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메이저리그가 구단 증설에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대도시만이 아니라 주변의 위성 도시 주민도 야구장을 찾는 고객이 됐다는 점이다. 과거라면 흥행이 어려운 중소 도시도 충분한 관중 동원력을 갖게 된 것. 거기에 대중매체의 발달로 TV 방영권 등 구단 수입이 다양해진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둘째는 메이저리그를 위협하는 요소를 미리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1960년대 초 뉴욕, 휴스턴, 캔자스시티 등을 중심으로 메이저리그에 대항한 제3의 리그가 창설될 움직임이 나타난 것. 1914년과 1915년 제3의 리그 페더럴리그와 벌인 치열한 경쟁으로 죽다가 살아난 메이저리그 각 구단은 제3의 리그라는 말은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움직임을 막기 위해 구단 확장이 이뤄진 것이다.
구단 확장으로 고달파진 것은 선수들이다. 물론 새로운 일자리가 늘어나고 구단 수입의 증가에 발맞춰 연봉도 크게 뛰었지만 미국 전역을 오가는 경기 일정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베이브 루스가 기차로 동부 지역 일부를 여행한 것과는 달리 지금의 선수는 비행기로 이동하며 시차에도 적응해야 한다. 또 구단이 늘어나고 드래프트 제도와 FA제도 등이 시행되면서 과거 양키스처럼 특정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독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FA(프리에이전트) 제도 도입
1969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 세인트루이스는 외야수 커트 플러드에게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됐다고 통보했다. 7번이나 골드글러브를 받는 등 구단을 위해 헌신한 플러드는 일방적인 트레이드 통보에 반발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12시즌을 뛰었지만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매매되는 구단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처사다.”
1970년 1월 이 트레이드를 부당하다고 생각한 플러드는 법에 호소했다. 핵심은 보류 조항(익년도 선수 계약 체결 권리로 실제로는 보유 대상 명단에 오른 선수는 영원히 그 구단이 재계약할 권리를 갖게 된다)이 독점금지법 위반인지 여부였다. 사실 이전에도 메이저리그가 독점금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법정 다툼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1915년 제3의 리그 ‘페더럴리그 사건’ 등을 통해 “프로야구는 독점금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판결을 손에 넣은 상황. 이것에 플러드가 정면 도전한 것이다. 법정에서 플러드는 “돈을 많이 받는 노예라고 해도 노예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며 호소했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패소. 그러나 그의 투쟁으로 선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게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72년에는 연금 문제를 둘러싼 최초의 파업이 13일 동안 벌어졌고 1975년에는 이른바 ‘피터 사이츠의 결정’으로 일정 조건을 갖춘 선수에게는 이적의 자유, 즉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줬다.
한·일 양국의 자존심, 박찬호와 노모
1994년 8월 12일 선수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구단주들이 선수들의 연봉총액을 제한하는 ‘샐러리캡’의 실시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노사 양측은 타협에 실패하며 시즌도 막을 내렸다. 세계대전 속에서도 열렸던 월드시리즈가 처음으로 중지됐다. 이듬해 구단주들이 양보하며 선수노조의 파업도 끝이 났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억만장자(구단주)와 백만장자(선수)의 싸움’에 비유하면서 야구장으로 가는 발길을 뚝 끊었다. 이 위기를 구한 것이 태평양 건너에서 불어온 한 줄기 ‘토네이도’였다.
1995년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 그의 성공을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81년 발렌수엘라 마니아에 버금가는 노모 마니아가 탄생했을 정도로 그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6월 22일 뒤늦게 첫 승을 올린 그는 전반기에 평균자책점 1.99에 9이닝 당 11.86개라는 엄청난 탈삼진을 기록했고 이해 신인왕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96년에는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노런을 작성한 데 이어 2001년에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거두며 역대 4번째로 양대 리그에서 노히터를 기록한 투수가 됐다. 2008년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12시즌을 뛰며 통산 123승 109패, 1,918 탈삼진에 평균자책점 4.24를 남겼다.
노모의 동양인 최다승을 기록을 깬 이가 ‘코리안 특급’ 박찬호다. 1994년 1월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역대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경험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선수가 됐다. 그러나 단 2경기에 등판하고 마이너리그 행. 본격적인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것은 1996년부터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5승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팀의 주축 투수로 성장했다. 2002년에는 5년간 6,500만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계약을 맺으며 텍사스로 이적했지만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타자를 압도하는 강력한 구위는 사라졌다. 이후 여러 구단을 거쳐 피츠버그의 유니폼을 입은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3이닝 6 탈삼진으로 호투하며 노모를 넘어서는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금지 약물 스캔들
메이저리그 최초의 40홈런-40도루를 달성한 호세 칸세코, 베이브 루스와 행크 애런을 뛰어넘으며 역대 최고의 홈런왕에 우뚝 선 배리 본즈, 걸어 다니는 억만장자 알렉스 로드리게스, 역대 4번째로 3,000안타와 500홈런을 이룬 라파엘 팔메이로, 사이영상 수집가 ‘로켓맨’ 로저 클레먼스, 홈런 반 삼진 반 ‘빅 맨’ 마크 맥과이어, ‘타점 머신’ 매니 라미레스 ‘빅 파피’ 데이비드 오티스 등. 이들의 공통점은 금지 약물에 손을 대며 하루아침에 명예가 별똥별이 된 스타들이다.
2007년 12월 13일 전 세계 야구계는 조지 미첼 상원의원의 보고서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메이저리그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금지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미첼 의원의 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를 스테로이드 시대라고 부를 만큼 선수들 사이에 금지 약물이 만연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스테로이드는 어떤 효과가 있어서 선수들이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일까. 김우준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스테로이드는 근력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얻을 수 있는 근력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형을 이대호로 만드는 마법의 약은 아니라고 한다. 30홈런을 친 타자가 다음 해에 40홈런을 치고 시속 140km를 던진 투수가 다음 시즌 시속 143km를 던지게 해 줄 뿐이다.
금지 약물 복용이 만천하에 밝혀지며 선수들의 기록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스테로이드 사용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약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이미 1950년대부터 스포츠 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각성제와 호르몬의 역사는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선수들도 암페타민을 스포츠 음료 마시듯이 입에 들이부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의 부정을 들어서 실망을 나타내기 보다는 철저한 관리·통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약물 스캔들도 스포츠 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