어느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기억을 내내 새롭게 되새기며
나도 장차 시인이 된다면 꼭 相和 선생 같은 詩人이 되리라는 다짐을
수성 들판에서 굳게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그 옛날 나의 소년시절에 거닐던 수성 들판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에 세워진 번화한 도시에다 번쩍이는 술집과 호텔,
음식점의 네온 간판들만이 휘황하게 빛날 뿐,
옛 추억은 아련한 기억 속에 겨우 실낱같이 남아서
저 홀로 빛 바래져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품었던 가슴속의 다짐은 여전히 살아 있건만
나는 相和 시인의 그림자라도 과연 뒤따르고 있는 것인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우리나라 모든 청년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서
소년 시절에 배웠던 詩작품이요,
북한의 문학사에서도 이 詩작품을 탁월한 민족저항시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비극적 분단체제 하에서도
이 작품만큼은 남북이 공감하는 민족문화 유산임에 틀림없다.
온갖 상념을 접고 다시 相和 시인의 묘소로 돌아와 보자.
대구의 나이 든 시인들도
相和 시인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
달성공원과 두류공원에 있는 詩碑와 문학비를 찾는 이는 더러 있으나
묘소를 찾는 이는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대구의 향토문학연구회에서 相和 묘소를 찾을 적에 함께 따라갔다가
그 고즈넉함에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대구교도소에서 다시 시내 방향으로 약 2km쯤 내려오면
상인동 로터리를 조금 못 가서
시립 희망원과 시립 정신병원 가는 길 입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相和 묘소로 가는 입구이다.
이 길을 따라서 조금만 걸어가면
언덕진 곳에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정신병원 정문이 나타난다.
그곳 좌측으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고,
그곳을 지나오면 왼편에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보인다.
아마도 월성 李씨 가족묘역을 관리하는 건물로 지어졌을 듯 여겨지나
지금은 퇴락하여 사는 사람이 따로 없는 듯이 보인다.
그곳 대문 앞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미리 준비해온 약간의 酒果(주과)를 들고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야산을 오르게 되는데
이 길가에는 영세한 공해물질 배출공장들이
주변을 몹시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야산의 언덕길을 따라 조금 길을 올라가면
울창한 송림 속에 한 채의 祭閣(제각)이 있고,
그 뒤로 월성 李씨 가족묘역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다.
맨 위쪽부터 相和 시인의 부모님이 계시고,
그 다음으로 相和 시인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부부의 묘소가 있고
그 다음으로 相和 시인 부부의 묘소가 있다.
바로 아래쪽으로 아우이신 이상백 선생 부부,
또 그 아래쪽으로 막내이신 수렵가 이상오 선생의 묘소가 있다.
살아계실 적이나 靈界(영계)에 드신 후이나 모두 출중하기 그지없다.
형과 아우의 묘소 앞에는 키보다 높은 비석이 우뚝하건만
시인의 묘소 앞에는 벗들이 세운 작은 돌비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시인 백아(白亞) 월성 이공 상화지묘」
나는 차디찬 돌비를 어루만진다.
詩人의 몸을 쓰다듬는 듯한 심정으로.
나는 묘소의 더부룩한 잡초와 아카시아를 꺾어 던진다.
詩人의 옷에 묻은 검불을 집어내는 심정으로.
그리고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놓고 온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린다.
相和 시인의 드높은 문학정신이 길이 길이 이어나가길 바라는 심정으로….
함께 온 젊은 시인들도 마음을 모아서 절을 올리는 눈치다.
우리는 묘소 위의 푸른 소나무 등걸에 기대어
相和 시인의 빼어난 詩작품들을 돌아가며 낭송했다.
낭랑한 詩 낭송은 봄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한 청년 詩人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낭송하는데,
「고맙게 잘자란 보리밭아」라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눈물이 왈칵 솟구치고 말았다.
정말 그렇구나!
우리나라는 모진 겨울을 이겨낸 보리밭의 푸르름처럼
온갖 환난과 고통을 다 이겨내고
이렇게 듬직한 광경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하나의 몸 떨리는 실존으로,
무한한 감격으로 이렇게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나는 젊은 후배들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어
공연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젖은 구름 한 덩이가 빠른 속도로 바람에 밀려
어디론가로 떠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